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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시지프스’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었다. 시지프스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영원의 형벌을 받고 있는 인간을 말한다. 이를 우리 인생사에 빗대어 본다면 행복보다는 불행의 시간을 더 많이 겪게 되는, 납득이 가는 것보다는 부조리한 상황을 더 많이 겪게 되는 삶이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 삶과 사회를 갉아먹는 질병의 뿌리를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기에 내 운명을 내 어깨에 지우고 ‘시지프스’처럼 힘들게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로 살아가도록 사회가 돕는 방식은 효율성이 최고의 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속에서 쉼 없이 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삶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더 이상 해결책이 없고 진정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 치료책이 바로 ‘내 삶은 주의 것’이라는 것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죄인이며 깨어진 형상으로 인해 수치감, 불안감, 허무감에 사로잡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엔 크리스토 사상) 들어옴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 가운데 들어와 살아가게 된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서 환경과 상황에 불안함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구원받은 자녀로서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나는 나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안전함과 평안함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된지 어느 덧 3년이다. 요즘은 확진자가 30만명에 달해 밖에 나가기도 두려운 실정이다. 우리네 환경과 상황은 두려움과 압박감을 준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내가 주님께 속했고 주님 안에서 안전한다라는 믿음이다. 저자는 이 팬데믹 시대 가운데, 그리고 갈수록 힘들어지는 시대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이야기하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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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추구하다가 지친 자들이 된 요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행복을 측정하는 행복지수 문항들을 보면, 행복은 단순히 감정적인 즐거움이 아니라다. 주관적인 만족감과 의미있는 삶이 포함되어있다. 만족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것이고, 의미 있는 삶은 나를 넘어 공동체를 위한 의미있는 삶을 의미힌다. 세상이 우리를 병들게 하며 그 병의 원인이 부분적으로 개인주의, 테크노크라시, 소비지상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는 싸움이 남아있다. 우리는 앞서 세셍을 산 위대한 지성들의 지혜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지혜를 21세기에 적용하고, 현재 많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자기 주인과 자기 소속에 관해 생각해보자. 요즘 나쁜 삶에서 좋은 삶, 헝클어진 삶에서 정돈된 삶, 우울한 삶에서 행복한 삶, 가난한 삶에서 부유한 삶, 엉망인 몸에서 건강한 몸으로 변화된 개인의 여정을 그린 논픽션 장르가 인기가 높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따르라, 당신의 삶 속에 남겨진 지혜롭고 의로운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르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알고 계신다.
내 운명을 내 어깨에 지우다 삶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는 것은 엄청난 중압감이 있다. 누가나 포옹이 필요하다. 이런 포옹이 그토록 강력하고도 편안한 이유는 존재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 '너는 안전하며 사랑을 받고 있다'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삶에 대해, 우리 사회의 소비방식 등의 여러 문제들이 지적한다. 책임을 수반하는 공동체,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정체성을 만들고,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를 선택하고, 소속될 책임이 있다. 이 모든 책임을 '자기 소속의 책임'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모든 책임을 같은 강도로 혹은 같은 시기에 느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책임을 강하게 느끼는 반면, 이웃은 자신의 정체성에만 몰두할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의 시기에 따라 책임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특정한 인류학이 유일한 현대 사회의 획일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기 소속의 책임을 느낀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속한 또 다른 존재가 있다. 그분 앞에서 살면 자기 소속의 결딜 수 없는 짐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다른 존재 말이다.
에덴동산에서 부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반역은 자율의 반역이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한 법을 받았지만 스스로 법이 되기를 선택했다. 자끄 엘륄이 지적하듯이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성을 건설했다. 가인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 대신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성벽의 힘에 의지하기로 선택했다. 엘륄은 이런 자립과 자율을 인간 도시의 정신의 근간으로 본다. 도시 건설의 밑바탕에는 보호와 자족을 통한 번영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려는 마음이 깔려있다. '무엇보다도 가인의 성은 자신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가인에게 그곳은 자신의 고국, 방랑 끝에 정착한 장소였다. 또 가인의 성은 그의 안전에 대한 물질적인 증거였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졌다' 가인의 성은 그가 자신의 것이고 자신에게 속했다는 선포였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갈망은 '샬롬' 과 '평안' 나의 안전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나는 누구에게 속한 자인가?
창세기 19장 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무덤에서의 부활, 성령이 우리 몸 안에서 거하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언약 관계로 들어갔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수만가지방법으로 죄를 짓고 해를 끼친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삶! 흥분과 두려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그분께 속하면 의를 추구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우리는 의로운 행동으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에서 그 아들의 아름다움과 의를 보신다. 모든 것의 심판관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신다. 우리는 절차주의나 효율성을 따지는 기계적인 신이 아닌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서 산다. 진보와 자기 개선의 가혹하고 비인간적이고 비난적이고 파괴적인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흩어진다. 우리의 어깨에 온 세상의 무게를 지우는 보편적인 자애의 요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섭리 안에서 해결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비난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설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긍정, 기독교 인류학을 바탕으로 한 긍정은 세속적인 긍정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현대 정체성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라'는 조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할 의무가 없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다. 아무리 완벽한 이미지, 시장 가치가 있는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노력해봐야 그것은 우리의 진짜 정체성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못한다. 남들의 의견이 우리를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의견만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은 우리를 정의하려는 그 어떤 인간의 시도에도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를 완벽히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그렇다고 우리가 참된 '참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창조할 짐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모든 순간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설 때 우리는 참된 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자아의 임무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성공회 신학자 로완 윌리엄스는 Being Disciples에서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의 시각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우리가 괜찮다는 사실을 알려면 우리를 아는 누군가의 '인정'과 '긍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도 사랑해 줄 사람을 원한다. 우리가 만들어 낸 이미지, 남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나 잠재력을 지닌 인간에 관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본 모습을 그대로 받아줄 사람을 원한다. 이것이 내가 이름과 얼굴의 중요성을 강요한 이유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흔한 축복 중 하나에 우리의 얼굴을 보시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수기 6장 24-26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들을 향한 축복을 주셨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덜 효율적인 삶의 방식, 그 찬란한 아름다움
일을 생각해보자. 현대 삶의 힘든 점 가운데 하나는 일이 기껏해야 무의미하고 심지어 해롭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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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실제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게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기쁨이 존재에 관한 더 깊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내 일이 의미있게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무의미한 것보다 내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을 원한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내가 삶에서 경험하는 의미는 하나님, 창조, 이웃에 관한 현실을 반영한 객관적인 의미이다. 내 딸이 달라붙을 때 느끼는 안전함과 하나님이 그 아이를 돌보신다는 초월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잇다. 심지어 내가 휴대폰을 사용하느라 너무 바빠서 딸이 소파에서 내 팔을 끌어당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땡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해도, 그 순간은 여전히 현실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지 못할 때도 그런 순간에는 엄연한 의미가 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의미이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의 문화와 개인적인 삶을 형성하는 가치들의 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름다움, 정의, 선함 등에 관한 우리의 개인적인 취향을 하나님의 완벽한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기준은 용감하게 행동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분명히 알아서 즐기며, 이생의 좋은 선물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역사의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께 속하면 효율성을 인간 노력의 최대 가치로 삼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자기 부인의 멍에 아래의 삶, 참된 자유 자기 소속의 책임을 벗고 겨우 자기 부인의 멍에 아래로 들어간다면 무엇을 얻은 것인가?
자유를 얻을 것이다. 멍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면 자신의 욕구를 부인하는 일은 눈앞에 있는 선한 것을 즐길 자유를 준다.
사랑은 눈 앞의 대상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행동은 집중하는 것이다. 미래를 행해 앞서 달려가지 않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사랑은 가만히 서서 이 순간의 선함을 기뻐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더 많은 것을 손에 넣을 필요가 없다. 선택사항등을 저울질하며 좋은 것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배우자든 자녀든 노래든 친구와의 즐거운 담소든 나뭇잎을 춤추게 만드는 바람이든, 눈앞에 있는 선물에 집중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효율적이지 않다. 효율성은 항상 최상의 선택사항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효율성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 시간을 더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이 내게 최상의 신랑감일까? 내 아이가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내게 최상의 커리어일까? 아직 상사에게 이메일도 이 나무를 감상하는 것이 내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일까?
하지만 바로 이것이 요지이다. 기법에 지배를 당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빼앗기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허덕인다. 항상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에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사랑, 감사, 아름다움, 선함 같은 효율성보다 더 높은 가치들이 있다. 부적절한 선물을 상상하고 바라기보다는 가진 선물을 즐기는 것이 훨씬 낫다.
기법에 대한 기독교의 대안은 '낭비'이다. 낭비는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가만히 있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효율성보다 사랑, 선함, 아름다움에 따라 행동할 때 낭비하며 살게 된다.
시편 23편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흘러남치는 잔은 낭비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비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전혀 덜 비인간적이지 않다. 낭비는 단지 하나님의 존재, 선함, 섭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 속에서 자시 소속의 책임을 벗고 눈 앞에 있는 선물들을 기쁨으로 집중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이것은 현대의 세속적 관점에서만 낭비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는 행동할 때 '승리'나 '이익', '진보' 따위에 주된 초점을 맞추지 말아야 한다.
이런 낭비의 한 보델을 요제프 피퍼의 짤지만 탁월한 저작 Leisure(여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앞서 피퍼가 비판한 '전적 일'의 문화에 관해 살펴보았다. 피러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거부한 채 불안에 시달리는 '아세디아' acedia, (권태로 인한 공허감을 일컫는 그리스어)란 악덕과 연결시킨다. 현대 세상은 기법과 진보를 통해 '아세디아'를 정당화시키곤 한다. 피러는 '아세디아'와 기법에 중독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를 여가로 부른다. 현대인들은 휴가와 오락을 즐기는 것은 정말 잘하지만 피퍼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여가에 관해서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다. 여가는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가는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따르고 우주의 의미에 일치한 삶을 살때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여가(참된 쉼)을 가질 수 있다. 현대인들이 진정한 여가를 즐기려면 모든 문명 이기의 사용을 의식적으로 중단해야 한다. 엘륄에 따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이는 낭비의 반대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낭비와 허비와 달리, 기독교의 낭비는 효율성을 다른 가치, 더 높은 가치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행위이다. 우리는 여가를 뭐든 육체적으로 가장 편안하게 해 주는 활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여가는 가장 쉽거나 단순하거나 싼 것을 따지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기는 행위이다. 현관 앞에 앉아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의 단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가는 단순히 밖에 있는 것이 좋고 자녀를 사랑하고 그것이 좋은 책이기 때문에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동이다. 원예활동을 하면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환경이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여가로서의 원예활동은 손에 묻는 흙의 느낌, 신선한 토마토의 맛, 깔끔하게 정리된 화원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행위이다. 사업에서 낭비의 리더쉽은 더 좋은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유급 육아 휴직을 주는 것이다. ㄴㅇ비는 매출이 크게 떨어지더라도 주일에는 가게 문을 닫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측정가능한 유익'이 있을 수 있지만 낭비는 효율성, 생산성, 수익보다는 사랑, 선함, 아름다움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 가능한 유익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편안하게 쉬는 경향이 있지만 피퍼는 이렇게 경고한다. '건강을 위해 여가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추구하면 여가는 절대 불가능하다' 낭비는 SNS를 통해 자신의 발전을 남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행동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동의 동기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때가 너무도 많다. 하지만 분명 현대사회의 시각에서 이런 행동은 낭비이다. 우리는 분명하고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유익이 있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탕자 비유의 형이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을 때의 가롯유다처럼 그것을 낭비로 여기며 눈살을 찌푸린다. 내가 나의 것이라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야한다. 자신을 잘 최적화하고 잘 경쟁하고 잘 개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현재 상태 그대로 기뻐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나의 선택은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이제 우리에겐 한계와 의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절대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불확실과 혼란과 분열로 치달아도 우리는 절대 버림을 받지 않는다. 역사 속 이 순간의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디에 속할지 선택할 수 있는 막대한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우리가 마음대로 가족, 장소, 지역사회, 종교 등에 속하거나 그것들에게서 떠날 수 있도록 필요한 첨단 기술과 법을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소속은 '추후 통보가 있기 전까지'의 소속이어야 옳다. 하지만 기독교 윤리학은 자신의 공동체와 소속을 정의할 현대 자유주의의 권리를 부인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가장 중요한 소속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ㅇ디ㅏ. 예를 들어 교회, 가족, 태어난 장소가 그렇다. 교회에 속하면 상처를 받을 일이 생긴다. 나와 달라 보이는 사람들, 나와 다른 관심과 꿈,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철저한 능력주의에서는 우리의 연민이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도와야 한다. 장로들의 적절한 리더쉽에 복종해야 한다. 우리가 의로운 이유는 그리스도가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고 섬겨 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 인류학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의무들을 지우지만, 그 의무들은 자기 소속의 책임과 전혀 다르다. 이전 장에서 보았듯이, 첫째, 자기 소속의 책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다. 둘째 자기 소속의 책임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셋째, 자기 소속의 책임은 우리의 삶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사람들과 장소에 올바로 속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의무들은 우리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가족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들을 섬겨야지만 내가 중요해지거나 가족 안에서 내 자리가 결정된다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자유롭게 그들을 섬길 수 있다. 나는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했기 '때문에' 섬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류의 연약함을 고려하셨다. 그래서 삶을 참을 만하게 해 줄 수많은 선물을 주셨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런 선물을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위안들이다. 예를 들어, 전도서는 우리가 수고의 열매인 떡과 포도주, 아내와의 성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9장 7-9절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실리적인 측면을 따지지 않고 즐길 '자격'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그냥 감사함으로 즐기면 그것은 일종의 예배이다. 이런 즐거움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전도서 기자는 삶의 허무함을 다룰 방법으로 즐거움을 거리낌 없이 추천한다. 우리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은혜 덕분이다.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며 우리의 고통은 잠시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즐거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때 향하는 목적지가 사랑이라는 시실을 일깨워 준다. 이런 선물을 즐길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수 있다. 우리의 의무는 생산성이나 측정 가능한 결과가 아니라 '충성'이다. 우리의 행동이 물줄기를 바꾸고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믿을 때는 용감하게 행동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바꾸리라는 기대없이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런 용기는 이번 장, 이 책, 크리스천 삶 전체의 중심에 있는 패러독스다. 행동할 때 우리는 자족과 자율을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행동할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의무는 '가만히 있어'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다. '행동'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은 일종의 포기이다. 우리는 삶이 나아질 가능성을 포기하고서 의미 없는 쾌락으로 세상 시름을 잊으려고 한다. 포기해서 가만히 있는 것은 사실상 '아세디아'이다. 아세디아는 중세 수사들이 '정오의 악마'라고 부른 절망적인 게으름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인정하고 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의 무의미함 속에 그냥 쉴 수 있다. 반면, 가만히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거룩한 고요는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 안에서 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이나 자신을 구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일이다. 거룩한 고요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요한 행동이다. 여기에 패러독스가 있다. 거룩한 고요는 하나님의 임재와 공급하심을 인정하는 일이고, 거룩한 해동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인정하는 일앋. 하지만, 그것은 고요한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자족을 낳을 것이라는 거짓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고요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쉬는 것이다. 행동은 그 은혜의 확장 그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겸손히 행동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서고도 사랑으로 그분께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상 심지어 자신의 의도 우리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쉬면 사회가 우리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분명히 보고 우리의 죄에 대해 변명을 하지도 개인적인 책임을 부인하지도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쉬면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쉬면 오직 하나님만 구할 수 있는 비인간적인 세상에 대처하면서도 자신과 이웃들을 은혜로 대할 수 있다.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증명된 전략을 찾으려는 우리의 욕구는 기법이 우리의 상상력을 장악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낭비'의 행동이다. 즉,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어도 우리의 도시를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이웃들이 평안을 챙기는 것이다. 반대로, 세상의 구속에 대해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면 그것이 정의를 위해 힘쓰지 않을 구실이 될까 봐 걱정이 될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 정의를 이룰 수 있는데 우리가 굳이 애써 봐야 무엇하는가? '우리의 일은 성공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엘륄 TS엘리엇 '우리에게는 오직 시도만 있네, 나머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네' 우리는 충성이나 사랑의 결과를 계산할 필요가 없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아도 정의에 계속해서 헌신할지 여부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이생에서 열매를 연연하지 말라. 하나님은 열매를 보시지 않고 우리으 순종을 바라신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삶을 책임진다면 오직 측정할 수 있는 즉각적인 성공만이 우리에게 일시적이나마 만족을 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정치적 비전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운동이 승리하기 위해 점점 더 미친듯이 질주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실패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점점 더 참아주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 인류학은 커리어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물론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파악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자신과 맞고 시장성이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 가족, 이웃들에게 속했기 때문에 공동체의 필요를 고려해야한다. 우리는 그런 필요를 채워 줄 의무가 있다. 정직하고 솜씨가 뛰어난 배관공, 수리공, 버스 운전기사도 교사나 은행가, 목사 만큼이나 이웃들의 유익을 섬길 수 있다.
우상이나 자신을 의존하는 곳에서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선포함으로써 도시의 정신에 저항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고 스스로 얻을 것에 대해 자격이 있다는 관념인 능력주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우리의 운명이 통제를 초월한다는 개념, 우리의 성공과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나 운명의 변뎍 혹은 운수에서 비롯한다는 개념이다.' 센델은 성공과 실패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지만, 우리는 그 중 오직 하나,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 할 수 있다. '운명의 변덕'이나 '운수'에 감사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인류학이 어떻게 '능력주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제시하는지 볼 수 있다. 이생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소유하는 좋은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이다. 이런 선물에 대한 우리의 감사는 공개적이고 뚜렷해야 한다. 즉 세상의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보일 정도의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얻은 성공을 나누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로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모든 선물은 하나님이 남들에게도 선물로 전해 주라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웃들이 자격이 있어서, 혹은 자격 없는 우리에게 연민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연민을 베푼다. 도시의 능력주의와 자율정신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이렇게 말과 행동에서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의 자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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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 앨런 노블 / 정성묵 역 / 두란노 What is your only comfort in life and death?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only comfort'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 위안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 평안을 상실해가고 있는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놀랍게도 'I am now my own.' '나는 나의 소유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게 어떻게 위로가, 그것도 유일한 위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세상은 '내 삶의 주인은 나야.',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고 있는데, 그렇게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도 뭐가 될까 말까한 것 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니... 그 다음 문장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는 핵심이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사나 죽으나 '나의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나의 존재와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로라는 것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의 답이며, 앨런 노블의 책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의 주제이다. 저자는 part1 에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병든 세상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part2 에서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치료제이며, 행복의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수많은 세속적인 방법들에 대항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자, 단 하나뿐인 유효한 방법이 바로 자신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올바로 아는 것이다. 에덴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 사도들과 교부들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외치고 살아냈던 그 방법이 다시 한 번 선포되고 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헛 된 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라.
『효율성을 최우선시하는 가치는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친 직원들에게 왜 회복 시간을 주어야 하는가? 그들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다.』p96 『'누구에게' 속했는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내가 나에게 속했다면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 그 자유에 따른 모든 영광과 공포도 나의 것이다.』p197 『우리는 우리를 위해 지어지지 않은 서식지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엘륄에 따르면 이 비인간적인 서식지에서 단순히 생존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의무를 지닌다. 그것은 거꾸로 진보하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사는 일이다.』p298 #나는나의것이아니다 #앨런노블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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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찬양이 있다. '내 삶은 주의 것 내 삶은 주의 것 온전한 신뢰를 주께 드리네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걷네 주 영광 바라보며 주만 따르네'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고, 내 삶 또한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인 주님의 것이기에 이 책을 펼치며 이 찬양과 함께 책장을 넘겼다. 현대인들 중에서 행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오늘 하루도 나와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일하며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관도 '행복'일 정도로 많은 이들이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이 책은 복음은 철저히 다른 삶을 제안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18쪽을 보면,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의 첫번째 문답이 나온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오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라고 문답에 적혀있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찾고, 그분 앞에서 투명하게 사는 것이다. (p.19) 현대사회가 안겨주는 인생의 기대감은 실제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실망감을 전한다. 누군가의 열정은 반대로 상대방에게 좌절을 전한다. 이것을 단순히 평가하기를 '경쟁'이라 칭한다. 건강한 자아 실현과 기대감은 독으로 전환돼서 극심한 경쟁에 시달린다. 이런 경쟁 사회에서 인류는 타인에게 자신의 고민과 상처를 나누지 못한다. 우리의 병듦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내가 아닌 나의 삶의 주인을 파악하는 것에서 그 답이 온다. 오늘날 사회는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바꿀수있다고 말하는 세상의 소리에 우리는 효율성과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최고가 아님을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사회의 방식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서 온다. 현대사회의 변천사에서 거류하는 인간의 존재는 실제적으로 절망과 좌절이라는 죽음의 선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세운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p.171). 이 죽음의 선, 인류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시키는 계산적 사고에 의거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본 책에서 지적하는 현대사회의 갈등양상에서 비롯된 인간의 처절한 연약한 인간성은 안타깝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사람에게도 기대지 못하며,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본 서는 천명한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며, 죽음이 도사리지 않으며, 경쟁이 상실되며, 절망이 소멸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은혜의 자리며, 하나님의 것, 예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시키며, 건강한 삶을 영위하도록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자신에게 속했다면 자신이 한계를 정한다. 이는 자기 의지 외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다는 뜻이다. 반대로 하나님께 속했따면 그분의 한계를 알고 지키는 것이 창조된 순리대로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설계하신 인간의 모습대로 살 수 있다. (p.198) 나도 이 책을 읽고 진심을 다해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삶을 정당화하기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얻은 큰 깨달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삶은 옳고 좋은 것이다. (p.217) 이 메시지를 품고 오늘을 살아가고자 한다. 나의 삶을 붙들어주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나는 오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추천 하나님을 믿지만, 크리스천이지만 오늘도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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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이 책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인간의 '독립 선언'이 어떻게 인간 삶을 병들게 했는지를 폭로합니다. '주코시스'(zoochosis)라는 말을 아십니까? 동물원(zoo)과 정신병(psychosis)의 합성어인 주코시스는, "동물원의 사자들이 우리 안을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증상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합니다(27).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의 저자 '앨런 노블'은, 동물원에 갇힌 사자처럼 현대인들이 주코시스를 앓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동물원을 아무리 사자의 서식지와 비슷하게 조성한다 해도 동물원은 동물원일 뿐이며, 동물원에 갇힌 이 불쌍한 짐승은 병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쌍한 동물들은 동물원에 갇혀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자를 미치게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불쌍한 동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낍니다. "대부분의 동물원 방문객들은 불안감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동물을 보며 마음은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29). 그리고 저자는 바로 이것이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병이며, 그 병을 대하는 태도라고 지적합니다.
이 책에 의하면, 지금 현대 세상은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우울증, 불안증, 목적 없음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 안의 사자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환경, 즉 자신과 맞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방식,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식, 노동하는 방식, 쉬는 방식 모두 질병의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이 살아가야 할 마땅한 방식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동물원의 사자를 바라보는 마음처럼, 마음은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질병을 바로잡는 일에는 손을 놓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속수무책이고, 무기력한 것은, 문제의 원인(뿌리)이 어디에 있는지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큰 거짓말이다.
현대 세상이 중병을 앓고 있는 이유는, "내가 나의 것이며 나에게 속했다는 가정에 따라 사회를 건설했기 때문"(41)이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자기 주인'이 될 때, 즉 내가 나의 것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비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하는지를 날카롭게 추척해냅니다. 또한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겁고 버거운 짐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것은 나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다.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 내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 의미 있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 내 가치를 선택하는 것, 내가 어디에 속할 지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15).
저자는,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 정체성 구축과 표현을 통해 삶을 정당화하려는 절박한 욕구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사회는 관심과 의미를 얻으려는 개인들 사이의 지독한 경쟁의 장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자신의 심판관이요 구속자가 되어야 하는 인간은, 끝없는 자기 개선의 굴레에서 고갈과 공허함을 다루기 위해 자기 치료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고, 어떤 이들은 폭식을 일삼고, 어떤 이들은 밤새도록 드라마를 보고, 어떤 이들은 게임이나 일중독에 빠지고, 어떤 일들은 밤새도록 인스타그램을 보고, 어떤 이들은 건강이나 미모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이렇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에 관해 걱정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80).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 안전한가"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는 비인간적인 사회를 치료하는 대안은 하나 뿐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찾고, 그분 앞에서 투명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하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그분의 몸인 교회, 그리고 가족과 이웃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속함에서 자연스럽게 비롯하는 의무, 미덕, 사랑의 제약을 기쁘게 받아들 수 있습니다. 속함은 한계를 요구하는데,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알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한계가 우리를 지켜주는 질서요,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자아를 실현하거나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은 그릇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거나 스스로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대개 그것은 이런 뜻이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특별하고 중요합니다"(215).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인간 삶의 전방위적 통찰을 통해, 인간에게 독립선언보다 더 위대한 선언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삶과 사회를 갉아먹는 질병의 뿌리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거짓말에 있다면, 이 사회를 치유할 유일한 치료제는 "내 삶은 주의 것"이라는 인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기독교적 신앙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에 저항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이 책을 정독한다면) 나는 나의 것이라는 가정에 따라 건설된 인간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계속해서 불안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환경을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30)는 한마디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병들어 있다는 것,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근본적인 대안을 찾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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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언제나 그분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사회가 방향을 잃고 우리가 수시로 변하는 세상에서 혼란을 느껴도 우주의 하나님은 우리를 아신다는 뜻이다(263)."
처음에 본서를 접하고 프롤로그를 읽기까지 본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본문을 읽어 나갈수록 현재 우리에게 기독교적인 사고와 정체성 그리고 기독교적인 정서를 각성하는 데 이 책만큼 좋은 글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현대사회의 교회 내에 성도들의 삶에 침범하여 기독교적 가치관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는 크고 작은 이슈들을 다르고 있다. 본서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우리의 삶속에서 자연적으로 접하게 되어 분별할 틈조차 주지 못하고 삶이 되어 버리고 사고되어 버리고 습관이 되어버린 것들에 관하여 저자는 가감 없는 비판과 분별을 언급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난 영적인 문둥병자였다는 표현을 거듭 반복했다. 10~20년전과 달리를 새로운 문화를 학습하고 습관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신앙의 거룩성과 성경적 가치관을 지키도록 교회에서는 소리를 내었고 우리의 몸과 시각을 성경의 기준에 의존하였다. 하지만 본서에서 다루는 현대의 문화적 요소들은 우리의 가치관을 흐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과 이웃을 살피는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나중심적, 개인적인 삶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하고 자유로운지를 심어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순간에 철저하게 배척하지 못하고 흡수되어 끌려왔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전인 현대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한 감사를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존의 이러한 주제들은 성경의 본문을 해석이 주를 이루고 구체적인 적용을 제시하기보다 문제 앞에서의 태도만을 강조하고 끝났다면 본서는 현대에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환경 하루에도 만날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들 우리의 삶에 침투해온 것 이상으로 우리가 빠져들어 있던 하나님 중심적이지 못하게 방해했던 것 비기독교적인 삶을 탈피하도록 도운다. 본서를 읽는 동안 생각했다. 모두가 여러 가지 문제로 극심한 불안 속에 시달리고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함을 누리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본서는 우리의 불안과 우리의 정신적 정서적 외곡된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누리지 못하게 하는 참된 자유함과 하나님 안에서의 온전하고 완전함 삶을 깨닫도록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사고와 순결한 마음가짐 거룩한 태도를 갖도록 해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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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행복을 추구하다 지친 시시포스의 현대인들'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이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현대 서구의 삶의 중요한 특징은 사회의 비인간성을 통렬히 느끼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인간성에는 낙태, 총기 난사, 만연한 성폭력 은폐, 의미 없는 직업, 망가진 공동체, 불안감을 겨우 30분간 마비시키는 효과만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점을 알고 있다.' '생존'의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과 세상은 중병(영적인 병과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데 그 질병의 뿌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 곧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것은 나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모든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며, 다른 누구도 나를 정의하거나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나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 말 그대로 나는 나에게 속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찾고, 그분 앞에서 투명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책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내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이 정체성의 발견의 시작이 현대 사회에서 영적인, 정신적인 중병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치료와 회복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해 있는 이 관념이 성, 가족, 일, 삶의 방식, 소비에 병든 관념을 만들어 내고, 이것이 자기의 삶을 정당화하는 방법으로 삶의 이유를 찾아가고 결국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해 고민합니다. 소속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효율성이라는 가치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며, 소속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욕구를 충족시킵니다. 그러나 사회는 이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것을 해결할 수 없고,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는 '내 삶은 주의 것이고, 나는 하나님께 속했다'라는 고백과 믿음임을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비난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설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SNS, 미디어, 성적인 문화 속에서 나의 정체성과 가치를 잃어버리고 바쁜 일상에 쫓기며 나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지 그리고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 책을 코로나19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되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살아갈때에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알기를 원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복음으로 살게 한 문장입니다. 332p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중심에는 '삶'이 있다.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삶이 본질적으로 좋고 가치 있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삶은 우리가 잘 관리해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는 우리가 매일 이불을 박차고 나와 이 세상 속에서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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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자기 자신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혼밥 문화, 혼술, 혼행, 혼깸, 1인 가족 등 다양한 문화 현상들이 벌어지지만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다. 프로그램 중에서도 나 혼자 산다라는 것도 있는 것처럼 이런 현상들이 거침없이 쓰나미처럼 몰려들고 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간다. 삶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서서 모든 것을 해 나가면 편하고, 자기 만족과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과연 그럴까? 라는 의문이 든다. 나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원하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앨런 노블이 쓴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는 이런 문화적인 현상과 흐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는 현대 사회가 말하는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고,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는 말에 대해서 진단과 함께 그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불가능한 것인지를 보여주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내 삶은 주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 만이 이 사회를 치유하는 유일한 길임을 제시하고 있다. 나의 삶의 주인이 나이고, 나의 것이라고 하며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지만 언제나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묻게 된다. 자신이 결정해서 모든 곳에 속한 동시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씁쓸함을 보게 된다. “내가 나의 것이라면 누구에게도 순종하거나 복종할 의무가 없다 이는 무질서 탄생의 완벽한 조건이다” “사회는 자기 소속의 책임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 기법들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스트레스, 불안증, 고갈, 무능감 만을 주었다.” 이것이 나의 삶은 나의 것이라는 현실이다. 그것을 치료하는 유일한 치료제는 내 삶의 주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를 읽으면서 내 삶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삶을 안정감 있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지 모른다. 내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통해 삶을 바라볼 때 삶에 대한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책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 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삶을 바꾸어줄 것이다. 젊은 청년들이나 자기 정체성을 세워야 될 분들에게 분명한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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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 책이 아마도 주는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 문장들을 보게 된다.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것은 나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다.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 내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 의미 있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 내 가치를 선택하는 것, 내가 어디에 속할지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 이는 곧 모든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다. 다른 누구도 나를 정의하거나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나를 판단ㄷ할 권리가 없다. 말 그대로 나는 나에게 속했다."
이 책이 반발하고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 위해 이 책이 쓰여지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를 주인으로 삼으려고 살아간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 나의 꿈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기준이 내가 되고, 심지어는 오직 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권력, 나의 돈, 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간다. 왜 그런가? 내가 삶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정말 하기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자기포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포기'(자기부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무리가 될 수는 있지만 제자는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 이 때 당시 십자가는 최고의 사형도구였으며,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죽는 사형틀이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기도 힘든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오늘 날 기독교가 직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자기부인하지 않고, 가정이 자기부인하지 않고, 심지어는 신앙인조차도 자기부인하지 않는다. 그저 무리는 되려하나 제자는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이 책은 이렇게 메시지를 던진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1. 현대사회의 가장 큰 거짓말은 "내가 나의 주인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번째 문답은 다음과 같다. 문: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오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아멘.....아멘입니다. '정체성'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바울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바울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기준대로 살아가고 싶지만 그 때마다 바울의 고백을 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2.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후에는 최고의 선택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 속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데까지 얼마나 어려운일인지를 안다. 아직도 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아직도 나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들이, 나를 위해 하고 싶은 선택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그분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바울이 고백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 나를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리스도께 속하고 연합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렇게 할 때 축복을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럴까? 그 분과 연합하기 때문이다. 연합하기 때문에 하나가 되고, 그 분이 우리의 짐, 염려, 근심 함께 져주신다. 고로 연합은 그분이 나의 삶에 들어오셔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심을 의미한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삶의 왕좌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로 느껴졌다. 이제 내 삶은 없는것인가? 나는 이제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제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기에...나는 편하게 살 수 없겠구나....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분과 내가 연합되어지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참 자유'를 허락해주셨다. 그리스도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음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게 하셨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야기한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의무가 아니다. 은혜 안에서 보면 이것은 실로 아름다운 의무이다." 결국 현대 사회는 나를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나에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되지 않고 그분을 향해 살아갈 때 그것이 나의 삶에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내 삶을 생각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기 원한다면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요.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이 가장 인생의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서에 보면 모든 것을 다 누려왔던 솔로몬 왕이 마지막 남기는 유언과 같이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무슨말일까? 나를 위한 삶이 결국 나의 삶을 헛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로,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정말 나를 위해 살아가기를 원하고, 내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그 분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이 그분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누리는 삶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3. 내가 앞서 나가는 인생은 고달픈 인생이다. 이 책을 읽으며서 나의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인생이 고달픈 것을 느낀다. 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것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으로서 져야 할 무게들이 존재한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조금은 천천히 가고 싶을 때도 만약 내가 이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자라는 인식을 깊이 가질때에는 쉴수가 없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가장들이 많이 피곤하다. 가장뿐 아니라 여성분들도 굉장히 피곤하다. 육아에 일에...쉴틈이 없다. 앞에서 끌고 나가야 하는 가정의 책임자, 또한 리더도 굉장히 고달프다. 앞에서 끌고 나가는 사람은 뒤에 있는 사람보다는 몇 배는 더 힘을 사용해야 한다. 만약, 내 인생의 책임자는 '나'라는 인식을 가지고 내 인생을 이끌어나간다면 매일 매일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은혜로 창조해주셨고, 인생을 이끌어 나가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숨을 쉬고, 우리의 몸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미 완벽한 창조를 이루어놓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숨을 쉬어야지, 내가 눈을 떠야지, 내가 발을 움직여야지, 손을 움직여야지... 이 모든 것들을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간단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셨다....사람이 피곤하면 잠들게 하시고 사람이 저녁이면 피곤하게 만드셔서....하나님은 나의 인생은 내가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게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내에서는 최선을 다하지만,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잡으시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고로 우리의 인생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결정적인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일을 하다보면 최종결정권자의 명령과 승인이 있어야만이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런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최종결정권자이시기에 오히려 그 분 앞에 매일 매일 우리가 나아갈 수 있음이 은혜임을 인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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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노블 #나는나의것이아니다 #두피플 #you_are_not_your_own
이 책은 신앙의 모호한 기준들을 명확하게 해준다.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시류를 거부한다. 그래서 저자는 날카로운 분석과 대단히 냉철한 기준 가운데 글을 전개해가고 있다. 그 기준이 오직 복음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주제에 몰두한다. 그것은 “나는 나의 것이다”라는 흐름이다.
“나는 나의 것이다”라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질병이다. 그것도 고약한 질병이다. 이 질병은 도저히 해결할 수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짐을 자신에게 지우고, 그 짐에 눌려 헐떡이며 가게 한다. 그것을 저자는 너무도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것은 나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다”(p. 15)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이것이다. 나라는 인간을 존재증명 하는 것이 바로 나다. 모든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말한다. 이것은 근거 없는 환상일 뿐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는 이 말은 현대사회의 가장 큰 거짓말이다. 이것은 현대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곡해하는가를 보여주는 표본이다. 이 말은 저자가 인용한 단테의 신곡의 유명한 도입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생길의 중간에 나는 어두운 숲에서 옳은 길을 잃었다.”(p. 49)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면 옳고 그름의 판단과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전적으로 나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기준이라고 말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명확하게 나일 수밖에는 없다. 저자는 현대 포스트모던 주의의 홍수 속에서 넘쳐나는 ‘나는 나의 것이다’라는 다양한 사례들을 말하고 있다. sns를 통해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정체성을 폭로한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자신을 누군가에게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 사실은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과 비교의식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심각한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저마다 나름의 방식대로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기준이 될수록 그 결과는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압박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르지 못한 인간의 이해가 올바른 이해로 바뀌게 되면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가정에 따른 인류학과 그 인류학이 이생과 내세에 관해 주는 소망을 논하기 전에, 현대 사회가 자기 소속의 책임을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주겠다는 약속을 얼마나 제데로 지키지 못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p. 109)
또한, 저자는 현대 포르노의 논리, 정신, 경제는 사회가 자시 소속의 책임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도구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현대 포르노는 개인 사용자를 우주의 중심에 놓음으로 이 아름답고 독특한 인간이 나에게 자신을 주고, 자신을 친밀하게 드러내므로 나는 중요한 사람이라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르노의 참상은 나를 우주의 중심에 두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들을 카뮈의 유명한 에세이 <시시포스의 신화>를 통해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500년 된 독일 교리문답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현대인들의 ‘나는 나의 것이다’라는 주장을 완벽하게 뒤엎는다. 일반 은혜에 따라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분과의 여한, 즉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사람과 위안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내가 나의 것이라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야 한다. 자신을 잘 최적화하고 잘 경쟁하고 잘 개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현재 상태 그대로 기뻐할 수 있다.”(p. 253)
사실을 쉽지 않은 내용의 글이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 속에서의 사고로 점철된 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분석과 지적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나의 것이다”라는 세상의 논리 속에 빠져 있었을 때가 많았다. 처음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저자의 글에 조금은 지루했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읽을수록 고민되는 내용이었지만 즐거운 독서였다. 저자의 날카로운 글들이 가슴을 찌르기도 했고, 다양한 방면의 이슈들을 아우르는 저자의 폭넓은 해박함도 좋았다. 책의 제목처럼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이 단순명료한 진리가 오늘날 점점 희박해지고 희석되고 있음에도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남겨진 이들이 있다는 것에 작은 위로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러한 변증서들을 자주 접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다소 무겁고 읽기 버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단순한 진리이지만, 이 책 속에 담긴 기독교의 깊은 진리가 정리될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