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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리뷰어클럽 당첨 도서 <저자는> 저 : 정찬주 (무염(無染), 벽록檗綠) 오랜 기간,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명상적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온 작가.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가 된 이래, 자신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변함없이 천착하고 있다. 호는 벽록(檗綠).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상명여대부속여고 국어교사로 교단에 섰다가 십수 년간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스님 책들을 만들면서 법정 스님은 저자를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현재 전남 화순 계당산 산자락에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짓고 2002년부터 자연을 스승 삼아 벗 삼아 집필에만 전념 중이다.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소설 무소유』, 『암자로 가는 길』(전 3권)을 비롯하여, 이 땅에 수행자가 존재하는 의미와 우리 정신문화의 뿌리를 일깨우는 수십 권의 저서를 펴냈다...... . <책 읽고 느낀 바> 어떤 책은 읽기전부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우가 있다. 법정 스님이 언급되는 책이자 정찬주 저자의 글이라면 무장해제되는 느낌. 4권의 책을 만나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같은 저자다보니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게 식상하지 않다. 샘터에 실린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서 글에 매료되었고 책을 구매한 적도 있다. 입적하신 후에 몇 권을 또 구매했다.
샘터사의 편집 일을 하면서 법정 스님을 자주 뵈었다는 저자. 맑은 사람을 만나서 변화되는 경우와 본래가 그런 성정였던 사람이어서 더욱 맑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글을 읽노라면 법정 스님의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며 글맛이다. 신기하다. 글을 읽는 동안은 나도 이렇게 아무런 욕심없이 살면 어떠려나 그런 생각을 일순간이라도 하게 된다.
글을 통해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은, 향기로워지는 것 같은 그 기분이 참 좋다. 이런 기분은 법정 스님의 책이나 저자의 책에서만 느껴지는 느낌이다. 다른 스님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저마다의 성정과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 이 느낌은 없을 것을 안다. 수행자의 삶을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살다 가신 삶이 대단하다.
법정 스님 무소유 소설에서도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게 스님의 몰래한 선행. 한쪽 손이 한 일을 다른 쪽 손이 모르게 한 것.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그마저도 힘들었던 때를 기억해,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신 것. 남몰래 했던 일들이 금융실명제가 되면서 세금 폭탄이 날아왔고 그 와중에 어쩔 수 없이 들통(?)난 것.
1천억 대의 대원각을 기증 받아 탄생한 절 길상사. 시인 백석의 여인이었다는데 공덕비가 사진으로 실려 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치도 너그러움이 없던 스님. 길상사에서 방 하나를 마련해놨으나 한 번도 거기서 지내신 적이 없는데 송광사 다비식 가기 전에 단 한 번 머물렀다고 한다. 스님의 뜻이 아닌 제를 위한 의식때문이었다고.
읽음으로써 맑고 향기로워 지는 책은 소중하다. 원래 정독 스타일이라 책도 빨리 읽지 못하는데 특히나 스님 말씀이 담긴 책이자 머무셨던 곳곳을 돌아보는 여정은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들어는 본 그 곳들을 상상해가며 동행하는 시간은 묵상하는 것 같았다. 저자의 회상과 기억으로 더듬어가며 일화가 나오고...거기엔 법정 스님이 늘 계셨다. 같이하고 계셨다.
절하는 행위를 우상을 섬기는 행위라고 하는 이들에게 할 말이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절은 나의 허망한 그림자를 지우고 없애는 행위이지 우상에게 나를 구원해달라고 비는 의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148쪽
착한 사람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마치 안개와 이슬 속을 가는 것 같아서, 비록 당장에 옷이 젖지는 않아도 점점 촉촉하게 적셔진다. 155쪽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199~200쪽
저마다 독특한 기량을 뽐내는 꽃이 피기 때문에 비로소 봄인 것이지 봄이라서 꽃이 피는 것은 아닙니다......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가 보기가 좋고,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가 보기가 좋고, 복사꽃은 멀리서 볼 때가 환상적이고, 배꽃은 가까이서 볼 때가 좋습니다......인간사도 멀리 두고 그리워하는 사이가 좋을 때도 있고, 가까이 앉아 회포를 풀어야 좋을 때가 있습니다. 241~242쪽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평소 이웃에게 나눈 친절과 따뜻한 마음씨로 쌓아 올린 덕행만이 시간과 장소의 벽을 넘어 오래도록 나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이웃에게 베푼 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248쪽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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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내용은 법정스님이 머물며 수행했던 곳을 '순례'하며 스님의 발자취와 더불어 스님에서 말씀하신 '무소유'에 대한 사색이 한가득 담겨 있다. 한편, 글쓴이는 세계 여러 곳에 '순례길'을 거론하면서 우리에게도 법정스님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는 곳을 따라가면서 '무소유 순례길'을 거니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고 전하고 있다. 그 자연과 풍경속에서 '스님의 뜻'과 함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경건함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비단 '종교의 가르침'을 얻고자 순례길을 나서지 않더라도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달라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가파른 산행으로 숨은 가빠지지만 들이켜지는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히 들어가면 시원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산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면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되고, '보여지던 것'들은 사부작 감춰버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정상에 도착했다는 것을 널리 알리려고 목청껏 "야호~"라고 외치는 등산객은 없으리라고 본다. 산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기에 손님된 도리로써 예의를 차리는 바람직한 몸가짐으로 품위를 지키는 것이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등산'에 목적지가 '법정스님이 머물던 자리'라고 생각하면 이 책의 이미지와 딱 맞을 것이다. 과연 스님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였던가 하고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법정스님의 일대기' 가운데 스님께서 머물던 암자와 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앞서 읽었던 <소설 무소유>와 겹치는 이야기가 많지만, 삽화처럼 곁들여진 '풍경사진'을 통해서 새로워진 감흥과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아직도 법정스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을 것으로 안다. 그분이 <무소유>한 청빈한 삶을 사셨다 가신 것을 알고 존경해 마지 않은 까닭일게다. 허나 '무욕의 삶'으로 살아갈 수 없는 현대인들의 숙명을 마주하면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없는 자신의 삶 때문에 더욱 괴로워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무욕의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욕심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곧 '거짓'인 것을...차라리 한껏 욕심대로 살아보아야 욕심을 버리기도 쉬울 것이다. 욕심 없이 살아도 고행이요, 욕심대로 살아도 고행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야, 욕심이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욕심의 '방향'이다. 나만을 향한 욕심은 나를 병들게 하고 괴롭히지만, 남을 위해 욕심을 부리면 주위의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해탈의 경지'에 들어설 첫 발을 내딛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에 한껏 욕심을 부려도 '무욕의 삶'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러니 욕심을 부려도 된다. 나만을 위하지 말고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적어도 난 그렇다. 저마다 법정스님을 그리는 까닭이 다를 테지만, 나는 그분을 이렇게 마음에 품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불일암도 찾아가고 싶고, 해인사도 방문하고 싶다. 그곳에서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찾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좋다. 내 마음속에 이미 그분의 말씀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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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우수영에서 강원도 수류산방까지, 스님을 따라 걷는 마음기행
2010년 법정스님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스님의 무소유는 한 때 사회의 화두가 될만큼 유명하기도 했고 생전 말씀하신 "맑고 향기롭게"운동은 길상사를 중심으로 아직 이어지고 있다. 그런 스님의 일생의 발자취를 따라걷는 이야기가 내 손에 들어왔다. 스님은 어릴 때 가난하였다. 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처가 있는 법이다."는 말처럼 스님은 가난으로 인한 상처가 있었다. 학교에서 선생에게 슬리퍼로 뺨을 무차별 맞기도 했다. 중학생때 학사금을 내지 못해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기도 했고 학비를 벌기 위해 인쇄소에서 일하기도 했다. 어린 소년이 살던 곳에서 한국전쟁의 상흔이 지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모처럼 수학여행으로 간 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가 있었고 어린 여동생이 있었고 따뜻했던 할머니가 있었지만, 끝내 이런 속세의 아픔을 접어두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던 불가에 들어간다. 이 글은 이런 스님의 일생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행기이자 스님의 마음을 따라가보는 마음기행이기도 하다.
책을 넘기다 보면 낡은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스님이 손수 만든 나무 의자는 스님께서 영화 <빠삐용>을 보고 나서 빠삐용 의자라 이름 붙였다. 영화 속에서 빠비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것은 인생을 낭비한 죄 때문이었다. 스님도 의자에 앉아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혹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자문해보았을 듯 싶다.
작년 봄에 길상사를 다녀왔다. 스님이 머물던 곳에 놓여있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듯 식물 화분 하나가 놓여서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스님은 학생 때 대흥사 암자를 찾아가 하룻밤 자게 되었다. 노스님이 달을 보고서 합장한 채 "월광보살"을 되뇌이던 모습이 아름다워 잊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이 되어서 삼청동 어느 화단에서 양귀비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말하기도 했다. 꽃과 달과 같은 주변의 것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그와 같이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던 스님. 그 스님이 생전에 낡은 의자에 앉아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었을 것만 같다. 생전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인생에서 낭비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보셨을지도 모른다. 직접 만들었을 것 같은 소박한 나무의자가 스님의 일생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신라시대 당나라로 가는 구법승들은 대부분 신라의 왕자나 고관의 자제들이어서 쉽게 배를 탔지만 진감선사처럼 신분이 일천한 구법승들은 그러지 못했고 노 젓는 노잡이를 지원하여 당나라로 갔다. 그래서일까. 진감선사의 성품은 꾸밈이 없고 말 또한 꾸며하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라도 따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겨와 싸라기라도 달게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화개곡으로 들어와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창건했다. 무소유를 이야기한 법정스님의 생전 모습이 오래전 진감선서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왕자나 고관의 자제들이 아닌 것이 그렇고 꾸밈 없이 검소하게 살던 모습이 비슷해보인다. 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과 쌍계사에 왔을 때 효봉스님은 진감선사 탑비를 먼저 보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진감선사가 오래 전 있었던 자리에 온 법정스님 또한 선사의 모습과 닮았지 않았나싶다. 아마도 먼저 가신 고승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그의 일생에서 무언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처님 계신 곳 어디인가 지금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 그 말씀 그대로 스님은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때로는 산속 깊은 오두막에서 지내기도 했다. 서울 봉은사를 떠나 입적하기 전까지 토끼와 다람쥐만 오고가는 강원도 오두막에서 지내기도 했다. 어디 있는지 구애받지 않고 서 있는 자리, 자신이 있던 그곳에서 마음속의 부처를 찾아 수행에 전념했다. 이 세상에는 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내리는 눈은 겉모습이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그 각자의 무게가 다르다. 하지만 무소유 이야기를 듣고 법정스님을 추종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법정스님의 글이 자신이 따르는 성철스님을 욕보였다 하여 난동을 피운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굴레에 갇히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스님은 자신의 특성대로 피어나야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사람에게 떨어져 있지만 자기 세계를 일구며 스스로의 질서를 흩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을 신뢰했고 그렇게 행하며 생활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생명의 신비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과 잠재력이 꽃으로 피어남으로써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이 둘레를 환하게 비춘다. 그 꽃은 자신이 지닌 특성대로 피어나야 한다. 만약 모란이 장미꽃을 닮으려고 하거나 매화가 벚꽃을 흉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란과 매화의 비극일 뿐 아니라 둘레에 꼴불견이 되고 말 것이다. - 모란은 모란이고 장미꽃은 장미꽃이다, 이 책 50쪽 - 꽃과 달과 같이 일상에 마주하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꽃의 모습을 빌어 그들 각자의 특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다음 글에서도 나타난다. 캄캄한 밤하늘이 아름다운 까닭은 별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반짝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는 몇 개의 별들만 광대무변한 허공에서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별들이 제 자리를 지키며 더불어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아름다운 인생인지 알고자 한다면 밤하늘의 별을 보라고 권면하고 싶다. 자기 자리에서 누구도 닮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반짝이는 별이 되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인생인 것이다. -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이 책 238쪽- 스님이 머물던 강원도 산속 수류 산방은 지금 사유지여서 그런지 출입이 어렵다고 한다. 아쉽기는 하지만 스님의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있는 것도 좋겠다 싶다. 그때 적적한 산속에서 살던 모습은 소설 무소유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 '스님은 원고를 쓰실 때 반드시 잉크가 가늘게 나오는 볼펜이나 만년 발필을 사용하셨는데, 어느 날 만년필이 하나 더 생겨 두 개가 되었다. 불일암을 찾아온 신도가 문구류를 좋아하는 스님의 취향을 알고 선물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만년필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만다. 만년필이 하나만 있을 때는 그것의 고마움이 느껴져 사랑스럽고 살뜰한 마음이 들었는데, 두 개가 되고 난 뒤부터는 만년필에 대한 살뜰한 마음이 시들해지고 쓸데없는 집착이 생겼기 때문이다.' 스님이 생전 말하던 무소유의 의미를 알려주는 일화이다. 필요한 것만 갖고 쓸 때 비로소 그것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을 갖게 될 때, 사물의 소중함을 잊게 되고 오히려 전보다 더 다른 재물에 집착하게 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무소유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님의 "무소유"에 대해서 "무소유한 삶이 꼭 버리고 떠나기만이 아닌 무소유는 나눔이다"라고 말해준다. 스님은 자신이 받은 것을 버리지 않고 나누었다. 자신의 시자에게 모처럼 장에서 사온 연필 한다스를 반으로 나누어 그 즐거움을 나눈다. 신자가 보내준 만년필을 나누어 다른 사람에게도 준다. 그렇게 나누면서 즐거움을 얻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것이 무소유가 아닐까.
스님의 무소유라는 말에 감명을 받은 대학생이 담을 넘어온 일화가 재미있다. 어느 날 절문이 막혀있자 절담을 넘은 대학생이 있어서 스님이 가로막는다. 대학생이 법정스님을 만나러 왔는데 스님이 막고 있다고 하자 "내가 법정이오."라고 대답한다. 그 일화 속 대화는 마치 무슨 선문답 같다.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진리를 주변에서 찾지 못하고 멀리 남의 것을 쫓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 같기도 하다. 글쓴이는 이 책에서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이렇게 숨겨진 일화들을 하나 둘씩 독자들에게 내놓으면서 스님의 삶과 생각을 우리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스님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시주하겠다는 보살이 있었다. 몇번의 거절 끝에 받아들여 길상사를 창건한다. 길상화 보살은 생전 백석 시인을 사랑하기도 했다. 그래서 길상사에는 백석 시인의 시비가 놓여있다. 보살의 공덕처럼 그 공덕비도 둥글둥글하게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스님이 창건한 길상사는 "맑고 향기롭게"운동의 본산이 되었다.
스님은 경복궁 부용지 연못에 연꽃이 없는 모습을 보고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톨릭의 '내 탓이오'라는 말은 스님의 마음을 더욱 끌어당겨 '맑고 향기롭게' 운동이 시작되었다. 어느 종교를 믿던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지만, 종교를 빌미로 사물을 없애고 남을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었다. 이 책은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여행을 적었고, 스님의 생각을 짚어 보는 마음을 담았다. 송광사 불일암에서 스님이 태어난 해남 우수영을 거쳐, 진도 쌍계사와 미래사, 가야산 해인사를 지난다. 해인사는 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의 봉은사 다래헌에서 다시 노년을 보낸 강원도 오두막 수류산방을 가본다. 그리고 길상화 보살이 있는 길상사에서 마무리를 한다. 책 속의 소제목만 찬찬히 읽어보아도 좋은데,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와 같은 소제목 자체로도 불문의 격언 같고 깨달음을 주는 가르침 같다. 자신의 상처를 "세상의 상처를 반짝이는 보석으로 승화시킨" 스님의 일생을 따라걷는 마음기행. 그 걸음을 따라 우리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 책을 읽는 보람이 있을 것이다. 벚꽃 피는 봄날, 스님이 머물던 가까운 길상사라도 다시 가봐야겠다.
이 글은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열림원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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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버리고 떠나고 나누기'이다. 작가 <정찬주>님의 법정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무소유'를 읽고 난 후 만나게 된 <법정스님 무소유 산에서 만나다> (열림원 펴냄)은 법정스님이 출가한 이후 거쳐온 길을 따라 순례를 다녀온 이야기를 통해 그리움과 함께 다시 한번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보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은 2011년도에 출간된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의 개정판이기도 하며, '소설 무소유'와 많은 부분이 중복되기도 합니다.
작가 <정찬주>님 스스로가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법정스님으로부터 무염無染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산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농부처럼 자연의 섭리를 좇고자 그의 바람은 '솔바람에 귀를 씻어 진리를 이룬 뒤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준다'는 뜻의 '이불재耳佛齋'라는 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법정스님의 고향인 해남으로부터 시작해서 불일암, 쌍계사, 미래사, 해인사, 봉은사, 길상사를 찾아 갑니다. 법정스님이 머물렀던 곳인만큼 발자취를 찾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느꼈을 사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스님이 그리울 때마다 몇 가지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한 번은 스님께서 국수를 끓이시고 내가 설거지 당번을 했을 때다. 스님께서 삶은 국수를 불일암 우물가로 가져가 찬물에 식히는 순간, 꼬들꼬들해진 국수 몇 가닥이 우물 밖으로 넘쳐흐르는 물에 떨어졌다. 스님께서는 망설이지 않고 '신도가 수행 잘하라고 보내준 정재淨財 인데'라며 주워 드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 본문 중에서 -
불일암은 한 권의 윤리 교과서라고 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라고 하고 집착과 욕심이 과해진 나에게 붉은 경고등을 켜주기 때문에 불일암 가는 것은 집착과 욕심의 몸무게를 줄이러 가는 길이며, 스님이 떠난신 이후에는 스님을 뵈러 가는 길이기도 하답니다. 대나무숲길을 지나 만나는 불일암에서 누구에게나 인생을 낭비한 죄를 묻는 '빠삐용 의자'가 놓여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일부러 눈발이 날리는 날 찾은 해남 우수영, 우수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로 유학을 떠났고, 학비가 없어 겪었던 이야기와 함께 초등학교 5학녕 때 산수시간에 일본인 흉내를 내던 담임선생의 폭행사건 이야기를 떠올리고, 출가를 결심한 청년 박재철이 할머니,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친구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떠나는 스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쌍계사에서의 일화는 이미 스님의 마음에는 구도자의 길이 담겨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 만 같습니다. 아침 해가 짙은 안개 속에 떠 있을 무렵에 절을 떠나면서 스님은 울었다고 합니다. 절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전생에 그 절에 살았는지도 몰라. 내가 태어난 우수영에서도 가깝고 떠나기가 서운해서 울었던 것을 보면.'> - 본문 중에서 -
쌍계사 탑전 시절 걸레 하나를 짜더라도 힘껏 비틀어서는 안 된다는 그 작은 말씀 한마디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큰 깨우침이 아닐까 합니다. 정찬주님의 글을 통해 떠나는 무소유의 순례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큰 울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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