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산혈해의 참상 속에 피가 강처럼 흐르는 전장. 말할 힘까지 아껴 가며 싸워 온 그들의 전투는 어느덧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큭큭큭." 창대에 의존해 조소를 흘리는 피투성이 사내는 운화결이었다. '진무립' 은곡의 무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진무립은 표사들의 빈틈을 착실하게 공략했다. 자신은 이제 움직일 힘조차 없건만 진무립은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에 쓰러진 숫자가 족히 칠백. 자신과 복령천주처럼 야망에 사로잡힌 괴물이 아니다. 그는 진짜 괴물이었다. 힘겹게 상체를 바로 세운 운화결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삼천이 넘던 부하 중 살아남은 숫자는 고작 삼백. 팔백에 불과하던 중원삼가의 무인은 샘백 명이나 두 발로 서 있었다. '내 눈에 담긴 것이 정녕 현실인가.' 분전의 중심에는 진무립과 상천의 고수들이 있었다. "삼가는 뒤로! 팔기는 적을 포위하라!" 쩌렁쩌렁한 외침은 이제 막 전투를 시작한 사람처럼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상천팔기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부름에 화답했다. "예!" 지친 삼가의 무인이 물러나는 사이, 일사불란 움직인 서진환과 상천팔기가 팔방에서 적을 몰아붙였다. 탓! 시뻘건 혈귀가 되어 전장의 중심으로 솟구치는 진무립에게 흑창이 빨려 들었다. 무려 일 장이나 솟구친 진무립의 창끝이 지면으로 향한다. 쿠우우우우...... 마치 발아래로 세상을 굽어보듯 밀집된 적을 눈에 담은 진무립이 거친 기합성을 토해 냈다. "하압-!" 날카로운 일성은 마치 뇌성벽력처럼 적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쌔애액! 진무립의 신형이 흑창과 함께 벼락 치듯 내리꽂혔다. 콰아아앙앙! "크아악!" 부르르 몸을 떠는 대지. 피 냄새로 흥건한 전장. 반경 일 장이 유성에 충돌한 듯 움푹 꺼지며 피와 살점이 바람과 함께 솟구친다. 쉬익! 바닥을 나뒹구는 두 자루 도가 진무립의 양손으로 빨려 들었다. 지면을 박찬 진무립은 거침없이 적을 향해 돌진했다. 서걱! 가볍게 휘두른 도신에 두 명의 머리통이 둥실 떠오른다. 그 사이 배후에서 두 명의 적이 창을 찔러 왔다. 상체를 돌린 진무립이 등 뒤의 창을 거칠게 후려쳤다. 카캉! 진무립은 지체없이 두 자루 도를 내던졌다. 퍼퍽! 여지없이 머리를 꿰뚫은 도가 시야 밖으로 사라진 순간 그의 손에는 어느새 적의 창이 쥐여 있었다. 휘리릭! 진무립의 움직임에 따라 한 자루 창이 수레바퀴처럼 회전하며 쏟아지는 공격을 받아친다. 따다다다당! 적진의 한복판에서 진무립은 추풍낙엽처럼 적의 목을 베어가는 장관을 연출했다. 적모개가 개방의 방주 철표개를 붙잡고 말했다. "그렇게 구경만 하실 때가 아닙니다. 상천팔기를 따라 주변을 포위하고 적을 안으로 압박해야 합니다. 그게 소공자가 바라는 일입니다. 그는 내색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지금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고 있을 겁니다. 상천팔기에게 포위를 지시한 것도 신법을 전개할 힘까지 아껴 적을 베기 위한 소공자의 의도입니다. 우린 외부에서 압박하며 적의 시선을 분산시켜 소공자를 도와야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쓰러져 있던 악계화가 몸을 일으킨다. "한 명이라도 더 베어야겠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던 자영이 너덜거리는 왼팔을 움켜쥐고 일어난다. "아직 움직일 수 있습니다." 복수를 위해 온몸을 내던진 태산표국의 무인 중 살아남은 이는 두 사람이 전부였다. 움직이려는 이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어이. 나 좀 일으켜 봐." 돌아본 악계화의 눈에 꿈틀거리는 육군명이 들어온다. 악계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육군명을 일으켰다. "나도 가겠어요." 탈진한 채 앉아 있던 진설란도 바닥에 검을 꽂고 일어난다. 잔뜩 인상을 쓴 철표개가 앞으로 나섰다. "저 아이들을 뒤로 물려라. 우리가 나서겠다." 적모개와 일부 제자들이 부상자들을 데려가자 철표개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먼저 가겠소." 그 뒤를 따라 개방의 제자들과 소림, 무당의 고수들이 신법을 전개한다. 순식간에 적을 포위한 그들은 상천팔기의 움직임에 맞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안에선 진무립이 휘젓고 밖에선 적의 압박이 거세진다. 밤새 이어진 격전에 지친 표사들에겐 그들을 당해 낼 힘이 없었다. 그들의 눈에 절망이 떠올랐다. 힘겹게 서 있던 운화결의 흐릿한 시야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은 지면을 박차고 달려드는 진무립의 얼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