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5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9.0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사르트르의 타자를 넘어서(4장에 대한 간략한 서평)
"사르트르의 타자를 넘어서(4장에 대한 간략한 서평)" 내용보기
https://blog.naver.com/exbris/222969203382 나는 너를 마주하고 있다. 너는 오늘 청소를 하지 않고 하교했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전화를 받고 불려왔다. 나는 앞에 있는 너를 자기의식을 통해 구성한다. 자기의식 상관적인 너는 오직 자기의식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 철학자들이 싫어하는 유아론이다. 후설은 나가 너를 인식할 때 감정이입을 통해 너의 현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사르트르의 타자를 넘어서(4장에 대한 간략한 서평)" 내용보기

https://blog.naver.com/exbris/222969203382

나는 너를 마주하고 있다. 너는 오늘 청소를 하지 않고 하교했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전화를 받고 불려왔다. 나는 앞에 있는 너를 자기의식을 통해 구성한다. 자기의식 상관적인 너는 오직 자기의식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 철학자들이 싫어하는 유아론이다. 후설은 나가 너를 인식할 때 감정이입을 통해 너의 현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감정이입을 통해 너가 나에게 미안함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전혀 미안하지 않다고 말한다. 감정이입에 의한 너의 추정은 쉽게 실패한다. 나의 인식을 통한 너는 개연적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너의 현존재가 나와 같은 공동현존재이므로 타자로서 위상이 보장된다고 말한다. 나와 너는 학교라는 공동체의 원리를 매개로 정립된다. 그러나 너는 학교라는 공동체 원리에 입각해 청소를 하고 하교했어야 한다. 너는 이렇게 학교라는 공동체의 원리도 가뿐히 벗어난다.

 

지금 이 순간 확실한 것은 너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의 활동이 나의 존재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너를 생각하는, 형태를 알 수 없는 의식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나라는 존재조차 불확실한데 타자인 너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다. 이 극도로 예민한 국면에서 나와 너의 출현을 사르트르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너를 생각하는 의식을 A라고 하자. 이 A를 의식하는 의식을 B라고 하자. B의 바깥에 A가 있다. 즉 A가 아닌 B에게 A가 거주한다고 상정되는 자아가 출현한다. 즉, 자아는 의식의 바깥에 있다. 근본적으로 의식은 모든 대상을 의식 밖으로 밀어내며 초월한다. 요컨대 의식의 본질은 무이며, 이것을 사르트르는 ‘의식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선언한다. 지금 너의 시선은 버스정류장에서 되돌아왔으므로 매우 어이없고 불쾌하다. B는 그 시선의 대상이 된 자아의 A가 당혹스럽고 약간의 모멸감마저 느낀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렇게 당혹감과 모멸감을 느끼는 자아가 확실한 만큼 어이없고 불쾌한 시선을 던지는 너라는 타자의 존재 역시 확실하다. 이렇게 너의 시선의 존재함과 나의 존재함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유아론은 해결된다.

 

나는 너의 어이없고 불쾌한 시선에 사로잡힌 대상에 만족할 수 없다. 너에게는 청소를 해야 하고 하지 않았을 때 잘못을 인정할 의무가 있으며, 나에게는 그것을 지적하고 훈육할 책무가 있다. 너가 나의 나무라는 시선을 수용하고 미안함을 느끼는 자아를 형성할 때 너는 내 시선의 대상이 되며 종속될 수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너는 당돌하게 청소하지 않고 도망간 것이 버스정류장에서까지 호출될 만큼 잘못했느냐고 나에게 따진다. 나는 움찔한다. 어떻게 너는 나에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너가 정해진 약속대로 청소를 수행할 때 너는 학생으로서 나는 교사로서 정체성을 가진다. 너는 청소 등의 행위를 통해 나에게 학생으로서 인정받는다. 그런데 지금 너는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이 귀가하던 길을 되돌릴 만큼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는 청소를 하고 안하고는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투쟁에서 나는 너에게 밀리고 있다.

 

그런데 너가 어이없고 불쾌하다는 것은 확실한가? 너의 어이없고 불쾌한 시선은 입의 모양, 얼굴의 각도, 눈의 위치 등 온몸의 제스처를 통해 ‘인식’된다. 그렇다. 인식되는 한에서 너의 어이없고 불쾌한 시선은 개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너의 시선의 대상이 되면서 또한 그 시선을 인식한다. 이렇게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기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나는 왜 너의 시선에 대해 당혹감과 모멸감을 느끼는가? 그것은 당혹감과 모멸감의 의식이 출현하기 전에 나가 교사로서 정체성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정체성은 당혹감과 모멸감이라는 자기의식에 선행하며, 이 의식이 출현하기 ‘전부터’ 나는 교사로서 끊임없이 보여지는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즉 나의 의식은 나를 보는 세계에 의해 사전에 규정되어 출현하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어이없고 불쾌한 시선은 사실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개연적으로 ‘상상’되는 것이다. 나는 너를 결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네가 나를 교사로 인정하고 너가 학생으로서 설득되기를 ‘욕망’하면서 너의 시선을 어이없고 불쾌한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와 너는 시선의 얽힘과 투쟁 이전에 각각 교사와 학생으로서 확보된 자리에 있었으며 그 자리에서 서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기어이 청소라는 노동의 주체가 자신임을 주장하는 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순간 너의 얼굴에 이 고성방가가 큰 효과가 없음을 반성하는 자아가 출현한다. 너의 얼굴에는 마치 거울처럼 너의 시선이 아닌 나의 반성적 의식이 출현한다.

 

너를 보내고 교무수첩에 너를 명명하며 “청소를 하지 않고 도망갔으며, 반성의 기미가 없음”이라고 적는다. 이 글쓰기 행위는 상황을 드러내는 동시에 상황을 바꾼다. 즉 너는 청소하지 않았음을 비난받으며 반성하기를 종용받는 것이다. 거울과 글쓰기를 통해 나의 지향적 의식의 자유가 실현되었다. 물론 찜찜하다. 나는 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을까? 정말 너는 반성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가? 설령 지금 반성하지 않았다는 게 확실하더라도 영원히 그렇다는 보장이 있는가? 무엇보다 과연 나는 지금 어떤 존재를 경험한 것일까?

m*******d 2022.12.29.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타자와의 마주침은 ‘언제나’ 초월인가?(5장에 대한 간략한 서평)
"타자와의 마주침은 ‘언제나’ 초월인가?(5장에 대한 간략한 서평)" 내용보기
https://blog.naver.com/exbris/222998318340 여전히 나는 너를 마주하고 있다. 너는 오늘 청소하지 않고 하교했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전화를 받고 불려왔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마주침’은 이 순간이 처음이 아니다. 너는 오늘 청소를 하지 않음을 통해 나와 최초로 마주했다. 너라는 ‘존재자’는 눈앞에 없었지만 청소하지 않은 ‘존재(사건)’를 통해 너를 드러낸
"타자와의 마주침은 ‘언제나’ 초월인가?(5장에 대한 간략한 서평)" 내용보기

https://blog.naver.com/exbris/222998318340

여전히 나는 너를 마주하고 있다. 너는 오늘 청소하지 않고 하교했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전화를 받고 불려왔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마주침은 이 순간이 처음이 아니다. 너는 오늘 청소를 하지 않음을 통해 나와 최초로 마주했다. 너라는 존재자는 눈앞에 없었지만 청소하지 않은 존재(사건)’를 통해 너를 드러낸 것이다.

 

너의 존재는 내게 말을 걸어온다. “, 오늘 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했다. 청소하지 않고 하교함으로써 발생한 너는 내게 어떤 식으로든 응답할 것을 요구하며, 이 모면할 수 없는 종속성으로 인해 나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이 된다. 정작 나의 자유는 이 절대적 종속성 이후에 어떻게 대응할지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모른 척 할까? 당장 전화해서 오라고 할까? 아니면 내일 등교하면 불러서 야단칠까 

 

그렇다면 너는 그저 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학생으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일까? 내 앞에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지가 펼쳐지는 것은 네가 단순히 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학생으로만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청소하는 것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귀찮아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너는 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것을 미안해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전혀 미안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너는 나의 지향적 의식을 통해 현재화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연기된 과거로 도래한다.

 

어떻게 응답할지 선택하기 전 도래하는 타자로서 너를 레비나스는 그 자체로 출현하도록 환대하라고 말한다. 환대란 무엇인가? 네가 어떤 존재인지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영접하는 것이다. 너는 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학생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너를 마주함에 있어서 나는 교사로서 정체성을 익명에 붙여야 한다. 이렇게 나는 익명적인 존재로서 너와 마주하며 이전의 나, 교사로서의 나와 결별한다. 그때야 비로소 노동과 향유가 반복되는 천편일률적인 순간들의 나열속에서 시간이 등장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시간이란 이렇게 새로운 순간의 출현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란 특정한 응답의 선택과 무관한 것일까? 예컨대 교사로서의 정체성과 무관한 익명적 존재로서 내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 너를 환대했다고 하자. 이런 익명적 존재가 선택한 응답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너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에 오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 선택은 앞의 환대와 무관하게 임의적이고 비지향적인가 

 

또한 왜 하필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존재사건이 나를 우회하지 않고 맞닥뜨렸을까? 청소하지 않은 학생은 교사의 결여된 대상이 아닐까? 즉 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학생은 타자가 아니라 나의 지향적 활동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내가 교사가 아니라면 청소하지 않고 하교한 학생을 타자로 마주할 수 있을까?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은 자의 욕구로서 출현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은 채 타자와 마주칠 수는 있는 것일까 

 

아마도 나의 전화와 음성을 통해 나와 마주한 너는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은 채 나와 마주한 것일 수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의 전화는 그야말로 너에게 너의 의지와 무관하게 거절불능의 수동적 사태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모든 마주침이 필연적으로 비지향적이며 초월의 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 어떤 마주침은 지향적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마주침의 연쇄 속에서 어떤 만남은 무한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예컨대 교무실에서 마주한 너는 번번이 나의 기대와 예상을 비껴가며 나의 의식 상관적인 지향성을 좌절시켰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나의 인식에 종속되거나 지배되지 않는 너는 타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즉 네가 타자인 한 내가 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도 없다. 네가 타자인 한 너는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생각하는 사유에 의해서만 접근가능하다. 이 말은 내가 너에 대한 사유를 중지하면 너도 무한한 연기를 중지하고 나에게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포획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체로 너의 졸업과 동시에 말이다.

 

레비나스 사상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남겨본다. 첫 번째 질문은 저자의 레비나스 비판에 관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환원 불가능한 책임이 국가 창건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하며 이스라엘의 탄생을 그 위대한 사건으로 예시한다. 또한 레비나스는 타자를 인간에 국한하고 타자로부터 동물을 배제한다. 이것은 레비나스 철학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기보다 오로지 다르다는 사실만을 실질적 속성으로 갖는 타자 철학을 편견에 치우쳐 불철저하게 적용했기 때문은 아닐까 

 

다른 하나는 무한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유한한 실체인 인간이 무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한에 대한 욕망이 필요하다. 그런데 무한은 유한한 실체인 인간에게 결여된 것이 아니다. 결여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욕망할 수 있는가? 저자는 무한이 매 순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생각하는 사유에 의해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든다. 무한을 사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한에 대한 욕망의 증거라는 의미일까? 즉 우리에게 무한의 관념은 필연적인 걸까? 이러나 저러나 데카르트나 레비나스가 아닌 나에게 그런 관념이 있기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걸까 

 

발제를 마치니 새벽 2시 무렵이다. 출근이 예정되어 있어 나는 잠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깨어 있는 의식은 자려는 나의 자발적 의지와 거리를 두며 달아난다. 불면이 진정한 타자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 타자는 자려는 나의 의지와 거리를 벌리며 끊임없이 오만가지생각과 정서들을 만들어낸다. 오만가지생각과 정서들이 타자의 본질이며, 실제로 신체에 상처를 남긴다. 그러다 이 거리가 나의 의식과 의지와 무관하게 소멸되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은 죽음과 달리 두려움과 공포 없이도 너도 나도 소멸되는 국면이다. 이 국면은 나와 너가 하나가 되어 무()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와 너가 진정으로 무한한 초월의 세계로 들어선 것일까 

m*******d 2023.01.2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