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혜린이 남긴 에세이를 보면 잉게보르그 바하만의 만하탄의 선신이란 작품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나온다. 내가 만하탄의 선신을 접한 것도 그 책을 통해서였다. 결국 그녀가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의 사유를 유추하는 과정에서 잉게보르그 바하만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바하만 역시 전혜린처럼 아주 특별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하탄의 선신에서 사랑에 대한 간결하고 표시적인 상징들과 지시적인 언어의 표현이 아닌 전이(轉移)적인 언어의 표현은 무척이나 내게 흥미로운 것이었다. 또한 사랑에 대한 맹목적이자 운명적인 종말에 대한 지극한 소명의식은 젊은 날의 나의 기억에 잔잔히 남아있는 편린과 같은 것이었기에 애정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절대완전체일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이기에 결코 누릴 수 없는 절대 사랑에 대한 상실의 표현이자 무력감의 이기(異記)가 이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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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방송 드라마용으로 씌었지만 영화나 연극으로도 충분히 체현될 수 있는 작품이다. 테마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이고 극적인 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모두가 한번쯤은 해보고 싶어하지만 누구나 할 수는 없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정말로 하게 되는데 종국에는 목숨을 바치는 치명적인 사랑이야기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낯선 타인 둘이 만나 첫눈에 반해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팽개치고 호텔에 들어 사랑에 빠진다. 맨하탄 공원에 기거하는 착한 신은 둘의 사랑을 영원하게 만들어주려고 폭탄을 보내는데 남자는 잠깐 외출을 했다가 현실을 깨닫고 여자를 떠나고 남자를 기다리던 여자는 행복하게 사랑에 빠진채 폭탄으로 인한 폭발로 즉사하는 것으로 끝. 눈부시던 사랑을 버리고 구차한 삶을 선택한 남자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가지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찢겨나갈 심장을 갖고 있는 위태한 목숨을 가진 여자. 누가 더 행복할까? 나는 어느 편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둘중 한쪽의 역할을 하게 된다면 평생 큰 상처가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간단한 줄거리지만 사람의 심정이 이렇게 극한까지 밀쳐질 정도로 절절할 수가 있구나 싶었고 그 심정을 이토록 잘 표현한 작가가 놀라웠다. 낯선 극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금방 익숙해진다. 사랑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 [인상깊은구절] 제니퍼 네.(속삭이며) 하지만 이제 전 혼자 있어야겠어요. 이해하시겠어요? 오늘 저녁에는 그를 태우지 않은 배가 한척 출범할 테니까요. 그리고 나면 행복이 저의 옷을 찢어버리게 될 테니까요. 가도록 하세요. 전 아무에게도 얘기하면 안 되게 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사랑을 하고 있어요. 제 정신이 아니에요. 저는 오장육부의 속속들이까지 사랑으로 불타고 있어요. 그리고 사랑을 향해 시간을 연소시키고 있어요. 아직 여기 오지 않았지만 곧 오게 될 그를 담고 있는 사랑을 향해. 저는 이 순간을 넘어서서 저의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를 사랑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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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本性的(본성적)으로 자신의 소리가 열심히 들리어지기를 希望(희망)한다. 그렇지만 갑자기 자신이 어떤 影響(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驚異(경이)스런 생각이 든다. 더욱이 慰安(위안)을 필요로 하는 人間(인간)들 앞에서 별로 慰安(위안)의 말을 할 수 없음을 自覺(자각)할 때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실상 人間(인간)이란 얼마나 常套的(상투적)이며 다른 어떤 被造物(피조물)보다도 엄청난 內密(내밀)의 苦痛(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存在(존재)인지 모르겠다. 人間(인간)의 이런 苦痛(고통)은 不可思議(불가사의)하고 殘忍(잔인)한 人間(인간)의 標識(표식)이다. 우리가 그 표식을 달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不可避(불가피)한 일이라면, 慰安(위안)이란 어떤 형태여야 하며, 그것이 대체 우리 人間(인간)들에게 무슨 意味(의미)를 가져야 하겠는까? 그 慰安(위안)을 言語(언어)로 이끌어 내려는 것은 내 생각에는 너무나 어설픈 일인것 같다. 恒常(항상) 그랬었지만 言語(언어)를 통한 慰安(위안)이란 너무나 微弱(미약)하고 값싸고 無想(무상)한 것인 듯싶다. 그렇지만 이 苦痛(고통)을 否定(부정)하고, 苦痛(고통)의 痕迹(흔적)을 지워 버리며, 外面(외면)하는 것은 작가의 使命(사명) 일 수 없다. 오히려 작가는 이 苦痛(고통)을 똑바로 認識(인식)하고 우리가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고통의 實體(실체)를 證明(증명)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보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가 지닌 來日(내일)의 苦痛(고통)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체험에 민감하도록, 특히 眞實(진실)에 대한 체험에 민감해지도록 해준다. 이 苦痛(고통)이 結實(결실)을 맺는 투명한 아픔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정당하고 明瞭(명료)하게 내가 눈을 떴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떤 事物(사물)이나 事件(사건)을 그저 皮相的(피상적)으로 認識(인식)하는 것이 아닌, 볼 수 없는 外面(외면)의 것을 捕捉(포착)했을 때 우리는 그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藝術(예술)이 이룩해야 하는 경지도 이런 意味(의미)에서 눈을 뜬 開眼(개안)의 경지겠지... 작가는 이것 역시 本性的(본성적)으로 온몸과 마음을 다해 너 (Du)를, 즉 人間(인간)을 향해 있다. 作家(작가) 자신이 人間(인간)으로부터 얻은 體驗(체험)을(물론 事物(사물)과 世界(세계), 자기의 時代(시대), 그야말로 一體(일체)에 대한 體驗(체험)을) 人間(인간)을 향해 전달해 주고 싶어한다. 그 중에서 특히 자기 자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일 수도 있는 人間(인간)이라는 것에 대하여, 作家(작가)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가장 참된 人間(인간)일 수 있는가를 알려 주고 싶어한다. 온 觸覺(촉각)을 동원해서 作家(작가)는 이 時代(시대)의 人間像(인간상)과 世界像(세계상)을 摸索(모색)한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思考(사고)하며 무엇을 行動(행동)하는가를, 어떤 것이 熱情(열정)이며, 萎縮(위축)이며, 希望(희망)인가를...... 이 글 안에서 다루어진 모든 問題(문제)가 男女間(남녀간)의 사랑의 문제, 즉 사랑은 무엇이며, 얼마나 無想(무상)하게 흘러가 버리며, 그것이 크고 작든 얼마만한 意味(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歸着(귀착)된다고 볼 때, 그것이 極端(극단)의 경우라고, 너무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든, 日常的(일상적)인 사랑의 문제에서까지도 우리가 좀더 가까이 가서 보면 發見(발견)해 낼 수 있는, 아마도 퍽 이나 努力(노력)을 해야만 찾아 낼 수 있는 극한 狀況(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우리는 이따금 극한점에까지 가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 그어진 限界線(한계선)을 넘어서고 싶은 衝動(충동)이 언제까지나 우리의 마음속에는 깨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撤回(철회)하는 의미가 아니라, 좀더 明白(명백)하게 補充(보충)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우리는 秩序(질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 社會(사회)로부터의 離脫(이탈)이란 있을 수도 없고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질서 안에서 서로를 實驗(실험)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저 자신이 분명히 是認(시인)한다는 事實(사실)이다. 이런 限界線(한계선)의 內部(내부)에는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든 자유이든, 아니면 개개의 순수한 위대함 이든 간에 완전한 것, 불가능한 것,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우리의 視線(시선)을 맞추어 왔다. 不可能(불가능)과 可能(가능)과의 對峙(대치)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可能性(가능성)을 넓히는 것이다. 이런 팽팽한 대치 상태를 우리가 만들고 있고, 그것을 勘當(감당)하고 있다는 事實(사실), 그것이 중요하다. 몰론 가까이 가보면 어느 틈에 멀어져 있는 目標(목표)일망정,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겠다. 作家(작가)가 表現(표현)을 통해서 讀者(독자)를 鼓舞(고무)하여 眞實(진실)에 이르도록 한다면, 讀者(독자) 역시, 때때로 稱讚(칭찬)을 하고, 때로는 批判(비판)을 해줌으로써 자신들이 作家(작가)를 향해 眞實(진실)을 要求(요구)하고 있으며, 開眼(개안)의 耕地(경지)에 導達(도달)하고 싶어한다는 事實(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作家(작가)를 激勵(격려)해 준다. 모름지기 人間(인간)은 眞實(진실)을 希求(희구)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더 무거운 運命(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여러분을 제외한 어느 누가 더 분명히, 우리는 不幸(불행)을 克復(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에서라도 스스로를 止揚(지양)시킬 수 있으며, 또한 꿈이 깨어진 상태에서도 失望(실망)하지 않고 生(생)을 榮位(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確信(확신)시킬 수 있겠는가? 나는 人間(인간)에게는 한 가지 肯志(긍지)가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暗黑(암흑) 속에서도 抛棄(포기)하지 않고 옳은 것을 찾아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者(자)의 肯志(긍지) 말이다. 두 가지 作業(작업) 사이의 화려한 休息(휴식)은, 오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곧 다음의 작업을 위한 思索(사색)의 기간이다. 이 휴식이 나의 사색의 기간이라 본다면, 우리들이 당연히 提起(제기)하실 問題點(문제점)을 위해서라도 나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그 問題(문제)의 解答(해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또 새로운 작업을 위해 부단한 努力(노력)을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