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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를 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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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은 1897년 천석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까지는 유교적 보수성을 삶의 기반으로 하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러나 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스승 면우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하면서 식민지 지식인의 책무를 심절히 깨달은 듯하다. 곧바로 그가 독립군자금 모집을 감행하여 서대문 감옥에서 2년 넘게 징역을 살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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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은 1897년 천석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까지는 유교적 보수성을 삶의 기반으로 하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러나 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스승 면우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하면서 식민지 지식인의 책무를 심절히 깨달은 듯하다. 곧바로 그가 독립군자금 모집을 감행하여 서대문 감옥에서 2년 넘게 징역을 살았기 때문이다. (p59)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1표 2서(《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면서 실학자이다. 특히 그는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18년간 그곳에서 성리학을 갈고닦게 된다. 최근 보았던 영화 [자산어보]는 주인공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쓴 한국 최초의 어류 생태서인 자산어보를 모티브로 하였다. 여기서 정약용은 조선시대의 사상가이며, 천주교 신자였다.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부터 서양의 과학·천문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으며, 그가 남긴 대표적인 저서 1표 2서는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여유당이 수몰되면서, 다산의 자료가 소실될 위험에 놓였다. 1934~1938년 신조선사에서 다산의 시문과 저서를 모아서 《여유당전서》를 4년에 걸쳐 편찬하였고, 2012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정본 여유당전서》를 출간하였다. 참고로, 최익한 선생은 1938년 12월 9일~1939년 6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64회에 걸쳐 '여유당전서 서평'을 연재하였다.

 

 

선생은 졸곡卒哭 후에 곧 고향으로 돌아가서 형제가 한자리에 모여 경전을 강론하고 노자 《도덕경》의

與兮若冬涉川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머뭇거리고

猶兮若畏四?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조심하라

는 구에서 취하여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하니 외약畏約의 뜻을 보인 것이다. (pp124~125)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는 신사임당·허난설헌처럼 특별한 의미가 있다. 노자의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여與와 유猶 자를 딴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다산의 파란만장한 삶의 원칙이 암시된 듯하다. 어쨌든 창해 최익한 선생의 저서가 남한과 북한에 다수 남아 있는데, 여러 방면에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영남 유림의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선생이 태어난 해인 서기 1762년은 갈릴레이가 천문학의 명저 《대화》를 발표한 후 130년이요, 뉴턴이 광학과 만유인력을 발견한 후 96년이요, 제너가 우두술牛痘術을 발명하기 전 겨우 34년이었다. 당시 서양에서도 실증과학이 신학의 신비적 전통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지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었다. 더구나 신학의 잔당인 서양 선교사들은 멀리 동양에 와서 서양 과학의 지식을 한갓 포교의 향기로운 미끼로 약간 던져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나마 주워 먹으려고 선생 일파는 최대 위험을 무릅썼던 것이다. (p266)

1934~38년에 여유당전서가 편찬되었다. 창해 최익한 선생은 다산 연구의 개척자로서 앞서 말한 대로 1938~39년에 최초의 다산학 개론서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6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물론 교주자 류현석은 최익한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3회에 걸쳐 필사하고 30회 가까이 읽은 후에 다산의 저서와 최익한의 연구 성과를 교정 주석하였다. 특히 『여유당전서를 독함』의 원문 한자를 하나하나 맞춰 나갔고, 문맥에 맞게 해결하는 치밀함과 완벽함으로 각주에 오류 및 오탈자를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덕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수정하였는가? 선생에게 덕은 물론 오묘히 내재한 성리性理가 아니라 윤리의 실천이며, 덕정德政은 바로 ‘위정이덕爲政以德(덕으로써 정치를 함)’이다.

 

공자는 “임금을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위정이덕’이다. (p342)

 

최익한 선생은 1897년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태어나 1909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개최된 시회詩會에 참가하여 장원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영남학파 거두였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가 어릴 적 잠시 들렀던 영주군에는 다산 정약용, 함석헌 선생이 추구하였던 민본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도 민실련(민본사상실천시민연합)이 현존하고 있으며, 선비정신의 본질과 애민사상을 이어나가려고 한다. 21세기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인성 교육은 애민사상과 민본에 있으며, 사람의 도리와 역할을 다하는 데 있다. 위정이덕, 즉 정치가 바로 설 때 민심이 따르고,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한다. 다산이 1표 2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학문의 요체이다. 그동안 내가 지역 향교 유림에서 《추구》, 《소학》, 《천자문》, 《논어》를 공부한 이유다. 내년에는 《맹자》의 사상을 배우련다.

 

 

최익한은 ML당 사건 이후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 포기하고, 동대문 밖에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추잡스런 ‘스캔들’을 일으킨 탈락분자라고 비난한 것이다. (p560)

1957년 9월~10월 중순: (최익한은) 최창익·박창옥朴昌玉 등이 주동한 ‘8월 종파 사건’(1956)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으로 보이며, 몰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p597)

 

최익한 선생은 군자금 사건과 ML당 사건으로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출옥하였다. 해방 이후 월북하였고, 김일성 대학에서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였다. 하지만 그의 책은 남북이 분단된 상태이니만큼 종합적으로 섭렵해야 한다. 지역 사회에서도 다산 연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남인 영남학파가 추구하였던 사상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해 최익한 선생은 전반부는 분단 전의 남한에 살았지만, 후반부는 북한에서 살았으므로 특별히 주목해야겠다. 창해 최익한의 다산 3부작 교주본 《여유당전서를 독함》, 《실학파와 정다산》, 《정다산선집》을 더 공부하여, 다산 정약용과 최익한 선생께서 이 땅에 남기고자 하였던 민본·애민사상의 본질을 다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달의 사락 k*******2 2023.09.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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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를 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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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와 최익한   [여유당전서]는 [여유당집]과 [열수전서]에서 비롯되었다. 정인보는 다산서세100년기념회를 다산 생신일에 개최하여 결국 ‘생신100년기生辰百年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업성은 당시에도 학자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니까 시중의 다산론자들이 아직까지 왜곡하며 떠벌이고 있는 ‘(서세) 100주년’ 따위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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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와 최익한

 

[여유당전서]는 [여유당집]과 [열수전서]에서 비롯되었다. 정인보는 다산서세100년기념회를 다산 생신일에 개최하여 결국 ‘생신100년기生辰百年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업성은 당시에도 학자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니까 시중의 다산론자들이 아직까지 왜곡하며 떠벌이고 있는 ‘(서세) 100주년’ 따위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다산 연구는 일본인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여유당전서] 출판 기념회의 발기인은 일본인은 물론 친일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 와중에 사회개량주의자 최익한崔益翰은 극히 희귀한 존재였다.

 

본고는 현재까지 알려진 다산 정약용의 생애에 대해서 정조와 관련된 일화를 중심으로 살펴봄과 동시에 운봉 류현석 선생의 교주본의 대중적 의의 및 역할을 중심으로 논해 보고자 한다.

 

정조와 다산의 경구

 

정조: 말니 마치(馬齒) 하나둘 이리(一二)

다산: 닭의 깃이 계우(鷄羽) 열다서 시오(十五)

- 여기서는 음독와 훈독이 어우러져 정조와 다산이 이 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정조: 보리 뿌리 맥근맥근(麥根麥根)

다산: 오동 열매 동실동실(桐實桐實)

- 여기서는 매끈매끈과 둥실둥실의 의태어를 음독과 훈독까지 제대로 표현했으나 정조가 선창 다산 선생이 후창을 했는데도 매끄럽게 이어간 부분이 소위 말하는 소울메이트의 수준까지 다다랐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 아침 까치 조작조작(朝鵲朝鵲)

선생: 낮 송아지 오독오독(午犢午犢)

 

정조: 연못 위 붉은 연꽃 내가 점을 찍었네(池上紅荷 吾與點也)

선생: 전각 앞 푸른 버들 다 드리웠다 하네(殿前碧柳 僉曰垂哉)

- 이 부분의 마지막에선 한시의 융합까지 이루어져 소위 ‘방점을 찍다’의 묘미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례만 보더라도 정조와 다산 선생의 식견이 돋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군신 간 허물없는 농담이 가능하게끔 철저히 신하를 교육하고자 했던 봉건군주 만천명월주인옹 정조의 너그러움과 군신간의 관계를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절대 부족함을 숨기지 않는 다산 선생의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용솟음침을 느낄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운봉 류현석의 교주본을 읽고

 

운봉 류현석 선생의 열정과 투지가 빛나는 옥고다. 창해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3번을 베껴쓰고 30회독을 했다는 사실은 약 150면에 다다르는 [여유당전서를 독함]의 양으로 미루어 보아 세간의 웬만한 강사보다도 다산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 법한 열정이다. 또한 필답형 답안을 작성해 본 입장으로서 10면 혹은 20면을 필사하는 것만 하더라도 온몸에서 비롯된 거부감과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 압박감에 시달리기 마련이나, 운봉 선생은 이뿐만 아니라 관련 논문 자료를 참고함과 동시에 그 내용을 빠짐없이 [여유당전서를 독함](교주본)에 융화시켜 놓았다. 이는 기존에 존재했던 여유당에 관한 고찰의 패러다임을 전체적으로 바꿀 법한 내용이었다. 이것은 창해 최익한 선생이 꿈꾸고자 했던 다산의 이상사회를 재반성함과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인륜의 도가 사라진 지금 필요한 인문학적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사견

 

현재 철학사라고 한다면 서구철학 중심으로 논해진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더하는 시점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식견이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을 때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던 루소의 사회계약설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다산 선생의 경세론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비견될 만한 식견을 제시했다는 점이 결코 동양철학이 서양철학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쾌거와도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남운 선생의 <정다산의 사상>에서 공상적인 사회주의적 이론이라는 비판도 있었거니와, 생각건대 다산 선생이 동물과 사람의 차별성을 강조한 부분에서는 최근 [위대한 수업]에서 ‘동물권리와 동물해방에 대한 공리주의적 철학’을 설명했던 피터 싱어와도 상반되는 면이 있어 당시 사상으로서는 최고의 보수적인 사상을 제시해 준 관료문인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운봉 류현석 선생의 교주본으로 하여금 다산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매우 감사하다.

 

 

 

**이 글은 컬처블롬을 통해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r****2 2023.09.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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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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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   [여유당전서를 독함]은 창해 최익한 선생이 1938년 12월 9일부터 1939년 6월 4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에 64회에 걸쳐 연재한, 다산 선생과 다산 학문에 관한 고전 비평이다.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약 8년간 징역을 살고 1936년 출옥한 창해는 [여유당전서]를 발간하고 있던 신조선사의 요청으로 다산의 일사와 일화, 저서 총목을 작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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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

 

[여유당전서를 독함]은 창해 최익한 선생이 1938129일부터 193964일까지 동아일보 지면에 64회에 걸쳐 연재한, 다산 선생과 다산 학문에 관한 고전 비평이다.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약 8년간 징역을 살고 1936년 출옥한 창해는 [여유당전서]를 발간하고 있던 신조선사의 요청으로 다산의 일사와 일화, 저서 총목을 작성하였는데, 이후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완성하기 전까지 근 3년 동안 얼개를 구성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던 듯하다. 1938129다산 선생의 애걸을 시작으로 연보>, <명호名號 소고>, <거주지 소고>, <저서 총목22편에 달하는 글을 193964일까지 동아일보에 나누어 게재하였다.(~69)

 

근 보름에 걸쳐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이 책을 정독하였다. 때론 이미 읽었던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뒷부분을 읽다가 내용이 와 닿지 않을 때에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하였다.

 

18년 기나긴 유배동안, 조선에서 가장 궁벽한 오지로 알려진 땅끝 해남과 접한 강진에 거하며 [여유당전서]를 집필한 다산 정약용 선생도 대단하지만,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일제 치하에 언론의 탄압과 핍박 속에서 신문에 연재한 창해 최익한 선생도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두 분 학자 못지않게 이 책을 교주한 류현석 선생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산과 창해에 두 학인에 대한 뜨거운 마음,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이러한 책을 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부분은 이 책을 교주하고 연구 분석하기 위해 편자가 창해 최익한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무려 3번씩이나 베껴 쓰고 30번 가까이 읽었으며, 관련 논문 자료들도 죄다 찾아 읽었다고 한 점이다. 전문을 옮겨 쓴다는 것은 웬만한 각오가 아니고서는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또한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나 글귀를 만나면 노트에 옮겨 적어 본 적은 있지만, 이제까지 어떤 책의 전문을 베껴 본 적은 없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베껴 쓰지는 못할망정 정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쓴 창해 최익한은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영남학파의 거유 곽종석의 문하에서 3년간 성리학을 익히고 지리산 산방에서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고 영어를 배우고 나서는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하였으며, 그 와중에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리고 군자금 모금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10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는 호구지책 마련을 위해 언론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동아일보 등 일간지에 잡문을 기고하며 [여유당전서를 독함]을 연재하였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였고 김일성종합대학 조선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실학파와 정다산], [정다산선집]까지 집필하여 최초로 다산 3부작을 완성하였다. () 한학을 공부하고도 신학문에뜻을 두어 1919년 경성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99월에는 중동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단발하고 변복을 하였다. (~37)

 

[여유당전서를 독함][실학파와 정다산]에 거의 다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창해 최익한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생애와 다산학 연구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창해는 19세기 격변하는 동아시아 세계와 조선의 미래 모습을 어느 정도 통찰하고 있었던 듯하며, 구한말의 지식인답게 구학문과 신학문을 동시에 배웠으며, 영어와 일본어에도 상당한 실력을 구비한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무척이나 인상적인 내용을 만났다.

 

때는 1925년 을축 홍수 때이다. 한강이 전에 없이 불어 넘쳐 마현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 선생의 사현손 규영씨의 결사적 작업으로 겨우 건져 내게 된 선생의 전서 외에는 여유당 옛집과 유물 전부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규영씨가 책을 구한 미담은 문화 보존사 차원에서 대서특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난 을축 홍수 때 한강이 불어 넘쳐 여유당의 구들방에 물이 달려든지라 씨는 생명같이 대대로 지켜 내려온 선생의 전서 서궤를 벽장에서 끄집어내 안방 다락에다가 옮겨 두었는데 () 때는 깊은 밤이고 집안과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탈출하느라 겨를이 없었지만, 씨는 홀로 황급히 다락에 뛰어올라가서 서궤를 끄집어내려고 하였다. () 급보를 들은 마을의 구조선이 달려와서 어서 나오라고 외쳤으나, ‘나는 다산 전집을 건져 내지 못하면 죽어도 못 나가겠다!’고 외쳤다. () 다음 날 강물이 빠지면서 선생의 옛집은 배가 되어 떠내려가 버렸고 오직 선생의 전서만이 사손의 매운 손에 잡혀 있다가 오늘날 세인의 눈앞에 활자로서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되었다.”(~400)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여유당전서]에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다산 선생의 18년 기록유산이 홍수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하였다가 그야말로 구사일생한 게 아닌가. 홍수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구한 [여유당전서]가 있었기에 우리는 다산 선생의 삶과 정신, 학문 세계에 대해 공부하며 연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정조시대 대학자로 정조와 함께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천재 학자 다산 선생의 학문과 실학 세계 등을 좋아하여 관련 책들을 보면서 틈틈이 공부하고 있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를 공부하면서 다산 선생을 논외로 하고는 그 시대의 학문은 물론, 정치·경제·문화 사상 전반에 걸친 내용들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때 다산 선생의 시문집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한문 실력이 얕아 이런저런 어려운 점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10여 년 전쯤에 한문 원문으로 된 [영인본 여유당전서]를 구입하려고 하다가 전문 연구자도 아닌데다 방대한 원서를 둘 공간도 마땅치 않아 결국 집에는 들이지 못했다. 대신 다산 선생과 관련이 있는 다양한 텍스트 [삶을 바꾼 만남],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들을 곁에 두고 지금도 꾸준히 애독하고 있다.

 

다산 선생 학문의 근간과 뿌리가 되는 18년 유배 생활의 결정체 [여유당전서], 그리고 그 책의 최초 풀이 해설서 격인 창해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 이 책은 다산 선생 학문 연구의 출발을 알린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최익한 선생의 [여유당전서를 독함]은 선생의 또 다른 저작인 [실학파와 정다산]과 함께 다산학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텍스트이다.

[여유당전서를 독함 교주본] 이 책은 교주 류현석 선생의 노력과 공이 들어간 저작이다.

이 책을 지은 창해 최익한의 생애와 저술에서는 그의 삶과 학문 세계, 다산 3부작 시리즈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여유당전서를 독함 해제>, <1장 다산 선생의 애걸에서부터 마지막 22장 다산 사상에 대한 개평>, <원문 교주본>,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유당전서를 독함] 시리즈는 [실학파와 정다산], [정다산선집]과 함께 3부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세 책은 서로 자매와도 같은 책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어 같이 보면 창해 선생의 다산 학문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산학 연구의 개척자 창해 최익한, 창해(滄海)란 그의 호에서 암울한 시대 넓고 큰 푸른 바다로 나아가려는 뜻이 느껴지는 듯하다.

d*****h 2023.08.2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