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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은 두 번의 양요를 겪으면서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만약 그 당시에 쇄국이 아닌 문호 개방을 택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정하곤 한다. 그리고,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이 성공하여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진정한 개혁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 역시 이 시기의 역사를 접할 때마다 자연스레 등장한다. 과정과 그 속도가 달랐지만 중국과 일본이 각각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서 홀로 변화의 바람을 무시하던 당시 조선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대부분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젊은 급진 개화주의자들을 응원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이전에는 그랬다. '갑신정변'에 대하여 상세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혁을 통하여 발전을 꾀하자는 그들의 주장과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게 된다면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이 책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갑신정변'은 물론 그 사건을 주도했던 김옥균이라는 인물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선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점은 '갑신정변'의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 사건에 대하여 수많은 자료를 통하여 깊게 파고들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갑신정변'의 막전 막후를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단순히 1884년의 '갑신정변'을 그 이전의 청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수구 세력 강화의 단초가 된 1882년의 '임오군란'에 대한 반동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그것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83년 김옥균은 차관을 요청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문한다. 이미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류하던 김옥균은 조선 역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1883년의 일본 방문은 실제 그가 '갑신정변'의 결행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의 차관 요청은 물론 정변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도 국내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 추진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굳이 조선을 놓고 청과 대립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이러한 소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던 일본의 재야 세력은 김옥균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1882년 조선에서 터진 '임오군란'을 계기 삼아 국외 문제에 대하여 정부에 대하여 질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옥균과 같은 모험주의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국외의 큰 혼란의 불씨가 될 수 있음을 감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 재야 세력의 대표인 일본의 자유당 지도자 고토 쇼지로는 김옥균을 북돋우면서 온갖 지원을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지원은 구체적인 것은 없었고 두리뭉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일본의 지원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갖고 거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렇다고 김옥균이 단순히 일본의 지원만을 굳게 믿고 충동적으로 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정변이 일어났을 때, 일본 공사관에서 병력을 제공하였지만 그 병력은 대략 150명 정도의 소수였기에 그것만 믿고 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개화파의 국내에서 나름의 준비 과정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집권 세력인 친청 세력, 즉 민씨 일파에 맞서 군사력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사실 군권은 집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개화파가 그에 맞서 군권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개화파에 속하던 윤웅렬(개화파 윤치호의 아버지)이 이끌던 함경도의 북청군 470명을 거사 2개월전인 1884년 10월에 입경케 하여 친군 후영에 속하게 됨으로써 얼추 사대당과 개화당의 군권의 상황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 아래 표를 보면 사대당의 병력이 약간 많지만, 해방영은 서울 밖의 경기도에 주둔하는 병력이니 거의 균형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군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은 개화파의 정변에 대한 국내에서의 치밀한 준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에 주도하고 있던 원세개의 청군이 문제였다. 김옥균이 믿는 것은 일본 공사관의 지원 병력은 150명 정도였기 때문에 아무리 국내의 병력 숫자를 맞춰도 청군이 개입한다면 거사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왜 이 책이 '갑신정변'을 '청불전쟁'과 제목으로 묶여있는지 보여준다. '청불전쟁'은 베트남의 주도권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주요 전장은 청나라와 베트남의 접경 지역과 대만이었으니 조선과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이 전쟁이 1884년 8월에 시작되어 1885년 4월에 종료되었기에 '갑신정변'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갑신정변'의 시작과 끝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의 병력을 1500명만 남기고 철수시킨다. 김옥균의 입장에서 이는 정변을 일으킬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물론 1500명의 청군도 무시할 수 없지만, 청나라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조선에서 일본군과의 충돌은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청군의 개입이 어려우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 '청불전쟁' 당시 프랑스는 일본에게 물밑으로 지원을 요청한 상황이었으니 청나라로서는 조선에서 쉽게 병력을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청불전쟁'의 개전은 김옥균의 개화당 세력에게 정변의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심지어 수구세력은 개화당의 군사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윤웅렬의 북청군을 다시 함경도로 복귀시키는 조치를 취하자 결국 개화당은 1884년 12월에 거사를 감행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거사에 지침하지 말라는 입장이었기에 일본 공사관은 소극적으로 임했지만, 일본 공사는 정부와 일본의 재야 세력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김옥균의 강력한 설득과 고종의 밀지를 명분으로 공사관 병력을 거사에 제공함으로써 우정국 낙성식에 맞춰 진행된 거사는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청불전쟁'의 시작이 김옥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전쟁의 정황은 결국 김옥균에게 패착이 된다. 프랑스의 우세로 진행되던 전쟁이 점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원세개는 조선에서 일본군과 충돌하더라도 청과 일본의 대규모 확전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과감히 병력을 동원하여 거사의 진압에 개입함으로써 결국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면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순식간에 역적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하여 '갑신정변'의 막전막후를 알게 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기존의 생각과는 큰 괴리감이 생겨났다. 젊은 엘리트들에 의한 개혁의 상징이라 여겼던 '갑신정변'은 그 과정에서 다수의 문제점을 보여주었기에 그 목적이 정말 구한말의 개혁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일본의 세력을 끌어들인 점과 정변 후 세조가 그랬던 것처럼 수구파의 고위 관료를 살해한 점 등은 그들의 거사를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거사에 성공한 이후 12월 6일 그들이 발표한 [혁신정강]에서 '대원군의 조속 귀환'이라는 내용이 조항에 포함된 부분도 이들의 거사가 마냥 젊은 엘리트들의 구국을 위한 결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권력 장악이 우선시 되어야 하지만 그들의 행보를 보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무리하게 권력 장악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의 거사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현실적인 부분에서 정책 추진을 위한 권력 장악은 필요한 것이고, 비록 실패하여 제대로 그들의 포부가 실현되지 않았지만, [혁신정강]의 내용을 본다면 적어도 당시 조선에서 개혁을 통한 구습의 타파를 실행으로 옮기려는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본다면 그들의 거사가 성공하였더라도 그 혁신이 이루어졌을지는 미지수이지만.) [혁신정강] - 대원군의 조속 귀환과 조공 폐지 - 탐관오리 징벌 - 만민평등. 양반 문벌 폐지 - 지조 개혁 - 내시부 폐지 - 지방 환곡 모두 폐지 - 규장각 폐지 - 경찰 제도 도입 - 해상공국 폐지 - 각종 옥사를 재조사하여 억울한 자들 방면 - 친군 전후좌우 4개 영을 1개 영으로 통합 - 국가 예산 관리는 모두 호조로 통합 - 6조의 대신, 참찬들의 국무회의가 내각으로서 국사 총괄 - 6조 외의 번다한 중앙 부처는 모두 폐지
이 책은 '갑신정변'의 과정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면서 흥미로운 가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바로 거사를 고종이 묵인했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에 조선이 비록 혼란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국왕이 존재하는 전제국가였기에 김옥균 세력이 나름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고 하더라도 고종의 허락 내지는 묵인이 없었다면 거사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가설을 언급한다. 즉, 고종은 개화당을 이용하여 청나라를 등에 업은 민씨 세력을 제거하는 이른바 차도살인(借刀殺人)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실제 거사의 과정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일족은 거사 다음날 고종을 만나려다가 개화당에 의하여 살해되거나 정권에서 축출당하였으니 마냥 허무맹랑한 가설은 아니다. 실제 고종은 성인이 되어 친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견제하고 훗날 청나라에 억류되는 것을 방관하였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 : 청불전쟁과 갑신정변]은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던 '청불전쟁'이 어떻게 '갑신정변'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이 사건들에 대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더불어 역사가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을 어떻게 아우르면서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를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간 '3일천하'라는 표현 때문에 '갑신정변'을 상당히 드라마틱한 사건으로만 이해했지만, 그 배경과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치밀한 전개에 의한 역사로 돌아볼 수 있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한 또 하나의 수확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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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일제식민통치'에 의한 강제적인 것으로 시작하였다. 허나 이는 '일본제국'을 위한 것이었을뿐, 우리를 위한 근대화는 아니었으니 말할 건덕지도 없다. 그런 탓에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은 '해방 이후'로 잡고 있으나, 그마저도 친일독재, 군사독재, 반민족적인 독재정권 들이 연이어 들어서는 바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고, 21세기 초반에야 겨우 '근대화의 틀'이 잡혀나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뼈아픈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정 '조선의 근대화'는 허상일 뿐이었고,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던가? 이번 편에서 '갑신정변'에 대해 풀어놓았으니 살펴볼 일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시작을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보고 있는 시각이 참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그 이전까지 '세도정치'로 지배계층이 뿌리까지 썪어 문드러져 있었으니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들이 뒤늦기는 했지만, 눈여겨볼 만한 탓이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 개혁세력들이 타격을 입고, '동학혁명'으로 새나라를 꿈꿨으나, 뒤이어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우리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모든 시도와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온국토와 백성들이 쑥대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결국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있었다면 그건, '민중봉기'로 싹튼 '민주국가에 대한 열망'이었고, '항일의거'로 보여준 '우리 민족의 불굴의 의지'였으며, 훗날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정신적 기틀'을 바로 세운 것이 전부였다. 뼈아픈 근현대사는 이렇듯 물적으로도, 인적으로도 '절대적인 자원부족' 상태에서 다시 세워 나아간 것이다.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기적을 이뤄냈고, 어떤이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끌어간 주역은 누구라고 보아야 할까?
조선후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개화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겠다. 흔히 '북학파'라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적인 세계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사대부)들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들이다. 꽤나 개방적인 사상을 갖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엄연한 '유학자'들일 뿐이었다. 유교라는 큰틀 안에서 '조그만 창'을 내어 세상밖을 살펴볼 뿐, 조선이라는 나라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개혁가들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개혁가를 꼽자면,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사상가들이 주목한 '롤 모델'은 일본의 '명치유신(메이지유신)'이었다. 일본의 개화가 성공적으로 보였던 이들은 일본과 손잡고 '조선의 근대화'를 서두르려 하였고, 나아가 서구열강들의 침탈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 일본을 파트너로 삼는데 거침이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내부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일본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 '외향적 분출(침략전쟁)'을 일삼던 나라라는 것을 이들은 잊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후쿠자와 유키치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김옥균과 그 일당들'의 철저한 오판이었던 것일까? 암튼 '갑신정변'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조선의 민중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 지도부의 교체(?)만으로 개혁이 성공하리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으며, 조선의 개혁을 은근히 바라는 서구열강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돕기 위해 견마지로를 다할 것이라 믿었고, 가장 큰 오판은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위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성공 이후, 개혁세력들이 정치적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일본정부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퍼줄 것이라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무려 '청나라'를 상대로 말이다.
그렇다. 고종임금이 다스리고 있던 그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간섭'이 너무나도 심했던 시절이었다. 가뜩이나 조선을 '청의 속국'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서구열강들의 의심스런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민씨일파들은 '임오군란'이라는 위기를 맞아 너무나도 쉽사리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이는 졸속적이고 졸렬한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 군사에 의해 내정간섭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고,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조선정부를 향해 막대한 보상금과 피해재발을 막을 수 있는 선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이렇게 고종과 민왕후는 '청의 간섭'으로도 모자라 '일본의 간섭'까지 받게 되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거기다 구세력(친청)과 신세력(친일)간의 마찰은 더욱 심화되어만 갔다. 애초에 임오군란의 원인이 이 둘의 갈등이었는데, '구세력의 불만'이 폭발한 뒤에 제대로 해소되지도 못하고 '청나라의 간섭'만 더욱 심해진 꼴이 되었으니 나라꼴이 엉망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신세력들은 나라꼴을 우습게 만든 세력이 볼짱사납게도 '재집권'을 하게 된 상황이 더욱 눈꼴 시린 것도 말할 것 없고 말이다. 이에 '갑신정변'이라는 새판을 짜기 위해 물밑작업을 시작했고, 결행의 시기까지 무리하게 앞당겼던 것이다. 그렇게 무리하게 결행한 결과가 고작 '삼일천하'였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이렇게 구세력도 별볼일 없었고, 신세력도 변변찮으니 나라꼴이 점점 우습게 된 것도 '당연지사'였으리라.
이런 판국에 '갑신정변'의 진행과정부터 결과까지 '청과 일본의 대결' 양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모양새는 더욱 빠지게 되고 말았다. 만약 '프랑스'라는 변수만 없었더라면,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일전쟁'이 곧바로 시작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응우옌 정권'을 독차지 하려다 청의 간섭을 받자, 곧장 '청불전쟁'을 시작했더랬다. 그렇게 프랑스와 청이 대판 싸우자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에 '청과 일본' 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꺼렸던 탓이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날 당시, 청나라는 청불전쟁에서 발을 빼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고, 일본은 청불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가 확실히 이길 거라는 보장도 없었기에 깊숙이 간섭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그래서 '갑신정변'으로 청군 3명 사망, 일본군 2명 사망이라는 나름의 성적표(?)를 가지고 치열한 협상을 벌인 끝에 양국군 모두 조선에서 철군하기로 '텐진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갑신정변'이후 개화세력(민씨척족) 제거와 동시에 외국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다. 이런 결과를 가장 반긴 이는 다름 아닌, '고종'이었다. 모처럼 '아버지 눈치'도 보지 않고, '아내의 간섭'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는데,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철수해버렸으니, 드디어 '고종의 친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종은 이 틈을 이용해 '청과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외교관계'를 바라마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청나라와 일본과 한판 붙어도 결코 쫄지 않는 '새로운 힘'과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고종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만다. 고종은 조선백성의 주인이면서도 백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스스로 힘을 기르겠다는 '자주국방'이라는 기본조차 망각한 무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봄을 맞이한 기간이 너무나도 짧아 무슨 노력을 기울였어도 달콤한 결과를 맛보기 힘들었겠으나, 겨우 맞이한 봄이 무색할 정도로 곧바로 겨울을 불러들이는 무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 권에서 다룰 내용이겠지만,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혁세력(친일)들이 모두 사라진 때에 '구세력(친청)들'만으로 무슨 기회를 엿볼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전통적인 구세력들이 믿을구석이라고 해봤자, 결국 '또다시 청나라'에 굽신거리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뭔가 노력을 하긴 했었는데, 다름 아니라 '러시아 세력'을 끌여들인 것이다. 그간 러시아가 보여준 저력은 엄청난 영토확장과 더불어 '대영제국'과도 과감히 맞짱을 뜨는 힘, 청나라를 상대로 만주와 연해주를 뜯어내는 힘, 태평양을 넘어 미국까지 경계하게 만드는 저력, 그리고 일본을 상대로도 말 한마디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가공함에 고종은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리라. 허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머나먼 왕국은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아직 '시베리아철도'가 개통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는 와중이라 러시아의 육군과 해군이 '조선'에 다다르기 위해선 얼어붙은 시베리아땅을 뚫어야 하고, 영국의 견제를 피해 대서양과 인도양을 끝에서 끝까지 종단과 횡단해야만 했기에 조선이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을 하더라도 '당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이 급변하면서 조선에 '러시아'와 '영국'이 발을 들이게 된다. 그로 인해 '거문도 점령'이라는 달갑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니, 다음 권에서 펼쳐질 내용이다.
정리하면, '갑신정변'으로 인해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 첫째, 소수일망정 개혁세력을 깡끄리 잃어버리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자주적인 근대화'는 물 건너갔다. 둘째, 무리한 개혁이었을망정 구세력(친청 사대부)들에게 감동과 각성을 주는 계기로 작용했어야 하는데, 되려 '개혁의 필요성'마저 망각하게 만들어버리는 비호감만 전해주었을 뿐이다. 셋째, 일시적이나마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그 절호의 기회를 맞아 '뭔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조차 없이 그저 '헤프닝'에 불과한 사건으로 일단락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나 아무런 영감도 불어넣어주지 못할 '정변'을 왜 했던 것일까? 아니 '누구'를 위한 개혁이었단 말인가? 단지 '불만표출'에 그칠 요량이면, 도끼를 매고서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의 행위를 따르고 말 일이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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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굽시니스트의 책은 바로 개화파가 벌렸고 실패했던 갑신정변입니다.
굽시니스트는 이 사건을 당시 동북아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국내에는 개화파가 벌인 설익은 정변이라는 관점과 수구파의 승리정도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한말의 정세에 대해서 최근 외교적 상황의 어려움을 얘길하면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시 김옥균은 개화파가 제대로 실력이 없는 상태에서 정변을 강행했습니다.
조선 정부를 옥죄고 있던 청나라가 베트남과 대만지역에서
국내에서는 비밀리 양성했던 신식군대들을 자꾸 민씨 척족들에게 뺏아기고
일본은 이떄 애매모한 정부와 달리 재야 세력은 김옥균을 부주키고 있었지요.
우리는 자꾸 당시 청과 일본의 군사력만 이야기 하지만 이 정변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친군 좌영, 우영, 전영, 후영으로 4개의 영(수백명 병력)이 고종과 한양을 수비하고 있었고
원세개의 이끌던 천여명의 청군과 일본군 공사관 경비 병력 150여명 다 싸운것으로 알고 있지만
뉘늦게 편성했던지라 지리멸렬했던 전영과 후영 대비
많이 알려졌던 개화파의 친군 전영과 후영이 소총이 없었던 것은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왜 실패했는지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목을 하지 않는 청불전쟁은 중국의 운명을 가른 전쟁입니다.
베트남을 잃어 버린 전쟁이지만 이렇게 남양의 괴멸은 이홍장의 북양에게 힘을 쏠리는게 계기가 되었지만
최대한 축약해서 잘 정리되어 우리나라의 역사를 동북아의 흐름에서 살펴 볼수 있는게 최대 장점이네요.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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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님의 13권을 목빠지게 기다리다가 드뎌 재밋게 다 읽었네요.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한국 근대사의 뼈아픈 한 장면을 깊이있게 다루는 것도 모자라, 청불 전쟁과 동북 아시아 동남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당시의 열강의 이해관계를 이보다 더 알기 쉽고도 재밌고도 깊이 있게 다룬 책이 있을까요? 그것도 만화로? ㄷㄷㄷ 이번 책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각 지역 내지 나라의 캐릭터가 동물들로 상징되다 보니까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부분이 어느 나라를 얘기하는 것인지가 실시간으로 자각되는 효과가 있어 이것 또한 정말 좋네요^!^ 휴가를 좀 늦게 가면서 이 책을 읽고 나니 어느덧 14권이 나오면서 또다시 기쁜 탄성을 지릅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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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어느덧 13권째 단행본이 나왔다. 20권완간이라니 개인적으로 30권 40권까지 나와서 2차대전 종전혹은 6.25한국전쟁시기까지 보여줬으면 하기도 한다. 어느덧 7권이 완간까지 남은 상화이다. 이번권에서는 갑신정변과 한성조약같은 격동시기를 다룬다. 다음권은 거문도 사건 방곡령같은 대목이 나올것이다. 청나라와 프랑스는 전쟁중이었고 조선의 급진개화파는 그틈을 기회로 보고 정변을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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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13권의 주제는 청불전쟁과 갑신정변인데요.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교육과정에서 개화기에 주요사건으로 배우지만 흐름에 따라 배울 뿐 자세한 내막까지는 배우기 어렵죠. 갑신정변의 전후와 전개 과정까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청불전쟁은 정말 짤막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청군과 프랑스군이 치고 받고 하는 전개 과정을 자세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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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의 청불전쟁과 갑신정변편입니다. 초반부터 조선 개화의 진행정도를 보여주고 개화당의 행적을 통해 갑신정변이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갑신정변 발발 후의 내용들 그리고 삼일 천하 후 까지도 날짜와 시간 순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갑신정변에 영향을 주었던 청불전쟁도 이후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
| 굽시니스트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죠 본격 한중일 세계사가 벌써 13권이 나왔습니다 12권이 나온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기분이 참 좋네요 12권이 임오군란에 대해 상세히 다뤘다면 13권은 갑신정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놨습니다 3일천하라고도 불리는 갑신정변은 우리 민족 최초의 근대화 시도라고 항 수 있겠네요 그러면서도 중국 쪽에는 베트남을 두고 프랑스와 다툰 청불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