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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미사에 앞서 찾아간 곳이 있었다. 바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빈소였다. 사건 수습은 물론이거니와 세월호 특별법에서조차 ‘불순한 주판알’만 튕기는 우리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더욱 교황에게 열광했던 것일까. 몇 해 전 용산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철거이주민들은 천막농성을 하며 사건의 진실 규명과 후속대책을 요구했다. 장기간의 시위에도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모 신부님과 그 일행이 사건 현장을 찾아, 이 한마디 말을 건냈다. “여러분, 참 많이 힘드셨죠?” 아!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구나, 누군가 내 처지와 내 상한 마음에 공감을 해주는구나라는 감동에 마음의 빚장이 풀리고 철거이주민들은 눈물을 쏟아냈다. 그 한마디 말에, 그 한번의 마음 씀에.
5월부터 읽어 온, 《월간 샘터-10월호》를 마주한다. 그런데 이번 10월호는 유달리 가슴을 짓누르는 글들이 많아서 글쓰기가 쉽지 않다. 특히 “공감”에 관한 글들이 많아 글을 따라가다가 창밖을 내다보는 경우가 많았다. ‘공감’. 이 능력은 ‘상상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보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시각을 이해하며 이해한 내용을 행동지침으로 삼는 기술. 그래서 인간성의 정수이자 인간관계의 핵심, 더 나은 사회, 인류의 행복을 위해 제일 먼저 회복해야할 능력임에 분명하다. 10월호가 나에게 주는 멧시지는 ‘공감’이었다.
에세이스트 김경의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에서는 ‘영혼마저 푸짐할 것 같은 덩치를 비좁은 꼬마 자동차에 구겨 넣고’ 방한한 교황의 일화와 소박한 모습으로 낮은 곳에 임하는 공감과 포용의 모습을 담고 있다. 더불어 자본의 가치에 밀린, 감수성, 소탈, 지성, 정의와 사랑등의 의미가 회복되기를 염원한다.
웹툰 작가이자 그림책 작가가 된 강풀의 <만화가 아빠의 그림책 육아>에서는 7년 만에 가진 아이를 위해 그림책 작업을 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그와 함께 강풀이 보인 공감과 나눔의 생활이 눈부시다. 그림책 초판 인세 전액이 무료 아동 급식소에 기부되었고 두 번째 책 <얼음 땡!>에서는 ‘깍뚜기’라는 모티브를 통해 작고 약한 것들의 가치, 더 나아가 인간 존엄의 절대가치를 선언한다. 2013년 서울 강동구에 최초로 설치된 길고양이 급식소의 제안자이기도 한 강풀은 작고 소외된 것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우리의 인식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방송작가 양희의 <슬픔을 위한 슬픔>은 어떤가. ‘슬픔’은 슬픔으로만 공감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안다’ 혹은 ‘공감한다’는 말의 무게에 대해서 통렬한 반성을 해보게 한다. “간단한 수술이지만 아이를 수술장 안으로 들여보낸 이후에서야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자신이 실제 겪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십 분의 일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만큼 어렵다. 시퍼런 바다에 아이를 잃은 부모들, 그 슬픔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진다...세상의 모든 슬픔은 오직 슬픔으로만 공감할 수 있다. 아픔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 그리하여 딱하게 여기는 마음,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마음이다.” (p.55)
특집 ‘미운정이 들었다’에 실린 작품들 역시 처음에는 몰랐던 타인의 마음을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된 깨닫음의 순간들이 펼쳐진다. 박혜란 단행본부 부장의 글, 명사초대석 - <죽음이 전한 말은 “살아가라”>는 글은 몇 번이고 읽어도 좋은 글이었다. 재일학자 강상중 교수의 인터뷰 글이었는데 그 중 몇 부분만 추려보면, “우리 사회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의 아픔이나 불행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왔을까?” “가장 나쁜 것은 아픔(죽음)을 잊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의도적으로 치유가 아닌 망각을 조장한다....현실에 대한 성찰 없이 긍정과 낙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희망에 대한 불성실이다.” “공감은 커녕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무감각해진다....무미건조한 ‘숫자상의 죽음’에서 5천명의 죽음과 5천 1명의 죽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 사이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끼는 것,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죽은 이의 존엄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p.68) 더불어 루게릭(ALS) 투병중인 전직 농구선수 박승일씨의 이름을 따서 루게릭 요양병원을 목표로 설립된 승일재단의 이야기를 놓치면 안되겠다. ALS 환우 돕기 위한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SNS에서 뜨거운 화제이니 꼭 확인해 보시길. ( www.sihope.or.kr )
‘공감’과 관련하여 너무나 당연해서 잠깐 잊고 있던 사실 하나만 언급해야겠다. 그건 내가 아닌 ‘네가’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아닌, ‘네가’ 있는 ‘관계’에서만 ‘공감’의 도덕률도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강풀이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공감’이기도 했지만, ‘공감’의 전제인, ‘관계’이기도 했다. (p.16) 박종무의 <세상에 나 아닌 것은 없다>에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이렇게 해석한다. (p.17) “세상에는 나 아닌 것이 없기에 세상은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 모든 생명이 나이기에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이어지는 해설을 보니, “생명은 자연 안에서 서로 연결되며 이 원할한 순환 속에서 삶이 지속된다.”고 하고 있다. 즉 홀로 존재하는 ‘독존’이 아닌, 너와 내가 연결되어서 하나인 우리 모두의 ‘독존’이다. 그 연결의 고리를 확인해보니 세상에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현경 교수의 《연약함의 힘》에서는 여든 세로 숲 속 생활을 하는 타라 할머니를 통해,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주에 가득한 것이 사랑이고 모두와 연결되어 있으니 외로움이나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p.43)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떨림, 혼자만의 삶을 넘어서 생명의 그물망 안에 은혜로 엮여 더 큰 삶을 이룬다" (p.69) 더 나아가 이브 엔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인용하며 모든 것과 연결된 존재임을 망각할 때는 ‘폭력’이 가능해진다(p.184)고 경고한다. 너와 내가 연결된 ‘관계의 인정’은 공감 충만의 사회로 나아가지만,‘관계의 부정’은 불의와 폭력이 가능해지며 부정의한 공감제로의 사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폭력과 부정의는 '공감의 둔감'을 통해 자라나고 조장된다. 이미 우리가 경험했듯.
《월간 샘터-10월호》는 ‘공감’과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싸워서 몇 일동안 토라져 있는 당신과는 어떻게 공감하고 화해해야할는지 고민이다.) 이 글의 원본은 http://thinker777.blog.me/220147910059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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