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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단편을 만난다는 것은 묘하게 껄끄럽다. 단편하면 난해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이 책 역시도 사람 참... 기분 묘하게 하는 힘이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마다 자주 보아온 구효서라는 작가... 너무 자주 봐서 그랬을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어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 이력을 보면서 그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러면서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거... 내가 무서워(?)한다는 난해한 단편 아니야? 역시나... ^^ 이런 불안감은 틀리지 않으니...
첫 번째 단편은 ‘바소 콘티누오’로 이 부자 관계는 묘하다.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나누지 않지만, 함께 음악을 듣는 것으로 삶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막내아들인 화자는 아버지의 완고함이 싫지만 그들은 나란히 걷는다. 그리고 둘은 참 많이 닮아 있다. ‘별명의 달인’의 화자는 학창 시절 별명을 잘 지었던 친구를 찾아간다. 화자의 아내는 “당신은 제대로 아는 게 없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주위 사람들의 특징을 잘 찾아 최고의 별명을 짓는 친구.. 그 친구라면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란 생각을 한다. ‘모란꽃’의 화자는 자신이 기억 하는 펄 벅의 소설 모란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책은 한 권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번역을 했으니 여러 권인 셈이었고, 내용을 조금씩 달리 알고 있다 해도 그것 모두 모란꽃의 내용임을 알게 된다. ‘6431-워딩.hwp’은 병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암을 앓고 있는 형과 지체장애자 동생의 기묘한 소통에 대한 이야기 이고,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은 정화백의 생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화양연화’는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온 메일을 제목만 읽고 지워버리는 이야기를 그렸다. ‘저 좀 봐줘요’는 남편과 아끼던 딸을 함께 잃고 가슴속이 텅 비어버린 여자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렸고,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타국에서 걸려온 누나의 전화로 전한 말 “아무것도 안 보여” 속에 숨겨진 의미를 이야기 한다.
솔직히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 하지 않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바소 콘티누오’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엄마와 딸의 관계와는 다르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참 묘하다. 서로 닮지 않았으면 좋겠는 부분을 닮았음에도 서로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하나가 바로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일 것이다. 이 책의 화자도 그렇다. 아버지의 완고함, 고리타분 함을 싫어하지만 형제 중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 또한 화자인 막내다. 그런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그들은 음악 앞에서 하나가 된다. 음악 앞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느끼고 이해한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아들이 함께 좋아하는 것. 음악을 듣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고 같이 음악을 들은 후 꼭 근사한 저녁을 함께 한다. 분명 묘한 부자관계지만 그 모습이 정겹다.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지만 함께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같이 누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나는 그게 참 부러웠다. 처음 만난 구효서라는 작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단편이 아니라 장편을 만나고 싶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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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이일수록 함부로 대한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에게 받은 상처는 회복되기 어렵다. 두고두고 마음 깊은 속에 자리 잡아 그것은 거대한 괴물처럼 자라기도 한다. 곁에 있어 소중한 줄 모르고 산다는 식상한 말로 대신할 수도 없다. 구효서의 『별명의 달인』은 이처럼 가장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 주변의 모습처럼 편안하고 한편으로는 생경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화양연화」, 남편과 딸을 잃고 삶을 내려놓은 여자의 공허한 눈빛에서 절망을 읽는 「저 좀 봐줘요」, 갈망하는 삶을 찾아 고국을 떠난 누나의 목소리에서 어떤 불안을 감지하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 상대의 특징을 꿰뚫어 별명의 달인이 된 친구라면 아내가 왜 떠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은 「별명의 달인」까지 구효서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가장 가까운 이에 대해 잘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닮았다는 걸 우리는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보통의 부자 관계와는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 「바소 콘티누오」에서 음악을 향한 열정이 그렇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막내아들. 자신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모시고 같은 공간에서 그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살아간다. 음악에 대한 애정이 가장 완벽하게 닮은 부자의 모습은 나란히 걷는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주보기는 분명 아니지만 외면도 아니다. 마주보기보단 더한 마주보기라는 걸, 알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완강히 마주보기를 꺼리는, 두 사람에게 작용하는 동일한 종류의 의지가 실은 모종의 연대거나 유대라는 걸. 그리움, 혹은 면구(面灸)의 유대.’ (「바소 콘티누오」, 25~26쪽)
아버지와 아들이 그러하듯 「모란꽃」에서는 어머니와 딸이 그렇다. 어린 시절 집에 있던 펄 벅의 소설 표지의 꽃에 대한 형제들의 기억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저마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의미나 목적을 두지 않고 글쓰기를 하는 화자는 엄마의 중얼거림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답을 듣기 위한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견디기 위한 말들이었다. 형제들의 기억 속에 표지가 모란꽃 아니더라도 그 책을 기억하며 그 시절을 공유할 수 있었다.
‘엄마는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숨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상 참 모를 것투성이여, 나가 왜 사는 중 알았으면 진즉 못 살았을 것이다…… 엄마의 엄청난 말들이 허공에 흩어졌다. 글로 쓰니까, 허공에 흩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쓸모 있는 내용도 아니고,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들이었으나, 흩어져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란꽃」, 80쪽)
‘그 속절없는 일에 애초부터 무슨 이유나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질 않은가. 버릇처럼 숨처럼 그래온 것뿐이니까. 40년간 하염없이 이어져오기만 한 거였으니까. 그리고 이어져갈 거니까.’ (「모란꽃」, 112쪽)
그게 무엇이든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놓치고 절망의 늪에서 그 존재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삶은 이전과는 다른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를 붙이자면 암 투병 중 병원에서 사라진 형과 언어장애가 있는 동생의 이야기「6431-워딩.hwp」에서 동생에게 말(글)을 가르쳐준 형은 그런 존재였다. 형은 모두에게 사라진 존재지만 동생은 끊임없이 그와 소통하는 기이한 이야기.
‘나에겐 말과 글이 따로일 수 없다. 허공에서 흩어지되 무시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거듭 뜻을 일깨우는 게 형의 말이라면, 내 말은 언제든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글이 된다.’ (「6431-워딩.hwp」, 142쪽) 가족과 함께 읽으면 하나의 추억을 소환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숨쉬는 것처럼 편안하고 쉬운 일상은 어디에도 없지만 숨쉬는 것처럼 지속되는 일상에 대하여. 닮았지만 닮지 않은 이야기들, 알 것 같지만 어렵게 다가오는 이야기.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가족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가족의 이야기. 구효서는 똑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하나 같을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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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행간에 공명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연주자들의 명연들... 그 요소마다 스며있는 사연과 추억이 공간처럼 같이 존재하고 있어서 눈 뜨면 감나무있는 그 집앞 풍경이 아파트 베란다의 을씬년스러움이 실황공연장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고... 별명의 달인
느끼면 분명 같음에도 현재의 것을 부정하게 된다.
넌 별명만 잘 짓는게 아니었어.상대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았지.그러기위해 넌 아주 고통스러워했어. 그랬던 만큼 상대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짚어낼 수 있었던거야.별명은 거기서 나오는 거였지.공포와도 같은 네 두려움의 결과 였달까...... 동생이라 불러줘서 나는 동생이 된 것 같았다. 외로웠던 별들이 별자리로 이어졌다. 없던 나무를 심자는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서 그림의 풍경을 보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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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구효서 작가의 소설을 몇 편 연달아 읽었고, 그 깊고 넓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제일 먼저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바로 [별명의 달인]을 비롯한 그의 단편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별명의 달인]이란 이름을 걸고 이번에 신간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나온다 나온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알리미 문자를 받고 보니 설렌다.
<목차>
바소 콘티누오 ‥‥‥‥‥‥『현대문학』 2011년 2월호
우와 이 센스 있는 목차 좀 보게! 목차에 이렇게 발표지면이 실려있다니!
구효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깊이와 넓이(이것은 오래 글을 쓰신 소설의 달인들의 소설을 읽다보면 대부분 느끼게 된다.)보다 글에서 느껴지는 세련되고 젊은 감각이었다.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아도 토속과 고귀함을 넘나들고 안정과 실험을 동시에 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다양한 시도들이 작가의 글을 늙지 않게 하는 힘이겠구나 싶다. 마치 이 소설 속에 멋스러움과 가당찮음의 경계([6431.hwp])라는 말이 나오는데 구효서의 소설이 그 둘을 동시에 오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일단, 읽은 바 각각의 작품에 대한 짧은 후감과 밑줄 친 것들을 올려본다. 더불어 한 번 더 읽게 될텐데 그후 리뷰를 남겨보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막연한 듯 선명하고, 길을 보여주는 듯 슬쩍 감추는 통에 사실 재주없는 글로서 정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다만, 그 단단한 느낌을 품고 있을 뿐이다.
<바소 콘티누오>를 읽다보면 마주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꼭 마주보아야 마주보는 것인가 하는 생각, 같이 하고 있다면 그것이 마주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 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같은. 두 사람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함께하는 응시의 순간들이 모여 세월이라는 시간의 숲을 이루었다. 숲은 길어지고 우거지고 깊어졌으나 등뒤 풍경으로만 저물어갈 뿐, 그들은 그것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란히 앞을 바라보는 사이 배경의 숲은 저 홀로 그윽해질 뿐이다.
<별명의 달인>을 읽으면서는 타인에 대한 내 마음대로의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만들어버린 타인의 이미지에 대한 강박,,,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와이프 별명이 베아트리체였어. 라즈니시가 말했다. 애칭이었지. 물론 내가 지어준. 와이프도 나름 그걸 소중하게 여기며 지금껏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나한테 말하더군. 라즈니시 입술에 옅은 미소 같은 게 스쳤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뭐랬는데? 그가 물었다. 웃기지 마셔. 나, 베아트리체 아니거덩!
<모란꽃>은 내가 여자라 그런지 삶을 살수록 공허한 느낌이 드는 탓인지 다음 문장에 공감하며 몰입했다. 어쩌면 어떤 실체와 맞닥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지금껏, 나와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무엇 하나 나와 착 붙어 있질 않았다. 늘 거리감이 있었고, 비켜났고, 부유하는 듯했고, 비위가 상했고, 불명확했다. 애착을 못 느꼈다. 그랬으면서,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거다! 라는 기분을 언제나 목말라 했다. 어딘가에 내 진짜 삶이 준비돼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 그곳을 못 찾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면 애가 탔다. ------집이 점점 가까워졌다. 뒤돌아, 왔던 길로 가버리고 싶었다. 어딘가에 있을 내 별로.
<6431-워딩.hwp>은 왠지 구효서 소설가가 소설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겐 말과 글이 따로일 수 없다. 허공 중에 흩어지되 무시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거듭 뜻을 일깨우는 게 형의 말이라면, 내 말은 언제든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글이된다. 그렇게 지금껏 적은 글이 6430개의 파일로 남았다.말의 궤적이었다. 지나온 자국으로서의 궤적이 아니라, 내 삶이 나아가고자 했던 이정표로서의 궤적.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은 좁은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혈연 뿐이겠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그들은 그자리에서 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하는 만큼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모호한 거리를 두면서 말이다. 말이 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품고 산딸나무는 새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만큼 서 있을 것이다. 당신은 새집에서 살 만큼 살 것이다. 나는 마을을 오르내리며 기념관의 지붕과 마당과 산딸나무를 바라볼 것이다. 개울은 원래 그랬다는 듯 흐를 것이고, 은백양 잎은 바람에 하얗게 뒤집힐 것이다. 정화백의 그림처럼.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는 <화양연화>에 나오는 '넌 정말 나와 너무 똑같아서 슬프다'라는 구절이 추억에 젖게 한하다. 그런 사랑,,,
<저 좀 봐줘요>는 다른 작품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몽환적이기도 하고, 은비라는 존재가 신비롭기도 하다. 이국적이기도 하고 토속적이기도 한 느낌이 공존하는 단편이었다. 소설이지만 어떤 영상이 펼쳐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삶의 피로감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재주와 웃음은 의도된 분망 뒤의 허약함까지 다 감추진 못했다. 마침내 태평양 끝까지 다다르고야 만 고단함. 더이상 오갈 수 없는 교착. 누나는 사이판 동북단 반자이 절벽 위에 표표히 옷자락 나부끼며 홀로 서 있는 거였다.
이미 많은 팬들이 있는 구효서 작가이지만 만약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소설집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바소 콘티누오>가 재밌다면 <랩소디 인 베를린>을 읽어보면 좋겠고,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저 좀 바줘요>가 재밌다면 <라디오 라디오>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것은 아니라 권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지만 시작은 [별명의 달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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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내게 미치지 못하였다. 소설을 읽는 때도 시절과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한 하루하루만큼이나 막막한 느낌이었다. 소설이 재미있을 리가 있겠나 하는 그런 체념이 먼저 생겨서 그럴 수도 있었을 일이다.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다. 우리가 산다는 게 이렇게 불합리하고 우울한 일인가 싶게, 현실과 맞춰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었다.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너를 이해한다고 여기는 나를 이해한 것에 그칠 뿐이고, 또 네가 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온전히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억하는 것과 네가 기억하는 것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데, 우리가 통한다고 말할 때의 온도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족 간에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남남끼리는 얼마나 다를 것인가. 끄덕이는 만큼이나 솟아나는 원초적인 절망이라니.
구효서의 소설을 너무 오랜만에 읽었나 보다. 이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좋아했던 것인지 그 배경조차 잊어버렸다. 이름만큼은 확실히 남아 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해 아쉽다. 내가 변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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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굉장히 느끼는 하나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거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자료를 찾다 보면 한번 읽을 것을 두 번 읽고, 두 번 읽을 것을 세 번 읽어가며 정리하니 어떤 것이든 처음보다 더, 두 번보다 세 번이 더 와 닿는 거라. 가끔 타블로그의 포스팅들을 보면서 불필요한 정보까지 너무 많아진 세상이구나. 싶다가도 내가 이렇게 쓸 때면 ‘정보’와 ‘기록’에 대해 새삼 고맙다. 너무 이기적인가. 하여튼!
‘별명의 달인’은 구효서 작가의 소설인데 내공 없는 내가 읽기에는 약간(이라고;) 힘들었다. 책을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고 ‘별명의 달인’이라는 제목이 좋았다. 소설이란 특성 때문인지 쉽게 읽히기는 하는데 바로 바로 스며드는 책은 아니었다. 글들 사이에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 그런데 묘하게도 단편집들 하나하나가 향하는 곳이 한결 같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뭔지 도통 모르겠다. 조금 더 매끄럽게 책을 읽기 위해 약간의 정보를 보탠다.
구효서 작가는 ‘숨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다. 등단 후 26년 간 끊임없이 글을 써왔고 누군가는 이런 그를 보며 ‘오직 소설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그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물으니 “가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번 세상에 없는 것을 지어내야 하는 작가의 시간을 돌아보니 남아있는 모든 글이 가짜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어느 날 책장에 꽂힌 30여 권의 제 책들을 봤는데 ‘내가 정말 저 글들을 쓴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글을 쓰려 한 줄 한 줄 고민했던 시간은 사라지고 화석 같은 문장만 남아 있는 사실이 끔찍했죠. 그래서 박스에 모든 책을 넣고 베란다 한 구석에 치워버렸어요.” 다시 구효서 작가는 펜을 잡았다. 독자들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소설집 <별명의 달인>은 ‘글’과 ‘말’, 즉 ‘언어’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담긴 책이다.
- 북DB <별명의 달인> 작가 구효서 인터뷰 ‘시간이 지나면 문장도 변한다’ 중.
단편집을 다 읽고 나면 ‘해설 | 고독의 권장’ (_275) 에서도 깊이 있는 해설을 해준다. 알면서도 인터뷰를 긁어 온 것은 평론가의 글이 아닌 작가가 어떤 상황에서 이와 같은 글을 썼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글은 작가의 기분과 상태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까.
많은 서평, 인터뷰 사이를 둘러보면 유독 그의 생각을 잘 담고 있는 단편이 몇 가지 있다. ‘모란꽃’, ‘별명의 달인’이 기본으로 아마 ‘6431-워딩.hwp’,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에겐 어느 하나 깨물어서 안 아플 수 없는 손가락이겠지만. 그런데 나는 그 중에서 ‘화양연화’가 왜 그리 좋았는지 모르겠다. 아직 말랑말랑해서 그런가, 추운 겨울이어서 그런가. 닿을 듯 말듯 한 그들의 만남이, 어렵고도 애매한 관계가 처음 본 사람과도 몸을 부비는 오늘날에 비해 너무 이질적으로 다가와서 그런 것일지도.
책을 읽다 보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에 부딪힌다. 내 기준에 조작된 기억들, 그리고 우리의 생각에만 치우쳐 입 밖으로 내는 수많은 단어들 사이에서 구효서 소설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고독의 시간을 선물한다. (……) “그래. 너무 걱정하지마. 세상 사는 거 다 그렇고 그렇지 별 뜻 있겠니.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이야” (「나뭇가지에 앉은 새」, 273쪽)라는 식의 읊조림에도 위안의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_290)
해설에 있는 글 처럼, 한 세상 놓은 듯 하면서도 우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ㅡ내 입장으로 생각하고 내뱉는 말들ㅡ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담담하게.
진심이었던 거지. 무심코 말하는 게 진심일 때가 있어. 그래서 실언이 진심이 되기도 하는 거야. 말은 한숨 같은 거지. 한숨이 말이고. (_127)
지극히 개인적으로 또 글들에 포장을 덧대 책에 의미를 부여한다. ‘별명의 달인’은 소설치고 내게 너무 어려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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