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동화작가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의 작품을 샅샅이 파헤치고 정신병리학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위해 쓰여진 서적이다. 이런 류의 서적이 만일 이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고 끝났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이 책은 성공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시장에 풀린 지 오래이며, 최초에 풀려나온 책들은 말초적인 호기심과 <작가>라는 인종에 대한 사람들의 무자비한 해부를 바탕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마디로 선배들의 상업적 성공을 등에 업고 풀린 책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선배격 되는 책으로는 <기발하고 야한="" 일본="" 엽기동화=""><정치적으로 올바른="" 베드타임="" 스토리=""><알고보면 잔혹한="" 그림동화=""> 등이 있는데, 안나 이즈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선배들과 같은 일본인이다. 왜 굳이 이런 종류의 책이 일본에서 출판되었는지 논하기 시작하면 지루한 문화론이 될 테니 접어두고, 공통점을 논하라면 이런 책들은 <작품을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정신병리학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본격적인 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어설픈 지식에 맞춰 <작품을 뜯어고친다="">. <알고보면 잔혹한="" 그림동화="">를 읽으면서 멋대로 뜯어고친 백설공주에 분개했던 나는, 이 책에서 똑같은 만행을 접했다. 이번에는 분노할 기운도 없었다. 작가는 작가라는 별개의 인종이 아닌,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이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울고 웃을 권리가 있고, 우리들이 거울을 보며 여드름 자국이나 짝눈에 고민하듯 작가에게도 컴플렉스를 가질 권리가 있다.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가능성은 작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어째서 안나 이즈미를 비롯하여 이런 종류의 서적을 집필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가장 불행하고 추악한 삶을 살았더라도 아름다움을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지 알 수 없다. 안데르센은 분명히 추한 외모를 가졌고, 정신병에 시달린 가계에서 태어났고, 살아가는 동안 별로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작품에 '추하고 끔찍한 이면'을 부여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완벽하게 충족된 환경에서 예술이 탄생하던가? 아니다. 위대한 예술은, 위대한 문학은, 언제나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꿈 속에서 탄생했다. 어째서, 안나 이즈미는 안데르센이 추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괴로운 일생을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운 동화를 쓰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고 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이 책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안데르센의 절규가 아니라,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창조되고 인정된 아름다움을 양파 껍질 까듯 하나하나 까내려가 해부하고 뜯어고쳐 전시함으로써 자신의 컴플렉스를 보상받고자 애쓴 <안나 이즈미의="" 절규="">였다.안나>오히려>알고보면>작품을>작품을>알고보면>정치적으로>기발하고>작가> |
| 글쎄, 뭐랄까? 허전한 느낌. 책을 다 읽은 느낌이 어떠냐고 굳이 말하자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제목이나 목차, 혹은 책의 한 부분이 맘에 들어 책을 사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나같은 독자를 타겟으로 이 책을 출판했다면 출판사의 입장에선 이 책은 절반은 성공을 한 셈이다. 이 책의 제목과 표지, 목차 등을 보면 책을 읽고싶은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책을 다 읽고서의 그 실망이란. 광고 문구가 너무 거창해서일까? 한마디로 실망이었다. 안데르센에 대한 환상이 깨어져서 실망한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에. 그가 얼만큼 불행하게 살다갔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정신병자였고 자신도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지독한 가난, 그리고 평생을 살면서 사랑도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는 단 몇줄로 작가는 안데르센이 자신의 동화에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면서 등장인물에 자신의 모습까지 반영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안데르센은 유명한, 정말 너무도 유명한 동화작가가 되었지만 그 유명세와는 달리 너무도 불행한 생을 살다 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작가라면 누구나 알게 모르게 자신의 불행했던, 혹은 행복했던(극히 드물겠지만) 과거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인물에 반영시키고 있다. 다만 안데르센은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아름다운동화로 미화시켜 나타냈을 뿐인데. 그게 무슨 큰 죄라고. 작가는 이야기가 하나씩 끝날때 마다 안데르센의 불행했던 시절을 강조(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급기야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안데르센은 불행하게 살다가 죽었고 그의 동화는 지금까지 아름답게 읽혀지고 있는데" 과연 몇 명이나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으면서 그는 너무도 불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동화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그의 자아를 반영한 인물들이다. 인어공주 얘기도 결코 아름다운 얘기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할까? '불행했던 천재작가의 슬픈 광기를 파헤친 공포판타지'가 아니라 코메디 판타지였고 '아름다운 안데르센 동화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면 이 책을 펴지 말라'는 문구는 우리에게 아무런 약발도 주지 못했다. 깨진 환상이 없으니까. 하긴, 한 가지 건진 건 있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8편이나 읽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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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동화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를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동화작가 안데르센... 그의 작품들 중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명한 동화들을 안데르센의 인생과 맞물려 재해석한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난 안데르센이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 그저 유명하고 아름다운 동화를 만든 작가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부모님은 정신병자이고 가난했으며 자신은 추남에다 사랑하는 여자마다 거절당하는 고통을 당했다니...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삶에 비추어 동화를 해석해 보며 무언가를 볼 때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새롭고 다른지를 느꼈다. 한편으로 내 기억속에 아름답게 남았있던 동화의 이미지가 깨진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동화에 어떤 진실이 들어있든 아름다운 이미지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흥미로운 책이었음에 틀림없다. [인상깊은구절] 왕자가 말했습니다. "엄지공주는 아름다운 이름이 아니야. 이제부터 마야라고 부르겠어" "엄지공주, 안녕!" 제비는 작별인사를 하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떠났지만 행복에 겨워 춤축 있는 엄지공주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들렸다 해도 엄지공주는 더 이상 제비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엄지공주는 왕자와 '얼마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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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오는 광고중에 이런 것이 있다. 말 그대로 그림같은 집에서 아름답고 다정한 어머니가 귀여운 아이에게 베겟머리에서 동화를 읽어주고 있다. 그리고 동화가 들리는 집이 있었기에 안데르센이 태어난 것이라고, 집이 사람을 만든다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안데르센이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훌륭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귀공자로 생각할 법한 광고이다.
하지만 동화가 아닌 인간 안데르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 광고가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것인지 어이가 없어 저만한 코미디가 없음을 알게된다.
진주는 사실 조개에겐 귀찮은 침입자나 기생충이라고 한다. 까슬까슬 걸리적 거리는 것이 괴로와서 매끈하게 덮어버린 것이 바로 진주라고. 안데르센의 동화만큼 진주의 이미지와 비슷한 것이 또 있을까.
처참하단 말로도 부족한 유년시절과 좌절로 가득한 젊은 날을 보낸, 열등감과 두려움에 찬 삶을 살았던 그가 이렇게 온 세계의 아이들이 읽는 아름다운 동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말이다.
그가 이야기한 수많은 동화들의 아름다운 겉모습 한 꺼풀 아래 여전히 생생히 숨쉬고 있는 그의 고통과 고뇌가 있기에 그의 동화가 더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동화는 슬퍼서 더 아름답다 [인상깊은구절] 엄지공주가 여러 상대로부터 구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미모 때문이었다. 생각이 깊다든지 마음이 곱다는 등 내면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안데르센은 명성이 높았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자. 뿐만 아니라 한평생 동정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많았었지만 그를 사랑하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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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 보면 희극이다"라고. 누구나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삶 자체가 완성될 수 없듯이 완성된 형태의 행복과 만족이 존재한다는 걸 본인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세계의 유명한 위인들은 그러한 미완성의 행복속에서 끊임 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노력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의 일이 무릇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이 될 것임을 짐작했음은 물론이다.
여기 평생을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다간 뛰어난 사람이 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정신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게다가 그는-실제로 사진을 보면 '쥐'를 연상케하는 길쭉한 얼굴에 퀭한 눈을 가진 추남이긴 하다-지독하게 못생긴 추남인데다가 운나쁘게도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수차레 상처를 입게 된다. 평생 동정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되는걸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비참하고 참기 어려운 일이란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그의 불운은 그를 끝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나 그는 이 모든 걸 극복하고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동화작가로서 그의 이름을 결코 불운한 이름으로 만들지 않게 되었다.
그의 동화는 내 어린 시절 가난하던 그때의 시름을 잊게 해주던 묘약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힘든 시절을 이겨낼 희망의 무기와도 같았던 것이다. 현실의 한계를 일찍 깨닫게 해줌으로써 거기에서 안주하는 것이 아닌 더 큰 희망으로 옮겨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동화를 보면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고귀한 사랑을 지켜내었던 인어공주도 있고, 안타깝도록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도 있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그런 비극적 결말이 아닌 것도 충분히 있다. 그러한 결말은 아마도 안데르센 자신의 가장 솔직한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가정, 그리고 안데르센의 상황에 따른 심리 가정등을 고려해볼때 제조명해보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마도 이 '안데르센의 절규'란 책일것이다. '안데르센의 가장 솔직한 심정으로 그의 동화를 다시 쓴다면?'하는 생각은 어쩌면 그 한 가지로도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개운하지 않은 느낌을 가지는 것은 그 새로운 분석의 묘미에만 치중한 나머지 그 목적은 흐지부지하게 된 것일것이다. 과연 어떠한 목적으로? 게다가 작가 안나 이즈미의 글을 보면 성급한 일반화나 대안 없는 사회비판, 감정적 악의등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러한 단점을 접어두고라도 이 책은 인간의 순수한 악의등을 끌어올리는데 그 가치를 더한다. 우리는 그 순수한 악의(혹은 악마성)조차도 사회적 사실(social fact)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 이즈미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다. 어쨋든 이 책은 어린시절 한번이라도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어보았거나 그의 얘기를 알고 있는 사람한테 그 동화의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안데르센의 고통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기에 충분한 책 임은 분명하다. 오늘 저녁엔 조카녀석에게 안데르센의 동화를 선물해줘야겠다. 그리고 이 말도 해주고 싶다.그 책에는 네가 아직은 잘 모르는 귀한 보석이 들어있노라고. [인상깊은구절] 인어공주는 허리를 굽혀 왕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왕자님 때문에 나는 모든 걸 잃었어. 가족, 바닷속 인어의 성, 내 목소리까지. 이젠 목숨까지 잃겠지. 날마다 떨쳐버릴 수 없는 미련 때문에 괴로워했지. 그런 내 진심을 조금도 몰라주다니..... 둘다 죽여버리고 말겠어!" |
| 안데르센의 불후의 명작들이 실제로는 안데르센의 유년기의 상처와 악몽이 남아 있는 슬픈 이야기라는 무시무시한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다.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충격적인 내용이라 흥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안데르센이 자신의 불우했던 인생을 지나오면서 그려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하나의 공포물로 전락시킬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심이 들었다. 불행했던 경험과 좌절이 아름다운 한편의 동화로 펼쳐질 수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책이었고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흥미있게 읽을 만한 책이다. 그러나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책은 아닌 것 같다.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이다. 이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제목만을 보고 책을 사게 되었다. <안데르센의 절규="">라고 하기에 그에 관한 자전적 소설인가, 에세이인가, 아니면 설명문 형식의 글인가... 별별 생각을 다 했는데, 결국 되돌아보니 '그림동화 바꿔 읽기'라는 식의 '안데르센 동화 바꿔 읽기'식의 내용이었다. 우리가 좋게만 생각하던 안데르센 동화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실"과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부정해 버린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거짓이 되어버리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사색을 시도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바꿔 읽게 되면, 안데르센이 처음에 의도했던(그랬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 집필의도를 무시하고 말도 안되게 재해석 한 것이 아닌가 혐오하게 된다. 그냥 가볍게 읽으려면 상관 없겠지만, 뭔가를 기대하고 보기엔 심히 걱정이 되는 책이 아닐 수 없다.안데르센의> |
| 안데르센과 안데르센 동화에 대해서 평가해 놓은 또다른 책을 보았고 역시 그 책도 안데르센을 인간적으로 그렸지만 분명 사람으로서 냉정했지만 횡설수설한 느낌은 없었고 깔끔한 느낌이다. 근데 이 책은 안데르센을 미친 사람 취급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분명 이건 나만의 느낌이였지만.... 안데르센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항상 안주한 모습이였다. 그래도 그의 동화는 지금 각색되었다 해도 아름다워 보였다. 안데르센과 동시대 인물들보다 더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기를 바랬고 귀족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사는 것도....어쩌면 그 나름의 삻이였으니까... 비판 정신은 별로 없었던 점도 작가로서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동화작가로만 안주해 있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의 가난 가족사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고 숨켜진 이복누나도 있었지만 밝히고 싶지 않은게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단점.... 누가 밝히고 싶겠는가. 분명 우리가 알아왔던 동화의 아버지 모습을 파해치고 싶었겠지만 너무 광적이다.... 이런 느낌... 좋지 않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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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먹을수록 동화에 대한 환상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동화의 이면에 대해서 다루는 책이 보이면 매번 실망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구매하곤 한다. '안데르센의 절규'는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그의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상처에 비추어 그의 동화에 담긴 이면을 보여주는 책이다. 하지만 읽고난 후에는 수박 겉핥기 식의 내용에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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