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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야사1,2 야사를 야사답게 꾸며, 건조하고 간결한 정사의 행간을 채워 넣ㅇ르 수 있다면, 우리 역사를 더욱 더 풍성하게 이해하는 첩경일 것이다. 야사를 통해 정사를 보완하는 것으로, 조선 역사 기술의 잣대와 먹줄로 삼으려고 한다. 야사는 그 자체로 매력이 있는것인데 야사를 야사답게 꾸민다니 작가의 표현이 참 솔찍하다고 생각이 든다. 정사를 버무려 쓰기는 했으나 정사인 것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역사이야기를 생각하며 읽어 보게 되었다. 그때는 왜 그리 듣고 싶지 않았읅까 지금은 새로운 묘미가 있는데 말이다. 민가에 떠도는 야사를 채록하고, 이를 주제별로 정리한 자료를 제시하였으며, 개인의 견해는 극도로 삼갔고, 오로지 춘추필법 정신으로 바른 역사를 남기려는 그의 의지가 너무나 선명하여, 동지섣달 투명하게 얼어붙은 계곡 속 얼음장 보는 듯하다. 조선왕조야사 1편은 태조부터 중종대왕 이야기가 전해진다. p131 세종은 문치(文治)에 정성을 다하였다. 2년 경자에 집현전을 두어 문사 10사람을 뽑아서 채웠더니 , 그 뒤에 더 뽑아서 30명이 되었다. 다시 20명으로 줄여 10사람에게 경연일을 맡기고, 나머지 10사람은 서연의 일을 보게 하여,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기되 고금의 일을 토론하여,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게 하니, 문장하는 선비가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어 낳은 새개끼가 모두 희더니, 몇 해 사이에 요직에 오른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고 서거정의 [필원잡기]는 전하고 있다, 집현전으 설치하여 문학하는 선비를 몇 십 년 동안 길렀더니 인재가 배출된 것이다. 재위 시절 양녕 주위에서 일어난 사건 연루자들을 혹독하게 치죄했던 태종이었건만, 양녕만은 끝까지 몸을 상하지 않게 보호했고, 대산들 모두 훼절한 어리만 없애버리면 만사 해결된다 주청하였건만, 차마 죽이지 못하다가 광주까지 동행토록 배려했던 것을 보면, 태종의 자식 사랑이 지나침이 있어 보인다. 조선왕조야사2권은 12대 인종대왕부터 25대 철종대왕의 이야기로 마무리 되어있다.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일성으로 날린 말이다. 하지만 이미 산전수전을 겪은데다 정치꾼으로서 동물적 감각을 타고난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여기까지 왔다고 처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영조가 자기 손으로 아들 사도를 죽인 몸이라, 세손을 위해서라고 장자였던 효장세자 아들로 입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곧 왕위 계승 걸림돌을 사전에 없애고자 한것이니, 핣아버지 속내를 읽고있던 정조는 저울추가 기울지 않는 선에서 아버지를 언급한 것이가. p362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 없습니다.” 라는, 이른바‘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대세웠다고 《영조실록》에서 밝혔으니, 이것이야말로 세손 권위를 땅에 처박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세손이 무사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홍국영을 비롯하여 김종수나 정민시 등이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들이 장왕하다. 읽는 재미가 있다.과거의 지혜를 발판삼아 보다 나은 현재와 미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본다. 우리모두 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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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란 관에서 편찬한 정사와 대립되는 민간에서 저술한 역사. 야승·패사·외사·사사라고도 불려진다고 한다.
야사는 주로 풍속·전설을 취급함으로써 정사의 결함을 보완해 주거나 오류를 시정해주기도 하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정사보 다도 더 시대상을 잘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조선조 오백년의 역사를 30년에 걸쳐 59권 42책에 기술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편집한 내용 이라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내용은 '옛 일을 따라 기록할 뿐, 스스로 창작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한다.
학교 다닐때 태정태세문단세....하며 조선왕조의 연대기를 외운 기억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이 연대기 순서대로 왕들을 소개해 준다.
1권에서는 1대 태조대왕부터 11대 중종대왕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임금이 죽고서 육신은 능으로 가지만, 혼백 가는 곳이 종묘인지라, 이 곳에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존호를 붙여 드리는데 생전의 업적 을 평가하여 태조니 세종이니 하는 식으로 부르던 것이 바로 '묘호' 라고 한다. 대체로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조'를 쓰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는 '종'을 붙인다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는 창업 혹은 중흥의 업을 남긴 왕에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종보다 격이 좀 더 높다 생각하는 관념들이 은연중에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은 승하 후 묘호도 없이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에 따라 그냥 공정왕으로 있다가 260년이 지난 후에야 묘호가 정해진 왕이 였다고 한다.
10대 연산군은 성종의 원자로 왕위에 있은 지 12년 만에 연산군으로 강봉 되어 1대부터 11대 왕 중에 묘호가 없는 유일한 왕으로 남게 되었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대립으로 일어난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갑자사화를 겪으며 왕의 폭정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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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수많은 훌륭한 출판사들 중에 주류성 출판사는 개인적으로 내가 선호하는 출판사이다. 역사 관련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출판하기 때문인데 이번엔 책 표지부터 으리으리한 조선왕조 야사를 주류성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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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야사 1, 2 박홍갑 著/주류성 . '야사'는 왠지 지어낸 것 같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됩니다. '정사'가 더 공적인 자료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승리한 자'의 맘대로 쓰여지는 것이라 신뢰도에 흠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 편찬의 기초자료가 되는 사초는 사관들의 엄정한 잣대로 기록 되어야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오백년을 이어가는 왕조에서 그 정착과정들이 결코 순탄치 만은 않았으니 세조 승하 후에 그 일대기를 담으려는 실록편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기에 이긍익도 ‘민수의 사옥’이란 제목으로 <점필재집> 내용을 차용하여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야사'에 대한 편견을 갖기보다는 '정사'와 '야사' 모두 다 참고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신뢰할만한 역사를 해석해내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사학자 박홍갑이 조선의 건국 때부터 숙종 때까지, 역대 임금 재위 별로 야사를 담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바탕으로 왕조의 야사를 정리하고, 연려실기술 이후의 100년은 正史와 여러 문헌을 버무려 구성한 오백년 조선왕조야사이다 저자 박홍갑은 1980년대 중반이래 줄곧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우리역사와 문화에 대한 뿌리와 줄기를 찾아 학술적 성과를 대중성 있는 글로 바꾸어 <사관위에 하늘이 있소이다.> <양반나라 조선나라><승정원일기><우리 성씨의 족보 이야기> 저술한 바 있다. ‘연려실기술’은 사건의 전개과정과 당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기사본말체라는 서술형태를 취하면서 당파적 편견을 배제하고 가급적 공정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당시의 역사상을 파악하려 했다는 점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기술하고자 한 사실에 대하여 저자의 견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인용서목을 첨가하고 있는 점은 역사의 객관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근대 역사학의 정신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사육신을 두고 방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등 여섯 사람을 지칭해 왔지만 추국과정을 살펴봐도 상삼문과 박팽년이 주모자였다는 정도만 드러나고 있을 뿐 실록 그 어디에도 여섯 신하를 콕 집어 심문했다거나, 육신이라 칭했던 사실이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이 사육신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렸으니 그것은 남효은이 지은 <육신전> 때문이다.”(P281) “ 일찍이 류성룡과 이발이 서로 틈이 있었는데 김성일 이성중, 이덕형등이 류성룡의 우익이 되었고 정여립 최영경, 정인홍, 등이 이발의 우익이 되어 서로 배척했지만 그래도 형적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5-6년후 지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을 위시한 서인을 대하는 입장에 따라 남북의 분열이 있게 되었다. 기축옥사에서 동인들을 얽어맨 정철의 처분을 놓고 강경한 입장을 보인 쪽이 북인 이었고 다소 온건론을 펼친 쪽이 남인이었다.” “이조판서 이기가 홍여순을 대사헌으로 삼으려하니 정랑 남이공이 합당치 않다고 거절했다. 이데 홍여순의 무리를 대북, 남이공의 무리를 소북이라 했다.” “ 경자(1600) 봄에 영의정 이원익이 대북을 이끌던 이산해를 견제하려다 체직되고 이산해가 영의정 이산해, 홍여순이 병조 판서가 되어 권력을 다투었는데 홍여순의 논의를 주장하는 자를 공북, 이이첨의 논의를 따른 자를 육북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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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를 버무려 쓴 조선왕조야사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