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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프는 12살의 나이에 상단의 거상 아지즈 아저씨를 따라 집을 나서 그의 가게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엔 이미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부모의 빚을 대신해 볼모로 와있던 칼릴과 지내며 그 집 정원에 애정을 쏟는다. 특별한 것 없던 그의 일상은 내륙으로 떠나는 행상길에 동참하면서 변화가 일어나지만, 본격적인 내륙 진입 전 하미드의 상인에게 맡겨진다. 일 년 후 16살의 유수프는 다시 상단에 합류해 험난한 행상길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지즈의 집으로 돌아와 칼릴과 낙원 같던 그 집의 정원을 마주하게 된다. 정원을 가꾸던 유수프를 눈여겨 보던 아지즈의 아내 줄레카의 부름 덕분에 칼릴의 동생이자 아지즈의 후처인 아미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아미나에게 이곳에서 도망치자고 말하지만 아미나는 그런 그를 몽상가라고 말한다. 유수프는 줄레카로 인해 궁지에 몰리지만 아지즈는 그를 의심하지 않고 용서한다. 하지만 평화롭던 마을에 독일군이 몰려오며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결말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낯선 동아프리카의 낯선 언어와 문화에 주석까지 참고해야 하니 완벽한 몰입이 힘들었다. 아프리카를 단순한 이분법으로 생각했던 나의 무지로 인해 이런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머릿속에 그려보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가 살았던 잔지바르 때문에 소설의 시작 배경인 가공의 소도시 카와가 잔지바르에 있다고 착각하며 읽었으니 나는 소설과 다른 공간에서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무지와 오해를 중도에 알아채고 다시 정신 차리고 읽어보자 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유럽 강국의 식민지 쟁탈전 속에 핍박받는 사람들, 종교적 갈등, 인종 갈등 등 19 ~20 세기의 동아프리카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그만이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낙원’이라는 제목과 달리 전혀 낙원과 거리가 멀었던 그 시절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낙원은 과연 있었겠느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천국과 지옥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데 나는 나만의 자유의지로 만족하며 낙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글쎄 안일한 생각일 수 있지만, 꼭 낙원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지옥 같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낙원이라 생각하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떠남, 고난, 구원의 종교적 서사를 담은 유수프(요셉)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에게 기대해보는 마지막이 구원으로 끝나지 않아 뭔가 이야기를 하다만 듯한 아쉬움도 있지만, 이 또한 작가의 큰 그림이라 여거진다. 사실 잘생긴 유수프에 대한 환상 없이 읽었더니 설렘은 없었지만, 모든 것에 달관한 성인군자처럼 덤덤한 유수프의 그런 면은 부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덤덤한 유수프라지만 이성을 향한 관심에선 덤덤하지도 초월하지도 못한 그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는 건 안 비밀이다. 억압에서 벗어나 사랑의 도피를 생각하지만 결국 자유 뒤에 따를 고통에 관한 책임감을 생각해 보며 또 한 번 유수프는 정신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문학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라고 한 압둘라자크 구루나의 말처럼 이 소설로 나는 19~20세기 동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특별한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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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역사적으로 조금 생소한 배경이다 보니 딱히 어려운게 아닌데도 머뭇거리면서 읽게 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무슬림들의 이야기인 듯 싶다가도 그 시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좀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단으로 움직이며 보게되는 아프리카의 다양한 모습과, 그곳으로 점점 들어오고 있는 식민지배세력. 그리고 이익에 따라 여러 사람의 운명을 쉽게 바꿔버리는 아지즈가 지니고 있는 힘과 매력이 엄청납니다 그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결국 바꿀 의지조차 잊고 최악이 아닌 주어진 환경안에서 만족하면서 살게 됩니다 주인공 유수프 꿈속에 내내 등장하다 가장 더러운 모습으로 현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개처럼, 결국 닫힌 문밖의 사람일 수 밖에 없는 유수프가 어린시절을 끝내고 어떤 어른이 될지는 소설 속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설 속 여러 군상들과 대입하며 적어도 어떤 모습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두운 이야일 수 밖에 없는데 주인공의 마음이 덤덤해서 그런 게 덜 느껴지는 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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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나서 처음 알게 된 압둘라자크 구르나. 문학동네에서 올해 네 권 정도 출시가 된다고 해서 신간 알림 신청을 하고 나서 낙원과 함께 바닷가에서 두 권을 구매했다. 뭘 읽을지 고민을 하다가 여러 후기를 통해 두 책의 번역가가 다르다보니 별개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낙원을 먼저 선택했다. 책의 내용은 열 두살의 유수프가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상인 아지즈의 밑에서 일하게 되고 새로운 세상에 혼자가 되어 자신이 맡은 일을 해내고 고독과 방황속에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초중반까지는 다소 여러 종교인을 지칭하는 말들이 등장해서 다소 지루하기도 했지만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뭔가 마음이 풍성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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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빚 때문에 상인의 하인이 되어버린 어린 소년 유스프에게 낙원이란 무었이었을까? 작가의 주된 주제인 아프리카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식민지 시대의 아픔, 난민문제, 계급과 인종 갈등을 부각하여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프리카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
| 유수프라는 어리고 예쁘장한 남자아이의 눈으로 서술되는 아프리카 배경의 소설이다. 아프리카 출신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 호기심과 흥미가 생겼고 아프리카의 낯선 문화를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만나보는 기회를 맛볼 수 있어 참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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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낙원』은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노벨상 선정한 이유에 대해 노벨상 수상 위원회는 '식민주의 영향과 대륙 문화 간 격차 속에서 난민이 처한 운명을 타협 없이 연민어린 시선으로 통찰했다' 라고 말한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는 소년 유수프의 성장을 통해 뿌리가 뽑힌 사람들인 이슬람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보게 된다. 동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를 믿으며 사는 아랍계 아프리카인의 삶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만약 이 책이 노벨문학상으로 수상되지 않았으면 읽어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만큼, 이 책은 나에게 낯설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면서도 매력적이기도 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영국와 독일 등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뿌리를 잃어 버린채, 힘겨운 삶을 살아야했던 이슬람 아프리카인들의 삶들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부모의 빚을 변제하기 하기 위해 팔려 집을 떠나게 되면서부터 열 두살 소년 유수프의 유목민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삶이 시작된다. 자신곽 같은 이유로 팔려온 청년 칼릴과 함께 지내게 되는데, 유수프는 자신이 팔려온 '노예' 의 처지이고 자신과 함께 온 '아지즈 아저씨' 가 아저씨가 아닌 '사이드' 즉 자신의 주인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칼릴은 아지즈를 '아저씨' 라고 부르는 유수프를 꾸짖는다. 유수프가 이슬람 거상이며 자신을 사온 아지즈를 '아저씨'에서 '사이드' 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그가 아지즈와 장기간의 카라반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 죽음의 위협을 무릎쓰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거래를 하면서 유수프는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깨닫게 된다. 유수는 장기간 동안 카라반 여행을 통해 상인 하미드, 칼라싱가, 후세인 등 여행을 통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글을 읽는 법을 배우고, 이슬람교에 대한 종교적인 신념도 쌓아나간다. '유수프'라는 이름이 상징하듯, 성경 속 요셉처럼 그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의 뛰어난 외모와 모습 덕분인지 그는 고난을 극복하고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동안 유수프가 카라반 여행을 통해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는 뿌리를 잃어버리고 떠돌며, 고향이 아닌 낯선 곳에서 잠시나마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는 이슬람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하고 힘든 삶을 보게 된다. 이 책 속에는 여러 민족간의 갈등,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침략과 식민지화, 종교간의 갈등 등 단순히 소년 유수프의 삶뿐만 아니라 그 당시 동아프리카 출신의 이슬람 아프리카인의 삶과 문화, 역사까지 아울러 살펴볼 수 있다. 이 책 속에 담겨진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유목민으로써, 난민으로써 살았던 디아스포라의 삶 또한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잔지바르' 의 역사, 잔지바르 혁명, 탄자니아 공화국 수립 과정, 유럽의 제국주의, 노예 무역,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랍인, 인도인, 아시아인 등 인종, 민족간의 갈등, 이슬람교와 다른 종교와의 갈등 들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런 종합적인 요소들을 모두 결합해서 이해해야지만,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하고, 그 속에서 담긴 작가의 의도와 메세지를 좀더 알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자유' 와 '낙원' 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아지즈의 정원에서 평생동안 정원사로 일하는 음지 함다니를 통해 진정한 자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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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J. M. 쿳시와 나딘 고디머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최애라고까지는 못 해도 내가 선호하는 작가군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아프리카 작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의 개별 작품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소설을 '아프리카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어디까지나 제3자일 뿐이다. 내가 궁금한 건,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점이다.
가령, 일제 식민지 시기에 경성에 살던 일본인이 한국어로 시나 소설을 지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작품은 '한국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 한국인의 정서로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이다.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도 그렇지만,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유럽 열강들에 의해 유린당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난도질 당했다. 지금 그곳에 사는 백인들은 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강화하고 거기에 복무했던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철저한 가해자들이다. 그리하여 아프리카를 보는 입장이 그러하듯, 그들의 문학을 대할 때의 입장도 도식적일 때가 많다. 백인과 흑인 내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에 갇힌다. 그런데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그리는 아프리카는 이보다 좀더 복잡하다. 실제로 동아프리카 잔지바르 섬 출신은 압두라자크 구르나는 스무 살에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서 출생해서 살았는데, 영국령이었던 잔지바르 섬은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오만 제국의 속국을 거쳐 영국 식민주의 보호령이 된다. 지금은 탄자니아의 일부로 편입되었지만, 복잡했던 과거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랍계였던 그가 영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게 된 이유도 이슬람에 대한 탄압 때문이었는데, 아프리카 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원래 자신들의 것을 찾고자 하는 혁명이었으나, 압둘라자크 구르나와 같은 아랍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수자에 대한 탄압이었다.
제3자인 우리 입장에서는 이 모두가 제국주의의 원죄이자 그 잔재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곳에서 살고 있던 다종다양한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삶과 생계, 목숨과 이어진 문제였다는 점에서 매우 실존적이고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요셉(Joseph)에서 파생된, 혹은 그 이름과 기원이 같은 것으로 사료되는 유수프가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목도하게 되는 동아프리카의 실상은 '낙원'이면서 그 낙원이 부재하는 공간이다. 거기 있던 낙원은 어떻게(무엇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 왜) 부재하게 되었나. 『낙원』은 그것을 탐색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아름다우면서, 시종일관 무겁다. 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대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지극히 미비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슬람을 종교로 가진 아랍계 아프리카인들에게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어떤 의미일까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그곳에서 어쩔 수 없이 이탈하게 된 사람들, 그러니까 뿌리가 뽑힌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영국에서 영문학교수를 할만큼 영어와 영문학에도 능통해서인지 문장들과 문체들이 유려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문장과 문체들이 아름다워서 '낙원'의 상실과 부재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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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아 자의로, 타의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들의 삶을 들여다 보다! 아프리카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동아프리카인들의 실존 문제를 매우 예리하게 그려낸 작품!
얼마 전, 흑인 노예 역사와의 화해를 시도한 소설 『빌러비드』를 읽고 흑인 문학 혹은 난민을 주제로 한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중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식민주의의 영향과 난민들의 운명에 대한 타협 없고 열정적인 통찰을 보여줬다”는 평가와 함께 그가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되어서이기도 하지만, 가 닿지 못할 낙원을 향한 상실자들의 애환을 어떠한 방식으로 그려냈는지 궁금해서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은 아프리카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동아프리카인들의 실존 문제를 매우 예리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어쩌면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놓은 이 세계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이제야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을 통해 조금 엿보았을 뿐이라고, 소설은 그렇게 내게 말하는 듯했다.
어디에도, 다시없을 그곳 ‘낙원’에 대하여
“네가 여기 있는 건 네 아버지가 사이드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야.” 열두 살의 소년 유수프는 종종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 방문하곤 하는 부유한 상인, 아지즈 아저씨의 일행을 따라 집을 나선다. 영문도 모른 채 아지즈 아저씨네로 오게 된 유수프는 그곳에서 일하는 칼릴이라는 청년으로부터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듣게 된다.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라 사이드 즉, 주인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부모가 진 빚에 팔려 낯선 곳에서 생활하게 된 유수프는 버림받은 기분을 애써 외면해보지만, 밤마다 흘러나오는 눈물과 무서운 꿈은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쉬이 감추지 못한다. 특히 밤이 되면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며 찾아오는 개들이야말로 유수프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창백한 반달 불빛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집요하게 노려보는 개들의 시선은 이 냉혹한 거리에서 그가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어쩌면 언젠가는, 그의 아버지가 성공하는 날이 온다면, 그를 구하러 올지도 몰랐다. 그는 할 수 있을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울었다. 때때로 그는 그들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간다는 생각에 공포에 질렸다. 그들의 음성이나 특유의 성향-어머니의 웃음, 마지못해 짓는 아버지의 웃음-에 대한 생각이 다시 그를 안심시켰다. 그가 그들을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 시간이 쌓여갈수록 그들을 점점 덜 그리워했다. (…) 그는 주어진 일을 했고, 칼릴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완수했으며, 그 ‘형’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허락을 받을 때면, 정원에서 일했다. / 71p
하지만 칼릴을 따라 집안일을 배우게 된 것도 잠시, 유수프는 아지즈의 뜻에 따라 인도양에 위치한 스와힐리 해안에서 탕가니카 호수와 콩고를 거쳐 그 너머의 깊숙한 내륙으로 들어가는 무역 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이때부터 소설은 동아프리카 상인과 현지인들, 부족민들, 인도인, 이슬람 아프리카인, 유럽 식민주의자들로 대표되는 독인인들까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와 종교가 합류하는 매우 복잡한 역사적 공간인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이 땅의 현실과 동아프리카인들의 내밀한 삶을 유수프의 시선을 통해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를 테면 흙처럼 붉게 염색된 머리와 황갈색의 매끈한 몸을 지닌 부족 전사들을 보며 ‘저들은 피를 마시는 야만인’이라고 조롱하는 동족들, 부모의 출신지를 조롱하고 거기에 우스꽝스럽고 불쾌한 이름들을 갖다 붙이는 소년들, 불행에 저항하기보다 신의 뜻이라며 그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 장신구를 얻기 위해 자기 사촌과 이웃들을 파는 이들, 처음에는 호의로 받아주었으나 역병과 재앙만을 남기고 떠난 여행자들에게 분노하는 원주민 부족들의 적대감 등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곳에서 동아프리카로 모여든 사람들은 거기에서 독특한 다언어적, 다인종적 문화를 형성하며 역동적’으로 살아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섞이고 또 섞이며 자신들이 누구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번역가 왕은철의 해석처럼, 모호한 정체성으로 뒤얽힌 동아프리카인들의 삶 속에서 성장해야 했던 유수프의 삶 역시 매번 위태롭게 느껴진다.
소년들의 부모들인 날삯꾼들은 곳곳에서 왔다. 카와 북쪽 우삼바라 고원지대에서도 왔고, 고원지대 서쪽의 아름다운 호수지역에서도 왔고, 전쟁에 짓밟힌 남쪽 사바나에서도 왔다. 상당수는 해안 출신이었다. 소년들은 부모 얘기를 하며 웃고, 그들의 노동요를 흉내내고, 그들이 귀가할 때 묻어오는 혐오스럽고 시큼한 냄새에 얽힌 이야기들을 서로 비교했다. 그들은 서로 욕하고 조롱해왔던 우스꽝스럽고 불쾌한 이름들을 부모의 출신지에 아무렇게나 갖다붙였다. / 17p
그들이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유수프는 이제는 병에 걸려 퉁퉁 부은,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상처들을 도저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그런 고통을 보면서 삶이 끝났으면 싶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것을 본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었다.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불탄 오두막 안에도 있었고 관목 가까이에도 있었고 나무 밑에도 있었다. / 169p
“너는 그렇게 많은 아랍인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을지 궁금하겠지. 그들이 이곳에 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 지역에서 노예들을 사는 것이 나무에서 과일을 따는 것과 같을 때였다. 그들이 직접 희생자들을 잡아야 했던 것도 아니었지. 물론 일부는 재미삼아 그러기도 했지만 말이다. 장신구를 위해 자기 사촌들과 이웃들을 팔려고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거든.” / 176p
무엇보다 유럽 열강 세력들의 아프리카 식민지화는 아프리카인들의 갈등을 촉발시킨 절대적인 계기가 되었던 게 분명하다. 유수프가 유년시절을 보낸 카와는 독일인들이 내륙의 고지대로 가는 철도 건설을 위한 기지로 삼은 신흥도시였고, 그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때 경기가 급부상하기도 했으나 그만큼 빠르게 식어가면서 도시 전체가 생지옥이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유수프는 아지즈의 무역 상단을 따라다니면서 어디를 가나 유럽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만 관심 있는 적들로부터 지켜주러 왔다고 하면서 정작 한 푼도 내지 않고 아름다운 땅을 가져가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때 유수프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저 독일인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목매달아 죽인다거나, 쇠도 씹어 먹을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강탈된 자유와 억압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아프리카인들의 의식 속에 이제 ‘낙원’은 그들만의 삶을 일굴 수 있었던 저 먼 과거 혹은 그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제목이 『낙원』 인 이유는 그래서 더 뼈아프다.
“나는 우리 앞에 있는 시간들이 두려워.” 후세인이 조용히 말하자 하미드는 노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유럽인들은 아주 작정한 것 같아. 땅을 번창시키는 문제로 싸우다가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짓뭉갤 거야. 그들이 좋은 일을 하려고 여기에 와 있다고 생각하면 당신들은 바보야. 그들이 노리는 건 장사가 아니라 땅 자체라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 / 119p
땅에서 검은 기름이 솟구치고 사탄의 파수꾼들처럼 생긴 금속탑이 물속에 서 있더래요. 불길이 화염 문처럼 하늘에 가득했대요. 거기서 아저씨는 산과 계곡을 넘어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갔대요. 헤라트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더래요. 과수원과 정원과 시냇물로 가득한 곳이었대요. 학식과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대요.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전쟁과 모의를 강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대요. 그래서 그들의 나라들에는 평화가 없었대요. / 144p
유수프는 악몽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칼릴에게 자신이 여행중에 아주 자주 살이 말랑말랑한 동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껍질에서 막 열린 공간으로 나왔는데, 혐오스럽고 괴상하게 생긴 짐승이 잡석들과 가시들 속으로 난 길을 맹목적으로 짓이기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의 곳 한가운데를 맹목적으로 짓이기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지의 곳 한가운데를 맹목적으로 통과하는 그들 모두가 그런 상태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느꼈던 공포는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말했다. 진짜로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고, 꿈속에서 죽음의 가장자리 너머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고 그런 공포를 극복해가면서 그토록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 235p
이렇듯 소설 『낙원』은 아버지가 진 빚으로 팔려온 소년 유수프의 성장 이야기이자, 식민주의의 영향과 혼종된 정체성이 한 데로 뒤섞인 동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능수능란하게 엮어낸 수작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내내 떠나질 않는다. 작가는 왜 주인공을 미소년으로 설정한 것일까? 유수프의 아름다운 외모는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낯선 부족민들에게까지 호감을 산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기로부터 그를 구하는 것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동안 아지즈의 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님은 ‘신이 너에게 천사의 모습을 주시고 선한 일을 하라고 이곳에 보냈다’며 원하는 것을 줄 테니 유수프로 하여금 자신의 병든 몸을 치료해달라고 하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유수프가 겪는 시련은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데에서 더 큰 의문으로 남는다. 작가는 왜, 굳이,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마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기회와 타협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 아미나를 데리고 도망치지도 못한 채 끝내 아지즈와 독일군에게 제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유수프의 체념이 주는 씁쓸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큰 그림일까.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고향과 자유를 상실한 아프리카인들의 처절한 운명을 다루고 있음에도 슴슴하게 읽히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유수프의 시선이 한 몫 한다.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아지즈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며 위험천만한 일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비롯해 주변 인물들을 철저히 방관자적인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민족주의에의 향수와 자유를 상실한 난민들의 비극을 감상주의로 포장하지 않고, 이른바 피해자의 입장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냉소적으로 직시하고 있는 특유의 문체는 아프리카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듯하다.
그는 부모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수년 전에 그를 버린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그가 그들을 버릴 차례였다. 그가 붙잡혀 있는 것으로부터 그들이 느꼈던 안도감은 이제 끝났다. 그는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고자 했다. 자유롭게 평원을 돌아다니면서 언젠가 그들한테 들러 그런 삶을 시작하도록 어려운 교훈을 가르쳐준 것에 고맙다고 할지도 몰랐다. / 305p
수치스러운 것은 그들이 그에게 살도록 강요한, 그들 모두에게 살도록 강요한 방식이었다. 그들의 음모와 증오와 보복적인 탐욕이 단순한 미덕들조차 교환과 교역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떠나려고 했다. 그보다 단순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 요구하는 억압적인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어딘가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외로움의 단단한 덩어리가 그의 추방당한 가슴에 오래전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어디를 가든 그것이 함께 있으면서 그가 작은 성취를 위해 계획하는 걸 축소시키거나 흩어놓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 308p
마님이 자유를 주겠다고 했는데도 왜 떠나지 않았는지 묻는 유수프에게 노인 음지 함다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내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어. 그녀가 줬지. 그녀가 그걸 줄 수 있다고 누가 말해줬을까? 나는 네가 얘기하는 자유가 뭔지 알아. 내가 태어난 순간 가지고 있던 자유지. (…) 그들은 너를 가두고 쇠사슬로 묶고 네가 가진 하찮은 것까지 모두 남용하지만, 자유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쓸모없어질 때도 여전히 너를 소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자유는 주어지는 것도,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자유를 속박당하고 타인의 의지에 나를 맡기곤 한다. 어쩌면 내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실현되는 그곳이 바로 낙원이 아닐까.
아프리카라는 낯선 이미지와 토속 언어로 인해 간간이 읽기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인류의 시작점이자 지구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이지만 여전히 생소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자유를 찾아 자의로, 타의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난민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작품으로도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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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책을 읽고
낙원 책을 읽는 동안에 왠지 모르는 사막 같은 공간에 낙원 책을 읽는 듯 싶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속에 주인공도 나와 같은 생각아닐까 싶기도 하다. 낙원 책은 종교와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낙원이라는 곳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면 어떤 곳인지 한번씩 생각하고 상상하게 된다. 낙원 소설 책을 잘 구입했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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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야할 난민에 대한 통찰'
22년 노벨문학상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하여 읽어보게 되었다. 책의 내용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면 분명 이 시대에 전하고싶은 메세지가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 메세지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난민, 식민주의에 대한 내용은 이 시대,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난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제3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해보았을뿐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이 책은 유수프라는 아이의 삶을 따라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기위해 팔려가고 아지즈아저씨라는 상인과 함께 물건을 팔기위해 힘든 여정을 떠난다. 이러한 유수프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난민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담담하게 우리에게 전해준다.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있다.
유수프는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답에 속아넘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늙은 정원사를 향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분의 노예였잖아요. 지금도 그분의 노예고요. 당신은 그렇게 되고 싶은 건가요? 자유를 준다고 할 때 왜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죠?” 음지 함다니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냐?”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고는 더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것처럼 말을 멈췄다. 그런데 잠시 후 그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게 자유를 선물로 주었어. 그녀가 줬지. 그녀가 그걸 줄 수 있다고 누가 말해줬을까? 나는 네가 얘기하는 자유가 뭔지 알아. 내가 태어난 순간 가지고 있던 자유지. 이 사람들이 넌 내 것이다. 나는 너를 소유한다고 할 때, 그것은 비가 지나가는 것이나 하루의 끝에 해가 지는 것과 같은 거야. 그들은 너를 가두고 쇠사슬로 묶고 네가 가진 하찮은 것까지 모두 남용하지만, 자유는 그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쓸모없어질 때도 여전히 너를 소유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네가 태어난 날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니? 이것은 나한테 하라고 주어진 일이야. 저 안에 있는 사람이 이것보다 더 자유로운 것을 나한테 줄 수 있겠니?” -p291
이 내용을 보면 쇼생크탈출에서 교도소에서 오래 살다보니 세상에서의 삶이 오히려 더 큰 억압으로 느껴졌던 브룩스가 떠올랐다. 자유란 무엇인가?
책이 마냥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문화와 아프리카언어를 번역을 해서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천천히 스토리를 잘 따라가다보면 압둘라자크 구르나씨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선명한 메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