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으로 보아서는 걷기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과 함께 한 긴 산책’이라는 부제에서 ‘뭐지?’하는 느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저녁까지 걷기>는 ‘피카소-자코메티 전시가 열리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홀로 밤을 보내면서, 예술작품이 보관된 장소에 갇히는 경험을 글로 써보라’는 기획에 따른 글이었습니다. 혹시 이런 기획이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의심도 해보았습니다. 영화에서처럼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 속 인물들이 자정이 되자 내려와 살아 움직이고, 이들과 나눈 대담을 적어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기획안을 받은 작가 리디 살베르는 프랑스로 망명한 스페인의 공화주의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난민촌에서 태어나서 툴루즈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고, 의과대학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정신의학을 전공하여 의사로 활동하다가 작가로 변신하였습니다. 그런 작가는 미술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 장소에 너무 많은 아름다움이, 너무 많은 천재성이, 너무 많은 우아함이, 너무 많은 재치가, 너무 많은 광휘가, 너무 많은 부가, 너무 많은 벌거벗은 몸이, 너무 많은 가슴이, 너무 많은 엉덩이가, 너무 많은 경이로움이 몰려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밀집된 작품들이 한 곳에 빽빽하게 몰아놓은 가축 떼처럼 서로를 짓누르다보니 각 작품 고유의 특성들은 이내 질식해버리고(7쪽)”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기획안을 받아들고 미술관에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이 기획이 리디 살베르에게 제안된 것은 작가가 오래전부터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에 열정을 품어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탈리아계의 스위스 조각가이자 미술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후기 인상파 화가인 조반니 자코메티의 아들입니다. 인간의 신체를 가느다랗게 늘여 표현한 작품들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리디 살베르는 자코메티의 대표작 <걷는 사람>에 대하여 “인간의 조건을 가장 적확하고 가장 가슴 저미는 방식으로 말해주는 작품 같았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무한한 고독과 무한한 취약성을, 취약하지만 삶을 이어가려는 끈질긴 고집을, 분별없이 삶에 집착하는 고집을 보여준다.(15쪽)”라고 설명했습니다.
“<걷은 사람>은 꼼짝 못하게 굳어 있는 동시에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이 마치 넘실대는 수간 추위에 얼어버린 바다의 파도 같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밤의 미술관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감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은 그녀를 좌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 앞에 놓은 야전침대에 앉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수첩에 적다가 잠든 그녀는 7시에 갇혀있던 피카소 미술관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현재에 대하여 따로 적은 바는 없지만, 항암주사를 맞는다는 것을 보면 유방암 수술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걷는 사람>은 나처럼, 우리처럼 죽음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고. 안다는 사실이 그의 등줄기를 휘게 했고, 무한히 겸손하게 만들었다.(184쪽)”라고 적었습니다.
<걷는 사람>이나 작가 자신 역시 죽음을 향하여 걷는 존재였습니다. 걷기를 멈추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셈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라진 뒤 내 뒤를 이어갈 아이를 두지 않은 걸 자책’했습니다. 홀로 사는 즐거움에 빠진 비혼주의자들이 새겨들어볼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요즈음 부쩍 건강을 챙기고 살아오면서 남겼던 삶의 흔적을 정리하고 있는 저 역시 <걷는 사람>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
카소 미술관에서 밤을 지새우는 경험을 해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 작품 옆에 야상침대를 놓고 예술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느끼는 감성은 어떨지 생각만으로도 벅차고 설레인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진 그 기분을 혼자 상상하며 충만한 느낌에 들뜬 나였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과 함께한 긴 산책을 이야기하고 있는 리디 살베르의 [저녁까지 걷기]는 이런 내 궁금증을 풀어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고 얇지만 꽉 찬 책이었다.
위대한 예술가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을 직접 본 사람은 이 작품이 주는 이미지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 독특한 작가의 내면 세계가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리디 살베르는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걷는 사람]은 인간의 조건을 가장 적확하고 가장 가슴 저미는 방식으로 말해주는 작품 같았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무한한 고독과 무한한 취약성을, 취약하지만 삶을 이어가려는 끈질긴 고집을, 분별없이 삶에 집착하는 고집을 보여준다' 자코메티가 보여주는 취약성은 그가 삶에서 느꼈던 덧없음과 연결이 되어 작품의 질료가 되었다고 한다. 자코메티는 '나는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들의 취약성을 느껴왔다. 그들은 서 있으려면 매순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았고 언제라도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았다. 내 조각작품들은 그런 취약성을 닮았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고 취약성을 느꼈다면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리디 살베르는 처음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라는 제안에 거절을 여러 번 하지만 끝내 수락하게 되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꽤 혼란스러워하고 작품에 몰입하기 힘든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실제로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은 저자 자신의 억눌린 분노와 모욕당한 듯한 느낌으로 자신의 보잘것 없음과 하찮음을 상기시켜주는 시간이 되고 만다.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솔직하게 털어 놓으며 자신의 취약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글로 독자에게 내비친 모습, 공쿠르 상 수상자다운 수려한 글솜씨와 깊이 있는 사유가 [저녁까지 걷기]를 읽으며 마음으로 와 닿게 된다.
자코메티의 예술과 삶, 리디 살베르의 삶의 지향점을 느껴볼 수 있는 독특한 느낌의 [저녁까지 걷기]는 소풍같을 것만 같았던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이 리디 살베르의 내면과 외부가 상호작용하여 혼란에 빠트린 냉담했던 원인을 찾아 떠나는 일련의 여행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 결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는 전체를 필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중 꼭 기억하고 싶은 한 문장은 이것이다. '예술은 아무런 가치를 보여주지 않았을지언정 예술만큼 가치있는 것이 없었다'
[본 서평은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