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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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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아뢰야식(識)의 발견을 제로의 발견에 비유한다. 저자에 의하면 아뢰야식은 뇌과학이 밝혀낸 마음과도, 정신분석의 무의식과도 다르다. 아뢰야식을 논의하는 유식(唯識) 불교는 단지 마음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아뢰야식은 마음을 표층에서 심층까지 여덟 가지로 나눌 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는 근본식을 말한다. 저자는 삶이 괴로운 것은 상식에 따라 살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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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아뢰야식(識)의 발견을 제로의 발견에 비유한다. 저자에 의하면 아뢰야식은 뇌과학이 밝혀낸 마음과도, 정신분석의 무의식과도 다르다. 아뢰야식을 논의하는 유식(唯識) 불교는 단지 마음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아뢰야식은 마음을 표층에서 심층까지 여덟 가지로 나눌 때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는 근본식을 말한다. 저자는 삶이 괴로운 것은 상식에 따라 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식에 따라 살면 나와 세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서 집착과 욕망이 생겨난다.



마음을 뇌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설명하는 뇌과학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저자는 뇌와 마음은 관계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관계적이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마음을 뇌 작용의 결과로 보는 뇌과학으로는 표층적인 마음과 심층적인 마음이 존재하는 메커니즘을 해명할 수 없고 탐진치 등 번뇌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생기는지 해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뇌과학은 번뇌 즉 더러운 마음을 제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마음이 뇌의 산물인데 어떻게 그것을 없애지 못하는가, 라는 이의제기이다.



저자는 무상(無常)한 것 즉 끊임없이 변하고 흘러가는 것의 일부를 잘라내고 고정화, 실체화해 영원한 것이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마음도 심(心) 대신 식(識)을 중심으로, 그것도 명사가 아닌 동사로 파악하는 작용이 필요하다.(唯識) 유식은 무경(無境) 즉 대상(외부 현상)이 없다는 말과 짝을 이룬다. 저자는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은 실제 사물이 아닌 영상(映像)임을 주장한다. 유식무경이란 사물을 인식한다는 착오를 깨기 위해 설해진 가르침이다.



어떤 사물의 영상이 밖에서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유식 사상은 그것을 생기(生起)시키는 원인을 아뢰야식 속의 종자(種子)로 설명한다. 또한 유식 불교는 경(境: 대상)을 무엇에 대해 집착한 결과로 파악, 부정(否定)한다. 저자는 하나의 움직임을 인식하기 위해 뇌의 무수한 부분이 입수한 데이터들이 조합된 결과 하나의 영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과학 실험을 예로 들며 사물의 움직임 자체를 거울처럼 그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뇌 속의 무수한 세포나 그 세포로 이루어진 무수한 시각야(視覺野: 시각 구역)들이 원인이 되어 생기하는 것을 인식하는 시각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그렇기에 시각이 파악한 사물과 그 움직임은 환영(幻影)이고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외경(外境)은 수많은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 즉 환영 = 꿈이라는 가르침이 유식사상의 주지(主旨)이다. 유식 불교에 의하면 ‘나’는 결코 마음 세계 밖으로 나가 외부 사물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기에 모든 것은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본래적인(항상하는) ‘나‘라는 존재는 없다(무아)는 가르침을 이해한다 해도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유식에서는 마음을 크게 심(心: 마음)과 심소(心所: 마음의 작용)로 나눈다. 심은 심왕(心王)으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 아뢰야식 등 여덟 가지로 나뉜다. 마음의 작용은 51 가지이다.



아뢰야식은 요가 실천을 통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다만 이 경우 깊은 마음의 관찰이 필요하다.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오식(五識)은 언어 없이 대상을 직접 파악하고 각기 고유의 대상을 갖는다. 의식은 오식과 함께 작용해 감각을 선명하게 하고 오식 뒤에서 언어를 사용해 사고한다. 말나식은 자아 집착심이다. 아뢰야식은 심층에 자리한 근본심이다.



저자는 사물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변화한다는 ‘중론(中論)’의 논리를 소개한다. 가령 우유는 있다는 논리는 우유가 만일 그렇게 (실체로) 있다면 변할 수 없는데 현실적으로 요구르트로 변하므로 우유는 있는 것이 아니라 논파하고, 우유는 없다는 논리는 실체로서 없다면 변할 수 없는데 현실적으로 요구르트로 변하기 때문에 우유는 없는 것이 아니라 논파한다. 이로부터 우유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변화한다는 논리를 얻을 수 있다. 물론 내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를 얻을 수 있다.



저자는 한 그루 나무를 보는 여러 사람을 언급하며 그들은 각각 일인일우주(一人一宇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있는 것은 영상으로서의(시각에 비친) 나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사물의 최소 단위인 소립자가 크기를 가진 입자가 아님을 언급하는 양자론의 논의를 근거로 우리는 사물에 대해 관찰자가 아닌 관여자라 설명한다. 저자는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등 말나식이라는 중심적인 마음에 함께 작용하는 네 가지 마음을 논한다.



아뢰야식은 자신이 지은 업(業)의 결과가 저장되는 창고 같은 곳이다. 유식은 감각이 파악한 다양한 사물 저편에 사물의 기체(基體)라 할 수 있는 것을 아뢰야식이 만들어내고 스스로 그것을 언제나 계속해서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식은 집착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의 변혁을 의도하는 사상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알아차림이다.



내가 유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식을 모르면 대승 불교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말이 계기가 되어서였다. 이 말에는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마음을 정교하게 분석한 치밀함은 배울 만하다. 진여(眞如) 등의 용어 때문이겠지만 유식 사상을 힌두적이라 비판하는 전문가(승려)들도 있는 형편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으로부터 신선한 충격을 느낀 기억이 새로운데 유식 사상에서도 그런 점을 느꼈다. 중요한 점은 유식이 아집(我執)을 벗어버리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저자(요코하마 코이츠)의 설명은 친절하고 쉽지만 유식이 워낙 어려운 분야이기에 다른 책들을 추가로 읽을 필요가 있다. 저자는 사람들이 유식 즉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교리를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교리는 의외로 간단하고 알기 쉽다(54 페이지)고 말하는 한편 유식이 어려운 것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을 기술하기 때문이라 말하기도 한다.(75 페이지)



몇년 전 김형경 작가의 ‘만 가지 행동‘이란 책에서 훈습(薰習)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읽었다. 김형경 작가는 정신분석 과정을 철저히 이행하는 작업을 우리말로 번역했다며 훈습을 유식 불교에서 따온 용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뢰야식에 종자(種子)를 심는 것을 훈습이라 설명한다.(181 페이지) 어떤 경우든 거기에는 심층 의식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어 표층 의식은 물론 신체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한자경 교수는 유식의 위대함은 단순히 수행적 깨달음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이론화, 체계화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유식무경‘ 192 페이지) 일지 스님은 위빠사나를 요가(yoga) 실천법의 하나로 설명한다.(’중관불교와 유식 불교‘ 182 페이지) 스님에 의하면 요가를 수행하는 마음에 나타난 모든 영상은 오직 식(識)이라는 자각적 체험이 유식 사상의 형성을 이끈 내면적 근원력이다.



저자는 각 개인의 식 전체가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수행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여기서 이정우 교수(철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불교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어요. 지난번에 我는 識의 執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시죠. 이것은 나라는 개체가 있어 삶의 모든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들이 응집되어 내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라이프니츠에서 근원적인 것은 빈위/사건인데 비해 불교에서 근원적인 것은 dharma라는 차이가 있죠. 그래서 해탈이란 말 그대로 執을 풀어서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개체, 인칭, 기호보다 사건/dharma가 먼저라는 것을 깨달아야죠."(’삶 죽음 운명‘ 184 페이지)



아, 우리의 불교가 이렇게 철학적이고 수행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자는 강력한 서원(誓願)이 자신을 바꾼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적실(的實)하다. 하지만 세상과 나의 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바꿀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르는 것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불교의 진면목을 만끽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m******1 2014.06.16. 신고 공감 8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