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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전작 [결: 거침에 대하여]를 읽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일단 구매부터 하였다. 그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억압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전작에서 언급했다. 그것은 회의(懷疑)하는 자아가 되는 길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미안함에 대하여]라니. 어쩌면 무엇이 그렇게 미안한걸까 하는 생각이 나를 자극해서 선뜻 제목만보고서 구매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저자가 세월호 참사이후 6년여 동안 <한겨레>지면에 실었던 칼럼을 묶은 책이라고 한다. 그는 서문에서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에 대하여 쓰고 있다. 세월호는 저자의 정서를 이루고 있던 슬픔, 쓸쓸함에 미안함을 얹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은 세월호 훨씬 이전이었다고 고백한다.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요행 덕에 살아남았기 때문이라며. 그런 저자의 말에 나 또한 지금은 많이 옅어졌지만 한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이 떠오른다. 얼치기로 운동권에 적을 두었던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이 그러했겠지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에 더 과격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하지도 못했고, 요행도 아니었고 그저 방관자가 되었다는 부끄러움이 죽은 자에 대한 미안함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 속의 미안함을 글로 썼다고 한다.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고 인간의 고통과 불행이 불거지는 곳은 중심이 아닌 변두리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장소 또한 변방이라고 말하는 그는, 총5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노동, 혐오, 교육, 빈곤, 진보정치를 주제로 우리사회의 변방 곳곳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몸은 평등하지만, 기업의 이윤 앞에서 인간의 몸은 평등하지 않고 우리는 길들여졌다고 말한다. 우리사회에서 산재사고는 수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알려지는 것보다 알려지지 못하고 묻히는 사고가 더 많다. 설사 알려진다고 해도 당시에만 뜨거운 관심을 가질 뿐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잊혀진다. 그런가하면 우리사회에는 성소수자에 대해서, 난민에 대해서, 약자에 대해서 혐오와 차별이 남긴 일그러진 풍경들이 곳곳에 널려있으며, 교육은 존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수단이 되었음에도 대부분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
그는 진보정치에 대해서도 비판의 강도를 달리하지 않는다. 지금의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이며, 자칭 보수라 말하는 수구와 적대적 공생관계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차별금지법이나 선거법개정에서 보여준 행태나 공교육개혁, 경제정책 등에서 말은 성찬을 이루지만 실상 내용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이 모두 신자유주의의 완성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막연하게 믿거나 생각하는 것과 달리 무관심은 중립이 아니다. 착한 사람은 대개 온유하고 소극적인 반면에, 나쁜 사람은 거칠고 그악스럽다. 광신적이거나 극단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열광과 열성을 가지고 있다.’(12쪽)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열광과 열성을 가진 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만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민심이라 생각하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탐욕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연대, 정의, 공정 등과 같은 공공성의 가치는 약자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남아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 일게다.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은 길들여진 채로 이를 옆에서 보고만 있다며,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라고 그는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좋은 대상에 익숙해지면 권태나 싫증을 느끼고, 나쁜 제도에 익숙해지면 별 저항없이 더 나쁜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며,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익숙해지면 그 공간에 대한 판단력을 잃게 된다.’(96쪽) 그래서 그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회의하는 자아’가 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회의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배움과 생각이 분리되지 않을 때 회의하는 자아가 될 수 있으며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를 가질 때 확증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기성세대로써 윤리적 죄의식을 느낀다는 저자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삶의 불안요인들을 전부 다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부를 대물림하며 기득권을 강화하고 유지해온 귀족들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이다. 그는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했다고 한다. 저자의 이력을 아는 사람들이라도 저자의 주장 모두를 공감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좌절도 포기하지도 말자. 자칫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의 하나는 개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확인하면서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것’이라며 개탄을 넘어 분노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설득하자는 그의 말은 우리가 비겁한 위선자가 되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다시금 되새기자.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239쪽)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착한 방관자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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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우리의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글 속에 충분히 묻어나고 있다. 저자 자신이 독재정권 시절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으며, 외국인과 소수자들에게 관대한 당시 프랑스의 문화의 혜택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한국에서 저자는 ‘척박한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의 역할을 하고자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위치를 선택하고, 기꺼이 ‘아웃사이더’로서의 즐거운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동안 신문기자와 진보정당의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벌금을 내지 못해 어쩔 수없이 교도소에서 노역을 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벌금을 대여해주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을 맡고 있다. 이 책은 2014년 4월에 벌어졌던 ‘세월호 참사’ 이후 6년 동안 한겨레신문에 기고햇던 칼럼을 묶어 엮은 것이라고 한다. 다시 4월이 된 지금, 여전히 많은 이들이 ‘속절없이 죽음을 당한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권력자들은 그들의 비극 앞에서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거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한 행동’이라는 '언어 폭력’으로 대하기도 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건에 대한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으며, 다시 무도한 ‘언어폭력’을 저질렀던 자들이 새로이 선출된 권력 주변에 모여들고 있다. 여전히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저자와 함께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있기에, 저자는 여전히 그러한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볼온한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회의하는 자 홍세화의 고백’이라고 이 글을 성격을 규정하면서, 이 책의 부제를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라고 붙였을 것이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몰상식과 광신의 늪에서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통’과 ‘이 땅에 와 있는 난민들, 이주노동자들의 고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오늘을 끝없이 저당 잡힌 일상을 보내는 청소년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은, 미안함에서 멈추지 않고 분노를 일으’킬 정도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 여기의 고통과 불행,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목소리를 안간힘처럼 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극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주류가 아닌, 무시당하고 소외받는 비주류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처지를 공감하며 위로할 수 있는 저자의 심정이 ‘미안함’이라는 정서로 표출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먼저 1부에서 ‘인간은 평등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2부의 글들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세월호 이후’ 여전히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아이들에게 미안하다’(3부)는 진심을 전하고, 비록 현재의 상황이 쉽게 바뀌지 않을지라도 ‘가슴엔 불가능한 꿈을 안고’ 최선을 다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저자를 4부의 글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5부에서는 비록 ‘갈 길이 멀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인간다운 삶’을 위해 걸음을 멈출 수 없으며, 그러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 비판의 목소리를 그치지 않겠노라는 다짐이 드러나고 있다. 여전히 뉴스에서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들의 사고사’ 소식이 전해지고 있으며, 인권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에 그릇된 신념을 주장하면서 ‘언어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일부 종교인들의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우크라 침략’으로 나타나고 있듯이, 권력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타인의 삶에 대해 ‘폭력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는 그들이 너무도 ‘뻔뻔하고 당당한 자세’를 보이기에, 그들을 대신하여 이 땅의 소수자들과 비주류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글을 쓰는 저자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진정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삶에 만족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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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여겨왔다. 그럼에도 지난 대선을 치르며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모든 게 확연히 달라진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품었다. 아마 다들 비슷했을 것이다. 암흑과도 같았던 시절은 지나갔다며, 앞으로는 전혀 다른 세상이 도래할 것처럼 느꼈지 싶다. 안타깝게도 환상은 금방 깨졌다. 기대만큼 진보적이지 아니 한 정책의 연속이었고, 거기에 초유의 감염병까지 더해지니 방향을 잃었다. 어떤 인물을 가져다 놓아도 현 상황을 극복하기란 힘들 듯하다. 허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큰 것 역시 사실이다. 글을 읽으며 현재를 응시해 본다. 지금 이 순간 우린 어떤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가. 대한민국으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는 나에게 다른 세상을 경험한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곤 했다. 이번에 읽게 된 책의 저자 홍세화 님의 경우에는 살짝 사정이 달랐다. 그의 프랑스 체류는 선택이 아닌 강제에 가까웠다. 여러모로 우리보다 앞선 사회를 경험한 그는 우리 말로 풀자면 ‘관용’에 해당할 똘레랑스의 가치에 눈 뜨게 됐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어느 한 편으로 경도됐으며 경직된 우리 사회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을 하고 바라보게 되었다. 비교의 대상이 없으므로 무엇이 어찌 잘못됐다는 인식조차 가지지 못했던 나날들이 많았는데, 최악까진 아닐 테지만 그렇다 하여 최선 혹은 최고도 아니라는 점을 책을 읽으며 자각할 수 있었다. 하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숱한 왜곡과 만날 수 있다. 나라를 잃었다 되찾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전쟁과 폭압의 시간들을 보냈다. 단순히 찢어질 듯 가난해도 문제인데, 우리의 경험은 인간을 인간답게 바라볼 시선을 앗아갔다는 점에서 지독했다. 과거로부터 모든 게 귀인했다는 식의 사고가 옳을 린 없다. 그럼에도 나는 타인에 대해, 어쩌면 내 자신을 향해 하등의 미안한 감정을 품지 못하는 게 왠지 지난날로부터 비롯됐지 싶었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려 들면 반동, 반역 따위의 말을 들어야 했다. 정당함을 논해야 할 시간에 개개인의 희생을 논해야 했다. 참으로 숨 막혔다.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빛 바랜 측면도 존재하나, 분명 대통령 탄핵은 민초들의 올곧은 힘이 발휘된 결과였다. 그보다 앞서 있었던 4.19 혁명과 성공을 논하기는 힘들다고 할지라도 끊이지 않았던 각종 민주화의 움직임 역시 그러했다. 무모하단 소리를 들을지언정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이야 말로 모두에게 희망이었다. 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나라 아닌 제 자신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다. 마냥 아름답다고 그들을 미화하지는 않으련다. 분명 의미는 있으나 오로지 개개인의 산화에만 의존해 앞날을 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사회는 어디에도 없지 싶다. 오래 전 저자의 책을 읽으며 동경했던 프랑스 사회도 요즘에는 많이 소란스럽다. 그 곳의 지도자들은 반인종주의의 목소리를 변조해 반무슬림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일종의 눈 가리고 아웅과도 같은 시도가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통용되고 있음이 놀랍다. 거리에서 일어난 믿기 어려운 참수 사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한낱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서는 결코 아니될 것이다. 점점 더 사회는 각박해지고 있다. 인간다움을 부정하고 하나같이 야수가 되길 갈망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된다. 많은 이들이 세상을 등진 가운데 홀로 살아남았다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결코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주는 울림은 그래서 크다. 바람직하지 아니 한 시도에 동참한다면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할 수도 있겠지만, 불편함을 택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인간다움을 부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각성을 가져본다. 인간되기를 갈망하기에 죽음도 각오해야만 하는 역설을 어찌 이해하면 좋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