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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스탕달'의 <파르마 수도원>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을 갖고 같은 작가의 대표작인 <적과 흑>을 읽게 됐다. <적과 흑>에는 사랑, 사상, 정치를 비롯한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파르마 수도원>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더욱이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성격과 갈등구조가 <파르마 수도원>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많아 <적과 흑>을 읽으며 <파르마 수도원>을 함께 읽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 쥘리앵은 프랑스 남부의 소도시 베리에르(가상의 지명)에서 제재소를 하는 소렐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우악스럽고 무지한 아비와 형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유년기를 보냈으며 가정 형편상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뛰어난 외모와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쥘리앵이 지닌 타고난 총명함과 재기를 발견한 셸랑 사제가 그에게 라틴어를 비롯한 성경을 가르쳤고 쥘리앵은 배운 것들을 달달 외울 정도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셸랑 사제의 소개로 베리에르 시장인 레날의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간 쥘리앵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상류층의 삶과 예절을 배워나간다. 쥘리앵은 나폴레옹을 동경하고 자유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젊은이었기 때문에 그의 눈에 비친 소위 상류층의 삶과 허영은 거북하고 경멸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레날 시장의 집에 머믈면서 시장의 아름다운 아내인 레날 부인과 가까워지게 되는데 쥘리앵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자신의 의사를 따르게 하는 방식으로 정복감을 느낀다.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지위와 부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성취감은 더욱 컸고 때로는 레날 부인을 궁지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욕구)를 관철시키는 행위로 승리감을 맛보았다. 쥘리앵과 레날 부인을 평등한 연인 관계라고 볼 수 없었는데, 레날 부인은 지극정성으로 쥘리앵을 사랑하고 헌신한 반면 쥘리앵은 레날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그녀를 굴복시켜 성취욕을 채우겠다는 삐뚤어진 마음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둘의 비밀 연애가 레날 시장에게 발각될 위기에 놓이자 셸랑 사제는 쥘리앵을 브장송의 신학교로 보낸다. 그곳에서 쥘리앵은 자신의 두 번째 스승인 피라르 신부를 만나 엄격한 교육을 받는다. 쥘리앵이 어느정도 학교에 적응해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게 되면서 신학교 학생들, 그리고 사제들의 모습에서 종교계의 타락을 발견한다. 쥘리앵 자신도 이기적인 면과 가학적인 면 그리고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소위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귀족이나 종교인들의 내면이 그다지 숭고하지도 맑지도 않음을 직시했다.
신학교에서도 우수한 학생으로 정평이 났기 때문에 쥘리앵은 빠른 승진을 했고 피라르 신부가 신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파리 근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을 때 위대한 귀족이 라몰 후작이 비서를 구하는 것을 알고 쥘리앵을 소개해 줬다. 덕분에 쥘리앵은 파리로 거처를 옮겨 라몰 후작을 돕게 됐다. 라몰 가문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문가로 라몰 후작도 정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와 그의 집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들끌었다. 쥘리앵은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라몰 후작의 기대 이상으로 업무 수행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단단한 신임을 얻었고 상류층의 예절과 격식을 익혀나갔다.
라몰 후작에게는 미모의 딸, 마틸드가 있었다. 마틸드는 빼어난 외모만큼이나 재기발랄한 숙녀였는데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적 매력에 빠져 수많은 명문가 자제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젊은 귀족 남성들의 권태로움과 무기력함에 대한 멸시와 푸념을 담고 있었다.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열정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그런 남자를 꿈꿨으며 자신 또한 그런 남자의 상대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고 어느 순간 비범하지 않은 극단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남자의 결기를 사모한 마틸드는 쥘리앵에게서 자신이 꿈에 바라던 그런 남자의 모습이 서려 있음을 발견한다. 쥘리앵은 비천한 자신의 출신과 삶에 비해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피해의식과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고 자유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상류층의 문화와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고 마음 속으로는 늘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쥘리앵의 객관적 처지는 좋다 할 수 없었지만(오히려 미천한 지경이었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은 스스로에 대한 높은 자존심을 지니게 했고 그 자존심과 냉점함으로부터 발현되는 예기지 못한 행동들이 마틸드의 관심을 끌었다.
쥘리앵의 의도치 않은 행동들은 뭇귀족 청년들과는 확연히 달리 보였고 마틸드는 그 점에 푹 빠져 쥘리앵을 사랑하게 된다. 쥘리앵 또한 마틸드를 사랑하지만 자신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냉정하게 돌변하는 마틸드의 종잡을 수 없는 모습에 괴로워한다. 쥘리앵이 거리를 두면 그녀는 쥘리앵을 추종했고 그녀에게 다가서면 사랑의 열정은 급격히 식어버리고 이성을 토대로 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쥘리앵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이런 마틸드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늘상 사랑하지 않는 척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하자 마틸드는 더욱 더 열렬하게 쥘리앵을 사모하게 된다. 신분의 차이, 부의 차이로 인해 쥘리앵과 마틸드의 합법적인 결혼은 난관이었으나 마틸드가 자신의 아버지를 강하게 설득함으로써 결혼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오래전 쥘리앵이 베리에르에서 사랑을 나눴던 레날 부인이 자신과 쥘리앵 사이의 관계와 쥘리앵의 사람 됨됨이가 바르지 못함을 담은 진정서를 라몰 후작에게 투고함에 따라 상황은 반전된다. 마틸드와 결혼을 해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던 쥘리앵은 이 사실을 알고 강한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레날 부인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교회로 방문해 그녀를 살해하고자 총을 발사한다. 쥘리앵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길은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레날 부인이 죽지 않음으로써 살인죄는 면했지만 교회에서 살인 의도를 가지고 총을 쏜 것은 명백한 중죄였고 결국 쥘리앵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빗겨간 총상을 치료한 레날 부인은 쥘리앵에 대한 죄책감과 그를 사랑했던 감정에 대한 회한이 겹치며 그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아직도 식지 않았음을, 그리고 전보다 더 깊어졌음을 확인하며 다시 사랑에 불타오른다. 쥘리앵의 구명운동에 힘을 쏟던 마틸드는 쥘리앵과 레날 부인 사이에서 강한 질투심을 느끼지만 그 감정만큼 더 쥘리앵을 사랑하게 된다. 쥘리앵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은 레날 부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는 감정과 자신의 마지막을 그녀와 함께 했다는 만족감을 가지고 사형을 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날 부인은 자살로써 쥘리앵의 뒤를 따른다. 마틸드는 쥘리앵이 삶에 매달리지 않는 의연한 모습, 자신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 마틸드의 사랑에 복종하지 않는 냉정한 모습, 레날 부인을 더 사랑하는 모습 등에서 쥘리앵을 더욱 위대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교수형에 처해진 쥘리앵의 머리를 부여잡고 그의 이마에 키스함으로써 위대한 사랑을 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적과 흑>은 <파르마 수도원>과 유사점이 많다. 주인공이 쥘리앵의 빼어난 얼굴에 대한 묘사나 훌륭한 외모로 많은 여인들로부터 호감을 이끌어내는 부분은 파브리스를 닮았으며 자유주의적 사상과 기득권(세속적 종교인, 황제, 귀족 등)에 대한 반감 또한 유사하다. <파르마 수도원>에서 파브리스가 고모인 산세베리나 공작부인을 사랑한 것처럼 쥘리앵은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레날 부인을 사랑한다. 레날 부인은 쥘리앵을 사랑하는 마음에 취해 사리분별을 못하기도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키고 그를 향한 지순한 사랑을 유지한다. 레날 부인의 마음과 행동은 <파르마 수도원>의 산세베리나 공작 부인과 유사하다. 한편 막내아들이 아플 때 쥘리앵과의 불륜으로 인해 자신의 아이에게 천벌이 내린 것이라고 여기는 모습은 <연애대위법>의 앨리나를 떠올리게 했다.
<적과 흑>에 인상적인 글귀가 여러개 있었지만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다음의 문장이다. "... 법정을 나가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쥘리앵의 재판을 언급하면서 스탕달은 수차례 이 말을 반복해 사용하고 있다. 잘생긴 외모가 그 사람에 대한 인상 및 평가를 높이는데 기여한다는 것은 이미 학문적으로도 밝혀진 바지만 두 세기 전에도 잘생긴 외모는 파급력이 무척 컸던 모양이다. 외람된 얘기지만, 스탕달의 초상화를 봤을 때 스탕달은 잘생긴 사람을 부러워 하거나 어쩌면 질투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외모지상주의'가 싫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잘생기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 "법정을 나가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여러번 강조한 스탕달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바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TO THE HAPPY FEW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