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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엔 그랬다. ‘좋은 건 좋은 것이고, 싫은 건 확실히 싫은 거야’라고 딱 떨어지는 깔끔한 판단을 좋아했다. 어중간한 판단, 어중간한 선택을 깔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하면 자로 잰 듯 너는 A편, 나는 B편이라고 정확하게 말했었다. 그런 모습이 우유부단하지 않고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이란 참 묘해서 ‘이거 아니면 저것’ 이라는 판단이 점점 어려워진다. 예전엔 오로지 내 입장에서만 상대를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내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같이 생각하게 되면서 내 입장에서 올바른 판단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선 바르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이곳을 오가는 페리 선. 그곳에서 술 취한 남자가 여자를 성추행한다. 페리 선 안, 밴드에 맞춰 노래 부르는 직원이 술 취해 성추행하는 남자를 폭행한다. 정도를 넘어선 무차별 폭행. 그렌스 형사는 이 사건이 단순 폭행이 아님을 직감하고, 폭행한 남자(존)의 신원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가해자 존은 미국에서 여자 친구를 죽여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에서 복역 하던 중 병이 생겨 죽은 것으로 확인 된다. 그렌스 형사는 경악하고 6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적하는데....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사형 소식을 들으면서도 크게 느끼는 것은 없었다. 말이 사형이지 우리나라에서도 진짜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형식적인 사형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피해자의 가족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라도 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만의 하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래서 죽기 전에 적어도 억울한 누명은 벗어야할 텐데 그 억울함을 벗을 수 있는 사람은 또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책을 읽으면서 피해자의 부모가 느끼는 절망과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그 광기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긴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무서운 집착과 복수가 제대로 된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게 했고, 그로 인해 아파야했던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잔인하다.
규범을 가진 사회는 살인하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는 말이오. 사형수동에서 몇 년을 보내고 나서야 그걸 이해하게 됐소. 어느 교도소를 가든, 수사상의 오류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기 마련이오. 나뿐만 아니라 교도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관리하는 사형수동에도 그런 무고한 사람들이 있소. (466) 솔직히 나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들을 위해 내가 낸 세금의 일부가 들어간다는 것도 싫었고, 그곳에서 과연 그들이 반성을 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들 중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곳에서 복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읽는 내내 조마조마 했고, 어떤 결말을 만나게 될까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 그곳에서 반전의 묘미를 맛보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극단적인 처방(?)일 수 있고, 두 남자의 인생이 한 남자에 의해 철저히 짓밟힌 것이 무섭도록 안타깝다. 만약 조금은 냉정한 제 3자의 입장에서 최초의 사건을 바라보고, 사건을 해결했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없었을 텐데...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서 사형 제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어떤 것이 최선의 선택이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일까? 사형제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단순한 논리에서 보다 다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점점 세상은 재단하듯 정확한 답을 요구하기 보다는 무수한, 창의적인 답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과연 사형제도는 있어야 하는 것일까? 사형제도가 없다면 더 무섭고 잔인한 범죄가 넘쳐나게 될까? 생각이 많아진 그런 하루다. |
![]() 댄스 플로어에서 상습적으로 여성을 성 추행하는 한 남자가 있다. 하필 그날 밤 그의 먹이가 된 여자가 첫사랑과 자신의 아내를 동시에 닮은 여성이다. 그는 참아보려 했지만, 분노가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결국 그 남자에게 폭행을 저지르고 만다. 다들 맞아도 싼 놈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켜보던 승객들의 불만신고가 있었고, 폭행혐의로 그 남자가 그를 고소 한다. 곧이어 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존 슈워츠는 그렇게 폭행 용의자로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런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그의 여권이 가짜로 확인된다. 사진, 출입국 스탬프 모두 다 위조여권이었던 것이다. 경찰에선 캐나다 대사관에서 여권을 조사하고, 여권번호, 여권소지인 신상정보 기록과 일치하는 걸로 확인되지만 결정적으로 여권의 사진과 존 슈워츠는 다른 인물로 확인된다. 인터폴에 지문정보를 넘기고 조사를 한 결과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그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사망한 장소를 감안해보아도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존 슈워츠, 그러니까 존 메이어 프레이는 6년 반 전, 미국의 오하이오 주 마커스빌 교도소에 수감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다가 형 집행 전에 지병으로 사망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6세 소녀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 사형수동에서 10년 넘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중에, 심근병증이라는 증상으로 자신의 감방에서 사망한 걸로 밝혀진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존 메이어 프레이는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는 교도소 사형수동에서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여기,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존 메이어 프레이. 열일곱이던 그는 열여섯 여자친구의 살해혐의로 기소되었고, 사형을 선고 받아 사형수동에서 10년을 보냈다. 살해된 엘리자베스와 그는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부터 사귀어온 사이였다. 그녀의 집안 곳곳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녀의 몸에 그의 정액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범죄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목격자도 없었고. 현장 어디에서도 그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에다 소년원도 두어 차례 들락거렸던 그의 이력이 혐오할 대상이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적합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주지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딸이 살해당했으니 누군가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했고, 권력을 이용해서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배심원들로 배심원단을 꾸리는 게 가능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그가 무고한지는 작품의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지만, 어쨌든 무고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다른 나라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스토리적인 재미를 위해 그가 '어떻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맞이했고, '어떤' 방법으로 지금의 삶을 살고 있었던 건지에 대한 부분은 밝히지 않겠다. 이 부분은 직접 책을 읽으면서 그 재미를 느껴봐야 하니까 말이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2퍼센트, 혹은 3퍼센트 정도는 잘못된 증거나 강압수사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경우라고 세계적인 연구결과가 밝히고 있다고 한다. 무고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얘기이다. 만약 이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사형이 집행되고 난 뒤에는 무죄가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형폐지론자들은 죄값을 목숨을 빼앗는 걸로 치르는 것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정의실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을 경우 사형이란 결국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것이고, 사형제도고 존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강력범죄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을 행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존치론자들은 억울한 사형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수사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이지 사형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살인자가 사형을 선고 받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졌고, 그들을 수감하느라 국민들의 세금이 쓰이는 것도 말이 안되고,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 유족들도 물론 알고 있다. 살인범이 죽는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가 치뤄 지지 않고,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수 십 년간 매일, 매 시간, 죽은 가족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그들에겐 내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증오하는 감정을 흘려 보내고, 슬픔과 회환, 안도의 감정과 함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는 간다. 단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사형을 당한다면 말이오. 단지 그것만으로도 모든 체제와 제도가 무너진단 말입니다. 그런 사실을 깨닫는다 해도 바로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어떤 보상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종종 언급하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복수극에 지나지 않다, 이 말입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수식어에 불과하단 말이오. 사회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그런 걸 믿습니까, 하인즈 기자? 사형이란 말이오,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난 그걸 매일 보며 살았으니까... 사형은, 단지 복수의 다른 말일 뿐이오. 국가가 제공하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도 존폐에 관해서 논란이 일고는 한다. 작년에 사형제도 존속여부에 대해서 여론 조사를 했을 때. 찬성하는 쪽이 과반수를 훨씬 넘어섰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지자, 사람들 모두 보다 강력한 처벌로 재범 방지와 유사한 다른 사건을 막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국가가 사람을 죽일 권한은 없고, 사법부가 오판을 할 가능성도 있으며, 범죄자의 인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법적 근거는 헌법에 기초한 것이고, 그 법적인 근거를 믿지 못한다면 애초에 사법부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범죄자의 인권과 생명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는 게 아닐까. 우선 이 작품에서 작가의 입장은 사형제도폐지론자 쪽에 가깝다. 무고한 누명을 쓴 주인공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고, 피해자의 가족의 슬픔보다는 그들이 막무가내로 사형을 요구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도 하고, 실제 죄의 유무보다는 국가적인 입장과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모습도 반영되어 있으니 말이다. 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법적 권한의 부당함도 맞는 말이고, 희생자 유족에게 적법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형제도가 무고한 국민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극적인 정의 실현으로 인해 이후 벌어질 각종 범죄들에 대한 예방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97년 이후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형대기수라는 명목으로 스무 명 가까이 수감 중인 걸로 알고 있고, 그들 흉악한 범죄자들을 위해 국민들의 세금이 매년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추리소설 학교에서 염건령 교수님의 범죄학 강의를 들을 때,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수치는 아니지만 실제 사형수 한 명당 1년에 쓰이는 금액이 5.000만원인데 그에 비해 피해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 500만원 정도라고 하셨던 걸 기억한다. 사실 가해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떠들면서, 정작 피해자의 보상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언론이든 경찰 측이든 배려가 그만큼 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무조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사형으로 판결이 나는 것도 아니고, 죄질에 따라서 합당하게 판결이 나는 것이므로, 사형제도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갈수록 사형제도 폐지 국가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강력범죄가 줄어드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과거에야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한 것도 아니었고, 강압수사에 의한 자백도 있었고 하니 오판에 대한 우려도 당연한 것이지만, 현재 국내 검찰들의 수사 기반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걱정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범죄자가 뉘우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개과천선만을 기다리며 피해자가 받아야 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묵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안데슈 루슬룬드와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여섯 권의 ‘그렌스 형사 시리즈’를 썼는데, 국내 출간작으로는 <비스트>, <쓰리 세컨즈>에 이어 <리뎀션>이 세 번째 작품이 되겠다. 무엇보다 이 콤비는 이력이 독특해서 화제가 되곤 했었는데, 안데슈 루슬룬드는 스웨덴 공영방송 사회부 기자로 활약하며 시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왔고 , 버리에 헬스트럼은 과거 전과자였으나 지금은 갱생하여 젊은 출소자를 돕기 위한 단체를 설립했다고 한다. 범죄에 있어서 누구보다 전문가인 두 사람이 써내는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은 극 사실의 스릴러이다. 덕분에 속도감 있는 전개와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거침없는 긴장감을 만들어내어 극의 몰입도를 높여주지만, 시리즈 물로서의 캐릭터가 가진 매력은 다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에베트 그랜스 형사 자체로서의 매력보다는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주제 의식과 속도감을 즐긴다면 더욱 재미있는 작품이란 얘기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존 그리샴의 '고백' 등 사형존폐론을 다룬 작품들은 기존에도 있었다. 그 작품들과 비교해서 <리뎀션>은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는지 기대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주인공이 '살기 위해서', 실제로 '죽어야만 했던' 그 기가 막힌 방법과 마지막 반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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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교수가 극찬한 소설책이라서 함께 주문했는데 책을 펴자마자 477페이지 짜리임에도 놓을 수가 없었다. 저녁 먹는 시간도 아까와서 그대로 몰입해서 다 읽었다. 중반 지나서 소설의 윤곽이 그려졌기에 왜 이렇게 길게 서술하는지 작가의 의도를 저울질해야 했다(^^) 그리고 역시 이런 장편에서도 빠질 수 없는 반전. 2006년 9월에 강동원 이나영이 주연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영화에 난 별 네개 ☆☆☆☆ 를 주었었다. (이 게시판에서 검색가능) 억울한 사형수 이야기 였기에 사형폐지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그래서 난 교육용으로 권장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한 죄수를 보면 저런 놈 왜 세금으로 먹이고 재우고 살려두냐는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완벽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인간의 판결로 인해 100명중 단 한 명의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생길 수 있기에 이 소설이 의도하는 사형제도폐지에 발을 둘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좋은 작품은 의식을 바꾸게도 한다. 이렇게 재미난 작품---사실 몇 달 전에 사 둔 셜록홈즈 전집을 꾸준히 읽긴 하는데 이 작품처럼 흡입력이 떨어져 진도를 못 내고 있다^^--이라면 사형제도에 아무 관심이 없던 독자들마저 깊이 인식하게 될 것 같다. 강추한다. 참 제목 redemption 은 "구원"이란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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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체감온도가 기분 나쁠 정도로 오슬오슬거립니다.. 나름 난방을 준비한 공간속에서 이렇게 조금만 벗어나도 오슬거리는 쌀쌀함이 장난이 아닌데 말이죠.. 이 초겨울의 쌀쌀함이 가득한 계절에 난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공간속에 놓여진 사람들은 얼마나 추울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자유를 구속당한 체 교도소에서 자신에게 집행된 형을 살아가는 수많은 재소자분들도 이런 어려움을 많이 겪을겁니다.. 물론 그들이 피해를 입힌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이라 생각하면 될 터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현재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인 경우 사형수들의 감정적 온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감에 더해지겠죠.. 물론 97년 마지막 사형이 집행된 이후로 15년 이상 사형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젠 잠정 사형폐지국가로 분류가 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형은 이루어질 수있는 것이죠... 사실 전 사형반대론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형을 꼭 집행해야한다는 입장에 놓여있지도 않죠.. 왜, 전 그런 입장에 놓여본 적이 없으며 그런 주변상황을 경험해본 적도 없어서 섣부른 주장을 하기가 그렇네요... 하지만 여기에 70년 후반부터 사형제가 폐지된 북유럽의 스웨덴에서 사형제에 대한 딜레마에 대한 스릴러를 보여줍니다.. 재미납니다..
안데슈, 버리에 콤비의 애버트 그렌스 시리즈의 한 권인 "리뎀션"입니다.. 사형제를 집행하고 있는 현재의 미국이라는 나라와 사형제가 폐지된 스웨덴의 입장에 대해서 두나라를 배경으로 한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시작과 함께 사형을 기다리는 한 남자 존 메이어 프레이는 초단위로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예민함을 어쩔 수 없이 익히게 됩니다.. 자신의 사형기일까지의 시간은 자신의 의자와 다르게 진행되는 중이니까요..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동년의 여고생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고 수감중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형기일은 조금씩 다가오죠..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들이 하나둘씩 사형을 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엄청난 공포감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존이 판결을 받을 당시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여인의 아버지 에드워드 피니건는 존이 사형을 지켜보는게 목적입니다.. 그에게는 존에 대한 증오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어느시점에 누군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사형수였던 존의 느낌이 강합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자유의 몸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미국이라는 곳이 아니라 미국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인 것이죠.. 그렇게 존은 과거의 미국 오하이오 마커스빌의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로서의 인생과 현재 스웨덴에서 또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 남자로서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에게 있어서의 미래의 삶은 어떻게 이어질까요, 아주 재미지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성이 제법 흥미롭습니다.. 두 작가의 전작들을 재미있게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이 작품 "리뎀션"도 나쁘지 않으실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두 분의 작가님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래도 이야기의 진행이 무척 빠르게 이어진다는겁니다.. 상황적 긴박감에 있어서는 여느 스릴러작가님들도 쉽게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흡입력을 보여주시는 작가님이시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이들이 내세우는 주제들도 만만찮습니다.. 대체적으로 범죄의 성향과 범죄의 구성에 대한 딜레마와 상황적 이중성을 다루는 구도가 아무래도 작가님들중 한 분이신 버리에 헬스트럼 아저씨가 교도소라는 배경에 대한 경험이 많이 작용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베트 그렌스라는 장년의 형사가 보여주는 고독함과 상황적 고립감에 대한 동정적 의도가 짙게 깔려있어 단순한 스릴러로서의 감성 이외에도 독자들의 상황적 공감도 잘 이끌어내주시는 것 같아서 독서에 허전함이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도 상당히 빠른 진행을 보이면서 이어지다가 마지막의 반전은 상당히 "뻥"집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반전의 의도로 보일 수 있구요, 또 다른 면에서 보면 그 반전의 느낌이 제법 억지스러워보이고 허술한 감이 없지도 않습니다만 역시 흥미로운 결말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듯 싶네요..
특히나 이 작품은 단순한 사형제에 대한 거부적 반응을 어중간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형이라는 개념에 대한 체감이 본질적으로 다른 두나라를 내세워 독자들의 판단을 스웨덴적 사형제 폐지의 의도를 짙게 깔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사형제는 사라져야한다는 주제를 깔고 가는거죠 - 작가들이 스웨덴 사람이니까요 - 초반에 말씀드린바대로 제가 이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드릴 수는 없지만 충분히 설득이 될만큼의 사형제 폐지에 대한 대중적 상황을 잘 만들어내신 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골치아프게 깊게 들어가서 독자들을 어지럽게 하지는 않으니 단순한 스릴러소설로 여기시고 펼쳐보셔도 상당한 재미를 선사해줄거라고 믿습니다.. 제가 전작인 "쓰리 세컨즈"를 읽어면서 스릴러적 재미만 따지고 본다면 개인적으로도 열손가락에 꼽을 수있을 정도의 즐거움을 주신 작가님이시라 이번 작품도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물론 "쓰리 세컨즈"가 더 대중적 재미가 많았는데 말이죠.. 알고보니 이 작품 "리뎀션"이 국내에서는 후발이지만 원칙적으로는 전작에 해당되더군요.. 아무래도 앞으로 더 좋은 스릴러소설을 선보여주실 작가님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척 기대되는 분들입니다.. 근데 이 작가 아저씨들 프로필 사진을 왜 범죄자처럼 찍은거야, 설정인가, 땡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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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트 그렌스" 경정 시리즈 제3탄!!!
"난 사형 제도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엄격한 사형집행을 공약으로 내건 주지사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내 아들 녀석이 진짜 범인이라면 녀석은 사형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니까요. 하지만...잘 모르시겠지만, 존은 살인범이 아닙니다." - 본문 증에서 -
스웨덴의 "안데슈 루슬룬드(Anders Roslund)"와 "버리에 헬스트럼(Borge Hellstrom)"는 "에베트 그렌스" 시리즈로 모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명콤비들이다. 소아성애범죄를 다룬 데뷔작 <비스트(The Beast)>로 스칸디나비아 최고의 스릴러에 주어지는 ‘글래스키 상“을 수상했으며. 영화화를 앞둔 두 번째 작품 <쓰리 세컨즈(Tre sekunder)>까지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헤닝 만켈 이후 반도 최고의 스릴러 작가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에 시리즈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리뎀션(Edward Finnigans upprattelse/Cell 8)>이 국내출간 되었는데 개인의 복수와 정의실현은 생각만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주제의식이 극명하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를 모델로 교도행정의 실태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지적하기도 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항해하는 오보 페리선에서 여성을 상대로 상습 성추행을 하던 남자가 밴드의 보컬에게 머리를 걷어차여 중상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존 슈워츠”라는 이 남자는 평소 그 성추행범을 눈여겨보다 마침 분노를 참지 못하고 순간 폭발하였던 것인데 스웨덴에 거주하는 캐나다인의 신분인 “존 슈워츠”가 폭행죄로 구금 조사를 받던 중 정신적 이상 증세를 보이게 되자 의혹을 느낀 "에베트 그렌스" 경정은 "존 슈워츠"의 신원조사에 착수한다.
아뿔사, 그 남자는 처음부터 수상했었는데 신원 조사결과는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존 슈워츠"는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에다 본명은 “존 메이어 프레이”였고 17살에 16살의 여자친구를 살인했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재소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사형집행을 2개월을 앞두고 6년 전 감옥에서 사망한 사람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 그가 지금 버젓이 살아 남아 스웨덴에서 다른 신분으로 결혼까지 해 아내와 아들까지 두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어찌 믿어야 할 것이며, 또 어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이 문제는 대외적으로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는데 9.11 테러 이후 미국과 EU 간 체결된 범죄인 인도조약으로 인해 즉시 본국으로 송환시켜야만 하지만 분명 이 남자는 즉시 사형에 처할 운명이 될 것이라 스웨덴 정부는 거부와 송환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사형을 반대하는 인권단체의 시위와 청원까지 줄을 이으면서 쟁점사항으로 번져가는 상황에 이르자 스웨덴 정부는 자신들에게 쏟아질 여론의 질타에 미국이 아닌 제3국으로 보내어 어떤 책임에서도 회피하고자 한다.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존 메이어 프레이”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대중은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조속한 사형집행을 촉구하는 여론으로 들끓는데...
스웨덴 국영방송국 사회부 기자였던 "안데슈 루슬룬드"와 과거 범죄자였던 "버리에 헬스트럼" 콤비는 이 작품 <리뎀션>을 통해 몇 개주에서 사형제도가 아직 살아있는 미국과 사형제도가 폐지된 스웨덴이라는 국가적 비교를 통해 사적복수의 어디까지가 정당한 것인지 묻는다. 정의 실현인가, 아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억울한 희생자를 감안하면 인권의 사각지대인가라는 무겁고도 민감한 이슈를 정면 돌파하고 있다. 사형옹호론자들과 사형폐지론자들의 논쟁은 쉽사리 좁혀질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사안인데 유족들에게는 보상이 될 것이며 범죄 예방효과라는 일석이조라는 해석에 일단 무게가 실린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당사자들에겐 죽은 자를 되살려내진 못해도 국가에게 보상을 요구함으로서 국가가 저지르는 살인에 대의명분과 면죄부를 실어주는, 어떤 의미에선 공범이 되는 셈이다. 사랑하는 이의 피를 보았으니 반드시 살인자의 피를 다시 뒤 짚어 써서라도 합법적인 살인으로 보답 받고 싶은 심정은 구경꾼들은 헤아리기 어렵다. 나 또한 그런 차원에서 존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고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피의자가 과학적 증거가 아니라 정황증거에 의한 유죄평결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복수 대신 보상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는 사형제도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형수들 중에 정말 무고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하늘만이 알 것이다. 이 책에서는 모든 것이 정리된 이후 억울한 희생자를 양산해서는 안 될 사형제도의 허점을 증명하고자 하는 모종의 실험이 가진 의도를 점차 드러내면서 허를 찌르고 들어온다. 그래서 무죄입증을 위한 시도가 이처럼 허망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정의와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말은 살아남은 자에게만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못했다면 그 보상은 또 어디에 청구해야한단 말인가? 진실을 호도하고 마녀사냥을 부추기는 여론이라는 압박도 무책임과 또 다른 의미의 매카시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피해가진 못한다. 연대책임을 요하는데.
또한 "스벤"과 "아니타" 부부 사이의 대화에서는 징벌을 받는 것은 정작 당사자가 아닌 남겨진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앗아간 행복에 신경 쓰인다는 말은 이 제도의 공명정대한 집행이 얼마나 절실한지가 주장된다. 시간에 쫓긴 졸속 집행 대신 한 치의 오차도 발생하지 않는 엄숙함이 필요하다. 그렇게 이 책은 주제 면에서는 확실한 색깔을 보여주기는 하나 “에베트 그렌스”의 잦은 짜증과 괴팍함은 동어 반복적으로 다뤄지기에 인내심을 수시로 확인시켜 준다는 점은 확실히 치명적이다. 뭔가 삶에서 새로운 활력을 찾아 신선한 바람으로 환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고 “마리아나 헬만손”과의 데이트(?)는 그나마 숨통을 트여줘서 다행이다. 그래서 그런가 봐. 단점 대신 장점으로 승화시킬만한 실마리를 투입하기 위해서라도 로맨스는 필요한가 봐. 더욱이 늙은 남자 “에베트 그렌스” 경정에겐 말이다. 하루하루 그녀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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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인기 콤비 작가 "안데슈 루슬룬드(Anders Roslund)"와 "버리에 헬스트럼(Borge Hellstrom)"의 "에베트 그렌스"시리즈 세번째 작품 "리뎀션(Edward Finnigans upprattelse/Cell 8)"입니다. 이 콤비 작가들은 데뷔작 "비스트"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고의 범죄 문학 상 '글래스 키'상을 수상하면서 이제는 유럽을 넘어 미국에서 까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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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뎀션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검은숲
“데드맨 워킹!" 죽은 이는 말이 없다, 없어야만 한다.
스웨덴의 소설가인 안데슈 루슬룬드(1961년~)와 버리에 헬스트럼(1957년~)이 공동으로 작업하여 펴내는 첫 작품인 <비스트>와 <쓰리 세컨드>에 이어 에베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이다. 사실,
사진이 이렇게 나오기에, 누가 안데슈 루슬룬드이고 누가 버리에 헬스트럼인지는 구분할 수 없지만, 추측건데, 안경을 쓴 사람이 안데슈 루슬룬드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오가는 페리 선에서 존 슈워츠라는 직원이 상습 성추행범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가 이를 고소하고 에베트 그렌스 형사는 존 슈워츠를 체포하여 감금하는 중에 존 슈워츠의 정도를 넘어선 극악한 폭력이 단순폭행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해자 존은 미국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범죄자 '존 메이어 프레이'이며 6년 전,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교도소에서 죽어나간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존 메이어 프레이는 미국 오하이오 주에 위치한 마커스빌 교도소에서 탈옥하고 이어서 캐나다 국적을 가진 존 슈워츠로 신분 세탁을 하여 헬레나와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교도관 버논 에릭센과 로서 그린우드, 버짓 비어코프라는 가상의 의무관들은 사형제도 철페를 주장하는 모임을 통해 만나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언뜻, 존 메이어 프레이가 이 소설에 주인공인 듯 보이지만, 마지막에 책을 덮을 즈음에는 존 메이어 프레이보다는 늘 방관자로 보이던 버논 에릭센이라는 사형집행자 또는 교도관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는 실제적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백을 주장하는 존 메이어 프레이라는 남자와 딸 엘리자베스의 복수만 끝나면 모든 것이 그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는 에드워드 피니건이라는 남자. 존 메이어 프레이와 그의 아버지 루벤 프레이가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하고 있고, 특히, 존 메이어 프레이 자신이 엘리자베스 피니건을 사랑했다고 끊임없이 고백하고 있어서, 진범은 존 메이어 프레이가 아니라, 혹시 그녀의 아버지인 에드워드 피니건이 아닐까? 하는 되지도 않는 추측을 했었다. 물론 보기좋게 낙점을 받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존 메이어 프레이의 재 사형이 결정나고 집행되는 과정이 시간별로 상세하게 나열되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이 집행이 번복되고 그가 살아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으로 초조함으로 마지막 부분을 조바심내며 읽었는데, ㅠㅠㅠ 뜻대로 되는 일은 없나보다.
개인적 복수와 정치적 이유로 악용되는 사형제도의 현실을 극사실주의로 완성해낸 범죄 스릴러소설의 걸작이라고 평가한다지만, 지나치게 사실적인 죽은 시체의 묘사와 살해과정을 읽으며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어둡고 섬뜩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인다. 아마도 버리에 헬스트럼이 범죄자로서 겪은 경험이 이렇게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했을테지만, 어쩌면 그래서 스웨덴 원서는 더 많이 있지만, 번역되어 수입되는 것이 어려움을 겪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5.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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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남자가 철창 뒤에서 시간을 세고 있다. 일초, 이초, 삼초...초가 모여 분이 되고, 분이 모여 시간이 되었다. 여자친구를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존 메이어 프레이. '살인사건'이라는 태풍에 휩쓸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정신을 차려보니 감옥에 들어와 있었고, 오늘, 자신에게 친철하게 대해주었던 옆방 사형수 마브의 형이 집행되었다.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그는 8번 감방에 갇힌 채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쏟아내는 독설을 견디며 자신에게 남겨진 삶이 얼마나 되는지를 헤아린다.
다른 남자가 있다. 배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 일한 지 오래되었지만 배의 동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그의 눈앞에서 한 남자가 열정적으로 춤추는 여자의 뒤로 다가선다. 사랑했던 여자와 현재 사랑하는 여자를 연상시키는 그녀. 그 남자가 여자의 뒤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순간, 결국 그는 노래를 멈추고 성추행범의 얼굴을 발로 가격해버린다. 두통과 불안함으로 밤을 보낸 그에게 배의 경비가 다가와 경찰이 그를 조사할 것이라는 말을 전달한 후부터 그는 과거가 강렬한 힘으로 자신의 발목을 낚아채는 것을 느낀다. 순간의 실수가 불러온 과거라는 파도. 그것을 피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
2. 실제 범죄자와 전직 기자의 결합을 내세우며 [비스트]로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들의 세 번째 작품이 출간되었다. 형사 에베트 그렌스 시리즈라고도 불리는 이들 작가의 작품은 매번 발표될 때마다 챙겨읽는 편인데 특히 이번 작품 [리뎀션]은 그 동안 출간된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겠다. 6년 전에 이미 교도소에서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던 존이 스웨덴에서 살아있는 불가사의한 상황을 파헤치는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 안에서 사형제도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작가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형제도에 대해 소신있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존 메이어 프레이에 대한 사형집행은 어느새 정치 쟁점으로 변해 있었고 주지사의 권위가 걸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프레이는 죽어야만 했다. 권력이 그렇게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사형존치론자들이 전리품처럼 흔들어댈 또 하나의 새로운 트로피가 될 터였다. 그리고 에드워드 피니건에게는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법적 보상의 기회이기도 했다. 반면, 버논 에릭센에게는 무고한 국민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의미했다. -p189, 190 사실 사형제도의 필요성 여부에 대해 나는 어떤 말도 못하겠다.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누군가가 사형당하기를 바라는 사건을 겪어본 적이 없고, 그저 단순히 뉴스를 통해 흉악한 범죄를 접할 뿐이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범인들을 욕하면서도 사형이 과연 희생자 가족에게 답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범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희생자 가족에게 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용서해야 한다고? 범인이 죽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그 사실을 유족들이 정말 몰라서 사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용서해라, 사형제도는 필요하지 않다-등의 말을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3. 그런데. 작가들은 다른 문제를 낸다.
예전 드라마인지 책에서인지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위해 열 명의 범인을 놓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을 들은 듯 하다. 한 번 죽으면 끝. 후에 그 사람이 무죄라는 것이 밝혀지고 국가에서 유족들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 또 하나의 희생만 늘어났을 뿐. 죄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간단하지만, 용의자는 계속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고 증거도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버리면 그 죽음은 누가 보상해야 하는 것일까.
4. 작품은 사형제도의 필요성 여부와 더불어 만약 존이 범인이 아니라면 진범은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제시한다. 또한 사랑하는 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분노에 집착하는 에드워드 피니건과 자신의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렸음에도 끝까지 그를 믿는 존의 아버지, 존의 새로운 가족이 된 헬레나와 그들의 아들, 그 가족들을 생각하는 형사들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묘사하며 각자가 처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답을 생각하라며 재촉한다. 그 앞에서 나는 여전히 우물쭈물.
사실 진실이 밝혀질 거라는 생각을 못하고 사형제도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읽느라 결말 부분에서 약간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정답.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취한 것 또한 결국은 '살인'이라는 생각에 역시 마음이 복잡하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같은, 그런 게 정말 필요한 것일까.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인데 왜 타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인지 무섭고 슬프다.
5. 이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세지에 안데슈보다는 버리에 작가의 목소리가 좀 더 강하게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진다. 과거 범죄자였던 그.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그가 이 작품을 썼을 때 마음은 어느 쪽을 향해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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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뎀션... 무슨 뜻일까...영어 사전으로도 프랑스어 사전으로도 비슷한 뜻이 나온다. 구원 , 속죄. 무언가에 대한 또는 누군가에 대한 속죄를 의미하는 단어. 아무런 신경 쓰지 않고 읽었던 단어의 뜻을 뒤늦게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니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한번에 이해가 되었다. 일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 챕터씩 끊어 읽었고 마지막엔 달리고 싶어서 일부러 주말에 읽었으나 또 다른 방해요소들로 인하여 또 읽을만하면 잘리고 해서 그 느낌이 살지 않았다. 가장 핵심적인 하이라이트에 들어서는 몰입을 하긴 했지만 왠만하면 한 세시간 잡아놓고 한꺼번에 죽 달려 읽어야 제대로 된 느낌이 사는 책이다. 나중에 비스트와 더불어서 한꺼번에 쌓아놓고 다시 읽을 책 중 하나.
이 이야기의 저자는 두명, 익히 아는 비스트의 작가들이다. 일반적인 작가들이 아니라 그중의 한명이 전과자라는 사실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더욱 생생한 현장감은 두드러지는 책이다. 비스트에서 성폭력에 시달린 딸을 대신하여 처단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번 책에서는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제도인가 또는 없어져야 할 제도인가를 놓고 그것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각기 대표자격으로 범인에 의해 딿은 아버지가 등장을 하고 그 반대의 입장으로는 사형자들을 관리하는 교도소장이 등장을 한다. 그들 둘은 한 여자를 사랑했던 사이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그들의 입장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6년전 미국에 있었던 사형수 존. 그리고 지금은 스웨덴에 있는 한 아들의 아버지인 존.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닮은 여자를 성추행하는 남자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 이유로 체포당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부터 시작이었으니 그가 예전에 죽었어야 하는 사형수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나라간에 또한 자신이 주장하는 신념하에 강하게 대비가 된다.
스웨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에베트형사의 활약이 대단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솔직히 존이 너무도 쉽게 잡혀 버렸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그를 미국으로 송환 할것인가 말것인가에 관련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스벤이나 마리안나의 활약도 크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당사자인 존의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 들여주고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할수 있도록 거들어 주는 것 뿐. 이후 존이 미국으로 보내지고 나서는 더욱 할일이 없어진다. 그부분에 있어서는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사형제도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활약은 또 다른 이야기에서 기대를 해보록 할수 있겠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어지던 이야기는 현재로 돌아와 한주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한주 안에서 존은 잡히고 미국으로 송환을 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한다. 이야기의 반전은 거기서 시작이다. 과연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던 그는 진실로 무죄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사랑하던 엘리자베스를 죽인 진범은 누구인것일까. 사형제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하루하루 날짜를 표시해가면서 살아가는 사형수처럼 요일이 나올때마다 조마조마한 느낌을 같이 느끼면서 읽게 된다. 존의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일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찬성파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한국에도 강력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더 강력해졌다. 성격에 나오는 것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까지는 아닐지라도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는 성폭력범이나 너무 심한 강력범죄의 범인들은 일벌백계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지만 실행되지 않고 있는지 꽤 오래되어 실질적으로는 사형제도가 유명무실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이런 범죄가 많아진 것이 아닐까.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사형수들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진범이 아닐 경우라면 어떻게 하느냐 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한국의 경찰을 믿고 그들의 능력을 믿고 그들이 무고한 사람을 잡아 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또한 그들에게 사형이라는 선고를 내리기까지 고민했을 사법제도를 믿고 두번 다시 그들이 이 사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강력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죄를 주장한 존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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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인상적이다. 존일까? <집나간 책>에서 서민교수가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된 책이라고 소개했다. 나 역시 정말 잔혹한 범죄자에게는 사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 다른 책을 보면서도 이 책이 내내 뇌리에 남아 읽게 되었다. 읽고 난 후, 서민교수처럼 완전히 생각이 바뀐 건 아니지만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의도하는 사형제도의 헛점과 모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일단 성공을 거둔 것 같다. 그 누구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 확신한다. 스릴러라는 장르로 사회문제를 언급하고 이렇듯 강하게 마음에 남길 수 있다니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아마도 그것은 책의 공동 작가 두 사람의 특이한 이력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도 같다. 특정사건이나 주제를 파헤치는 탐사보도 기자 출신의 루슬룬드와 불우한 청소년기를 거치며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전과자가 개과천선하여 다른 전과자들을 돕는 헬스트럼, 그들로 인해 교도소의 세계가 리얼하게 펼쳐지고 마지막까지 소신을 지키는 그들이 멋지다. 미국 오하이오주, 사형수 감방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책은 시작한다. 17살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존 메이어 프레이, 그와 많은 나이 차이가 나는 흑인 마브,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 거냐고 묻는 마브를 통해 존은 서서히 사람이 되어간다. 사형수들에게는 빛과도 같은 존재 버논 에릭센, 딸을 잃고 딸의 목숨을 앗아간 녀석의 사형을 기다리는 에드워드 피니건... 스웨덴 스톡홀름 선상에서 아내 헬레나와 옛여친 엘리자베스를 꼭 닮은 여자가 성추행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존 슈워츠는 격분하여 절대 해서는 안되는 폭행을 저지르고 만다. 그렇게 숨기고 싶은 과거가 서서히 드러나고, 단순 폭행 사건으로 생각하고 접근했던 에베트 그렌스 경정과 그와 같이 일하는 부하직원 스벤과 마리안나 헬만손 경위는 위조여권 하나가 기나긴 이야기의 서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500여쪽에 달하는 책인데 스릴러라 잘 읽히며 재미있고, 묘사도 탁월하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맞게 된 한 남자가 끝내 어떤 운명에 처해질 것인지 책의 말미까지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마지막을 몇페이지 앞두고 이루어지는 대반전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웬만한 스릴러에는 놀라지 않는 베테랑 독자들도 허를 찌르는 반전에 열광할 것이다. 북유럽 최고의 스릴러에 주어지는 글래스키 상을 받은 작가의 이 소설을 읽어보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