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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또노미아라는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첫 문장을 ‘지금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아우또노미아라는 유령이”’라고 시작한다면 지나칠까?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혼종적인 사상이 출현하여 ‘아우또노미아’라는 이름으로 논쟁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상을 낳고 또 사람들의 활동, 운동, 그 생기 가득한 힘들과 결합되어 등장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유령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 우리에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조정환의 말마따나 ‘안또니오 네그리’라고 하는 칠순이 넘은 정열적인 사상가는 어떤 이에게는 아나키스트로, 어떤 이에게는 맑스주의자로, 또 어떤 이에게는 테러리스트로 이해되고 있다. 그 어느 표현도 안또니오 네그리의 진면목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그는 지금 ‘천 개의 얼굴’로 비쳐진다. '어떤' 거울들에 말이다.
‘유령’이라 함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또니오 네그리는 제대로 이해되지도 못했다. 아우또노미아 라는 혼종적이고 복수적인 사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은 일종의 ‘선언’일까? 이 책의 제목을 단순히 ‘아우또노미아’라고 한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의 ‘선언’처럼 들린다. 1848년에 출간된 어떤 ‘선언’ Manifesto 의 출간이 하나의 ‘사건’이었다면 이 책의 출간 역시 하나의 ‘사건’이다.
올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이화여대에서 <맑스 코뮤날레="">가 열렸을 때, 누구도 한국의 구좌파 교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음에도 공공연하게 아나키즘을 공격하고, 들뢰즈를 비판하고,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을 비판했다. 마치 안또니오 네그리가 한국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모두가 ‘유령’에 대한 제각기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10여 년이 넘게 아우또노미아, 그리고 안또니오 네그리의 사상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 조정환이 내놓은 이 책은 둘러말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전면적으로 다룬다. 거울을 치우고 그를 그로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은 네그리에 대한 연구서이기도 하면서, 아우또노미아 사상, 그리고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입문서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우또노미아’를 다룬 책이라고 한다.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아우또노미아’ Autonomia 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탈리아어로 ‘자율’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아우또노미아 운동에 대해 그 내용에 대해 가치론, 계급구성론, 사회편성론, 제국론, 국가론, 코뮤니즘론, 조직론 등의 측면에서 다룬다.
최근 들뢰즈, 가따리의 책이 한국에 많이 소개가 되면서 스피노자, 네그리, 하트 역시 함께 읽혀졌다. 그것은 스피노자-맑스-들뢰즈-가따리의 계열 속에서 '네그리'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특이성보다는 다른 사상가들과의 연속성만이 강조될 위험이 있다. 사실, 한국에서 네그리는 아직 제대로 '소개', '이해'조차 되지 못했고, 따라서 '오해'의 소지는 매우 컸다. 이러한 때에 조정환의 새 책은 네그리의 사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반갑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에서 하나의 사건이다.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인상깊은구절] 변증법적 합(合)의 운동, 역사적 덧셈은 끝났다. 이제 뺄셈(subtraction)이 코뮤니즘을 움직인다. (285~286 쪽) 그러나 네그리의 생각은 결코 완결되고 닫힌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프롤레타리아의 계급구성과 재구성 과정을 참조하면서 부단히 자신을 갱신하는 열린 체계이다. 네그리는 맑스를 통해 맑스를 넘어서 나아간다. 우리 역시 네그리에 의지하면서 그를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삶이 계속되는 한 필연적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인류의 집단적 자율의 꿈, 코뮤니즘의 꿈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자율은 영원하다. (415~416 쪽)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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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이 출간되고 나자, 2001년 <제국>이 출간되었을 때의 설렘과 흥분이 다시 찾아오는 것 같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난 뒤에도, 87년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자본주의 전략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띠고 나타났을 때도, 우리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쉽사리 역사의 종언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회변혁 운동의 무기로 인식되었던 당과 노동조합 조직의 비민주적 운영과 다중의 저항적 활력을 체계적으로 가로막은데 대한 반발은 한편으로는 조직적 운동에 대한 냉소주의와 패배의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방향의 다중심적 운동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레닌주의적 혁명기획의 파산이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라면 오늘날의 혁명기획을 현실화할 새로운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전의 산업노동자계급으로 표상되던 근대적 프롤레타리아인가, 아니면 새로운 활력으로 천 개의 얼굴을 띠고 나타나는 어떤 새로운 주체성인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과 <다중>은 탈근대화한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윤곽을 그려내며, 바로 이러한 저항적 주체성에 대한 탐구의 결과였다. 안또니오 네그리의 책을 읽기 전에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조망해볼 필수적인 입문서로 <아우또노미아>가 자주 거론되어 왔다.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조정환의 저서 <아우또노미아>가 투옥과 감금, 오랜 수배생활과 사상적 전환이라는 저자 자신의 삶의 궤적처럼 수배, 투옥과 망명, 재투옥과 가택연금이라는 19~20세기 혁명가들의 수난을 고스란히 겪은 안또니오 네그리의 삶의 이력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점이다. ‘思想’이란 사상가의 삶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며 지금 바로 여기의 현실에서 어떠한 실천적 태도가 필요한가를 치열하게 되물은 흔적인 것이다. 네그리가 말하는 것처럼 제국의 네트워크가 전 지구를 포섭하고 있다면, 제국에는 외부도 없고 중심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탈출구 없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맞서 저항할 수 있을까? 자본은 디지털 정보지식사회에서 인간의 정신적, 정서적 능력까지 착취한다. 그래서 오늘날에 가장 헤게모니적인 착취양식은 기존의 산업-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물질적인 노동에 대한 착취를 넘어서 지적인 인간능력 자체에 대한 착취로 된다. 다중은 자본의 이러한 포섭양식 안에서 오히려 소통 능력을 발전시키며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저항을 일궈낼 수 있다. 이 책 <아우또노미아>가 다루는 내용의 핵심은 우리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꿈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자율의 꿈, 코뮤니즘의 꿈이다. 이 책의 제7장 다중과 코뮤니즘에서 저자는 “네그리는 코뮤니즘이 내세에서가 아니라 현세에서 발견되고 추구되어야 할 운동임을 밝힘으로써 코뮤니즘에 관한 일체의 유토피아적 구상을 파괴한다.”라고 한다. 또한 탈근대적 세계에서 산노동은 점점 더 비물질적인 차원에서 협력하기 시작하며 생산협력의 조정자로서의 자본의 역할을 몰아냄으로써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제 “변증법적 합(合)의 운동, 역사적 덧셈은 끝났다. 이제 뺄셈(subtraction)이 코뮤니즘을 움직인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장인 제11장 자율의 정치학과 활력의 윤리학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자율은 개체성의 근저에 살아 움직이는 영원성에 개개인들이 자신을 접목시키는 윤리적 활동이며 민주주의는 영원하게 되기의 과정이다. 이런 한에서 코뮤니즘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현실화하고 있는 다중의 실제적이고 집단적인 운동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코뮤니즘은 영원하다.” |
| '아우또노미아' 참 매력적인 말이다. '자율'이라고 번역된다고 한다. 초중고 12년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껍데기만 남은 '자율'은 아니라고 한다. 다행이다. 요점 먼저 얘기하면, 뚜렷하게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다중의 자율에 의해 '제국'이라는 새로운 거대권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제국'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건지, '다중'이라는 것을 하나의 실체로 규정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분명히 있긴 있겠지.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의 '경향'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는 이유는 내가 잘 알아서가 아니라, 이 책에서 분명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이 책은 그렇다. 조금 심하게 얘기하면, 네그리에 대한 중고등학교 문제집 같다고 해야할까. 마치, 시험에 나오는 요점만 정리해 놓은. 한편으로는, 네그리의 생각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에 앞서서, 그러한 경향들을 명료화 해야 하는게 남은 사람들의 임무라는 말에는 동감한다. 전반적으로 맑스와 네그리의 차이를 통한 새로운 맑스를 생성해 내는 과정이 이 책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다. 책 내용중 '잉여가치화'에 대한 '자기 가치화' 개념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마치 '되기'나 '생성'과 비슷한 것 같다.(이 말들의 정확한 뜻을 내가 안다면). 매력적이라서, 더 추상적이기도 하다. 찬사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서 그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