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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어느 시점부터 인식하게 되었다. 대부분 거실에 깔아놓은 침구에 누워계시려 한다. 시간의 무서움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로부터 생의 활기를 빼앗아가고 봉인된 죽음의 안식(安息)을 받아들이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부쩍 죽음이라는 실존적 필연성이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는 시절이다.
내 삶의 자취와 남은 생에 대한 의미를, 그리고 죽음의 수용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를, 즉 삶과 죽음을 오가는 사념에 빠지게 된다. 『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 는 이러한 인간 운명에 대한 고뇌어린 환유(換喩)다.
영미(英美) 시(詩) 아흔 여 편과 함께 죽음에 대한 사유의 지대를 거닐며 저자는 책을 읽고 있는 산 자들에게 삶의 축복과 행복의 존엄함을, 죽음이라는 필멸의 운명에 도사린 그 음험하게 보이는 비밀이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한다. 미국의 여성 시인 ‘에밀리 디킨스’는 “누구도 그것에(죽음) 어느 것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며, “봉인된 절망”, “장엄한 고뇌”라 노래했다.
그런가하면 셰익스피어는 『소네트』에서 죽음이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삶에 대한 더욱 커다란 사랑을 할 것이라며 아래와 같이 쓰기도 했다.
책은 삶과 분리되지 않은 죽음의 이해에서부터 죽음의 예감, 묘지의 풍경들, 죽고 난 이후의 남겨진 자들의 슬픔, 그리고 삶을 위한 조언으로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향한 점진적 접근의 단계를 밟고 있다. 이들 필멸의 운명을 노래한 시편들을 통해 저자는 삶을 죽음이라는 소멸의 상자에 봉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선명한 아름다움의 깨달음, 이를 통해 삶의 의미라는 귀중한 가치를 찾을 수 있도록 하려는 실천적 각성을 나누고자 한다.
사람들은 몸이 죽고 나서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살아있으리라 믿기도 한다. 그러나 몸은 소멸하고, 그 몸으로서 경험 할 수 있는 것들을 더는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죽음임을 부정할 수 없다. 종교적 내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야 삶은 하나의 경유 지대이니 그들에게 죽음의 두려움이란 어리석은 감정에 불과할 터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대한 그 강박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죽은 이의 장례식에서 옷깃을 여미며, 묘지를 둘러보며 모두에게 기다리는 보편적 운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셰익스피어가 『measure for measure』에서 “지겹고 혐오스런 세상살이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에 비하면 천국”이라 외쳤듯이 살아있음은 죽음이란 무지의 세계보다 낫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누구도 피할 길이 없으니, 이를 상상하며, 죽음의 불안을 다스리고, 삶의 기쁨을 확인하려한다. 그것은 미국 시인 ‘반 다이크(Henry Van Dyke, 1852~1933)’의 시(詩), 「내 시야에서 사라졌네」처럼 사라짐과 나타남의 변주로, 삶과 죽음이란 내용과 형식의 차이에 불과함으로 사유되기도 하고, ‘메리 프라이(Mary Elizabeth Frye, 1905~2004)’의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말아요」와 같이 “나는 천 가락 불어오는 바람 / (...) / 부드러운 가을비라오.”라며 우주 자연에 깃든 새로운 존재일 것을 노래하기도 한다.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이 필연적 실존적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지혜의 탐구로서 시는 영원한 삶의 수단이었으리라. 소개되는 시들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속적인 의미의 추구이며, 이로서 매 순간 삶의 향유, 오래 머물지 않는 삶의 그 소중함을 깨운다. 때로는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어린 자식이기도 하고, 젊은 형제 자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다.
이들 애가(哀歌)를 읽다보면 사랑하던 이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슴에 묻는 무너져내리는 슬픔을 통해 산 자로서의 어떤 의무감을 느끼기도 한다.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세 자매들의 각 대표작인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와일드 펠 홀의 소작인』에 대한 독서의 욕망과 더불어 동생들을 연이어 잃은 맏언니 샬럿 브론테의 시 「앤 브론테의 죽음에 부쳐」를 읽으며, 일상에 붙들려 소원해진 형제, 자매, 벗들을 향한 연민으로 갑작스레 울컥하기도 한다.
가을, 혹은 황혼을 떠올리면 무언가를 끝낸 후의 평온한 휴식의 시간에 대한 기대로 이어진다. “가을빛이 그토록 선명하고 강렬한 것은 곧 꺼지게 될 빛이 아주 잠깐 온 힘을 다해 타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가 올 가을빛이 내게도 그토록 강렬한 것일 수 있을까? 노동자 시인 ‘카니’가 노래한 「가을 Autumn」 의 시(詩)처럼, 삶의 모든 나날을 성실한 노동으로 보낸 후 그 보상으로 “한 시간 평온한 휴식을” 허락해 주기를 소망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삶은 언제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네 삶이란 것은 누군가와 무언가의 죽음에 의존하지 않고 유지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죽음에 의존하는 것임을 긍정할 수 있다면 “죽음이란 감추어진 비밀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자주 잊거나, 외면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실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나는 캐나다의 시인 ‘로버트 윌리엄 서비스’의 시 「Death and Life」의 생명과 탄생의 죽음이라는 수레바퀴의 그 흔쾌한 수용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삶의 행복이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이 깨달음의 시는 우주 자연 속의 한 개체인 나를 우주 순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의 하나의 순환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해준다. 이 책은 소중한 이들을 잃은 산 자들에게 위로를, 죽음의 그림자를 앞 둔 이들에게 평온한 안식의 이치를 나지막이 들려주고, 산 자들에게는 겸허함과 흔쾌한 생의 만끽을, 그 축복을 들려준다. 어쩌면 이 아름다운 시들의 목소리와 그로부터 울려 퍼지는 삶과 죽음의 이해에 대한 문학적 산책의 여정은 한 번뿐인 우리네 삶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선사해 줄 것이다.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순환하는 자연 속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으리라.”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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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물고달아난도둑고양이 #송기호 #싱긋출판사 영장류들은 죽음에 슬퍼하는 듯한 행동들이 있다고 제인 구달 선생님은 그랬다. 그렇지만,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으로 승화를 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한 것 아닐까? 인간의 죽음은 감정적 변화를 만들어 내지만, 죽음이 어떤 구심점이 되어 행사로 이어지기도 하고, 죽음의 상징성을 가지고 많은 예술작품이 탄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면,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 사랑하는 것의 소멸까지 죽음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죽음의 가장 큰 영역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무한의 슬픔인 것 같다. 그 그리움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될까 무섭기도 하다. 죽음에 관한 생각을 적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책의 작가 송기호님은 대학에서 영시를 가르치고 연구하시는 분이다. 책에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죽음을 다룬 영시 작품을 작가, 시대, 의미들을 설명한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시들이 죽음에 대해 적혀있구나. 새삼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사랑처럼 죽음도 인생의 일부분이기에 문학, 예술의 주제로 쓰이는 것은 당연했다. 책의 챕터 중 <6장 묘비명> 읽으면서 나의 묘비에는 뭐라고 적히는 것이 좋을까 고민도 잠시 했다. 조지 버나드 쇼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처럼 듣는 순간 확 오는 한 문장을 생각해본다. ㅎㅎㅎ “애들아, 신나게 놀다 와!” 이렇게 적을까? 일단 좀 더 생각해보기로... 멋진 구절 남겨본다. 문학의 탐색 대상이 삶이라면, 그 짝인 죽음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 삶 너머에 있는 죽음의 풍경을 문학이 어떻게 그려내는지, 더 구체적으로는 시가 어떻게 그려내는지 살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핵은 시의 길을 따라 죽음의 풍경을 둘러보러 떠나는 산책이다. (26쪽) 문학에서 생명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비유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계절의 순환이다. ....(중략)...생의 늦가을에 가장 예민해진 감성으로 돌아보는 사랑은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시와 같으리라. (52쪽) 그대 지나갈 때 나를 기억해주오. 나도 한때 지금의 당신과 같았다오. 그대도 반드시 지금의 나와 같아지리니 죽음을 준비하고 나를 따르시기를 (93쪽) -식민지시대 뉴잉글랜드 지역의 묘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죽음은 내가 직접 죽음을 겪지 않더라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 외에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우리가 삶의 무대에서 상상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죽음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그에 대한 답을 삶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244쪽) #도서지원 #감사합니다. #교유서가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주관적인 관점으로 독후활동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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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을 완성하는 시가 된다." 우리를 기다리는 보편적인 운명 죽음의 시에서 마주한 삶의 얼굴 사실 아직 죽음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는 듯하다. 죽음은 나와 동떨어져 있을것만 같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지 않을것만 같은 느낌이라 더 그런듯하다. 그런 죽음이 사실은 언제 내게 다가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두렵다. 나의 죽음이 단순히 나의 죽음으로 끝날까? 나의 죽음은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을 줄 것이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것이다. 죽음은 강 건너에서 환하게 불이 켜진 삶의 집을 들여다보는 도둑고양이 같다. 죽음은 탐욕스러운 눈으로 삶을 바라보며, 손에 쇠몽둥이를 들고 소리나지 않게 발을 들고 삻이 있는 쪽으로 조심그럽게 다가 오고 있다. 삶은 그렇게 다가오는 죽음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p.15 죽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듯,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는 것도 우리에게 부여된 숙명이다.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 우리는 더 없이 숙연해지고 연약한 생명을 짓누르는 온 우주의 무게를 실감한다. p.46 ~ p.47 드라마나 책을 보다보면 죽기 전에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는 듯하다. 죽기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남기기도 하고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생명은 우리에게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이기에 소중하다. 그 생명이 유지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획일적인 기준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 살아 있기를 원하는 가에 관한 자기 신념의 문제이다. p.221 우리는 삶에 대한 욕심을 가진 존재이다. 한 번 뿐인 삶을 보다 잘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배우고, 즐기고. 한 번 뿐인 생을 누구보다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한 중에도 생명을 쉽게 버리기도 한다. 견디지 못할 현실 속에서 죽음을 택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 같은 것은 아니리라. 나는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한 권의 책이었다. 싱긋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쓴 글입니다. #시간을물고달아난도둑고양이 #시의길을따라걷는죽음의풍경 #송기호지음 #인문 #교양 #교양으로읽는인문 #주제로읽는인문학 #노년 #죽음 #싱긋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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