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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없으니깐 생각해본 적 없는 대상. 그리움이 아무 맛 없는 듯, 텅비게 느껴졌던 것처럼 당신을 그려볼 생각도 하지 못했고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도 가지지 않았어요. 책을 펼치자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당신이 되었어요. 저 편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데 나한테 인사하는 건가? 헷갈려서 뒤도 돌아보고요. 두리번거렸어요. 한편 한편 글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당신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당신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의 당신도 그려보게 되었어요. 요즘 저는 같은 문장을 시작으로 한줄 글을 쓰는 100일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한번은 '아주아주 그리운 얼굴이 있어' 라는 문장이 주어졌는데 다른 분들은 그리운 대상에 대해 쓰셨지요. 그런데 저는 그리움이 뭘까에 대해 썼어요. '그리움'을 입안에서 요리조리 굴려보았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고 텅 빈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신도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생각했었어요. 책을 읽으며 누군가의 당신이 되는 경험으로 나는 당신을 그려보게 되었어요. 아직은 멀고 희미한 뿌연 형체로만 떠오르지만 어느날엔가 선명히 가깝게 그려지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 가능성만으로도 그리움을 살포시 알 것 같아졌어요. - 시인님이 십여년 동안 쓰신 글들을 모은 이 책은 에세이나 수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주인 없는 책상에 놓여진 사랑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다가 누군가가 가만가만 들려주는 자장가 같다가, 어두운 이의 혼잣말을 모퉁이에서 몰래 듣는 것 같다가, 달디 단 잠이었다가, 한낮의 시원한 바람 같다가, 고요한 밤의 풀벌레 소리 같았다. 읽으며 자주 장면이 선하게 그려졌다. 어떤 순간이 플래시백처럼 눈 앞에 되살아 났다. 그래서인지 책에 처음으로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곳곳에 놓인 빛나는 표현들에도 밑줄 긋고 마음에 담았다. 떠오르는 생각을 곳곳에 끄적였다. 다정한 글은 나의 당신이 되었고 쓸쓸한 글은 곁을 지키는 친구였다. 차갑고 시린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가을날, 이 책을 읽으며 곤하게 잠든 이의 이마를 짚어주는 다정한 당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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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 밤 읽기 좋은 책이에요. 괜찮다가 아니라 괜찮지 않다가 되어서 그림자를, 딱 그만큼의 그림자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빛의 것이며 그것은 슬프지도 아프지도 무섭지도 않으며 다할 때까지만 것이다. 이런 저녁에. 다음 저녁에도. 아마득한 먼 옛날과 미래에도 저녁은. p.39 한여름 커다란 나무의 부서질 듯 흔들리는 잎사귀 아래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당신은 내게 준다. 당신과 나의 사이에 바람이 분다. 작은 것들 흔들리고 나는 그것들보다 당신이 좋다. p.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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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너무 외로웠다. 봄은 느낄 새도 없이 회전해 버렸고 겨우 반바퀴를 돌아 다시 겨울이 되어간다. 적요를 생각했다. 당신을 생각했다. 잠들지 못했던 수많은 어둠을 헤집어 놓으니 나와 나, 그리고 저만치에서 지켜보는 자그마한 당신이 있었다. 자그마치 당신이 있었다. 유 시인은 내 베개에 자주 소곤거렸다. 가끔은 우리가 너무 가까워서 울음을 낼 수밖에 없었고, 나는 가만히 모로 누워 연신 귀만 만들어냈다. 라디오가 없어도. 주파수가 없어도. 베개에서 오래도록 물먹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당신의 안부가 별자리처럼 이어졌다. 반짝이는 것이 흡사 생존 신고 같았다. 기척만으로도 이어지는 생존 신고, 나와 당신은 다른 오늘을 같이 살아냈고, 같은 내일을 다르게 살아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또 다른 겨울을 준비한다. 수평선이 아득해도 파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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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곁에서 걷는 일은 참 경이롭다. 삶의 의미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것이니까. 한여름 커다란 나무의 부서질 듯 흔들리는 잎사귀 아래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당신은 내게 준다. 한 해 한 해 버리듯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삼스러운 자책이 밀려들 때 나는 늘 지금과 같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어떤 봄에는 씨앗을 심듯 기대를 품은 채 살아가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런 시절. 그와 함께 어떤 이름과 어떤 골목과 나란하던 그림자가 떠오른다. 아직은 좀 춥지만 곧 봄이 올 것이다. 그러면 가득가득 벚꽃이 필 것이다. 그러한 어느 밤엔 나는 여태 잊지 못한 것들을 되새기며 길을 따라 걷고 또 걷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쑥 떠오를 것이다. 무언가를 적고 있을 때. 그러다 어떤 책이 필요해질 때. 그리하여 한껏 몸을 세워 책장 제일 높은 곳에서 그 책을 뽑으려 할 때. 그때가 되면 나는 그래요, 하던 목소리를 잊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차츰 지워갈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산은 어떤 가족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하나, 딸 둘과 보낸 어느 해 장마 중에 아버지가 죽었다. 가족들은 우산을 쓰고 내내 울었다. 슬퍼할 시간은 왜 늘 모자란 걸까. 우산은 늙어버렸다. 부러진 살대와 낡아 버린 천 조각으로는 슬픔은커녕 기억을 가리기에도 부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