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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앞의 이 문장은 말 그 자체로 자기모순이다. 문장이 진실이라면 진실이 없다는 문장의 뜻에 어긋나게 되고, 거짓이라면 절대적인 진실이 있다는 의미가 되기에 문장 그 자체로 틀린 말이 된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 말에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 무엇도 절대적이지 않지만, 절대적이기도 한 게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알 수 없다. 다만, 상식 혹은 과학적 방법에 의거 하여 합의해 볼 수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복잡하게 변한다. 합의할 여유는 없고, 기존의 상식은 바뀐다. 불확실성. 세상은 끊임없이 빠르게 변화하기에, 그것을 예측하고 적응하기 어렵게만 변해가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확정적이고 절대적인 정답을 찾는다.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위안과 안정감을 찾는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다.
<바보의 벽>은 이것에 대해서 말한다. 상식의 파괴, 본말의 전도가 소통을 막는 ‘벽’을 만들고 있다고. 일본, 나아가 민주주의에 큰 위협이 된다고 말한다. 속된 말로 노빠꾸다.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은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p.26~27) 위험할 수 있고, 학자와 정치가의 특성상 플라톤이 말한 ‘철인 정치’란 성립하지 않(p.186)는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본말을 전도해서 오해하고,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믿기 때문이다. 개성은 몸에 깃들어 있음에도 정신에서 찾고, 정보가 변하고 사람은 불변함에도 반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사실들이 잘못된 교육을 낳고, 단조로운 사회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정작 필요한 것은 ‘공통 이해’다. 우리가 커다란 사회를 구성하고, 약점을 넘어서 큰 힘을 발휘한 이유는 상호 공유할 수 있었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것이 사라지고 있다.
핵심은 ‘일원론’에 있다. ‘이원론’, 혹은 ‘다원론’이 아니라, 어떤 정답이 존재한다는 생각, 나 이외의 다른 존재나 사고를 인정하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우리들은 몸을 무시하고, 추상적인 사고체계 중심으로 세상을 발전시켜 왔다. “문명의 발달이란 목 아래의 운동을 억압하는 것(p.103)”이기에 그것에 충실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신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물질적인 존재기도 하다. 문명화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일원론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p.196~197) 나아가 뭔가 내가 알고 있다고 단정해 버리는 자세(p.205)로 인해 벽은 영원히 넘을 수 없는 계곡이 되고 만다. 더닝 크루거 효과는 능력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유능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인지 편향이다. 어쩌면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능력이 낮은 사람은 벽에 막혀 있는지도 모르고, 유능한 사람은 오히려 벽을 넘을 수 있음에도 항상 겸손하게 벽을 의식하고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좌절의 골짜기 어디인가에서 헤매고 있거나, 아니면 우매함의 봉우리에 서서 알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매함의 봉우리를 넘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다음으로 게으른 몸을 움직여야 한다. 또한, 나를 알아야 한다. 깨달음의 오르막에 이르기 위해서 잠시 일은 미루고, 책은 덮어두더라도. 내가 물질적인 존재임을 명백히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게 신년의 목표로 삼아본다.
일독 260210/ 작성 260213 ----------------------------------------------------------------------------- 현실을 자세히 아는 일이 그처럼 간단할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늘 확실한 뭔가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종교 또한 그래서 나왔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가 현실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성립했다고 봅니다. p.20~21 ‘객관적 사실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역시 최종적으로 신앙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누구에게도 그것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가장 두려운 점은 그것이 신앙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의 대표가 NHK 방송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입니다. p.21~22 피터 바라칸 씨가 ‘잡학과 상식을 혼동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방대한 ‘잡학’류의 지식을 나열한다고 해서 ‘상식’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럼 상식이란 무엇일까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간단히 말해 상식이란 ‘누가 생각해도 그럴 것이다’라고 할 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절대적 진실이든 아니든 ‘인간이라면 보통 그럴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상식이라는 뜻입니다. / 몽테뉴는 ‘이쪽 세계에서는 당연해도 저쪽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객관적 사실’ 따위를 맹목적으로 믿지도 않았습니다. 상식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p.22~23 즉 ‘과학적’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무조건 절대적 진실이라고 여기지 않고, 거기에 반증될 수 있는 모호한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 진화론의 경우 ‘자연선택설’이 위험한 것도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종이 적자다’라는 주장을 반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종’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살아남지 못한 자’가 과연 환경에 부적합했는지 어떤지는 비교하기 힘듭니다. p.26~27 포퍼는 말합니다. / “아주 사소한 하나의 사실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이론일수록 좋은 이론입니다.” p.27 ‘심리’를 ‘뇌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설명해 보자면 ‘입력에 대한 적절한 무게를 부여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 인간의 뇌를 계산기 같은 하나의 입출력 장치로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p.41 요즘의 젊은이들을 보면 정말이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공통 이해’를 요구받는 것과 동시에 의미 불명의 ‘개성’을 강요받는 모순된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를 비롯한 조직은 철저히 ‘공통 이해’를 강요하면서도 입으로는 개성을 발휘하라고 외칩니다. 대체 어떡하란 말이냐고 절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 요컨대, ‘조직이 원하는 개성’을 발휘하라는 모순된 요구에 직면한 것입니다. p.49 피부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개성’은 애당초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나를 낳아 준 부모와도 그렇게 다르니 그 누구와도 다르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 그런데 의식의 세계는 그와는 반대로 서로 통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통하지 않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랍과 이슬람의 사고방식은 이해하지만 그 개별성을 표면에 드러낼 경우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마는 것입니다. / 이렇게 볼 때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교육 현장에서는 개성을 기르라는 바보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보다는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친구 또는 홈리스의 생각을 이해할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진정한 교육이 아닐까 싶습니다. p.52 앞에서 말했듯이 ‘개성’은 뇌가 아니라 몸에 깃들어 있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이와 전혀 반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매우 비슷한 착각을 ‘정보’에 관한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흔히들 정보는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보는 매일 바뀌지만 자신은 바뀌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 ‘개성’이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실은 반대입니다. p.57 정보가 매일 달라진다는 생각은 착각으로, 주간지의 경우 단지 매주 최신호가 나올 따름입니다. / 19세기에 이미 도시화와 사회의 정보화가 이루어진 서양에서는 일찌감치 이 이상한 현상에 눈을 돌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카프카로, 그의 소설 ‘변신’이 그러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 주인공 그레고르는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벌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의식은 여전히 ‘나는 잠사다.’라고 생각합니다. / 실상과는 정반대로 ‘변하지 않는 인간과 변하는 정보’라는 사고방식이 통용되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 그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테마입니다. p.63 안다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바뀌는 일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뀝니다. 설령 그것이 어제까지와 똑같은 세상일지라도 말입니다. p.65 의식의 세계나 마음의 세계는 그것이 감정이든 논리든 상호 공통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설명을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의식의 세계에서 개성을 끌어들이면 매우 곤란합니다. p.71 의식에서 공유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에 반해 개성을 보장하는 것은 신체입니다. 의식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신체를 무의식이라고 일컬어도 좋을 것입니다. p.71~72 현대 사회가 간과하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벽’을 만드는 커다란 문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대전제,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 말입니다. p.72 물론 ‘나는 나’라는 사고방식에도 어느 정도의 진실성은 깃들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죽을 때까지 하나의 개체이며, 그런 점에서 ‘나는 나’입니다. 유전자도 평생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나라고 주장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 그러나 인간과 정보, 양자의 본질적인 특성을 비교할 때 크게 보아 어느 쪽이 변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에게 개성을 기르라고 말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오히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 더 개성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들과 똑같아지는 일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 ‘너는 그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야.’라고 말해 주면 됩니다. p.73 아주 간단히 말하면 신이란 인간의 진화, 또는 뇌의 진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84~85 여기서 ‘도시’란 앞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뇌화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뇌 속에 도면으로 그린 세계가 실제로 구현된 것입니다. p.94 건강한 상태란 프로그램을 바꾸어 가며 다양한 입출력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p.99 신체를 움직이는 것은 세상을 아는 일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p.100 원래 문명의 발달이란 목 아래의 운동을 억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발로 걷는 대신 자동차를 타게 된 것은 목 아래의 운동을 억제하는 일입니다. / 목 아래의 운동은 동물에게 기초적인 부분입니다. 이름이 동물일 정도니까 다리를 움직여 이동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뜻입니다. 문명 사회는 이러한 이동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이처럼 신체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신체를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p.103~104 공동체가 제대로 기능할 때는 구성원들끼리 뭔가를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인생의 의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은 타인과 교류가 있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어떤 식이든 주고받는 일이 생깁니다. / 뭔가를 받으면 보답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와 같은 것으로, 자신을 길러 준 공동체에 성실한 인간을 되돌려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위입니다. p.114 공동체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하면 아무래도 얼굴 없는 인간의 집합체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각자의 행복이나 ‘인생의 의미’에 직접 관련된 것이 공동체입니다. p.117 인간은 고민하는 게 당연하고, 살아 있는 한 고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있거나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를 좋지 않다고 여겨 무리하게 고민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얻으려는 마음이 큰 나머지 과학이나 종교를 절대시하게 됩니다. p.122 세간에서 말하는 ‘머리가 좋다’ 또는 ‘현명하다’라는 것은 사회적 적응성의 문제와 관련이 크므로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2장에서 언급했듯이 y=ax에서 a가 적정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것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으니까요. 과학적으로는 장례식에서 우는 것이 옳은지 웃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힘듭니다. p.140 ‘생각’을 한다는 것은 대뇌 피질 내에서 갖가지 자극을 내보냈다가 받아들였다가 하는 일입니다. 그것과 운동 속도는 별개의 것입니다.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어느 쪽이 적합하고 어느 쪽이 적합하지 않은지, 그 방향성이 판가름 납니다. p.143 천재란 한마디로 말하면 A->D라는 식으로 일부 과정을 생략하거나 아니면 일부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는 피카소가 좋은 사례입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 매우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역시 보통 사람이 나니 천재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피카소의 그림에 관해 이와다 마코토 도쿄 여자 의대 교수가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큐비즘 시대의 회화는 공간 배치가 뒤죽박죽입니다. 코가 옆 쪽을 향해 있는데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는 그림이 비일비재하니 뒤죽박죽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 하지만 그에 비해 부분 부분의 데생은 상당히 정확합니다. 즉 모델인 인간이나 사물을 여러 방향에서 보고 묘사한 그림을 뒤섞어 합체한 듯한 형상입니다. / 데셍에 필요한 공간 배치는 일반적으로 시각의 중요한 네 가지 기능 중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너진 상태라면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은 피카소의 큐비즘 그림과 같이 보일 것입니다. 물론 피카소 자신은 보통 사람과 똑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했고, 아시다시피 초기에는 상당히 정통적인,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큐비즘적인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일까요. / 그는 모델 한 사람을 이쪽저쪽에서 바라보며 데생을 해서 조각조각 이어 붙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정상적인 공간 배치 능력을 의식적으로 지워 없앴을 겁니다. 피카소는 그러한 일을 의식적으로 했습니다. 질병으로 어떤 능력이 사라져서 자신도 모르게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지만, 피카소 자신은 그렇지 않음에도 의도적으로 그런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 그는 자신의 시각야를 매우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p.145~46 애초에 교육이란 스스로의 삶에 꿈이 있는 교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너희들, 나를 보고 배워라.” 하는 얘기니까요. 그런데 과연 자신을 보고 배우라고 할 정도로 훌륭하게 살아가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요. 기껏해야 교사가 되는 방법이나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란 상당히 모순된 행위입니다. 따라서 나를 보고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 무리라면 차라리 좋아하는 일이 있어서 그것을 학생들에게 전가하기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p.166~167 학문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 또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물을 정보라는 변하지 않는 내용으로 바꾸는 직업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학문입니다. p.167 학생이 두개골을 보고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실물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가상현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눈앞에 누워 있는 시체를 보기 힘듭니다. 보통 사람이 시체를 목격한다면 ‘이게 뭐지?’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그런데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정치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감춥니다. 그래서 시체도 감춥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마음을 억누르고 진득하게 바라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바로 학문입니다. p.170 의식적 세계란 하잘것없으며 기본은 신체입니다. 그것은 험한 시대를 지내보면 알게 됩니다. 몸이 받쳐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p.172 한 사람을 계속 추적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현상과의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개체를 추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 실제로 후생성에서 이런 방법을 사용해 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비행을 저지른 사람의 과거를 추적하자 하나의 경향이 통계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가족에게 계속 앙케이트를 실시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고등학생 때 비행을 저지른 사람은 세 살까지 어머니가 ‘이 아이는 참으로 키우기 힘들다.’라고 대답한 비율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사를 통해 이런 사람은 부모와의 관계에 아주 어릴 적부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물론 이것만으로 학생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부모에게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기 힘듭니다. p.174~175 우리는 오늘날까지 단조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예를 들면, 옛날부터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상태에 가까워지려는 소망이 공통의 원동력으로 작용해 생활이 이토록 편리해졌습니다. p.181~182 학자란 인간이 사물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얼마만큼 현명한지 알아내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 정치가는 인간이 얼마나 바보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 상대가 현명하다고 생각해서는 설교가 먹히지 않습니다. 상대가 얼마나 바보인지를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상대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로서는 자격이 없습니다. / 이처럼 학자와 정치가는 그 성질이 정반대입니다. 학자가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는 이유는 인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즉, 플라톤이 말한 ‘철인 정치’란 성립하지 않습니다. p.186 그 결과에 직면하기가 두려우므로 병기가 점점 간접화되어 갑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몸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무기의 진화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서로 칼로 찔러 죽일 때는 억지력도 직접적으로 작용합니다. 눈앞에 있는 적을 찌르면 그 감촉이 손으로 전해지고, 피가 자신에게 튀고, 적은 눈앞에서 쓰러집니다. /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무기를 자신의 몸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런 욕망을 실현해 간 결과 무기에 의한 피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p.188~189 욕망은 억제하지 않으면 몸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습니다. p.189 그렇다면 세계에서 통하는 화폐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에도 시대처럼 쌀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겠죠. 세계 공통의 기준으로는 에너지 단위 외에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p.193 바보의 벽이란 일종의 일원론에 기인하는 면이 있습니다. 바보에게 벽의 안쪽이 세상의 전부여서 그 너머는 보이지 않습니다. 벽 너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 이 책에서 몇 번이고 사람은 변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도 일원론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일원론의 배후에는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착각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 전제가 없으면 일원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절대적인 원리주의를 주장할 수 없으니까요. p.196~197 원리주의가 자라기 쉬운 토양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편해지고 싶을 때 뇌 속의 계수를 최대한 고정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사고 정지 상황이 마음이 가장 편하기 때문입니다. p.200 안이하게 ‘안다’, ‘말하면 안다’, ‘절대적 진실이 있다’라고 단정해 버리는 자세, 거기서 일원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금방입니다. 일단 일원론에 걸려들었다 하면 굳건한 벽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일견 편안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벽 너머의 세상,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당연히 대화도 통하지 않습니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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