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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2022추석]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추수밭 의심하는 인간
글, 사진 : 서원준(news@toktoknews.com) * 이 포스팅은 청림출판그룹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것으로 도서 소개, 구매가이드 형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필자로서는 8월 한 달 많고 많은 도서들을 다 읽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에 오른쪽 복숭아뼈를 보도블럭 모서리에 그대로 들이받게 되어 몇 주째 반 깁스 상태이다. 그 건강을 돌보다가 독서 시간을 놓치게 된 것이다. 너무나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추석특집 서평도 도서 소개로 대체하게 됐다. 이번에 소개할 도서는 조금은 진부하긴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철학적인 면이 굉장히 강한 인문학 서적을 하나 준비했다. 현 시대를 말할 때, “확증편향의 시대” 라는 표현을 쓴다. 유튜브에는 수 없는 가짜뉴스 또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든 뉴스들이 난무하는데, 이것만을 믿었다간 큰일난다.
“의심하는 인간” 에서는 왜, 갈수록 상식보다 음모, 평화보다 분쟁이 늘어나는 이유를 묻고 있고 현대사회에서 독단을 치유할 수 있는 회의주의의 지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철학은 의심에서 시작된다” 고. “의심하는 인간” 은 서구 철학사에서 철저하게 외면받아온 고대 회의주의를 새롭게 평가하고 일련의 계보로 재구성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회의주의의 덕목을 제시한다. 그동안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구성돼온 ‘이성 중심의 철학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회의주의자들이 일상에서 지니는 삶의 기술로서 변증술, 판단유보, 마음의 평안(평정심) 등을 제시한다. 어떤 의견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의심’을 새로운 인간의 원동력으로 제시하는 책으로 내가 ‘나’로서 바로 서고 행동하기 위한 철학을 제공해주는 책이다. 즉, 고대 철학을 현 상황과 접목시키는데 필요한 지식을 쌓음으로써 의심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인문학적인 성격이 강한 도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확신과 독단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고대 회의주의의 철학과 지혜를 소개한다. 소크라테스부터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계보와 그들이 펼쳐낸 치열한 논쟁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구성돼온 ‘이성 중심의 철학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도서 소개를 마치면서 이 책은 또한 데카르트가 발견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전에 오류를 범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견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몽테뉴의 생각을 읽다 보면, 세상에 우리가 판단하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통찰과 함께 일상에서 회의주의자가 누릴 수 있는 삶의 지혜와 기술까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추석에 책 선물을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고려해볼 책으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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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실이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올해는 대통령 선거와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뤄졌어요. 정권이 바뀌었고 이제는 민생경제를 안정화시켜야 할 때인데 여전히 선거판이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예요. 갑자기 과거의 사건들이 재조명되면서 정치 이슈로 변질되고 있어요. 확증편향의 시대에서 한심한 정치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의심하는 인간》 은 철학자 박규철 교수님의 책이에요. 이 책에서는 독단과 아집의 세계 속에서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위한 해답으로 회의주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어요. 왜 회의주의 철학일까요. 우선 고대 회의주의에서 언급되는 '회의 懷疑 , 의심을 품다, doubt'는 앎의 문제에 있어서 확실성을 의심하는 지적인 태도를 말하며, 대상에 대한 인식을 당연시하는 인식론적 독단주의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어요. 진리에 대한 추구라는 관점에서 보면 회의 또는 의심은 탐구의 개념과 동일시할 수 있어요. 회의주의자들은 특정 이론이나 체계를 주장하지 않고 지식에 대한 획득 가능성도 부정했는데, 독단주의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회의주의자들의 사유 안에 내재된 불일치성과 자기반박을 지적했어요. 독단주의자들은 신념 없이는 어떠한 행동도 불가능하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회의주의자들처럼 판단유보의 원리에 따라 신념 획득을 부정하는 건 실천이나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설득력이 없어요. 왜냐하면 회의주의자들은 어떠한 믿음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독단적 믿음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념을 가질 수 있고, 그 신념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에요. 서구 철학사에서 등장했던 고대 회의주의는 고전기 그리스 및 헬레니즘 시기 그리스 철학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산물이었고,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크게 네 명이 있어요. 크세노파네스와 고르기아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피론이에요. 아카데미 회의주의와 피론주의를 포함한 고대 회의주의 철학의 공통점은 마음의 평안과 삶의 행복을 지향했다는 점이에요. 그들은 삶의 불행과 마음의 불안의 원인이 됐던 독단과 아집, 지적 교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삶의 지혜와 기술을 제시했는데, 이는 호모 두비탄스, '의심하는 인간'의 탄생이라고 볼 수 있어요. 본래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의심이나 회의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한데, 철학자들은 합리적인 도구로써 의심과 희의를 다루고 있어요. 의심과 회의는 일반적 원리 내지 원칙이며, 회의주의적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진리라고 믿어온 확실성이 오류로 드러났을 때 그것을 포기하는 용기를 뜻한다고 해요. 이것은 항상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자세를 의미하며, 동양 철학의 중용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결국 회의주의 철학이 알려주는 삶의 기술이란 배워서 얻는 게 아니라 스스로 부딪혀 깨닫는 통찰이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는 이미 독단이 종교적 광기나 정치적 폭력과 결합되어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인류 역사를 통해 배웠어요. 이제는 회의주의적 지혜와 정신으로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할 때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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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의심하는 상태에서는 좀처럼 마음이 편안하기 힘듭니다. 한편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일 때, 마음속에서 혼란은 찾아보기 힘들죠. 그렇다면 의심보다는 확신이 낫고 편안한 마음이 혼란스러운 마음보다 나은가? 아마 각자 추구하는 가치, 그리고 각각의 상태나 그 정도에 따라 다른 답을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지금 저에게 선택권을 주고 어느 한쪽을 택하라면, 조금 괴롭긴 하겠지만 후자보다는 전자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아마 예전의 저였다면 그야말로 '의심'의 여지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겠지만요. 전자와 후자 모두에 깊게, 그리고 오랜 시간 머물렀고 또 그런 이들을 주변에서 지켜보면서, 후자의 상태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제한하는지를 크게 느꼈고 동시에 의심을 잘 다루어 좀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전자가 더 낫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물론 나중에는 또 달리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의심하는 인간>의 부제는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입니다. 철학자이자 교수인 저자 박규철 님은 이 책을 통해 고대 회의주의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통찰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오늘날 현대인의 불안과 불행의 이유를 정치, 경제, 종교 각 분야에서 자신의 가치에만 빠져 정치적 배려, 경제적 절제, 종교적 관용을 잃어버린 공동체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그 영향 하에 있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철학자들의 '회의주의'에 대한 탐구로부터 지금 우리의 독단과 아집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습니다. '고대 회의주의의 의미,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몽테뉴의 새로운 회의주의, 21세기에 소환된 고대 회의주의',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서양 철학사에서 '회의주의'로 잘 알려졌거나 '회의주의'에 영향을 주었거나, 또는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자로 여겨질 수 있을 견해를 제시한 이들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고대 회의주의 철학이 '부정적인 철학'이나 허무적인 문제제기에만 매달리는 비학문적인 학문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과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새로운 지적 태도이자 학문적 방법론이라고 말합니다(p.24). 그리고 책을 통해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철학이 21세기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함을 입증하려 합니다.
저자는 피론주의자 섹스투스의 이야기를 빌려, 고대 회의주의적인 삶의 기술은 가르침이나 배움에 의해 획득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비인간적인 믿음의 대상들이 반박되고 부정되는 순간에 드러나는 통찰 같은 것일 수 있다(p.362)구요. 저 역시 이 말에 동의합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경험이 반복된다면 그는 자신이 믿는 것들에 대해 이전보다 의심의 여지를 두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의심이 신경증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는 대신 저자가 말하는 '탐구'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이는 한 개인의 삶을 보다 성숙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구성원 중 그런 이들이 늘어날수록 공동체 역시 독단과 아집보다 관용과 배려의 태도가 늘어날 것 같구요. 그런 의미에서 '의심하는 태도'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나 우리 자신이 굳게 믿는 것에 대해 꼭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 받았으며, 내용에 대한 요구 없이 저의 견해가 담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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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인간
“코기토 에르고 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이 말은 근대 과학에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이성 활동의 결과물인 과학을, 확실하지 않는 의심스러운 어떤 것 위에 건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확실하고 오류불가능한 명제로서 다른 모든 인간의 지식을 보장하는 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끝없는 회의를 통해 결국 어떠한 조건에도 확실한 코기토 에르고숨에 이릅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이르기 위해 사용했던 것을 '방법적 회의'라고 하는데, 방법적회의란 인간은 어떤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는 회의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회의입니다. 다시말하면 아무리 의심하려 해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인식을 찾기 위한 방법입니다.
출판사 추수밭에서 출간된 ‘의심하는 인간’은 회의하는 인간에 대한 책으로서 오늘날 회의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한 책입니다. 현대인이 불안하고 불행한 이유가 독단주의와 자기중심성 때문임을 지적하고, 종교적 관용과 정치적 배려를 잃어버린 시대에 그 해결책으로 회의주의를 제시합니다.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자에 이르기 까지 고대 회의주의가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고대 회의주의가 지향하는 것이 진리와 자유임을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각종 도그마와 이데올로기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이 책에서 ‘회의’란 앎의 문제에 있어서 확실성을 의심하는 지적인 태도라고 정의합니다. 오늘날은 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다툼이 많고, 확실성의 지나침 때문에 분쟁이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적인 사고를 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집단의 주장만이 옳다고 확신하고 상대진영의 주장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용이란 종교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오늘날 종교영역에서 조차 자신의 도그마만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불행할 따름입니다. 그 해결책을 저자는 회의주의에서 찾습니다.
이 책의 집필의도와 목적이 잘 드러나는 문장이 있어 옮겨보겠습니다. “ 이 책은 현대사회가 교만과 독단에 갇힌 채 불안과 불행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적인 삶의 지혜와 기술을 비롯해 ‘호모 두비탄스’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고대 회의주의 철학이 현대인의 불안과 불행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서구 철학사에 엄연히 존재해온 고대 회의주의의 역사와 그 영향을 적극적으로 고찰하여, 현대인에게 필요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 그리고 그에 필요한 삶의 자세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전달하고자 했다. ”
고대의 회의주의는 수상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에 와서 새롭게 해석되고 발전합니다. 앞에서 말한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추구함으로써 고대 회의주의와 특성을 달리하지만 그가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회의주의를 선택함으써, 근대철학에서 회의주는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은 몽테뉴가 뿌린 회의주의를 수용하고 변형하는 과정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고 인간의 역사를 발전하게 했던 동력중 ‘호모 두비탄스’라는 인간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고, 확신으로 가득차 오만과 교만이 지나친 현실에 절실히 필요한 인간상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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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흔히 정보의 바다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과거 인터넷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이제 사라지고 이제는 정보 과잉, 정보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로 인해, 사람들은 이제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의 취사선택을 알고리즘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바야흐로 확증 편향 시대가 열렸습니다. 또한 1인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인터넷에 떠도는 얕은 정보, 독단, 아집, 말재주로 무장한 가짜 전문가가 진짜 전문가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최고 권력자가 나서서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이라는 정체 불명의 말을 통해 거짓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안티 백서 등 반지성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시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는 시대. 자신이 믿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 믿음을 키워가는 시대. 가짜 전문가가 진짜 전문가를 구축(驅逐)하는 시대.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흔들어대는 시대. 사이비 과학과 사이비 역사가 득세하는 시대. 미신이 다시 창궐하는 시대. 지금 이 시대의 적나라한 민낯이 아닐까 합니다.
“의심하는 인간 (박규철 著, 추수밭)”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박규철 교수입니다. 박규철 교수는 철학 박사로 전공 분야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이지만, 고대 회의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적 병폐 중 하나인 확증 편향과 반지성주의에 대한 치료제로 철학적 방법론 중 하나인 회의주의 (懷疑主義, skepticism)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진리는 얻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이라 말하며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야기합니다. 회의주의란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참된 지식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어떤 명제라도 그것이 참임을 확신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철학적 방법론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회의주의자들은 삶이 주는 불안과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을 호모 두비탄스 (homo dubitans)라는 새로운 인간상에서 찾으려 했고, 이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주장합니다. 그들의 사회 역시 충분한 탐구 없는 아집과 독단, 교만에 빠져 있었기에 탐구의 종식 이전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회의주의가 사회 전체적인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현대 한국에서 고대 그리스와 유사한 독단과 아집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정치, 경제, 종교 등 많은 사회적 영역에서 소통과 경청은 사라지고 독설과 장광설만 난무하는 독단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고 일갈(一喝)합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치료하기 위해 고대 회의주의가 주는 통찰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역설(力說)합니다. 이미 고대에 그 생명이 다했다고 생각했던 고대 회의주의는 여러 시대를 통해 지혜로서 계승되고 발전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γν?θι σεαυτ?ν)’며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였습니다. 독단은 무지임을 알지 못하니 빠져나올 수 없는 무지의 감옥입니다. 여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열쇠로 저자는 회의주의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의 이해를 위해 고대 회의주의 의미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그 다음, 고대 회의주의를 이끈 대표적인 철학자인 아르케실라오스, 카르네아데스, 피론, 아이네시데모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주요 개념, 논증 방식 등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회의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확증 편향 시대에 접어든 현대에서 고대 회의주의의 활용에 대한 저자의 의견까지 나아갑니다.
이 책, “의심하는 인간”은 스스로 독단의 감옥에 갇히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고대 회의주의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독서가 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의심하는인간, #박규철, #추수밭, #청림출판, #책좋사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주관에 따라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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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했을 때 "생각"이란 곧 의심을 뜻했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저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왜 그럴까? 혹시 저 말이 틀린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는 가운데 각성도 일어나고 새로운 진리의 발견도 가능해집니다. 저자는 p11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 역시 무지의 자각 그 중요성을 일갈한 언명이라고 독자에게 가르칩니다. 책에서는 서양 철학자들의 다양한 업적을 회고하면서 이 가운데 "의심(회의주의)"이라는 키워드가 관통하는 현대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쉽고 친절하게 되짚습니다.
"그리스어 doxa는 '믿음, 의견, 억견' 등으로 번역된다. 그 뿌리는 '보인다'라는 뜻을 가진 dokein이라는 동사이다.(p29)" 이처럼 고전을 공부할 때는 그리스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수인 듯합니다. 이 중 억견이라는 말은, 한자어의 "억"이 억지를 쓴다고 할 때의 그 抑입니다. 회의주의의 먼 근원은 모든 믿음은 억견일 수 있다는 태도인데, 무엇을 철석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억견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연예인에 대한 열광이든 간에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있기 힘듭니다. 오류일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마냥 유지하려 드는 믿음은 그게 곧 억견인 것입니다. 모든 믿음이 억견일 수 있다는 생각은 곧 세련된 회의주의 스탠스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특정 진영을 무작정 믿는 사람보다, 시쳇말로 "중립기어 박고 보는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에 대비되는 태도는 "독단주의자"입니다. 이들의 논변도 참 설득력 있는 게, 회의주의자들처럼 이건지 저건지 장담 못한다며 매번 팔짱만 끼고 있으면 어떤 행동도 안 이뤄진다는 거죠. 이런 행위불가의 상태를 "아프락시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p29). 영어의 practice 같은 단어의 어원도 저 단어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의심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의심이란, 언젠가 완전한 앎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잠정적으로 거치는 단계이며 언젠가는 극복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완전한 인식에 도달하기 어렵고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지간히 많이 아는 단계까지 이르렀어도 의심, 건설적인 회의는 아예 상비적인 태도, 방법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윤리 시간에 열심히 배운 데카르트의 태도를 놓고 언제나 강조되는 포인트가 그의 회의는 방법론적 회의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방법론적 회의가 아니라, 회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철학적 입장도 따로 있다는 소리입니다. "표상들의 불일치성, 그로 인한 자아의 혼란은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다가왔다(p31)" 이게 방법론적 회의입니다. 우발적이고 과도기적인 상태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의 그 자체에 큰 의의를 두었던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생각은 달랐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우리는 중등 교과서에서 소피스트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았고, 소크라테스나 이후 서양의 주류 철학자들이 이들 소피스트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극복하는 일련의 행보가 근대성의 확립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회의주의는 불확실성이 점차 증가하고 복잡계를 직면하여 더욱 유연해져야 하는 우리의 사고, 도전받는 원칙의 시대에 오히려 새롭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완전한 하나의 진리에 복종해야 오히려 마음의 평화가 생길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진리는 현실에서 부단히, 온갖 예외에 맞부딪혀 체면과 위신을 전혀 지키질 못합니다. 그런 불완전한 걸 진리랍시고 받들고 있으니 마음에 평화가 생길 날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카데미 회의주의이건 피론 학파건 간에, "판단유보, 파악 불가능성"을 공통으로 지향했으며(p34), "마음의 평안"에 대한 지향이 두 학파의 공통점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독자인 저 개인적 생각으로, 야구 경기를 볼 때에도 처음 입문할 때는 응원팀을 하나 만들어야 흥미가 생기지만, 계속 보다 보면 아예 응원팀 없이 경기 자체를 즐기는 편이 훨씬 마음이 홀가분한 것과 이치가 통할 것도 같습니다. 이런 게 철학으로 치면 회의주의겠죠(이기는 편 우리편).
"피론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항상 '마음의 평안'을 강조했던 현자와 같은 인물이었다.(p113)" 책에 따르면 피론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이에 반해 그의 스승이었던 아낙사르코스는 성품이 거칠어 제자인 피론의 그런 장점을 언제나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 참여했고, 도중에 인도의 나체 철학자들을 만났다고 책에 나옵니다. 원어는 gumnosophistai라고 역시 책에 나오는데, "나체"라는 gumno- 어근은 영어의 gymnastic이라든가 독일어의 학교 김나지움 등과 다 공통이죠. 아마도 나체 수행을 중시했던, 마하비라 바르다마나가 창시한 자이나 교 승려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전은 오늘날에는 사어로 취급받는 언어로 쓰인 것도 있고, 고전 헬라어라고 하면 현대 그리스인들이 쓰는 언어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한데, 많은 해석 입장 중 "인식론적(주관적) 입장"은 사람에게 원래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합니다(p127). 재미있는 건 이 책에도 나오는, 예컨대 dia tutto 같은 부분을 dia to로 바꾸어 해석하는, 즉 원문에 일종의 오기가 발생했다고 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E 젤러(에두아르트 첼러) 같은 학자입니다. 원문을 수정해가면서까지 더 잘 통하는 해석을 추구하는 입장은 철학 외에도 여러 분야에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도 명가(名家) 같은 학파가 있어서 공손룡 같은 이가 발전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 가장 빛나는 파트가 논리학, 논변술 같은 걸 이론적으로 아주 정밀하게 마련한 것입니다. p143에는 아이네시데모스의 열 가지 논증방식이 나오는데 이는 긍정의 논증과 부정의 논증이 동시에 성립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존재의 대상이건 사유의 대상이건 간에, 등치 또는 양립의 구조라는 건, 결국 모든 주제에 대한 판단이 "유보"되어야 함을 결국 암시합니다. 저자는 피론의 회의적 방법론을 최초로 체계화한 게 바로 이 아이네시데모스라고 합니다.
이어 피론주의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섹스투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에 의하면 이 회의주의에 대한 핵심 개념은 대립, 판단유보, 마음의 평안이라고 합니다. 대립과 판단유보 같은 기술적 개념이, 마음의 평안 같은 가치적, 도덕적 개념과 나란히 놓인다는 게 정말 흥미롭습니다. 섹스투스의 평가 중 또 흥미로운 건, 같은 회의주의 계보인 아카데미파의 아르케실라오스를 두고 "(회의주의와 대척에 서 있는) 독단주의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아카데미파를 플라톤 진영으로 거의 몰아넣는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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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한국사회는 정치적 배려와 경제적 절제, 종교적 관용의 태도가 멸실된 확증편향적 시각을 가진 불통과 불관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 책 "의심하는 인간" 은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삶의 지혜와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고대의 회의주의를 왜 21세기인 지금에 다시 소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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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늘날 사람들이 교만과 독단에 갇힌 채, 불안과 불행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고대 회의주의적인 삶의 지혜와 기술이 의심하는 인간을 탄생시켰다. 이것을 통해 현대인들이 필요한 마음의 평안을 얻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게 고대 회의주의자들이 어떻게 나왔으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걸 발전시킨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끊임없는 회의주의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삶의 행복을 지향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카데미 학파에 반발에서 나온 피론은 다른 회의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철학을 제대로 세운 사람이 섹스투스라는 철학자이다. 피론 회의주의를 누구가 알기 쉽게 정의를 해서 회의주의 철학을 세운 사람이다. 그러면서 아카데미 학파와 차이점을 설명한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몽테뉴이다. 중세 신앙주의에 회의주의를 접목하여 회의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 사상은 나중에 니체나 다른 철학자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추천한 내용만 읽고 책을 골랐더니 완전히 실패다. 철학 역사책이다. 읽기 너무 힘들었다. 내용도 잘 이해가지 않고, 몇 번이나 같은 페이지를 읽었는지 모른다. 다만 회의주의에 대한 이해도 조금 올라갔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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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확산되고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정보들은 더 빨리 더 많이 확대 재생산되는 현재는 어떤 정보가 신호인지 어떤 정보가 소음인 지 판단하기는 너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야 말로 철학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진리에 대한 추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의 또는 의심은 '탐구' 개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회의하다'는 '탐구하다'와 같은 의미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그로부터 영향받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자들을 탐구함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총 5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1부 "고대 회의주의의 의미"에서는 호모 두비탄스(의심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와 그 의미 그리고 고대 회의주의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는 피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인간과 삶의 문제에 있어서 '초연함'과 '태연함' 그리고 '마음의 평안'이라는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피론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그의 회의주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부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에서는 중기 아카데미 학파의 시조인 아르케실라오스의 회의주의와 신 아카데미 학파의 창시자인 카르네아데스의 회의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르케실라오스는 회의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두가지 개념인 사물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과 '판단유보'에 대해 핵심원리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식 불가능성'은 감각을 통해서든 이성을 통해서든 사물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고, '판단유보'는 인식 불가능성의 원리를 모든 사물에 보편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3부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에서는 피론학파의 시조인 피론과 그의 제자 티몬, 피론학파의 창시자인 아이네시데모스와 피론 학파의 완성자인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3부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고대 회의주의를 집대성한 섹스투스의 관점이었습니다. 섹스투스에 의하면 회의주의자들은 판단유보의 원리에 따라 '단언하지 않음'과 '판단유보'에 집중함으로써 무언가가 본성적으로 좋거나 나쁘다는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한 열렬한 기피나 추종을 피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섹스투스는 회의주의자를 독단적 믿음을 갖지 않고 스스로 느끼는 바를 보고하며 외부 대상에 대해 결코 확언하지 않는 철학자라고 정의했습니다. 물론 외부 대상에 대해 결코 확언하지 않는 것은 철학적 측면에서는 유용할 수 있겠으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러한 회의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저희들은 현시점에서 장점과 단점을 모두 고려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판단유보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4부 "아우구스티누스와 몽테뉴의 새로운 회의주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와 몽테뉴의 새로운 피론주의를 이야기 합니다. 중세 신학자인 아우쿠스티누스가 회의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저에게는 꽤 재미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신앙주의가 과연 회의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지도 궁금했습니다. 저자는 독단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진리탐구를 강조했던 아카데미 회의주의자들의 생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주의에 더 부합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그 대답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한 몽테뉴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마치 인간이 물을 잡으로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사물의 본질은 인식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몽테뉴는 회의주의의 탐구영역을 사물의 본성이 아닌 현상으로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5부 "21세기에 소환된 고대 회의주의"에서는 고대 회의주의가 현대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는 지식의 확실성을 지향하던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들에 의해 많이 위축되었으나 영국 경험론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과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해 재조명되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 철학은 진리에 대한 충분한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존재하거나 사유되는 모든 것에 대한 단정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이는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평안과 행복의 가치를 선사할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내내 '21세기에도 고대 회의주의는 유의미할까?'라는 질문에 매달렸고 '그렇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한 회의주의가 인간이 가진 지적자만심과 심적조급증을 치유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근 아는 이로부터 제 단점이 너무 고지식한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머리를 한대 얻어 맞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룰은 꼭 지켜야 한다고 배웠고 저도 그 룰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의심하는 인간이란 다시 말해 지식을 탐구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글귀를 읽으며 저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지식을 의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발전의 기회는 없다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특히나 어릴 때부터 대학입시를 위해 짧은 시간동안 많은 지식을 배우고 외우는 학습을 훈련한 저의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좀 허무하기도 한 얘기입니다. 물론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을 살아왔던 저는 그런 교육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한계가 있고 그 한계점을 부수기 위해서는 기존에 배우고 익혔던 패러다임을 모두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 터닝포인트가 되어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던 것들도 한번 더 사유하고 탐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진지하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