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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 정해진 운명에 저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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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황동규 시인은 영화 <편지>를 통해 유명해진 ‘즐거운 편지’의 작가다.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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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황동규 시인은 영화편지를 통해 유명해진 즐거운 편지의 작가다.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뭇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p. 15]

 

아마도 내가 처음三南에 내리는 눈을 펼쳐서 즐거운 편지를 읽었을 때에는 그저 지극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영화의 잔향(殘香)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느낌이 틀린 것은 아니다. ‘즐거운 편지자체가 작가가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인에 바치는 글이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마음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사내처럼.

 

이는 그의 또 다른 시 얼음의 비밀을 보면 더 잘 연상되는 부분이다.

 

얼음의 비밀

 

눈이 그쳤을 때, 바람이 불 때, 내 외롭지 않을 때

나는 갔었다, 너의 문 닫는 집으로

얼은 벽에 머리 부비고 선 사내에게로

너의 입가에서 웃음으로 바뀌는 너의 서 있는 자세에로.

나를 성에 사이로 이끌던

헐벗은 옷 틈새의 웃음소리, 내민 살의 내민 살의 웃음소리.

네 앞에 누가 잠잠할 수 있을 건가

누가 네 머리 부비는 웃음을 끊고 싶지 않을 건가.

허나 배반하고 말았다, 눈을 가리고 얼은 듯이 쓰러지며

배반하고 말았다, 나를 벗어나려 하는 말들을. [p. 25]

 

물론 이 시집을 펼쳐보면, ‘전봉준’, ‘三南에 내리는 눈’, ‘계엄령 속의 눈처럼 제목만 봐도 참여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글도 많다. 하지만 그런 시()도 넓게 생각하면, 계란으로 바위 치듯이, 패배가 예정된 것처럼 보이는 운명에 저항하는 몸짓이 아니었을까 

 

괜히 베토벤의운명이 듣고 싶어지는 밤이다.

w******f 2018.09.05. 신고 공감 7 댓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