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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생각하면 현실과는 관계 없이, 딴 나라 이야기를 하는 듯 하고 뭔가 고고하고 형이상학이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보다 쉽고 현실과 접목되는 철학 이야기, 삶 속의 철학 이야기를 기대한 나로서는 실망이 크다. 특히 프롤로그 부분에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거창한 화두를 던져 얼른 집어들었는데, 책이 끝날 때까지 그에 대한 일말의 답도 주지 않은 점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철학적 수사를 많이 썼지만, 그것은 쉬운 얘기를 어렵게 푼 격이었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동시대의 일에 대해서는 매우 추상적으로 기술한 것에 그쳤다. 저자는 풍요로운 소비의 시대의 이모저모를 얘기하면서 그 가운데 욕망을 절제하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돈과 권력을 지닌 층만 부패했다고 욕하지 말고, 자신의 삶은 어떠한지 돌아보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소박하고 간단한 결론인가? 여기서 중용과 절제는 모든 이가 지녀야 할 덕목이 된다. 맞는 말이지만, 이것 또한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한 사람의 체화되지 못한 지식의 허구를 드러낼 뿐이다.
대학생들의 철학 리포트로도 얘기될 수 있는 정도의 내용을 책으로 냈다는 것이 이 책의 깊이 없음에 대한 나의 소견이다. 좀더 현실의 문제에 깊이 파고드는 철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상깊은구절] 풍요로운 소비시대에 관조적 삶을 가능케 하는 여유는 '절제'에서 나온다. 우리의 욕망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겨다닌다면, 우리의 삶은 쉴 여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욕구의 강압적인 억제가 삶 자체를 소외시켰다면, 욕구의 매몰되어 있는 삶은 노예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의 욕구를 제한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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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이 갈수록 압축에 압축을 거듭하면서 국적조차 확인하기 힘든 수많은 문화상품들이 범람하고 있다. 현실은 그러한 놀라운 변화의 속도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여 급기야 '탈현대'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극단의 시대를 생성해내기에 이르렀고, 욕망은 갈피를 잡지 못한채 탈주하고 있다. 이러한 때 새삼스레 철학을 얘기하고자 하는 저자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단순히 이제는 진부한 논의가 되어버린 철학 - 도덕 윤리를 포함하는 - 의 위기를 말하고자 함은 아닌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물음들이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한 것이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기는 한가'라는 회의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나의 회의적인 물음에 도전하듯 주변에 늘 존재하는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제목에서 말하듯 저 높은 곳에 있는 철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부단히 애쓰고 있는 듯 하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려한다거나 이것이 절대지식이요 하는 식으로 쏟아붓지 않는다. 그 대신 지금껏 우리가 막연히 감지하고 있었던 것, 한 번쯤 경험하고 생각해 보았던 것을 상기시켜 명료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기억의 조달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기술문명, 페미니즘, 생태학, 포스트 모더니즘, 인권, 신좌파논리 등 그의 관심분야는 현대의 거의 모든 부분을 망라한다. 그리고 하나하나를 자신의 시각에서 조명한다. 때문에 저자의 논리는 다소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이색적인 부분도 있다. 사회의 단면 단면만으로 자신의 논리를 완성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이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의 시각이 모든 논리를 대변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꽤나 많은 것들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주변의 것들을 명료하게 정리했다고 해서 이 책을 책꽂이 구석에 쳐박아둘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나는 저자가 고민했던 많은 문제들 앞에 스스로 마주서게 될 때마다 이 책을 다시 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지은이와 무언의 대화와 토론을 벌이게 될 것이다. 철학은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 속에 포함된 의미를 씹으며 말이다. 철학은 슬픔과 분노 가운데서도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되물을 줄 아는 사람들, 허무 속에서도 그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직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리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인상깊은구절] 니체는 현대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믿음의 노예가 된 반문화적 사회라고 질타한다. 또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가 "철저하게 노예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노예'라는 말을 두려워할 정도로 기피하는 사회"라고 꼬집는다. 현대인은 인권이니 또는 인권 존엄이니 하는 추상적인 권리를 가지고 실제의 노예 상태를 위장하는 자기 기만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는 서양의 합리주의와 민주주의는 같은 토대 위에서 동일한 필연성을 가지고 발전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합리주의가 개별적이고 현실적인 것의 차이를 무시하고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논리를 토대로 하듯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평등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논리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것은 없다'고 니체는 단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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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의 운명... 지상으로 내려왔다? 철학이 지상으로 내려왔다면 천상은 철학의 고향일지 모른다. 철학은 오래동안 천상에 있었다. 사람들은 철학자를 심오한 사상을 설파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그의 말은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 힘들지만 하여간 의미가 있다. 철학책은 이런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유명한 철학자가 쓴 책을 읽기 위해 첫 장을 펼친 사람은 몇 장 읽지도 못해서 포기하고 만다. 그는 철학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광인이거나 천재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광인이라고 하기에는 명성이 높으니 천재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일상을 훌쩍 뛰어넘은 세계에 존재하는 철학이 지상으로, 일상으로 하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류가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이야기는 지상으로 하강한 자의 운명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천상에 있다가 지상으로 하강했다. 아주 좋은 의도를 가지고. 즉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상의 사람에게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지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주목할 때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예수처럼 철학이 지상의 규칙, 일상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철학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신체의 위협이 아니라 소위 상업성을 가리킨다. 대중성을 따르지 않는 철학책은 전혀 팔리지 않을 것이다. 반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라는 충고에 충실한 나머지 대중성에 영합하면 철학이 간직하고 있는 진리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철학이 철학다운 이유는 철학의 진리가 지상이 아니라 천상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대중에 영합하면 진리를 상실하고 대중을 외면하면 박해를 받는다.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이 대중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이 딜레마는 무척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지상으로 철학을 인도한 저자는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지상과 일상은 무척 다양하고 복잡하다. 무수히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무수히 많은 관점이 난무하는 게 지상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철학도 하나의 진리, 하나의 관점에 머물기 보다 여러가지 문제에 개입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목차에서 금방 알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무척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밀레니엄을 논했다가, 성과 사랑을 말하고, 21세기 정치를 논한다. 이것은 현실의 복잡성을 반영하려는 저자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전략은 ‘다르게 보기’이다.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고 하지만 사회에는 여전히 지배적인 관점, 상식이 있다. 그런데 관점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어떤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의 방향에서 세계를 본다는 의미이다. 상식을 가진 많은 사람은 하나의 방향에서 세계를 보고 이해한다. 다른 관점, 다른 방향은 상식에 의해서 가려진다. 다르게 보기는 바로 가려진 관점을 복원함으로써 상식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상식에 의해 가려진 진리를 다르게 보기를 통해서 복원할 수 있다.
저자의 전략은 과연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에 설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가? 대중문화는 이미 다르게 보기의 전략을 상품 개발의 모토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문화 상품을 개발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상품과 자신의 것을 구별짓는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관점을 계속 거부하고 다른 관점을 취하려고 한다. 철학자 뿐만 아니라 문화 상품을 개발하는 자도 다르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문화 상품 개발자와 자신을 어떻게 구별시킬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저자의 문체로 이어진다. 그의 문체는 여전히 천상의 철학자가 구사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서문에서 독자에게 다르게 ‘보기’만을 주문한다. 마치 자신의 글을 통해서 다르게 ‘보기’만 하면 자연스레 다르게 ‘쓸’ 수 있는 것처럼.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은 천상의 스타일과 다른 스타일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천상의 옷을 입고 지상을 배회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의 전략이 다소 부실해도 우리는 여전히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의 운명에 주목한다. 결국 철학은 지상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천상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상의 운명을 걸머진 채 새로운 운명을 개척할 것인가. 이것은 저자의 몫이기도 하고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인상깊은구절] 형식적 절차를 거치는 것보다 누군가를 알고 있으면 무엇이든지 쉽게 해결된다는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