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선물은 반대다. 표지가 아무리 멋져도 그 멋짐을 늘 능가하는 내용이 있다. 모든 책은 꽝 없는 10-100배 정도의 행운권 당첨과 같다. 읽지 않은 새 책은 모두 설레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두근거리고 기대가 커지는 책은 그림책이다.
전시회 작품과도 같은 그림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나 대책 없이 들뜬다. 지난 달 4단 서랍장이 필요하다고 하신 어머니 생각도 나고, 20대의 어느 날, 무릎에 고양이가 잠든 채로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 쬐며 책 읽는 할머니를 본 기억도 난다. 나도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물건들은 사용하다보면 망가지게 마련이라, 지난주에도 오래 좋아한 컵과 이별했다. 예전에 속상하고 울기도 했는데, 이젠 담담하게 이별할 줄 안다. 내게도 선물 받아서 특별한 유리병과 틴케이스와 유리컵과 잔들이 있다. 손편지들도 그림들도 작은 주머니도 티코스터들도...
가장 오래된 것은 드롭스 사탕들이 가득했던 병인데, 무려 30년 동안이나 사탕향이 난다(고 느낀다). 아까워서 일 년에 한번 정도만 열어본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과 목소리가 담겨 있다. 새삼스럽지만 사람보다 물건이 더 오래 남는다.
부모님 댁에 가면 돌 때 신었던 신도 있고 첫 한복도 있고 어릴 적 밥그릇도 아직 있다. 버릴 수도 기증할 수도 없는 물건들이다. 불과 몇 십 년 전이지만 그것들이 누군가의 평생이고 추억이니 미니멀리스트 같은 개념은 통할 여지가 없다.
그림책에서 모든 게 과거의 시간들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더 반갑고 기뻤다. 살아 있는 한 매일 새로운 날을 처음 사는 것인데, 나이가 많다고 새로운 모든 것들을 사양하며 살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한국의 고령층들이 폐지도 안 줍고, 아픈 데도 그렇게 많지 않고, 가족들이나 사회로부터 차별도 무시도 당하지 않고, 더 즐겁게 편안하게 사시면 좋겠다. 대하소설 하나씩 가진 분들이 얘기를 풀어내주는 그런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할 수는 없는 걸까.
작아지고 마르고 굽은 몸을 움직이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진다. 속도도 크기도 감당이 안 되는 시설들에서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 죄책감이 든다. 추억도 가득, 새로운 즐거움으로 웃음도 얼굴 한 가득, 그렇게 사셨으면. 인간도 동물도 물건도, 무엇이건 좀 더 귀하게 존중받을 수 있기를.
|
|
홀로 사는 레미 할머니가 아끼는 작은 서랍장의 맨 아래 서랍에 딸이 선물한 작은 초콜릿 상자를 넣어둡니다. 깜깜한 서랍 안에는 바삭바삭한 쿠키를 담았던 빈 쿠키 깡통, 과일 맛 사탕이 담겼던 둥그런 빈 병, 장미 꽃다발을 묶은 노란 리본, 빨간 털 뭉치 등이 들어 있어요. 어느 봄날 할머니는 둥그런 빈 사탕 병을 꺼내더니 막 완성된 딸기잼을 가득 넣었습니다. 여름이 되자 서랍 안의 긴 유리병을 꺼내 여름 채소로 만든 피클을 채웠습니다. 리본도 털 풍치도 차례차례 서랍에서 꺼내져 필요한 곳에 사용되는 데 작은 초콜릿 상자만 여전히 서랍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동그란 깡통에 든 쿠키가 선물로 들어오면 쿠키보다는 깡통이 욕심이 나 언제 과자를 다 먹고 깡통을 가질 수 있을까 기다렸지요. 만약 엄마가 반짇고리나 다른 용도로 쓸 요량을 보이면 몇 날 며칠을 졸라서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깡통 안에는 작은 실핀도 넣고 공깃돌도 넣고 종이 인형도 넣어 아주 소중히 갖고 다녔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레미 할머니의 서랍 속 물건들도 꼭 맞은 곳에 재사용됩니다. 사탕 병이 딸기잼 병이 되고 남은 털실은 소중한 사람의 모자가 되고 오랫동안 서랍을 지켰던 초콜릿 상자도 아름다운 곳에 사용됩니다. 서랍 속 물건들의 재탄생을 보며 그 물건의 깃든 사연까지 떠오르게 합니다. 단순한 재활용에 대한 그림책을 넘어 아름다운 인생의 한순간을 볼 수 있어 더없이 사랑스러운 그림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