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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조각을 모아서 [무도회]를 읽고
그렇다. 삶이란 참 묘해서,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도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전쟁과 평화가 공존한다.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는 가운데, 최근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어든 책 한 권이 있다. 바로 이렌 네미롭스키의 단편 모음집 <무도회>이다. 책에는 「무도회(1929년작)」를 비롯하여 「다른 젊은 여자(1940년작)」, 「로즈 씨 이야기(1940년작)」, 「그날 밤(1942년작)」 등 총 네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네 개의 단편(短篇)에는 각기 다른 인물들과 사건이 독립적으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독자에게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 여기저기에 흩어진 단편(斷片)들을 이어 붙여간다면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헤아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긴다.
조각 하나, '두 여자'
「무도회」는 각각 사교계에서의 신분 상승과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탈바꿈을 욕망하는 허영심 많은 엄마인 캉프 부인과 사춘기가 한창인 딸 앙투아네트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무도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대립은 갈수록 심해지는데, 결국 한 사람이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야말로 가엾은 존재가 된다. 무도회가 끝난 뒤 "내 가엾은 딸···", "내 가엾은 엄마···"라며 서로 위로의 말을 주고 받으면서 (한 단락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반면, 「그날 밤」에 등장하는 엄마와 딸은 「무도회」의 모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비춰진다. 아빠와 헤어진 후 엄마와 함께 이모가 살고 있는 시골에 내려와 함께 살게 된 딸의 눈에 비친 엄마는 그야말로 '내 가엾은 엄마'다. 그날 밤부터 이모와 친구들 그리고 엄마가 나누는 얘기를 통해 어린 딸은 조금씩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라며 여성과 삶에 대해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 모녀 관계는 아니지만 「다른 젊은 여자」에서도 세대가 다른 두 여성의 교감을 엿볼 수 있다.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마들렌 아주머니가 단골 손님인 질베르트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족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질베르트는 젊은 시절의 마들렌은 응당 자기와는 다른 결의 모습일 것이라 여겼는데, 놀랍게도 사진 속에서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툭하면 토라지고, 버럭 화를 내고, 생쥐를 무서워할 것 같은 평범한 젊은 여자.(86쪽)"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마들렌처럼 사랑을 베풀고 괴로움에 몸부림 치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조각 둘, '사랑과 전쟁'
「다른 젊은 여자」에서 마들렌은 질베르트의 오래된 미래를, 질베르트는 마들렌의 새로운 과거를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 전세대가 후세대에게 결코 물려줘서는 안 될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전쟁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에 대한 기억과 인식은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마들렌이 나흘간 부상당한 프랑스군 병사를 간호했던 이야기를 통해 질베르트는 타인을 향한 연민 혹은 사랑, 나아가 인류애적 가치에 눈을 뜨게 된다. 「로즈 씨 이야기」에도 "야생동물이 몸을 곧추세우고 덤불에서 튀어나오듯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그의 평화로운 피난처를 덮친(101쪽)" 전쟁으로 말미암아 피난길에 오른 한 남자가 나온다. 한평생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는 데에만 몰두한 로즈 씨가 전쟁통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고,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생사의 갈림길 위에서 희미하게나마 생에 대한 의지를 깨닫는다. 앞서의 두 작품이 전쟁을 통해 사랑을 비롯한 삶의 가치들을 발견했다면, 「그날 밤」은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르셀 아주머니는 사랑과 결혼을 우연이 아니라 본능의 문제로서, 그것을 삶에 대한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살기를 원하거나, 자신과 같이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저 소박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평온을 갈망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에 엄마는 "결국,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돼. 그게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야.(130쪽)"라고 말하며 사랑과 결혼을 본능을 넘어 욕망의 문제로 바라본다. 비록 시공간은 다르지만 엄마의 사연이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변주되어 재현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조각 셋, '그날 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크든 작든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무도회」에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각자만의 '상승'을 바랐던 캉프 부인과 앙투아네트에게는 무도회가 열리는 그날 밤이 바로 그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에서도 엄마와 이모들의 대화를 듣던 딸이 "그날 밤부터 엄마는 더 이상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다.(130쪽)"고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른 젊은 여자」의 질베르트가 마들렌이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나 「로즈 씨 이야기」의 로즈 씨가 피난길 위에서 마르크라는 청년을 만났을 때가 그들만의 '그날 밤'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세 조각을 한 데 모아놓고 보니 결국 <무도회>는 독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기 앞의 생, 곧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의 생애를 통해 소설 곳곳에서 자전적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사업으로 바빴던 아버지와 어린 그를 유모에게 맡기고 자신만의 삶을 누렸던 어머니로 인해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하고 외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어떤 인물을 통해서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드러내고, 또 어떤 인물에게서는 위로받고 나아가 자신이 꿈꿨던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투영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서른아홉의 나이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작가였기에 사는 내내 전쟁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공포,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가 극심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이 고스란히 스며든 <무도회>라는 책을 덮으며 삶이 곧 전쟁인 그들과 전쟁 같은 삶을 사는 이들에게 몸과 마음의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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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불유쾌함, 마치 속내를 들킨 것 같은 혐오와 불안한 수용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그러함의 이야기들이란 느낌이다.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타인들의 욕망, 혹은 내 것일 수도 있는 이것들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것도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아마 이 소설집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 소임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꼭지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선집은 유대계 우크라이나 출신의 프랑스 작가인 ‘이렌 네미롭스키(1903.2.11~1942.8.17)’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스윗 프랑세즈: Suite Francaise』에 앞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전초전이 될 듯싶다. 표제작인 「무도회」는 그야말로 야생적 본능, 새로운 물질세계로 접어든 인간의 체 정비되지 않은 벌거숭이 욕망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삶의 우발적이고 유희적인 모습의 적나라함일 것이다.
아마 수록된 네 작품에서 「무도회」는 단연 충동들의 격렬함이 도드라진다. 열네 살 사춘기에 들어 선 소녀 ‘앙투아네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소설은 당대의 내면화된 사회적 욕망이 인간들을 얼마나 거칠게 휩쓸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난한 은행 직원 ‘캉프’와 결혼한 ‘로진’에게 좁아터진 싸구려 주택에서의 삶은 희망 없는 자기 연민의 고통만을 불러온다. 이런 찌든 삶에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이 들어오며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빈곤했던 과거를 지우고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픈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타인의 욕망에 대한 이해가 들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전통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소시민의 의식에는 아이의 개성화를 위한 교육적 이해가 들어서지 못한다. 부모의 전통적 권위에 순응하지 못하는 앙투아네트는 로진의 욕망에 위협이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두 욕망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성인들 세계에 대한 동경, 어린 여자아이의 성적 과시의 욕구는 엄마의 과시 욕구에 의해 거듭 좌절된다. 캉프와 로진 부부는 명망 있는 부자들과 귀족들을 초대하여 자신들이 상류 계층의 일원임을 승인받는 파티를 준비한다. 일면식도 없는 초대 손님들의 명단과 그 주소를 쓰는 장면은 이들의 속물근성과 천박한 욕망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은 앙투아네트의 전혀 우발적 행동에 의해 야기된 파티 당일의 정경에 맞추어진다. 독자는 썩은 미소를 지을 준비가 되었기에 로진의 발작적인 증오심, 자기 연민의 훌쩍거림과 앙투아네트가 짓는 회심의 미소를 보며 인간 삶의 비속함을 다시금 확인케 된다.
초기작인 「무도회」와 달리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넓어진 1940년 작인 「로즈 씨 이야기」는 내게 인상적으로 남은 작품이다. 자신의 이해(利害)에 의해서만 세상을 보는 데 익숙했던 한 남자의 믿음과 그 전환적 사건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전통적인 여성적 삶의 행복에서 인생 전반으로 확장되어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시선이 확장된 듯하다. 더는 자기 연민, 욕망의 좌절을 보듬고 핥아대는 나르시시즘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은 오늘의 전형적인 인간 상(像)과 닮아 있다.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부를 축적하고 보존하는 데 일념(一念)하는,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뺨에는 기름기가 흘렀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권위적(89쪽)”인 그런 남자이다. 젊은 시절 분위기에 이끌려 결혼을 약속했지만 자기 삶에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의 번잡함이 끼어드는 것이 두려워 도주하기까지 한 독신자, 전쟁을 예견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르웨이에 투자하고, 가장 안전할 것 같은 노르망디 지역으로 가치 있는 재산을 옮겨놓기까지 한다.
삶이란 우연의 연속이다. 전쟁은 노르웨이를 강타하고, 노르망디는 전쟁터가 된다. 평온함을 예견했던 노르망디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고 동쪽을 향한 피난길에 오르지만, 피난 행렬에 막힌 차량은 더디게 움직인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음식과 물을 구하기 위해 기사에게 차량을 맡기고 인가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다. 차량은 그 사이 기사와 함께 사라지고 도보 행렬에 섞인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경계로 살아 온 그에게 한 청년이 무람없이 다가와 말을 건다. 모르는 이와 결코 대화하는 법이 없던 남자는 키 크고 건장한 청년이 고된 피난길의 ‘쓸모’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상대를 맞이한다. 이기심에서 시작된 이 동행은 군에 입대하겠다는 열여덟 살 청년과의 대화에서 그의 인생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청년은 피난길에서 약자들을 돕고, 먹을거리를 구해 나누어주기도 하며, 걷기 힘들어하는 그를 부축해 걷기도 한다. 그 와중에 청년은 손목시계를 잃어버린다.
폭탄이 떨어질 때 청년은 남자를 감싸 안아 그를 보호한다. 청년은 커다란 부상을 입고 행군은 이어지지만 두 사람은 더는 걷지 못할 만큼의 상처로 주저앉는다. 늙은 남자와 청년은 루아르 강(江)에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며 “재산이나 목숨까지 초월하는 평온함과 무심함(114쪽)”을 느낀다. 루아르 강을 건너던 한 차량 안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과 청년의 탑승을 제안하지만 자리는 남자를 태울 공간에 불과하다. 청년과 동승할 수 없는 탑승을 거절한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 생의 끝이었다.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생이란 무엇일까? 생이란 정말 우연한 유희에 불과한 것인가
삶을 꿰뚫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문장이 떠오른다. (1)‘생명 차원에서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주는 관계, 길을 나서는 베이스캠프,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라’는 제안이었다. 손가락이 타인, 세상을 향할 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늙은 남자 로즈가 변했을 때 세계는 그를 응원하는 구원이 되어 줄지도.
이 작품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다른 젊은 여자」는 제목처럼 두 여자가 등장한다. 주제는 다르지만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라는 구조는 마치 「로즈 씨 이야기」의 쌍둥이 작품 같다. 촌구석의 물건도 별반 없는 가게를 찾은 열여섯 살 ‘질베르트’는 자신이 찾는 물건이 없음을 이내 알아차리지만 밖에는 눈이 내리고 그녀는 주인 ‘마들렌’의 제안으로 가게에 머무르며 대화를 이어간다. 무언가 회상하기에 딱 그만인 배경 속에서 마들렌은 1차 대전 중 겪었던 강렬한 기억을 술회한다.
폭격으로 부상당한 한 프랑스군을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숨겨주고 간호하며, 그의 생명 연장을 위해 매 순간 기도하던, 어떤 한 마디의 문장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애틋함의 기억이다.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행위이다. 아마도 마들렌에게 그 나흘이란 짧은 순간은 그녀에게 천국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찰나의 시간이 한 인간에겐 영원한 삶을 의미했을 것이다. 질베르트가 이 얘기 속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복잡한 자존감의 확인은 역시 어렴풋한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살해되던 해인 1942년에 쓰인 작품인 「그날 밤」 또한 삶의 선택에 직면한 그 순간, 영겁(永劫)같은 찰나에 마주하는 환희, 「다른 젊은 여자」의 마들렌의 술회와 그 궤를 같이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다만 작가가 다가 올 운명을 예견했던 것 아니었을까하는 마음에서 주인공 ‘카미유’에게 동생 ‘알베르트’가 외치는 마지막 문장이 예사롭지만은 않다.
물론 이 문장은 사랑하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어린 딸 니콜과 함께 외롭게 혼자 살며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여동생 ‘알베르트’의 집을 찾아 자신의 슬픈 처지를 한탄한 언니 대한 반응이다. 카미유는 “왜 난 너처럼 남자 없이, 홀로, 조용히 지내지 못했을까?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나 하니?(125쪽)” 라며 사랑은 끔찍한 거짓놀음에 불과함을 토로한다.
이때 동석한 알베르트의 친구인 ‘블랑슈’는 말한다. 모든 결혼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단지 삶이 끔찍한 것이라고. 그런데 또 다른 친구 ‘마르셀’이 말한다. 삶이란 “우연이 아니라 본능의 문제”라고.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되는 것일 뿐,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돌고 돌아 처음의 소설 「무도회」의 주제로 다시 회귀한다. 비록 역겹고 혐오스러운 욕망일지언정 우린 그 욕망의 사랑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감히 우리가 삶의 진면목을 어찌 알 수 있으리!
■(1)인용출처: 고미숙 著, 『기생충과 가족』, 북튜브 2020.9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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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쉘…, 뭘 원하니? 그게 바로 삶이야. 날 것 그대로의 삶은 그런 거야. (139쪽)
소설가 이력을 읽는데 작가가 요절했다는 정보를 만나면 가슴 철렁해진다.
소설집은 작가의 첫 컬렉션을 내면서 4편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중편인 ‘무도회’를 거쳐서 《다른 젊은 여자》가 나오는데 1940년작이다.
1928년에서 갑자기 12년을 뛰어 넘다니. 그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소설은 경향이 확 달라져서 좀 놀랐다. 그리고 이 때부터 작가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 편의 단편들은 모두 프랑스의 비시정부 하에서 유대인 핍박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쓰여졌다.
《다른 젊은 여자》에는 열여섯살 질베르트와 오십세의 마들렌 두 여성이 나온다. 마들렌이 운영하는 가게의 단골인 질베르트. 그는 마들렌이 해주는 얘기를 통해서 지난 전쟁시기에 마들렌이 행한 용감한 일을 듣고 그녀를 존경하게 된다.
또 다른 1940년작 《로즈씨 이야기》. 로즈 라고 해서 여자명 같은데 의외로 50대 독신남성이 주인공이다. 로즈씨는 폭격이 벌어지는 전쟁의 한 가운데 프랑스에 있고, 인생의 격변을 경험한다. 엔딩에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한 작은 행동이 놀라운 결과로 이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 수록작인 《그날 밤》은 가장 작가의 시그니처가 느껴지는 단편소설이었다. 마흔다섯에 남편이 바람나서 이혼을 하고 7살 딸을 키우고 있는 카미유. 프랑스의 소설이지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7살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점이 반가웠다.
카미유는 동성의 친구 두 명이 있고 친구들은 (책의 표현) ‘노처녀’ 독신들이다. 소설은 어느날 밤에 카미유와 여성들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던 때를 단편으로 깨알같이 담았다. 7살 주인공의 시점이어서 객관적이면서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이 책을 집어든 게 사실이다. ‘모파상’과 ‘투르게네프’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그 작가들을 잘 몰라서 비교는 못 하겠다.
그런데 정말 이 작가를 알게 된게 너무도 좋았다. 올 상반기에 발견한 최고의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물, 풍경을 묘사하는 표현, 사건을 전개하는 기법 등 모든 게 완전히 나의 스타일이었다.
작가는 유대인이어서 독일군에게 잡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티푸스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1942년이었다.
딴 걸 떠나서 ‘소설’로 작가를 처음 만나서인지 나는 그녀와 급 친밀해진 느낌이었고, 그래서 더욱 이런 죽음이 애석하게 다가왔다.
아이러니 일까. 그녀는 소르본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소설을 쓰면서 왕성히 활동하였고 생애 기간에 비해서는 다량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슬픈 와중이지만 이 사실이 ‘독자’로서 참 다행스러웠고 앞으로 다 만나보고 싶어진다.
책 에서
아! 그래, 행복한 시절이라니, 행복한 시절 좋아하네. 농담도 무슨 그런 농담을! (32쪽)
앙투아네트는 문득 자신에게 온전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싱싱한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72쪽)
고양이와 함께 난롯가에서 보내는 외로운 나날들. 아마 늘 똑같은 꿈이 되풀이되는 불면의 밤들도 있을 것이다. 영광이나 사랑, 그리고 피의 추억이. 얼굴이 상한 그 자그마한 여자는 한때 영웅이었다. (85쪽)
한 남자를 알려면, 그가 식탁에서, 또는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구는지 봐야 한다. (89쪽)
나는 선 채로 졸고 있었다. 부엌에는 식탁이 차려졌고, 모든 것이 밝고, 따뜻하고, 눈부셨다. (123쪽)
그게 바로 삶이야. 날 것 그대로의 삶은 그런 거야.“ (13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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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의 저자 이렌 네미롭스키는 1903년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금융가였던 아버지는 늘 사업으로 바빴고 어머니는 어린 이렌을 유모에게 맡기고 자신만의 삶을 누렸다. 이 시절 이렌은 절망에 맞서기 위해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키웠는데, 이러한 모녀 관계는 그녀의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작가 소개 참조)
{무도회} 열네 살 소녀 앙투아네트는 증권으로 큰 부자가 된 유대인 알프레드 캉프와 로진의 사춘기 딸이다. 갑자기 부자가 된 캉프 부부는 큰 돈을 벌기 전에도 늘 허영심이 많았고 낭비벽이 심했다. 허름한 아파트에서 고급 아파트로 이사한 이들은 후작들, 백작들, 사업적 지인들을 초대하는 성대한 무도회를 열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마치지만, 앙투아네트는 이 무도회에 참석하기엔 이른 나이다. 특히 어머니와 갈등이 많은 앙투아네트는 부모님 몰래 반항적인 행위를 하는데... 무도회는 과연...?
{다른 젊은 여자} 추운 겨울, 열여섯 살 금발 소녀 질베르트가 취미로 하고 있는 뜨개질 실을 사기 위해 마들렌의 작은 가게에 들른다. 눈이 내리는 바람에 잠시 마들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전쟁으로 부상을 당한 병사를 간호했던 이야기를 듣고 그 시절 사진을 청해 보며, 질베르트는 소박하게만 보았던 마들렌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사진 속에서 열정 가득하고 자부심 넘치는 표정의 그녀를 찾는 것이다.
{로즈 씨 이야기} 독신에 부자인 로즈 씨가 전쟁통에 피난길에 오르면서 만나는 젊은 청년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건 사고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역설과 아이러니가 잘 드러나 있다.
{그날 밤} 사랑과 결혼, 독신과 자유로운 삶의 대비 가운데 진정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해준다. 단편 소설 [그날 밤]은 일곱 살 여자 아이의 시점에서 어머니와 독신 여교사인 이모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여교사와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독신녀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소재이다. 겉으로 보기에 평안하고 자유로운 독신녀의 삶과 수많은 질곡을 겪은 애증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어머니의 삶 이야기 끝에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네 가지 단편 모두 짧지만 재미있는 소재의 이야기였다. 이렌 네미롭스키의 작품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자는 묵은 기획의 일환으로서, 작가의 중·장편을 소개하기에 앞서 선별해 엮은 소설집이라고 한다. 다음에 소개될 작품들도 기대된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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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매력적인 분홍색, 요즘 이슈가 되는 우크라이나 작가, 욕망을 비판하지 쉽지만, 그런 욕망이 나에도 있음을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소개의 말에 혹했다. 이 책에는 무도회, 로즈씨이야기, 그날밤 세개의 단편이 들어있다. 세 가지 모두 주인공의 내면의 상황을 매우 섬세하게, 하지만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무도회의 주인공 앙투아네트는 진지한 마틸다를 보는 것 같았다. 어른들의 허영, 허세에 대해서, 그러면서 아이의 감정이나 생각에는 무관심하며 무시해 오는 부모의 행태에 매우 부조리함을 느끼고 있던 앙투아네트, 부모가 온갖 정성을 들인 무도회 초대장을 우연한 순간에 찢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완전범죄다. 그래서 부모의 허영심을 채워줄 무도회가 한 명의 손님으로 끝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로즈씨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상황을 빼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로즈씨이야기이다. 하필 지금 전쟁중인 우크라이나의 작가가 쓴 글이라서 전쟁이라는 상황이 더 깊게 다가온다. 로즈씨는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계산하고, 결코 손해보는 일이 없는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채용했던 운전사에게 배신당해 피란민 대열에서 같이 움직이게 된 로즈씨는 마르크라는 청년을 만나서 도움을 받게 된다. 로즈씨를 구하려 부상을 입게 된 마르크. 그러던 중 로즈씨가 차에 얻어탈 기회가 있었는데, 마르크까지 태웠으면 했는데, 안된다고 하여 자신도 그냥 보내게 된 자동차, 그 자동차에 탄 사람들이 다리 폭격으로 먼저 사고를 당하는 소식을 듣는 로즈씨, 마르크를 만나면서 이해관계를 따지는 인생의 룰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로즈씨 이야기였다.
그날 밤, 너무나 사랑했던 부부가 남편의 외도로 심각하게 싸우고, 진한 사랑을 나누던 그날 밤, 그 싸움을 들었던 여동생 알베르트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결혼을 둘러싼 위선적 태도에 혐오감을 가지고 독신으로 살아간다. 잦은 외도에도 카미유 언니는 형부와 함께 살아가던 중, 부자가 된 건축가 형부는 결국 젊은 여자와 함께 집을 나가면서, 언니는 동생에게 생계를 의탁하기 위해 온다. 그리고 그날 밤 이야기를 처음으로 같이 나눈다. 독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결혼생활의 배신, 상처, 행복, 가치를 암시한다. 힘겨운 결혼의 행복이 독신에게는 위선으로 보일 수 있음을 느낀다. 이 작품의 시선이 독특하다. 처음엔 제 3자의 전지적 이야기처럼 진행되는데, 어느 순간 딸의 시선으로 바뀌어서 서술된다. 자연스럽게 앙투아네트, 로즈씨, 카미유와 알베르트, 모두 내면에 많은 변화를 겪으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작가는 그 변화를 직설적인 언어로 섬세하게 표현한다. - 누구나 그러듯, 그도 희생의 불가피성을 일깨우고 그것의 고귀함도 찬양했다. 시민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속으로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무만 떠넘기고 자신은 권리만 취했다. - 내가 원해서 찾은 고독이 아니야. 굴욕적이고 쓰디쓴 나쁜 고독이야. 버림받고 배신당해 얻은 고독이지 전체적인 스토리 구성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지만, 표현의 기법과 인물의 심정 묘사가 매우 세밀하다. 비록 이 작가의 글은 처음 읽었지만, 사람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렌 네미롭스키의 인물들을 만나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믿음이 간다.
YES 리뷰단 선정으로 도서를 기증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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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금에 한창 전쟁의 비극을 겪고 있는 나라, 우크라이나 키이우 부유한 유대인 집안 태생으로 프랑스 이민자 가정의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1903~ 1942)의 단편 소설 선집 입니다,
처음 작가의 이름을 접하고 생소했었는데 영화 [스윗 프랑세즈]의 원작자라는 소개글을 보고서 오래전 보았던 그 영화를 상기하면서 작가가 1942년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비극적 으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전쟁을 소재로 한 그 소설을 집필했었으며 이후 세월이 흘러 작가의 유품을 정리하던 작가의 딸에 의해 원고가 발견되어, 마침내 2004년 출간되면서 영미권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고서 집중 독서 할 수 있었습니다,
[스윗 프랑세즈]도 2차대전을 소재로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의 장교와 프랑스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전쟁의 참혹상, 비극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시각으로 묘사되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인데 이 책의 표제작으로서 모녀간의 증오와 사랑을 섬세하게 숨어 엿보기로 묘사한 단편 [무도회](1928)와 이 책에서도 본격 전쟁을 배경으로 독일의 침공을 피해서 피난 행렬의 대열에 끼어 전쟁의 참상과 비극의 고초를 겪게 되는 부유한 프랑스 주인공 로즈씨가 등장하는 단편 [로즈씨 이야기](1940)를 읽으면서 작금에 각종의 대중매체 보도를 통해 매일 접하게 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와 그 전쟁의 참상과 비극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면서 반복되는 역사의 기시감에 몸서리를 쳐야 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하루 빨리 우크라이나 땅에 평화가 찾아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전범 푸틴은 반드시 그 책임과 합당한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이 단편선집에는 비교적 짧은 단편 [다른 젊은 여자](1940)와 단편 [그날 밤](1942)이 실려 있는데 [로즈씨 이야기]를 포함하여 1940년대의 작품들은 프랑스 비시 정권의 유대인 검거 가 본격화되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작가가 생활고와 공포에 시달리며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숨어서 숨죽여 지켜보는 듯한 긴장감과 함께 날것 그대로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실로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 그게 바로 삶이야,,, 날것 그대로의 삶은 그런거야,,, " (P139)
*YES24 리뷰어클럽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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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늘 평온을 갈망했어. 그래서 한동안 수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러다가 나에게 필요한 건 주님이 아니라, 내 소박한 일상을 반복하면서, 나만의 소중한 습관들과 함께 조용히 지내는 삶이라는 걸 깨달았지. 남자! 맙소사! 내가 남자를 데리고 뭘 하겠어!"
4편의 단편이 담긴 <무도회>를 통해 이렌 네미롭스키를 처음 만났다. 죽음의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까지 글을 썼다. 이 짤막한 단편을 읽으며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썼는지 느낄 수 있었다.
14살 어린 여자아이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어른이자 엄마는 매번 수시로 아이에게 상처되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마냥 아이로만 생각한 엄마에게 사춘기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거나 어쩜 그런 눈치를 채기에는 자기 자신밖에는 알지 못했던 거 같다. 중2는 북한의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는데 그만큼 그 시간대에 분출되는 호르몬은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
졸부가 된 부모. 과거는 잊고 싶은 엄마. 그 엄마가 처음으로 치르는 <무도회> 14살 딸은 엄마에게 받은 상처와 자신의 눈앞에서 버젓이 연애질을 하는 가정교사에 대한 분노로 저지르면 안 될 일을 저지른다. 이리 사악할수가!
<로즈 씨 이야기>에선 전쟁을 미리 대비하며 영리하게 재산을 도피시켰다고 믿었던 로즈 씨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젊은 날에 젊은 여성에게 '결혼하자'고 말하고는 바로 후회하고 줄행랑을 친 이후 혼자의 삶을 만끽하면서 재산을 모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공허한 노년의 슬픔을 17살 청년을 만나 길동무를 하면서 피난길에 오른 로즈 씨. 젊은이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아끼지 않는 이 노신사는 자기 때문에 상처를 입은 젊은이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못하고 아는 사람이 자동차에 태워준다는 걸 거절한다. 뭔가 자기밖에는 모르는 거 같고,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하지만 틀에 박힌 노인네처럼 보였던 로즈 씨. 자신만을 위한 결정이 아닌 결정을 내렸을 때 따라오는 부수적인 행운은 로즈 씨의 것!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고, 무엇 하나 자로 잰 듯이 정확할 수 없는 법. 이 짧은 이야기들은 신선하게 뒤통수를 친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날 밤> 네 명의 어른 여자들의 이야기를 어린아이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언니가 한 말은 뭐였을까? 정말 이 말은 그 경지의 '맛'을 본 사람만이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말이지. 그러기에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던 옛 어르신들의 말은 진리라네~
여태껏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언니의 불행은 불행이 아니었던 걸까? 여태껏 나는 그 불행을 피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던 동생에겐 새로운 불행이 생기는 걸까?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와 끈질긴 후회를 남길 뿐!
이렌 네미롭스키. 이 분 인생의 묘미를 아시는 분이네~ 짤막한 글에서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짐. 스릴러의 반전 저리 가라 하는 인생의 반전을 맛볼 수 있는 단편들의 묘미. 이렌 네미롭스키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 보고 싶어짐.
긴 글이 싫은 분들, 짧게 읽고 긴 여운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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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라는 낯선 이름이 기억해야 할 이름으로 각인되는 순간! 날카로운 언어와 예리한 문체로 인생의 명암을 냉소적으로 그려낸 수작!
1903년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2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전쟁과 유대인 박해의 희생자가 된 이렌 네미롭스키. 아우슈비츠로 끌려갈 운명을 직감하고서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던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작품 이력을 따라가다 보니, 지금에서라도 재발견되어 네 권의 선집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괜스레 반갑다.
『무도회』 속에는 사랑과 욕망을 향한 헛된 욕심과 삶의 짙은 비애가 녹아 있는 네 편의 단편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풍경 속에서 욕망하고 절망하고 우울했던 당대인들의 표상을 예리하게 그려낸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여기에 자기 파괴적이고 모순된 삶의 진실과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묘파해낸 이렌 네미롭스키의 언어는 직설적이다 못해 상당히 강렬하다. 그 누구라도 책을 덮는 순간, 잔뜩 벼르고 벼른 날 선 생의 감각이란 것이 인장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 내 가엾은 마르셀…, 뭘 원하니? 그게 바로 삶이야. 날것 그대로의 삶은 그런 거야.” / 「그날 밤」 중에서 139p
표제작인 「무도회」는 금융가였던 아버지와 어린 이렌을 유모에게 맡기고 자신만의 삶을 누렸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다. 1926년, 프랑화와 파운드화의 가치가 널뛰기를 하는 바람에 증권으로 큰돈을 벌어 단숨에 졸부가 된 캉프 부부는 허세와 가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지만 이를 바라보는 딸 앙투아네트의 마음은 온통 증오로 가득하다. 상류층의 삶을 즐기는 데만 온통 몰두해있는 엄마에게 있어 딸은 늘 걸리적거리고 하찮아 보이는 존재이고, 사춘기 소녀인 앙투아네트에게 있어서 엄마는 천박한 속물성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다.
이들의 갈등은 강프 부부가 무도회를 열기로 하면서 극에 달한다. 결국 앙투아네트는 우체통에 넣어야 할 초대장을 갈기갈기 찢어 센강에다 던져버린다. 이윽고 펼쳐지는 악몽 같은 시간은 허영심과 알량한 자존심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던 이들의 헛된 욕망에 조소와 연민의 마음을 보내는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장면으로, 기묘하고도 잔혹한 유머의 진수를 보여준다.
앙투아네트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비겁하고 괴로운 노력 탓에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가끔씩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은 발을 구르며 ‘아유, 정말 짜증 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앙투아네트는 어른들이 미웠다. / 「무도회」 중에서 11p
“앙투아네트, 혹시라도 누가 너한테 뭘 물으면 일 년 내내 남프랑스에 살았다고 말해…. 칸인지 니스인지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는 없고, 그냥 남프랑스라고만 해…. 꼬치꼬치 캐물으면 칸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그게 더 품격이 있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네 아빠 말이 맞아. 입을 다무는 게 최고지. 어린 여자애는 가능한 한 어른들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해.” / 「무도회」 중에서 16p
절대, 절대 더는 안 기다릴 거야. 이 나쁜 욕망들, 석양이 질 무렵 서로를 껴안고 걸어가는,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살짝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두 연인을 볼 때 마음을 갉아먹는 부끄럽고 절망에 찬 시샘은 왜 이는 걸까? 열 네 살의 나이에 노처녀의 증오심을 갖다니? 언젠가는 자기 몫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멀었다.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그때까지는 굴욕적이고 답답한 생활과 레슨, 엄격한 규율을 소리나 빽빽 질러대는 엄마…. / 「무도회」 중에서 33p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다른 젊은 여자」와 「로즈 씨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삶의 진정성을 엿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이 중 「다른 젊은 여자」는 전쟁이 일어나자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로 오게 된 천진난만한 열여섯의 소녀 질베르트가 마들렌이라는 한 여인을 만나 지난 전쟁의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들렌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고향에서 부상당한 프랑스군을 갱도에 숨겨주고 간호해주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모두가 만류했지만 한 시간만 더, 그리고 또 한 시간만 더 그가 버텨주기를 바라며 프랑스군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마들렌의 희생과 결연한 의지에 질베르트는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전쟁은 이 작은 영웅의 이름을 묻지 않겠지만, 모든 가치를 상실한 듯한 전쟁 속에서도 헌신과 사랑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묵직한 여운을 준다.
그는 자신의 이해를 통해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이해가 세상의 운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운명은 그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보신을 합리화했다. 유럽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버림으로써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다고 손쉽게 확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 「로즈 씨 이야기」 중에서 97p
여태까지 그는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려 했으며, 논리적이고 신중하게 행동해왔다. 그런데 이성과 신중함이 그 힘을, 예전의 효력을 점점 잃어갔다. 어떤 기후 조건에서는 정밀한 기계들조차 고장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것들도 미쳐버린 세상과 접촉하자 탈이 나 덩달아 미쳐버렸다. / 「로즈 씨 이야기」 중에서 99p
그는 목숨만은 구할 생각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미래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리 쪼그라든다. 그는 이제 내년이나 내달이 아니라 곧 다가올 낮과 밤, 그리고 시를 생각했다. 그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 그는 배가 고프고 목일 말랐다. 그는 빵 한 조각, 물 한 잔 외에는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식량을 가져올 생각을 미처 못 하다니! / 「로즈 씨 이야기」 중에서 103p
「그날 밤」은 남편의 외도로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실존적 불안감을,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세 여인들을 향한 얄팍한 연민을 통해 해소하는 카미유로 하여금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어긋난 감각을 선사한다는 것을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카미유를 향한 동생 알베르트의 마지막 외침은 근래에 읽은 소설들 중 가장 강렬한 한 장면으로 기억될 듯하다.
“난 널 보면 부러워. 알베르트,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하지 알기나 하니? 사랑, 사랑, 끔찍하기 짝이 없는 거짓 놀음!” 내 가엾은 엄마가 외쳤다. / 「그날 밤」 중에서 125p
“네 말이 맞아, 마르셀. 그건 우연이 아니라 본능, 나아가 욕망의 문제야. 결국,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돼. 그게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야.” / 「그날 밤」 중에서 130p
국내 독자들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이렌 네미롭스키는 이 작품집으로 하여금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으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쉽고 간결한 문체, 폐부를 찌르는 강렬하고 날카로운 언어, 그런 가운데서도 한 편 한 편 모두 짙은 여운을 남기는 이렌 네미롭스키의 소설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꽤 묵직한 느낌이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들 역시 무척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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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시대상을 보여주기보다 삭막해진 모든 인간 군상을 모아놓은 단편집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혹은 치르고 난 뒤 사람들이 비로소 드러낸 그들의 실체를 담아냈다. 실체들은 모두 아이러니하고 적나라하며 과감하다. 엄청난 부를 얻었지만 돈이 없었을 때보다 더 비굴해진 사람, 매사에 동요가 없었는데 전쟁을 치르며 이타적으로 변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지금 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과거를 평가하려다가 시도가 좌절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전쟁은 시대에게 가난과 아픔을 주었지만, 인간에게는 가식을 벗고 실체가 드러날 기회를 주기도 했다.
너무 낯설고 생소한 작가였던지라 외국 작가에 무지한 나를 잠깐 책망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말 다행으로 이 책은 이렌 네미롭스키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자는 취지에서 선보인 시리즈의 첫 책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것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닌 게, 영화 <스윗 프랑세즈>의 원작을 쓴 작가로 이미 알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우크라이나 출생으로, 그 역시 이 책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피해자였다.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내내 겪었던 생활고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기 전까지 그를 글 쓰는 사람으로 살게 했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작품에서도 그의 삶의 단편들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 타인과의 연대와 이타심에 대한 갈증, 사랑을 향한 욕망과 회의가 작품마다 잘 녹아있었다.
무도회 사춘기를 지내는 앙투아네트는 졸부가 된 부모와 갈등을 빚는다. 형편이 나아지기 전에도 이미 낭비와 허영이 심했던 캉프 부부는 갈수록 정도가 심해진다. 하인을 무시하고, 부자인 지인을 두기 위해 가식을 부리고, 딸에게 형식적인 예를 갖추도록 강요한다. 그들이 가난했던 시절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은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일이므로 딸의 입단속과 행동거지를 철저하게 단속한다. 사교계에 편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은 무도회를 계획한다. 앙투아네트는 어리다는 이유로 무도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항심은 점차 커진다. 반항심은 곧 부모에게 엄청난 회한을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단편집의 표제작이 되는 것이 매우 합당할 만큼 좋았던 작품이다. 로진 부인의 허영스러운 면모는 작품에서 수차례 보여주었다. 허름한 아파트에 살 때도 실크 속옷과 새 장갑에 혈안이 되어 월급을 모두 치장하는 데 사용했으며, 졸부가 되어서는 일면식도 없는 부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내 무도회에 초대하려고 했다.
무도회는 그들이 성공했다는 것을 매우 쉽게 증명할 방법이었다. 이처럼 속수무책인 엄마에게 어린 딸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대항할 힘이 없다. 반항에도 한계가 있고 가출처럼 물리적 저항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무도회가 좌절되었을 때 로진 부인이 느꼈을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테다. 상실감이 딸에 대한 미안함이 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고, 어찌 되었든 앙투아네트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 아니었나 싶다.
이로써 영원해 보였던 모녀의 갈등은 결국 앙투아네트의 무도회를 망치는 행동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면서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둘의 관계가 해소되었을 거라 보지 않는다. 로진 부인은 여전히 권위와 가식 속에서 살 것이고, 앙투아네트는 부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숨기며 욕망을 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부를 향한 인간의 치졸한 욕망과 증오에서 발현된 인간의 비속함이 충돌하여 순식간에 두 관계를 전세가 역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어느 젊은 여자 재미라고는 뜨개질밖에 없는 마을에 사는 소녀 질베르트는 눈이 내리는 추운 어느 날, 뜨개질 실을 사러 상점에 들른다.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상점 주인 마들렌의 젊었을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다. 몇십 년 전, 전쟁이 한창이었던 그 시절에 마들렌은 부상당한 병사 한 명을 극진히 간호한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질베르트는 마들렌의 젊었을 때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한다. 이야기가 끝나면서 마들렌은 그 시절의 사진을 내보인다. 질베르트는 자신이 상상했던 여인과 전혀 다른 모습의 마들렌을 보고 놀란다.
질베르트는 여느 사춘기 소녀와 마찬가지로 근거 없는 자의식이 과잉되어 있었다. 자신을 잘나고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마들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또한 자신처럼 자부심이 있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에 마들렌이 들려준 이야기에 두드러진 감동이 없었다면 아마 질베르트는 마들렌의 모습을 정반대의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을까. 치기 어리고 미숙한 질베르트에게는 남을 쉽게 판단하고 업신여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병사를 간호했던 나흘간은 지금까지 살아있는 마들렌에게는 찰나의 순간처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들렌에 의해 간호를 받았던 병사에게는 명을 이을 수 있었던 긴 시간이었다. 이미 수십 년이 흘러 잊혔어도 진작 잊혔을 그 짧은 4일이 마들렌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한 생명을 구하려고 했던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고마움 때문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냥 죽어 나가는 수많은 병사 중에 한 명이었을지도 모를 그는 마들렌에 의해서 나흘이나 더 살 수 있었다.
황폐한 전쟁 중에서도 인류애와 사랑에의 욕망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작품이다. 노년이 된 지금까지도 마들렌이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불멸할 것이다. 가장 분량이 짧았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었다.
로즈 씨 이야기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로즈 씨는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다. 가진 것을 모두 기사에게 도난당한 뒤 피난민 틈에서 고단한 행군을 시작한다. 급작스럽게 터진 폭탄이 터졌을 때 이름 모를 청년의 보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로즈 씨는 청년과 동행하기로 한다. 끝이 없어 보였던 피난길에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걸을 힘도 없을 때쯤 로즈 씨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차량으로 피난 중인 지인은 로즈 씨만 차에 탑승하길 권하지만, 로즈 씨는 청년과 함께 탈 자리가 없어 이를 거부한다.
청년과 로즈 씨는 대비되는 인물로 보인다. 피난길 내내 청년은 남을 돕느라 손해를 보지만 그럼에도 남을 돕는 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전쟁이라는 각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타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의 행동을 통해 로즈 씨가 그간 누리려고 애를 썼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이 피난길에서는 한낱 종이 조각과 골동품에 불과했고, 폭탄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한 것은 이동 수단이 아닌 옆에 있는 사람의 품 안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길길이 날뛰던 로즈 씨가 피난길에서 오래 굶주린 탓에 떠올리는 거라곤 배고픔이라는 단순한 욕구뿐이란 것도 전쟁의 가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삶의 편의성을 높여주는 이동 수단과 다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거리를 제공했다. 전쟁이라는 통제된 환경에서 과연 차량이 안전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피난처에 빨리 당도한다고 하는 것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다리를 건너면 저편에는 안위가, 이편에는 죽음이 있다고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사람은 가능성을 어림잡아 더 나아 보이는 쪽을 매 순간 선택할 뿐이다. 이처럼 차량 한 대로, 다리 한 개로 쉽게 갈라질 수 있는 것이 삶과 죽음이다.
청년의 행동에 늘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로즈 씨도 청년으로부터 더 가치 있는 선택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늘 ‘혼자’를 바라던 로즈 씨가 ‘혼자’가 아닌 ‘함께’를 선택한 것은 ‘함께’였을 때 더 가치 있게 살 가망성이 높다는 것을 청년 덕분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날 밤 남편의 외도로 불행한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카미유는 어린 딸 니콜을 데리고 동생 알베르트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오랜 옛 친구들과 신세를 한탄하며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 미혼인 알베르트를 비롯해 다른 두 친구도 결혼과 출산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대화의 주제는 결혼 생활에서 시작해 인생 이야기로 옮겨져 밤이 깊도록 이어진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내재한다. 서로 겪지 못한 상대의 경험을 놓고 각자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나의 삶이 더 낫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내가 꾸리는 삶이 더 나은 것을 증명하고자 상대방의 경험에서 계속 부정적 요소를 끄집어내고자 시도한다. 처음에는 결혼의 불행에 대해 한탄하며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과 동생을 부러워하던 카미유도 결국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자기변호에 나선다.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모자라 외도까지 한 남편을 두둔하는 모습에서 알베르트와 다른 친구들처럼 한탄이 나왔다. 카미유는 ‘사랑’, 그 자체는 부정하는 것이 용인되나,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진정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는 이내 자기 연민에 빠져버려 주변을 안타깝게 만드는 인물이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여자들의 사정은 각자 다양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언니를 보고 결혼하지 않기로 다짐한 여성, 많은 자식을 낳고도 남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보고 자란 여성, 사랑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속지 않고 그 이면의 배신과 아픔을 진작 알아본 여성. 그러나 결혼을 겪어본 여성은 단지 사랑이라는 한 가지 사정을 갖는다. 전자의 삶은 후자의 극명히 대조되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단순한 이유 한 가지가 그들을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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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 네미롭스키의 무도회를 읽었다. 그러한 인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닥치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겪게 되는데 결은 조금 다르지만 내겐 오헨리 단편선이 떠오르기도 했다.
p.11 가끔씩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은 발을 구르며 ‘아유, 정말 짜증 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앙투아네트는 어른들이 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무서워했다. 앙투아네트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으며 쓰다듬어준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그때 일을 까맣게 잊었다. 대신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아드는 화난 목소리의 파편들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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