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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브런치 : https://brunch.co.kr/@uxinside/40 목차 1.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인가? 1.1. 드러난 진리를 사유하는 것 1.2. 개념의 분리 1.3. 논리적 반란 1.4. 창조적 반복 2. 모순의 문제 3. 시차적 해결 철학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평소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진 못했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철학은 고대 희랍어의 필로소피아(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파생된 단어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생관,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1]이라고 한다. 사실 철학에 대한 이같은 정의는 이전에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삶 [2] 그 자체였다. 아마 인간성에 대한 부분만 떼놓고 보자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일 듯 싶다. 그렇다면 인간성 탐구라는 측면에서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은 무엇일까? 그것이 이번 글의 중심내용이자 책을 읽는 가운데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으로, 사실 바디우의 주체를 알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철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이를 잠시 미뤄둘만큼 매력적이었다. 1.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인가? 1.1. 드러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디우를 진지하게 접했던 것은 그의 책 『사도바울』 [3] 을 통해서였다. 당시 깊이 와닿았던 부분은 '진리는 주체적인 것'이라는 그의 설명이었다. 사건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고 이에 충실한 것, 비기독교인 철학자가 바라본 바울의 주체적 진리란 그런 것이었다. 이번 책을 통해서는 여기에 한 문장이 더해졌다.'철학은 진리의 출현 이후에 도래하는 것' 이라고 말이다. 마치 바울의 주체성과 교리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그의 방식처럼, 이미 드러난 현상을 두고 깊이 사유함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진리의 출현은 바디우가 '조건들'이라고 명명한 원인, 즉 과학, 정치, 예술,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철학은 이들 조건들에 철저히 '의존적'이다. (『조건들』이라는 그의 책은 이후에 다뤄볼 예정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철학의 특징을 헤겔을 빌어 날이 저문 후에 날아 오르는 지혜의 새 '올빼미'에 비유한다. 경험, 앎, 삶이라는 낮을 지나 밤의 시작과 함께 도래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철학이 진리를 드러내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고 믿고 있던 필자로서는 놀랄 수 밖에 없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에 이르기 위해 철학을 했던 게 아니었나? 철학자가 자신의 결론을 굳건히 믿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면 그 또한 진리가 되는 것인가? 문득 진리는 주체적인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러한 의구심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는 것이다. 1.2. 개념의 분리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에 맞춰 필요한 법안을 마련하는 오늘날의 입법 행위처럼, 새로운 진리의 출현은 이를 정의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이는 철학이 진리의 출현 이후에 도래하는 것이라고 하는 앞의 내용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통해 다른 이들의 지혜의 정체를 파헤치는 산파술을 창안하게 된다. 이 덕분에 자신이 지혜에 대한 기존의 정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예술가, 정치인, 장인 등) 와는 다른,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적인 지혜’를 갖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지혜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정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탐구로 인해 분열되어 새로운 질서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바디우의 설명은 철학의 그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1.3. 논리적 반란 철학은 대상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기존의 방법, 또는 관념을 새롭게 하는데 이를 수 있는 ‘진리 이해를 위한 방법론’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진리로 나아갈 수 있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같은 분리는 기성 질서와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개개인이 믿고 있는 논리 체계는 정신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를 변경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이미 많은 내용물들이 그 구조를 전제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구조가 오래될수록, 안에 담긴 내용물이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새로운 개념이 주는 충격은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철학이 혁명, 반란, 봉기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로, 바디우는 이러한 철학적 행위에 대한 좋은 정의를 시인 랭보를 빌어 ‘논리적인 봉기들’ 이라고 이야기 한다.
1.4. 창조적 반복 바디우가 알튀세르를 통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철학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그것은 철학의 원형이 반복적으로 순환한다는 뜻으로 이를 줄여 철학의 미래는 그것의 과거와 동일하다고까지 표현한다. 물론 이는 지향점이 유사하다는 차원이지 그것의 내용마저 동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첫 부분에서 밝혔듯 바디우는 철학이 각 시대마다 발견된 진리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 되어 왔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출현은 곧 욕망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들을 자극하는 이들 진리로 인해 철학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2. 모순의 문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철학이 사유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새로운 진리의 출현 덕분이다. 그러한 진리는 비철학적 조건에서 연유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새로운 언어를 통한 개념의 분리는 기존 사유 질서에 대한 투쟁이자 상실로 사회 속에 자리매김 한다. 이러한 철학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두 관념을 충돌시키게 마련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유와 평등(정의)이다. 이를 대표하는 방식은 의견(자유)과 진리(평등)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자유는 철학의 출발점에 있어서 필연적이다. 논리적 봉기를 가능케 하는 현존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때 개개인의 의견은 자유의 이름 아래 온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철학적 과정 이후, 합의된 규칙에 도달한 이후에는 더 이상의 자유는 불가능하다. 오직 가능한 것은 이에 대한 복종 뿐이기에 민주주의는 철학의 원점에서는 필연이지만, 철학의 종점에서는 난점[4]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문제가 철학사의 반복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상대주의(자유)를 주장하던 소피스트에 반대해 보편주의(진리)를 내세운 소크라테스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 두 개의 관념은 여지없이 우리를 고민에 빠뜨릴 것이다. 개인 욕망의 자유로운 확장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피해와 마주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개의 관념 사이에서 우리가 더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하는, 특히나 사회 전반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자유의 관념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 또한 우리는 결국 법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필명이 Veritas, 즉 진리인 이유이다), 그러한 진리는 자유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은연중에 자유를 평등보다 중요시했던 것 같다. 소신있는, 솔직한 표현에 열광하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는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약자들의 의미있는 항변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플라톤과 함께하는 바디우는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그것도 평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개인의 자유를 누려야 된다는 것은 상식으로 여겨진다. 즉, 개인의 자유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타인의 자유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주여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평등을 자유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고대 아테네 소피스트들의 주장처럼 개개인은 모두 다르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고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각자의 생각을 존중한다고 하는 것이 여러모로 간편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고민할 필요 없이 모두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하기에 우리는 내적인 갈등에 놓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3. 시차(時差)적 해결 중요한 것은 바디우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1.2. 개념의 분리) 중요도와 그 실행 방법을 구분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의 공정한 삶을 향한 이념은 다른 어떤 가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란 그러한 구조 안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라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지 않고서는 외부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결국 이를 위해 필요한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이다. 우리가 온전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견의 전적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열린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의 낮이 충분히 도래한 이후에, 우리는 철학의 밤을 열어야 한다. 하나의 지향점 아래 서로 다른 순서로 최선의 방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최선의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어떠한 판단 없이 아이디어를 모으고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채택하는 우리의 다양한 기획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소위 발산 후 수렴이라고 하는 훌륭한 방식은 둘 사이의 철저한 양립을 요구한다. 둘은 어떠한 경우에도 공존해서는 안되며 그 순서가 뒤바뀌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이미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방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체감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인 듯 싶다. 높은 곳에 계신 등 따시고 배부른 분들은 타협을 향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는 비단 정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성과가 생존과 직결된 일부 기업들 안에서의 몸부림에 그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바디우는 공산주의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해방의 집단적 행동이 철학이 요구하는 사유의 규약들과 구별되지 않는 주체적 상태[5]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위험한 표현이긴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개념이 보편적 평등이라는 정의를 함의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틀 안에서 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절대성이 부정되는 상대주의의 시대에 그 상대성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더욱 엄밀한 법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는 인권 선언 하에서 우리는 분명 개별성을 존중할 수 있는 보편성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더해 공동체의 보편적 행복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미 우리 모두는 철학자라고 하는 그의 외침은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 분과가 우리 곁에서 멀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준다. 바디우가 책의 제목을 통해 투사라고 지칭한 것은 이러한 이들,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가운데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고뇌하는 ‘철학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 사유하는 일반인이 보다 많아지고 생각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을 때 우리의 자유는 분명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구 철학을 연 것은 소크라테스(보편주의)였지만, 소크라테스를 있게 한 것은 소피스트(상대주의)였다는 점이다. 언제나 진리는 비철학적 조건으로부터 출현하니까. [1] 위키피디아, 철학, https://ko.m.wikipedia.org/wiki/%EC%B2%A0%ED%95%99 [2] 필자의 리뷰 - 인간 소크라테스 이해하기, 『소크라테스의 변명』, https://brunch.co.kr/@uxinside/39 [3] 필자의 리뷰 -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바울이 필요한 이유, 『사도바울』, https://brunch.co.kr/@uxinside/5 [4] p. 57 [5] p. 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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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다른 가능성, 다른 세상을 모색하는 것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것은 실제 아주 간단하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피곤한 삶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피곤하고 머리 아프다. 그런데 그 피곤함을 감내하고,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길이란다. 그길을 포기하면, 그저 우리는 '먹고사는' 데만 신경 쓰는 인간-동물에 머물 뿐이란다.
철학은 늘 지배적인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새로운 규범의 창조를 통한 질서의 역전 가능성을 제기하는 개입의 장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철학자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실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 다시 말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지배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게 하는 것,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규범적 질서를 모색하게 하는 것,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규범적 질서의 창조야말로 그 임무라고 말하는 바디우는 우리로 하여금 "실천적 사유"를 지켜나갈 것을 요구한다. -해제를 겸한 옮긴이의 말 중에서-
현대를 '이념'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극단적인 역사의 장을 넘기며 인류는 21세기로 접어 들면서 '지구촌'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허나 이 지구촌이라는 말은 교과서적인 말로 사용될 뿐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여전히 동과 서, 남과 북이라는 긴장감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남쪽에서는 '세계화'에 북쪽에서는 '주체화'에 갇혀 서로 평행선 위를 달리고 있는 중인 거다. 민족공간에 두 원칙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과연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다. 극단적인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는 쉽다. 상생을 위한 길을 모색해 내기가, 새로운 이념(사상)을 만들어 내기가 벅찰 뿐이다. 달콤한 자본주의에 심하게 매료되어 온 듯하니까.
분명한 것은 '세계화'의 철학인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와는 무관하다. 부자들에게는 조세 감면, 환경 보호 정책의 후퇴, 교육과 복지 정책의 포기를, 세계적 차원에서는 '부익부 빈익빈'만을 낳은, 인간적 모습마저 잃은 자본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새로운 실천을 요구할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게 바디우의 '투사(鬪士)'는 자본주의의 어두움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치의 조건들'을 사유하는 주체의 개인을 위한 의미로 다가왔다.
민주주의, 정치, 철학이라는 세 항 사이에는 무언가 역설적인 관계가 있는데 바디우는 민주주의에서 철학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은 누구에게나 '주장'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를 미리 선택해 놓지 않는다. 허나 그 주장을 인정하거나 비판한다. 그 과정에서 사유를 통해 누구나를 위한 것이 되도록 결론지을 수 있게 된다. 그 결론조차도 말하거나 사유하는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또는 정치적 지위에 완전히 무관심하기에 철학은 민주주의의가 작동되는 다수에 의한 결정 방식이라 할 수가 없다.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만화계의 계약서이야기를 풀어가는 중, 머리가 없고 가슴만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님, 후대에겐 병신인 거에요!' 격하게 하는 말을 들으며 그와 반대로 머리만 있는 이들이 만든 사회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슴만으로는 살 수 없는 현실을 알아차려야 했던 거지. 가슴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머리만 있는 인간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용하여 '자유'와 '평등'을 내걸며 저들에게로 치우친 사회제도를 만들어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평등은 원래 그런 거거든 하며, 우민화 시켜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되겠다.
철학은 머리와 가슴이 함께 움직일 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사유이다. 이제 본질적인 구조의 변화를 위한 투쟁은 연대의 행동만으로는 역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우린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시간들에서 바라보자면 '혁명'또한 현재를 변화하게 하려는 데 급급한 조급증의 결과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자본주의가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은 '나'로 부터 시작된다. 현실의 움직임을 알아가고, 비주체로서 허위욕망과 그로인해 발생되는 내 안의 탐욕을 부추기는 이기주의를 털어낼 가치 지향이 필요한 거다. 온전하게 삶을 향유한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 바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후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자면 세대를 몇 번은 지나야 한다 해도 이제는 본질에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내가 '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종(種)의 공멸을 막기 위한 한걸음의 의미가 될 것이다. 바디우가 말하듯 자기 자신을 반복적인 자동성에 맡김으로써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고, 진리를 확신하는 주체의 삶, 이념을 지닌 삶을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전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이 '새로운 철학'이 나와 너에게서부터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인간적인 것으로 얻어지는 풍요로운 요소 안에서 인간의 상징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상을 향해 기꺼이 투사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노예성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인 형상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이 민주주의, 정치와 공존하게 되어질 때,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고, 정치는 비로소 권력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장(場)이 될 것이다. 니체가 '최후의 인간'이라 불렀던 비극의 모습, 모든 형상을 잃은 창백한 형상으로 남은 인간이기를 결코 허용할 마음이 내게는 없기에..이렇게라도 버티기를 하는 것일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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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얇은 책이다. 그런데 비싸다. 철학의 일반적인 형식과 내용을 정리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은 한 밤의 올빼미의 모습이라 평한다. 세상의 새로운 인식의 탄생 이후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그의 설명이고,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사실에 의존하는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후에 새로운 철학은 탄생했기에 철학의 모습은 깊은 밤의 올빼미처럼 고독한 성찰을 통해 아침을 맞이한다고 했다. 그의 실천적 모습은 대학과 현장이라는 이분법적 영역으로 철학은 완성된다고 했다. 대학의 모습은 올빼미의 모습으로, 현장의 모습은 행동하는 실현을 위해 달리는 철학으로 모습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철학은 그 능력이 절대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가깝고, 욕망이라는 격렬한 버팀목은 없지만 사랑에 가깝고, 예술이 갖는 감각적인 능력은 없지만 예술적 창조에 가깝고, 수학의 형식주의 또는 물리학의 경험적이고 기술적인 능력이 없음에도 과학적 인식에 가깝다." 막연하나마 그 느낌은 알 수 있을듯하다. 철학이 어려운 건지, 바디우가 어려운 건지 수수께끼의 주체마저 혼란을 겪고 있다는 느낌을 들었다. 분명한 것은 바디우는 행동. 실천을 철학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제일 와 닿는 (제목과 일치한다는 느낌)것 같다. 철학과 정치의 관계를 정돈한 것 같지만, 그에 연관성은 아직 이해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함을 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지루한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병사의 형상'부분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였다. 귀족적 전사의 모습에서 일상의 익명성을 갖는 병사의 형상을 통해 영웅성과 방향성을 잡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병사에게는 고유명이 없다. 그는 이념의 힘으로 위대한 규율을 자각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는 결국 익명적이다." 귀족적 전사의 영웅성이 무명의 병사에게로 와 창조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현실에서는 분류하고 구분하는데 촛점을 맞춘다. 그런데 그 분류는 의식적인 부분일 뿐 실재적 분류가 되지 못하는 경우 이것이... 정치의 비표현적인 변증법의 모습을 말하는듯하다. 완성형 리뷰를 적지 못하는 것 같다. 현재 내 영역 밖의 문제인 것을 직감한다. 다만, 다시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읽어 최선을 다해 그 의미를 새겨볼까 한다. 가장 크게 공감했던, 민주주의라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의견과 진실을 다수결에 대비시킴으로 착각하게 하는 현상의 모습... 아마도 바디우는 그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의식의 망각 속에 다수의 선택이 결코 진실일 수 없음을... 잘못된 의견이 진실인 양 세상을 속이는 행위의 정치들을 말하고 있음을 느낀다. 나름 고민이 되었던 부분이 있다. 우선은 철학은 사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것. 이것은 어쩌면 역사학자 같은 느낌이 들어본다. 기간에 그러했으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체념적 발상이 담긴 것은 아닌가? 무엇인가 동기가 될 만한 기점이 마련되어야만 활동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기간에는 그러했으니, 앞으로는 먼저 이끌어보자는 선동적 언사로써, 뱉어보는 말은 아니다. 바디우는 향 후 인류의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는 비젼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이다. 그렇다면 그런 확신으로 실천을 이끄는 모습이여야 하지 않는가하는 의문점이 들어봤다. 그래야만 진정한 실천의 철학이 되는 것이 아닌가? 행동을 위한 대학과 현장의 방식을 더욱 구체화 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상의 형상을 읽으며, 줄 곧 생각되는 의문은 전사나 병사나 어떠한 목적에 따르는 폭력성을 전제하는 대상을 통해 상징성을 부여 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란 것이다. 아직 나아갈 길들이 남아 있기에 얼마간의 폭력성은 전제되어도 괜찮다는 발상인지... 아니면 이러한 폭력은 정당하다는 것인지. 명쾌한 설명이 없다. 어쩌면 세상 모두가 중독된 폭력성이기에 설명이 필요없는 것인지.... 아니면, 나는 굉장히 엉뚱한 방향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내 자신의 의식만을 사고했다. 읽히기를 희망하면서도 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마음... 뭐라 쉽게 정돈되지 않는다. 바디우를 통해 몇 가지 노력해야 될 부분을 찾은 듯 하다. 먼저의 생각처럼 얇은 책... 비싼 책... 여기에 하나 곁들이면 쉬 읽혀지지 않는 책... 쉽게 이해되지 않은 책... 그렇지만 계속 읽어나갈 것을 다짐한 책이 되었다. 몇 번 더 리뷰를 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