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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수명 연장, 둘 중 무엇의 역사가 더 길까. 이와 같은 궁금증이 성립하고도 남을 정도로 인간은 유한성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을 해왔다. 불로초를 찾아 헤맸다는 진시황의 일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걸 보면 이 문제의 해법을 발견한 이는 아직 없는 모양이다. 의학이,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과거보다 인류의 수명이 늘어나기는 했다. 고작 20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던 지난 시절의 수명이 심히 짧았던 데다, 확인할 길 없는 고대의 인류가 무려 900년을 넘는 장수의 삶을 누렸다는 것과 비교하면 아직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120살까지는 무리 없이 늘어날 거라는 주장이 있지만 과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현실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평균 수명은 말 그대로 평균인지라 내가 그 평균치를 다 채우거나 넘기고 있을지 여부도 알 길이 없다. 본능과도 같은 불멸을 향한 마음, 수명 연장을 위해 펼친 다양한 시도들의 역사를 살핀 책이 나왔다. <불멸을 꿈꾸는 수명 연장의 역사>에는 죽음 앞에서 마냥 무기력하기를 거부한 멋진 사상가들이 다수 등장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보편화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죽음을 다룸에 있어서도 이는 성립하지 싶었다. 동양과 서양이 보인 각기 다른 태도 앞에서 나는 이들이 정녕 같은 인간인가 신기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바라보고 있는 게 죽음 혹은 영생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크게는 두 갈래로 사고를 구분할 수 있었다. 죽음 자체를 긍정하는 게 그 중 하나였다. 기독교 사상이 큰 힘을 발휘하던 시절, 사고의 중심에는 인간 아닌 신이 놓였다. 신은 인간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내렸는데 그것이 노화이고 죽음이며, 출산과 노동의 고통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신이 주신 형벌이므로 거부할 수 없다는 시선과 더불어 죽음 이후에 놓인 천국이라는 이상향을 고려했을 때 죽음이 매우 고통스럽거나 마냥 서글프지만은 않으리라는 식의 주장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리스 신화나 고대 철학자들로부터도 이와 같은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죽음이 우리에게 선사한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는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 한 번 뿐이므로 열과 성을 다해 살아내야만 한다는 말은 왠지 나의 삶을 더욱 숭고하게 만들어주는 듯도 하다. 친-수명 연장주의 쪽에 저자는 보다 중점을 뒀다. 다소 신비주의적 분위기를 풍기는 동양의 도가 사상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 게 독특했다. 마치 금은보화 가득한 신대륙을 꿈꾸는 모습과 닮은 것만 같았다고 해도 좋을지. 이 사상을 주창한 이들은 꽤나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도 나열해가며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고자 노력했는데, 다분히 금욕주의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음식을 최대한 절제하고, 먹는다면 영양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만을 골라 먹고. 운동을 하되 장수하는 동물, 이를 테면 거북이의 자세를 본 딴 동작을 행하는 등. 이 모든 걸 따르려 들었다가는 삶이 심히 고달픈 나머지 외려 수명이 줄어들지 않을까 나의 짧은 생각에선 우려가 일기도 하였다. 인간을 넘어서 영원한 금, 은 따위의 물질까지도 갈망하는 연금술사들의 시도가 등장했을 적엔 왠지 지지를 얻기 힘들어 보였다. 그들의 묘사는 모호했고, 다수의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수준에 도달했다. 연금술이 수명 연장과 실제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증명된 바는 없지만, 소수의 연금술 구사자들만이 장수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의 권력이자 특권 마냥 여겨질 소지가 다분해 보였다. 이성의 영향력을 절대 부정 않을 법한 데카르트나 베이컨의 이름도 등장했다. 그들 또한 더 살고자 하는 욕망을 결코 떨쳐내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개개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노력 덕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의술이 태동할 수 있었다 생각하니 앞선 시도들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어쩌면 나라는 개체로서는 뛰어넘기 힘든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함이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