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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고정된 프레임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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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장은 좋은 문장들을 옮기면서 필요한 경우 < >로 강조하고 사견을 살짝 곁들여 보겠다. 밑줄긋기 많으면 싫어하는 작가도 있고 실례일 것 같은데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요. (^-^)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모든 앎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 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이며, 혼종, 혼합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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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4장은 좋은 문장들을 옮기면서 필요한 경우 < > 강조하고 사견을 살짝 곁들여 보겠다. 밑줄긋기 많으면 싫어하는 작가도 있고 실례일 것 같은데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요. (^-^)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모든 앎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 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이며, 혼종, 혼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견이나 틀린 말도 언제나 의미가 있다. <재해석하기 나름>. (189-190)

==> 어느 부분에서 오해가 생기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지는 발언을 듣는 게 아무래도 유리할 듯.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은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언어다.’ (190)

==> 강산이 변할 시간동안 싸이월드에서 실컷 놀았다. 그때 방 이름이 The Enormous Room이었다. 가상공간에서만큼은 거대한 방을 갖고 싶어 e.e. 커밍스의 시 제목을 땄었다. 팬데믹 시기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읽기 바람이 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큰조카가 독립서점에서 기념엽서를 사와 주기도 했었다. 글쓰기(프리랜서 작업) 공간과 일정 수입이 지금 주목을 끄는 이유는 독립된 분리 공간과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함의하는 바가 클 거다. 여담] 결혼할 당시 한 약속 두 가지를 남편이 지켰는데도.. 우울병을 이기지 못했다.

 

 <당파성과 가치관이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앎은 현실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집단을 위한 융합인지가 핵심이다... 융합은 개별 학문을 넘어서는 가치관의 문제다. 융합의 전제는 지식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융합은 그 과정도 결과도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191)

==> 정치적 언어 전성시대 함 가즈아 ~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고 인지, 지식, 돌봄, 감정 노동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invisible heart’이라고 주장해 왔다. (193)

==> 아담 스미스를 시작으로 한 자본주의를 재해석하는 움직임으로, 얀 물리에 부탕 같은 여성주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대안적인 글로벌 경제를 귀띔한다.

 

 모든 지식은 다른 지식과의 비교나 대비>(반대말, 동의어)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절대로 홀로 성립하는 개념은 없다. 모든 개념은 연결의 법칙이 다를 뿐 연결된다... 개념들의 접목이 융합이 되려면, 무관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알려면 새로 공부해야 한다. (198-199; 202)

 

 어떤 언어도 한 가지 요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얘기다. 말은 계속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 중 오염은 필연적이고, ‘외래어비난 자체가 외설적(벗어난 개념^^)이다. (207)

==> 저자는 한글 전용론의 한계를 말하며 한국어는 한문과 영어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한글도 우리말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언어와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겪었던 사정상 여러 언어 흔적이 있는 중역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학생의 한문과 상식 용어에 대한 이해력이 교육개편과 인터넷 문화의 영향인지 점점 떨어진다.

 

 이것(언어)권력의 임의적 결정>, 즉 사회적 산물이지 하늘의 이치가 아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는 것이다. 조물주 콤플렉스가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사고라면, 메시아 콤플렉스는 그것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피해의식은 새로움에 대한 수용성, 호기심, 이를 받아들이는 용기라는 융합적 사고방식을 방해한다. (208)

==> 콤플렉스 부분에서 ㅋㅋㅋ 비약과 프로파간다는 내 전문인데. 저자는 정체불명은 모든 언어(문화)의 속성이라고 파격적으로 언명한다.

 

 <관점에 따라 데이터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점은 당파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기. (211)

 

 이제까지 공간 개념은 시간적 진보를 증명하는 도구--‘그 시대 위대한 건축물’--였다. 오랜 세월 동안 공간은 시간 개념에 비해 인식론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거의 모든 비유는 젠더, , 자연, 공간과 관련되는데, 이는 남성의 사유가 투사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공간적 주체. 어느 공간에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코로나 시대 최대 아이러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지만 사회의 대안으로서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다... 코로나 스트레스는 곧 공간 스트레스다. (212-214; 215)

==> 내 경우 학업 과정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지만, 특히 공간에 대한 사고 전환이 신선했었다. 데카르트의 몸/정신 이분구도 뒤집기에 버금가게 공간적spatial 접근이 고정 관념을 흔들었다. 이동이 자유롭고 워라밸을 장착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말이다. 코로나19 초기만 해도 건축학자 유현준의 책들을 탐독했었는데 지금은 멀어졌으..

 

 한마디로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객관적은 없다. 어떤 객관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산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객관성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오염된 개념이다. 객관성은 사회와 맺는 관계에서만 논할 수 있는 문제다...

 ‘객관성은 없다의 의미는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객관이 특정 맥락에서만 작동하는 유동적 특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해서 쟁취할 필요가 없는 반면 약자의 삶은 그렇지 않아 고달프다. 약자에게 객관성은 쟁취해서 확보해야만 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 운동이다. (217; 219; 221)

==> 국가권력에 의한 언어의 오염을 가장 현장감 있고 무게 있게 포착한 르포 작가가 조지 오웰일 것이다. 이런 객관성의 철옹성을 깨려면 읽고 역사의 반복과 흐름을 공부해야한다. 마지막 인용에서처럼,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운동에 몸담고 목소리 내는 민주시민들의 실천, 멋지다!

 

 시대와 장소, 말하는 사람의 위치, 정치적 상황 등 수많은 요소에 따라 객관성의 내용은 다르게 구성된다. 그래서 융합적 사고에서는 객관성보다 상황적 지식을 주장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수 있다. (222-223)

 

 대개 언어는 위계의 만남이다. 이분법은 AB가 아니라 기준으로 삼은 A와 그 외 것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비교하려면 연구 주제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한다. 앎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정하는 것이 비교의 기본이다... 기존의 앎을 의심하지 않는 비교는 무의미를 넘어 유해하다... 오히려 인문사회과학 연구는 변수, 새로운 배경, 상황, 맥락을 드러내기 위한 공부다. (225; 230; 227-228)

==> 정희진 작가가 말하는 생각의 지도와 자기 이해, 그리고 사회 기여의 연동성이 역동적이라 좋다. 대학원 시절, 동기와 나는 비교의 평가에 시달렸다. 둘이 반반 섞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훈수를 들어야 했다. 융합이나 협업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니까 그러려니. 나만 하는 투덜거림인 줄 알았는데 정 작가도 한다. ‘당신이 뭔데!’ 오래 전 지도교수님과 합의를 봤다. 복잡할 거 없이 70% 내키는 사람은 좋은 사람 하자고.

 

 안목은 그 사회의 수준과 개인적 노력, 환경의 총체다... <자기 프레임을 모르는 사람이 오피니언 리더, 고위 관료, 통치자가 되면 역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민생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233-234)

==> 뼈 때리는 문장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우중의 덫에 걸려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사회의 안목을 겸비해야 한다.  현실 정치와 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다 . 내년 총선에서 의제를 잘 선점해서 화끈하게 이기자.

 각종 자원 배분과 해결책 결정자를 비롯해 인력풀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한국은 진통을 앓고 있다. 저자는 2021스폰서 검사와 비리70년 해묵은/해먹은 검찰의 일제 잔재를 끊어낼 수 있었는데, 김건희 씨의 논문이 불거져 검찰개혁이 산으로 갔다고 비판한다. 아래 인용처럼 윤 씨 문제는 삭제되고 여론전 속에 문제의 본질이 엉뚱하게 물타기 당하고 말았다. 지난 리뷰와 마찬가지로 에바의 거리에서의 삶과 거니의 삶은 비교가 안되자나 요.

 

 판결이 법대로 내려지는 게 아니라 어떤 판검사를 만나느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직 있어요, /    내가 궁금한 점은 윤 씨 부부의 탄생이 검찰제도의 산물인가 여부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 우중 농단. 에휴/    가치관, 당파성이 문제를 인식하는 범위와 초점을 정한다... 검사 한 명이 의제를 장악해 전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현재진행형 휴우/ (235-237)

이달의 사락 s********d 2023.03.2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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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내용보기
정희진 선생님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후루룩 읽지 못하는 저의 무지함을 탓하면서 이어캡을 끼고 조용한 곳에서 정말 공부하듯이 읽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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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에 후루룩 읽지 못하는 저의 무지함을 탓하면서 이어캡을 끼고 조용한 곳에서 정말 공부하듯이 읽었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j******3 2024.05.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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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3 2024.05.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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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다른 것을 다르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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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가진 이야기 주머니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내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던 내가 지각변동을 겪은 듯 나불나불. 몸 고생은 했다 할 수 없지만 마음고생이 마디마다 썼는데도 꿀꺽 잘 삼키며 살아온 것 같다...(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같다며 자뻑 하려니 현실적인 엄마와 여동생이 스쳐 수정한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그나마 지켜준 인생이다. 묵묵히 고요히.  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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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에 가진 이야기 주머니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내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던 내가 지각변동을 겪은 듯 나불나불. 몸 고생은 했다 할 수 없지만 마음고생이 마디마다 썼는데도 꿀꺽 잘 삼키며 살아온 것 같다...(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같다며 자뻑 하려니 현실적인 엄마와 여동생이 스쳐 수정한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그나마 지켜준 인생이다. 묵묵히 고요히.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5(현재 기준으로 최종)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가 어떤 이에게는 별 울림 없고, 더욱이 3다른 것을 다르게 보기도 탁상공론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나는 관통penetration을 당한 나머지 나를 모아 보는 값진 시간이었다.

 살면서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황급히 돌아서고 보낸 사람들이. 유물론적 으로는 함께 하지 못해도 그들의 말과 글이 내게 남아있다. 3장을 읽다가 90년대 목소리내기라고 했던 다른 말, ‘자기 언어가 중요하게 싹튼 시기를 재확인하며 뭉클해졌다. 스무살, 방황하다가 나는 크리에이티브 라이터(뭔지도 몰랐으..)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슴에 품었고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능동태 아니고 그냥 정해진 흐름을 따라.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자기 언어는 현실 인식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게 이끈다. 이 세 가지가 무한 반복 루프 같다고 할까. 자기 언어를 갈구하는 나이지만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는 아예 시도조차 안 했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그곳에 없을 거고 나를 봐달라고 애/떼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말하지 못한 고통을 꺼내 자기/사회적 검열과 침묵을 깨고, 정제된 언어로 형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인생의 큰 축이었다.

 

 이 책의 키워드는 융합融合이다. 융합을 유심히 살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독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문화는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아포리즘을 투척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미국은 다양한 사회가 아니다. <백인 문화가 용광로를 운영한다. 백인들은 용광로melting pot에 들어가지 않는다(145)”고 말할 때 표현이 진심 부러웠다. ‘그렇지, 운영진이 기계의 일부가 될 일은 없지.’ 자기 언어는 봤다고 해서, 깨우쳤다고 해서 따라오는 부속품이 아니다. 언어는 가진 것 없고 특권층에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연마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한다.

 글이 될 때, 아니 구체적으로 책의 형태일 때 그것은 아는 것을 전 꼬치처럼(내가 미는 표현^^) 시각적으로 명료화한다. 그리고 글이 되었을 때 그것은 제약을 빗겨 뻗어나가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전체 맥락이라는 보호막을 갖추어 설을 더하거나 반박하려면 세심히 살펴야 한다. 상호 이해의 노력이 추가되는 매개라 말보다 관계가 두텁고 기대게 된다. 건축물이기에 나중에 수리나 개조나 리모델링이 구체적이고 큰 망에서 조화로울 수 있다.

 어쩌다보니 3장 리뷰가 글 예찬으로 넘어가고 있다. 두더지 게임 속 두더지처럼 빼꼼 얼굴을 내밀 때마다 맞는데도 기꺼이 머리를 내주게 된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위한 융합인가이다... 안보 신화를 종식할 수 있는 논리, 무의미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논리, 한국 현대사에서 검사 집단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 이런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융합이다(146).” 융합은 뜬구름잡기나 말풍선 생각에 머무는 작업이 아니다.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146).”

 인문학 공부를 하며 늘 달고 산 게 ? 도대체 왜?’ 라는 물음들이었다. 와이? 가 우중 우산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게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부른다(賢問賢答^^). 반복해온 정답지의 답안이 아니라 이전에 미처 감안하지 못했던 기류를 품는 출발점이 아마 질문하기 일 거다. 카프카가 말한 정신의 얼음을 깨는 도끼까지는 아니어도 균열이 가해지는 외부 충격의 순간이고, 만남이 얕지 않고 흔한 사이를 넘어선다.

 

 나는 정 작가가 융합은 학문 간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한다기보다는 정치적 요구라고 할 때 불끈 힘이 났다. 학문 간 소통도 정치(여러 이해관계를 조정). “횡단의 정치는 사고를 교차하거나 기존 의미의 문지방을 넘어 사회 변화trans/formation를 추구한다(147).” 적어도 나는 아버지의 연장이자 지배 언어의 식민성을 띠어 폭력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 기존의 언어 틀에서, “하나의 마디”article에 대해 또렷이 생각을 밝힘”articulate an idea으로써 절합한다고 할 때 하트 뿅뿅 반해버렸다.

 인문학 종사자라면 한번쯤 해봤을 왜 우리는 인문학 강국이 아닐까?(왜 노벨 문학상을 못 탈까)”라는 회의감에 젖은 질문에 융합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언어가 부재한 사회(149)”라고 직언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권력과 지식>(역학관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151).” 이 부분에서 나는 지식의 위계질서에 금이 가게하고 싶어 크리에이티브 라이팅에 줄곧 관심을 가져왔음을 깨닫는다. 차이는 필요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개념인 것이다.

 융합은 완전 정복형이 아니고 생각하는 힘이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는 태도(152)”이다. 저자는 79억 개의 개별적 몸이 손쉽게 소통하고 대화하고 공감할 거라고 절~대 보지 않는다. 상호 이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내다보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다. 연장선에서 협력도 원래의 지식의 상하구조를 견고히 하여 약자 착취에 허울 좋게 쓰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바람직한desirable 융합은 기득권이 고수해온 (집단)인식을 포기하게 하는 가로지르기이며 앎의 변화.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155)”이다.

 

 융합은 손이 많이 가는 피곤한 작업이다. 정상적이고 노멀하다고 간주되는 언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갱신되게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일례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가족에는 수식어가 없으나, 베트남 신부는 다문화’, 미국 신랑은 글로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런 차이는 인종주의, 남성 중심주의, 국가 간 위계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157-158).” 소통전문가 김창옥 강사는 가족끼리 다른 나라 사람으로, 다른 언어를 쓴다고 생각하면 너그러울 수 있다고 설파한다. 마찬가지로, 정 작가도 가족 내부에도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충돌이 존재하며 모든 가족은 다문화 가족이라고 정의한다.

 다음은 가족주의의 위험성을 자녀로까지 적용해 눈길을 끈다. “가족 구성원의 분업과 위계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고 한의 문화를 낳는다. ‘과 울화는 예전 어머니들이 가진 사연이 아니다. 가족, 사회, 학교 제도의 구조적 억압속에서 한 맺힌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가(158).” (미안합니다ㅜㅜ) 다시 말해 범주 설정이 무엇을 중심적으로 인식하는지를 드러낸다. 다양성 혹은 보편성이라 하고선 하나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배제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한국 사회는 수저논란 속에 부모의 재력이 자신의 능력으로 혼동되고, 기회와 조건의 불평등이 팽배하다. 정 작가는 다양성을 말할 때 그 여러 개끼리 평등하지 않음을 고려하고, 어설픈 관용이나 배려도 우월함의 표식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권한다.

 

 모든 지식이 저절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노력이 없으면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보수의 반대말이 공부라고 생각한다.진보도 공부하지 않으면 보수적, 방어적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 분야는 특정 학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이 필요로 하는 정치적 입장, 새로운 가치관이다. (162-163)

 

 위의 인용은 자기 분야가 어떻게 자기를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만들어진 것인지를 밝히는 실천이, 융합적 공부라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조국-박원순-윤미향을 하나의 진보 사태로 일반화하거나 패키지 처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모든 발언에 동의하진 않는다. 허나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은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170).”

 (긍정적인 파괴인 데리다 식의?) 해체destruction는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낳는다. “건설적 사고는 파괴를 기반으로 하는 창의적 사유under construction”이고 사회 변화는 지식의 재해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이다(171-172).” 그 결과 진짜 문제를 은폐하거나 차별을 대충 봉합하고 하나로 무리해 통합함을 피하고, 인식자의 개별 위치()를 살려 닫힌 의미를 교란할 수 있다.

 이리 쓰다보면 말로는 뭔들 불가능할까 싶지만 현실은 자기 나이를 수용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다. 노화가 이십대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조건이자 생로병사가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도 건망증도 여기저기 탈나는 신체도 싫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진보 기득권 세력인 386이 세대 갈등의 원흉인 것처럼 몰이하는 것도 앞으로 자제해야겠다.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답정너는 폭력이니까.. 교육, 부동산. 건강, 노화를 구분해 말하지만 이들은 구조적으로 지배받는 계급의 문제임이 드러난다. 세대 갈등을 노년과 청년의 대립으로 떠들지만 기실 계급을 둘러싼 갈등 첨예로 읽는다.

 나이 듦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들기 쉬울 뿐 아니라, 도리어 노욕이 생기고 성숙하지 못할 수 있으니 늘 깨어있으라 한다. 사담이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속 늙고 지친 가축들과 같은 에코 챔버 충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청년층의 취업시간대 최저 임금 논의로 변질시킨 정치인과 자본가들(177)”을 적대시하라고 말한다. ~~때문이야, ~가 제일 문제야 라는 식의 깔때기 언설(‘환원주의’)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기존 개념에 의문을 품고, 차이와 경계의 기준을 재설정해 지금, 여기의 사안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언제나 움직이니까!

 저자는 합하는 과정에서 분이 필수적이고 구분區分융합의 핵심이라고 피력한다. 대표적인 예로 대선 때 김건희에 대한 벽화를 과도하게 비호하며 검찰 문제를 은폐한 정황을 언급한다. 김경진 전 의원은 윤 씨 부부의 검찰의 부끄러운 역사, 엉뚱하게 마크롱과 존슨 내외와 나란히 두어 덮어버렸고, 현재는 조정훈이라는 시대전환 역적이 요상한 비호를 해댄다(거니 대변인인가!).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은 기득권층이고, 고통받는 이들은 새로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180)”임을 기억하고 힘내자 . (^-^)

이달의 사락 s********d 2023.03.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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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파국의 시대, 공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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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를 제목으로 단 책들이 붐이고, 평생교육이 일반화되는 요즘 중년 이후 관심이 드높다. 김영민의 책은 머리 식힐 겸 읽었고, 고미숙 선생의 공부 시리즈는 꾸준히 따라 읽었다(최근 글에 힘이 빠지셔서*^^*). 김영하 작가의 삼부작 ‘다다다’는 2030 동지들에게 권하고 싶다. 책들이 취하는 주요 포인트와 관점들이 달라 서로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지금의 나는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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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란 무엇인가를 제목으로 단 책들이 붐이고, 평생교육이 일반화되는 요즘 중년 이후 관심이 드높다. 김영민의 책은 머리 식힐 겸 읽었고, 고미숙 선생의 공부 시리즈는 꾸준히 따라 읽었다(최근 글에 힘이 빠지셔서*^^*). 김영하 작가의 삼부작 다다다2030 동지들에게 권하고 싶다. 책들이 취하는 주요 포인트와 관점들이 달라 서로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지금의 나는 정희진 작가의 워딩을 쵝오의 위치에 두고 싶다.

 저자의 말은 자꾸 곱씹게 된다. 아침마다 영양제 삼아 챙겨먹는 작고 단단한 사과를 닮았다. 한국은 트럼프라는 증후적 인물을 남의 나라 이야기로 나태하게 치부한 결과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노골적인 혐오와 불이익을 주는 K-트럼프를 리더로 두고 지낸다. 서민경제나 지역경제에 관심이 일체 없는 대통령은 당선 일 년 만에 고실업노동 의욕 상실을 예고한다.

 지난 일 년 계속된 한탄이 왜 사회적 약자가 특권층을 뽑고 지지gr하느냐 였다. 이론가 파농이 말한 하얀 가면을 쓴흑인의 백인 선망과 추종의 유사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욕망 특징이 절대성, 일방성, 그리고 주체적 종속인 관계로 상호 해방의 가능성은 없다(89).” 그들은 재벌의 손에 그들의 생계가 결정된다고 믿는다(2번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이라 하는 나도 편협).

 고용과 안전은 뒷전인 재벌가를 선망하고, 무노조 경영과 산업 재해 방치를 방조한다. 저자는 우리는 착취하는 자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을 더 걱정한다(90)”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에서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앞잡이가 되어 아들을 밀고하고 주인집에 바치는 장면은 무지한 끔찍함 그 이상이었다.

 

 저자는 한국이 문맹률은 낮은 반면 문해력은 바닥 수준이라고 개탄한다. 자구적 말 풀이와 해석 능력이 대체로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문해력이 낮은 원인을 분단과 식민주의’(여파)로 꼽는다. 반미, 반북, 친일로 프레임 짓거나 국가보안법과 색깔론이 여전히 작동하는 나라에서 빚어지는 일이다. IT 강국이라는 포장을 뜯어내면 진영 논리에 휘둘리는 무지가 드러난다. 그런 이유로 국민은 동물농장의 가축쯤으로 치부된다ㅜㅜ.

 

 문해력은 인간의 조건이자 상식 사회의 초석이다. 낮은 문해력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고 지적 양극화>, <의사소통 저해등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낮은 문해력은 유용한 통치 기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의 문해력은 일제 강점기, 미군정, 한국 전쟁 때보다 후퇴했다. (94-95)

 

 저자는 문해력이, 지식의 정보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판단 정지)이며, 알아 가는 자기 진화의 과정으로 연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 작가는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무한한 자유,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의 시대(99)”라고 예리하게 가른다. 대통령의 69시간 근무제 발언에 실업과 과로사 사이에서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발이 거세다. 윤 정부가 포용하는 세대가 있기나 한가.

 어제 이재명은 호찌민의 싸움 전략을 말하며 서로 믿고 보조를 맞추는 길동무가 되어달라고 지지자들에게 부탁했다. 이런 소통 자리가 리더는 머리를 빌려 쓰는 사람임을 인증한다. “현실 정치 지도자의 첫 번째 조건은 현명함이다. 그래야 참모의 능력을 제대로 빌릴 수 있다(101).” 이 대표의 헌신할 만한 조직과 결합된 확장성이 각종 괴롭힘과 두려움을 떨쳐내게 하는 것 같다. 융합의 측면에선 개별적인 가치관의 충돌을 통한 당파성의 지속적인 재생산이 중요한데, 그는 이를 꿰뚫어보고 있다. 숭일崇日 지도자의 겁박 쇼, 아니면 거짓 눈물 쇼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몸의 개별 텍스트성을 특별히 여긴다. 이에 기초해 앎의 내용과 가치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생성 중인 지식()의 융합 작용을 긍정하게 한다. 알다시피 나는 에머슨과 소로로 대표되는 미국의 초절주의 사상을 흠모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완벽한 개체다(102).” 비록 이미 있던 철학과 가치를 그들 문화(특히 동부)에 녹여 특성화하고 개념화하고 포교한 것이라 해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같은 이유에서 이잼의 정치 스피치를 사랑한다.

 

 2장에서 공부하는 공동체 모임이나 도반 관계를 말하는 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개인 내부에 융합이 된 이들이 모여 함께공부할 때 파급력이 커진다. 그냥 모여서만은 안 된다. ‘동무는 독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 융합은 단순히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개별적 몸들의 접속 상황이기에 서로 충돌하며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자극과 긴장 관계지만 뒤끝 없이 믿을 만한 길동무들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나 마지막 강의같은 책이 인기를 모았던 이유도 도반을 향한 갈망을 채울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을 함께 하는 정신적 단짝들.

 

 모든 분리와 분업은 위계화의 시작이다. 그래서 앎의 궁극적 목적은 배제 없는 온전함holism이다. 온전함은 경계,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려면 일단 우리의 온 몸을 비우는(아마도 뇌 포함^^) 노력, 적어도 상상이라도 자주 해야 한다. (108)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함은 맞지만 지식인의 권위 의식에는 반대한다. 이 대목에서 정여울 작가가 한 학교에 귀속되지 못한 사연이 떠오른다. 주변부에 있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더 원할 수도 있다. 사이의 경계인에게만 허락되는 봄과 통찰이 있으니까. 온전함이 wholeness가 아닌 점에도 주목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wholeness는 착각이자 신기루이자 이상향에 그치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대안으로 holism 제시를 통해 개별들의 접촉을 있는 그대로만 살린다. 꽉 차 있거나 과부하 상태에서는 새로운 것이 들어설 여유 공간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성적 판단과 인간의 감정의 영역에 대해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이런 때 저자의 이성, 합리성, 일관성은 인간을 정의하고자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개념일 뿐(109)”이라는 말에 집중하게 된다.

 무리수를 조금 두자면, 인간사는 모두 언어로 맺어지고 확장되거나 흩어진다. 인간과 대척점에 놓이는 AI 같은 첨단 기술도 결국은 언어’(코딩)의 산물이다. 언어를 매개로 융합하는 현장은 대단히 역동적인 활동 모둠이기도 하다. 자신과 세상을 아는 과정에서 열의의 불이 붙고 그것이 다른 관심사로 옮아가기 때문이다. 강의를 하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다양한 학생들과 영문학을 논할 때였다. 전공의 형식과 권태에 묶이지 않는 교양의 자유로움이 어디까지 학생들을 이동시킬지 종잡을 수 없었다. 같이 충만해졌던 감사한 추억 :)

 나는 감화가 컸던 책에 대해 말할 때 유독 작은따옴표를 많이 쓴다. 작은따옴표도 느낌표처럼 큰 언성으로 들릴 수 있어 자제하려는데 잘 안 된다. 이 찔림을 저자가 포근히 감싸준다. “이중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작은따옴표 사용을 자제하는 일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글쓰기, 창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작은따옴표는 중요한 문제다. 작은따옴표는 기존의 의미를 재해석했다는 표식 중 가장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유) 표식이다(113).”

 

 잠시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겠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당시 개정 강사법이 마침표를 찍고 채택되었다. 물론 이전 보수 정권이 밑밥을 깐 발의안이었지만 최종 승인자는 그로 남을 것이다. 터무니없게도 강사법은 대부분 종사자들의 뜻과는 무관했고, 인문학자를 양성하지 않는 한국사회로 가는 길을 확실히 했다. 박사할 거면 외국 나가든지. 사대주의에 물든 사람들의 결정. 지적 자생력을 포기해버리는 처참한 사태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한국은 지적 독립체 양성에 인색하다. “잘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이 사상들은 왠지 기력이 없거나 심지어 한가한 주제로 인식된다(114).” 나는 사상은 idea로 사상가는 thinker로 쓰길 좋아한다. 생활 밀착형 표현을 쓰고 싶다. “지식은 자원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자원중의 자원이다(124).” (경제 지상) 발전주의에 맞서기 위해선 사회 운동을 응집시킬 대안 이론이 절실하다. 몸빵만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언어와 사고 정립과 재창출도 수반되어야 한다. 확립된 자기 가치관과 관점 위에, 지식을 응용하고 연습하는 언어 마술사(스피커)도 양성해야 맞다.

 

 다음으로 넘어가 김건희 여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 거래를 위반한 피의자다. 정황이 확인된 것만 해도 주가조작범이자 논문표절자다. 중세 시대에서나 가능할 초법적인 방탄 거니. 신평 교수는 학계 표절이 관례인 것처럼 부풀려 말했다. 그가 속한 교육 기관은 그런지 몰라도 나는 대학원 시절 석사 논문 표절이 당사자의 고발로 발각돼 박사 논문까지 자동 취소되는 교육대학원 사례를 똑똑히 보았다. 두 달 만에 내려진 취소 처분이 왜 김건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그와 관련된 다른 주가조작 공범들은 어쩔 건가.

 그리고 여성주의 얘기만 나와도 발끈하는 여성분들이 계시다. 원시적일 수 있으나 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경우 앞 세대들에게 빚진 부분이 누구나 있으며 그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주의다. 특정 사람을 운운하며 여성주의 전체를 깎아내리는 건 터무니없다. 진정 박지현이 여성주의 대표주자라고 생각하는가? 심상정이 노동자와 장애인을 대변하는가? 그냥 사익 추구하는 심술보들 아닌가.

 한때는 문학 전도사냐는 말에 파르르 떨던 시절이 있었다. 전공과 직업을 밝히고 싶지 않아 꾹 참았지만 ()문학 복음 좀 하면 안 되나. 이젠 그리 받아친다. 여성주의에 반감 있는 분들에게 실비아 플라스, 까미유 클로델, 프리다 칼로, 힐러리, 미셸... 한 명이라도 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실체 없는 부당함에 인생을 걸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예술가나 여사라 거리감이 든다면 ‘82년생 김지영이라도 보시라. 지금의 공부할 자유와 당연한 권리는 그냥 어느 날 생긴 게 아니다. 좀 알고 싫다 해라 요.

 자신을 생태주의-여성주의-평화주의가 교차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정희진 작가. 자본이나 폭력에 봉사하는 융합을 경계하고, 증오와 파괴가 아닌 대안적 융합을 그리는 그(의 글)가 있어 다행이다.

RM 'No.2 (with 박지윤)'

이달의 사락 s********d 2023.03.2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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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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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작가의 논리 전개는 용의주도하고 힘차다. 거기에 슬쩍 얹는 한자나 영문 표기도 신선해 시선을 끈다. 엄청난 관찰(옵절빙)을 통한 포박.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철저히 수비하고 틈새를 공격한다. 저자는 투수의 선구안眼을 피력하는 야구광이기도 하다. 나는 작은 공에 도대체 몇 명이 휘둘리고, 동시다발적이지 못하고 연차적인 전개라서 별 흥미를 못 느낀다.  기존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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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진 작가의 논리 전개는 용의주도하고 힘차다. 거기에 슬쩍 얹는 한자나 영문 표기도 신선해 시선을 끈다. 엄청난 관찰(옵절빙)을 통한 포박.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철저히 수비하고 틈새를 공격한다. 저자는 투수의 선구안을 피력하는 야구광이기도 하다. 나는 작은 공에 도대체 몇 명이 휘둘리고, 동시다발적이지 못하고 연차적인 전개라서 별 흥미를 못 느낀다.

 기존의 남성 중심의 단일 보편성uni/versal(하나의 목소리)을 뒤집는 과정에서 다양성poly/versal을 위장한 채, 위계를 숨기고 있는 흑백논리를 재탕해선 안 된다고 견제한다. 포장된 관용이나 나 편한 연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리뷰 (1)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로 통일하는 비대한 범학문에 반대하고, ‘횡단적 사고’ ‘사선으로 보기’ ‘가로지름’ ‘조우가 건전한/온전한 융합이라고 대안을 제시한다. 이론도 흐름 속에 재검토하고 갱신하고 업데이트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이론도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47).” 볼매 문장~.

 융합을 보는 정 작가의 시선은 미국 국가의 초기 다문화주의 멜팅 팟을 부정하고 샐러드 바를 제창하던 것과 겹친다. 샐러드 바 다음에 다른 것으로 넘어갔는데 생각이 안 난다. .융합은 모든 지식을 습득한 다음 녹여서 합하는 것이 아니다(50).” 본연의 맛과 색을 잃어선 안 된다는 개()성 추구가 핵이다. 이렇듯 이론은 실재나 실천과 연계될 때 살아있는 물고기로 활기를 띨 수 있다.

 

 공동체의 운명은 지도자와 구성원들의 선구안에 달려 있다. 타석의 선수가 매번 공을 판단하듯 스트라이크 존은 앎과 삶의 범위를 상징한다. 인생은 거창하지 않다. 일상이다. 지식은 일상의 매순간 필요한 수많은 양식 중 하나일 뿐이다. 학자도 다르지 않다. (49)

 

 위의 인용은 일 년째 누적된 걱정과 분노의 원인을 투영해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전부를 장악하려는 무식하고도 용감한 대통령 내외를 보며 오늘도 무사히를 기도하는 국민의 심정은 애탄다. 내가 보기엔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게 없고 잿밥에만 마음을 두는 불통과 엽기 행각 그 자체다. 그런데 언론과 대통령실은 윤비어천가를 읊조리며 윤체이탈을 거짓말로 덮고, 국가를 그들 것으로 착복하며 나눠 먹는 초법적인 겁탈을 벌인다.

 

 여기에 추임새를 넣는 나쁜 지식()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다. “지식인 범죄자는 매력적이다’. 이런 범죄에서 피해자는 소모품으로 다루어지고 범죄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 좋은 이들의 게임이 된다>(52).” 유시민 작가의 지적대로 국민의 반 이상을 무시하고 저버리는 처사다. 누누이 말했듯이 기본이 안 된 정부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열린 마음, 지적 호기심, 인격은 개나 줘버린.

 ‘권력화된 무지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게)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현실에 맞는 쓸 수 있는 이론을 만들면 된다면서, 지식은 미시에서 거시로, 아래에서 위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을 재 구현하는 거라고 말한다. 저자의 핵심 논지는 자기 포지션 파악과 부분성 인정이다. “모든 지식은 특정 상황과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지식은 인식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융합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한위치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조직화하는 공부법이다(56-57).” 그렇기에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

 저자의 핵심 논지인 이처럼 자기 인식이 부분적partial이라는 진리, 즉 각자의 당파성partiality을 인정해야성찰적 지식의 성립이 가능하다.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인생은 이런 작은 단위, 상황, 맥락의 연속(52)”인 까닭에 있다. 일상과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 지식은 고여 썩은 물과 같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 여론을 주도하거나 지도자가 될 때 공동체는 위험해진다...

 <위치성은 각자에게 놓인현실이면서 동시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이동하는 정치적 과정의 산물이다... 역지사지는 공감을 넘어서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다. (59-61)

 

 그래서 유 작가가 이잼에게 한 부디 조리돌림과 수모를 견디라는 충고는 파급력이 크다. 상대가 무기 대등의 원칙을 깬 상태에서 가진 무기를 총동원해 싸워야 맞다며, 내부 총질러와 대선 패배의 해당행위자들의 몰염치와 궤변을 날린다. 불체포 권한을 동원할 수 있는데 뭔 개소리냐며(내 과장^^). 여의도 정치 타워에서 그만 내려와 들, 모르는 거 빼고 (미비하게) 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현장과 소통하면서 깨어나기를 바란다. 연말은 늠 늦응깨 /반사/

 ‘지적 양극화의 시대에 맞서 직업윤리가 우선 가치로 등극되어야 한다. 페이크 뉴스는 사람들을 쉽게 결집하고 또 분산시킨다. 정신 착란과 교란을 일삼는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찾는 정보는 이미 누군가 쳐놓은 그물 안에만 존재한다. 정치권과 포털 사이트는 이미 협력 관계를 맺고 있고, 자본의 정보 통제는 일상적인 현실(66)”임을 상기하고 맞서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종이신문 읽기를 통한 전체 맥락 파악과 안목과 선구안 회복을 제시한다. 대학 졸업반 시절, 영자신문 전면 훑기를 통해 익스팬드 마이 호라이즌을 실감했던 터라 공감한다. 인터넷 정보를 맹신하며 자기 생각은 없고 고집만 센 에코 챔버 충이 되지 않는 길이다.

 

 당연한 건데 사람은 책임질 줄 알고 또 남을 믿고 기댈 줄도 알아야 균형 잡힌 관계를 영위할 수 있다..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픈 신체화’somatization를 겪는 저자를 이해한다. 나도 경청 행위는 반응해야 한다부채감이 따른다.” “질병은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하지 않은 상태dis/ease(77).” 왜냐하면 지식은 인식자의 심리적 산물>”이기도 해서 앎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인 이유에서다.

 정 작가는 내면 아이에 호응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고, 무의식도 사회 밖에 있지 않다며. 고로 무의식도 인격을 반영한다는 논지다. 에코 챔버(세뇌 공간)의 탄생 배후도 다 이유가 있다. “피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환상은 영토성(금 긋기 놀이)과 함께 피어나 안보 이데올로기의 전제가 되었다(72).” 이런 불안한 집단 심리를 정쟁으로 이용하며 화마를 부르는 정권은 나쁘다.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의 시대다. 이때 개인은 해방된 자아가 아니라 고립된 상태, 주체적 종속상태다(74).” 애국한다는 병적 상태.

 저자는 인생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수용과 함께, 상대방의 장점과 자원을 알아내는데 주력하고 삶의 대처 능력을 함께 모색하는 대안 찾기와 몰아를 힘주어 주장한다. 상상력과 공감 능력을 토대로 한, 서로 이야기하기(‘상담相談)를 통한 치료talking cure와 굴뚝 청소chimney sweeping를 의미 있게 본다. 다만 지식은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therapistthe/rapist가 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라고 덧붙인다.

이달의 사락 s********d 2023.03.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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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생각대로 살지 않으려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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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글은 고전 문학을 닮았다. 일정 연륜이 있어야 끄덕이거나 같이 걸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40~50대에게 통할 언어라고 하면 닫아건 문고리 같을까. 하지만 정확한 청중 타깃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 말해본다. 어떻게 말하고 쓸 것인가, 또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하며, 어디에 ‘위치’하는지 등을 고민하고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닿을 ‘지식을 생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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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진의 글은 고전 문학을 닮았다. 일정 연륜이 있어야 끄덕이거나 같이 걸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40~50대에게 통할 언어라고 하면 닫아건 문고리 같을까. 하지만 정확한 청중 타깃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 말해본다. 어떻게 말하고 쓸 것인가, 또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하며, 어디에 위치하는지 등을 고민하고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닿을 지식을 생산해낸다.

 나는 지식knowledge보다는 앎이라고 할 때 더 진솔하고 포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더불어 지식의 반대는 무지이자 무시Ignorance 임을 잊지 않으려한다. 이 반대항을 만났을 때 안개가 걷히고 눈이 확 떠졌었다. 권력-지식 관계를 논함은 1장만의 주제는 아닐 듯하고 앞으로 층층이 분석될 것이다.

 앎도 중요하지만 알고 난 다음의 변화와 동시에 그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도 챙길 수 있어야 한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논지대로 부단한 애씀과 몸부림에 방점을 찍는다. 스스로를 따르는 自由는 그렇게 계속 흐름이다.

 부풀대로 부푼 듯해 꽉 차 오르는 듯해 하얀 종이를 채우려하면 사라지는 것이 생각이다. 과연 있기나 했나 싶게 사라지는 신기루를 마주하곤 한다. 내밀한 대화와 글쓰기는 우리를 그냥 두지rest 않고 시험test한다(레스트/테스트는 내 말로 요즘 미는 표현^^).

 어제도 곳곳에서 화가 난 사람들을 봤다. 단지 고객이라는 이유로 부정적인 감정을 과하게 쏟아낼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감정 쓰레기를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비워낼 때 나는 많이 불편해한다. 그냥 성격이다. 그럼 상대도 그렇게 보면 될 텐데 나부터가 상호 인식 존중과 역지사지를 곧잘 놓친다. “인간사는 협력, 의존, 공조가 있기에 가능하다... 타인과 사이를 조율하는 일이 곧 인생고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려면 타인을 존중하고 인내하는 성숙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30).”

 저자는 이런 성질을 포착해, 어느 현상이나 양면이 있기 마련이고, 역사는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라며 살아가는 자체가 저항이길 요청한다. “인간은 단지 자기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이니 사는 대로 생각”(33)하면 된다고 (역술)단순화한다. 오늘은 못 했어도 내일은 변화 할 수 있다고 여지를 열어둔다. 구성 중이라는 말을 오래 의지해왔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온 나는 이미 노동시장의 전제 혹은 기본값이 되어버린 이 기막히고 비인간적인 허용과 관용이 좀 싫다. 다음은 내 노동관-정체성과 일치하는 속 시원한 발언이라 받아 적는다. “‘여성학 강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의 여러 직업 중 하나다. 여성주의는 내 부분적 가치관이다. 하지만 나를 여성주의를 온몸에 뒤집어쓴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34).”

 이어 저자는 흔히 발생하는 여성 지식인들을 향한 질문의 비윤리성문제를 띄운다. 아직 잔류하는 가부장적 문화는 의연 중에 이들이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을 체화해, 1초 안에 우아하고 지적으로 그러나 통쾌하게대처해야 하는 강박을 심어놓는다. “말은 권력관계의 산물자기 관점에서 기존 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40)”인 융합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방해하곤 한다.

 이것이 어떻게 성별에 국한된 문제이기만 하느냐고 묻고 싶을 거다. 맞다. 모든 답정너는 폭력이다. 그래서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는, 잘 싸우는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지금의 야당에게 그러하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엮인 페이크 뉴스로 도배된 세상에서는 더더욱. 병원 벽걸이 티브이에 빨간색으로 이재명 기소를 대서특필하던 자막이 떠오른다. 자기 밥그릇 지키기와 의원 배지 달기에만 신경 쓰는 사익추구형 정치인들. 어디 그들만 그럴까. 타이틀과 자리 욕심은 어디든 도사린다.

 저자는 에드워드 윌슨이 쓸고 간 역량 이상의 주목을 은근히 비튼다. 물론 통섭統攝이라는 용어는 죄가 없다. 그것이 어느 날 뚝딱 만들어지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별천지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성이 배후에 존재한다. 이미 있던 것을 그가 때마침 콕 집어내 운좋게 인기를 누렸을 뿐이다. 통섭은 종합적 지향이나 범학문이 아니라 제3의 지식으로 변형 가능한 유동 물질(흐르며 세 귀를 내미는)이자 사유의 방법이라고 예쁘게? 말한다.

 

 이중 섭은 소곤거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귓속말을 뜻한다... ‘잘 들리지 않는 소리는 소수자의 목소리, 가시화되지 못한진실, 보이지 않는 현실, 특정한 시각에서만 발명되는 사실 등으로 해석 가능하므로 은 멋진 글자가 아닐 수 없다. (45)

이달의 사락 s********d 2023.03.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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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빅 퀘스천을 던져 결연하다 못해 비장하다. 흔들리는 순간 잡아주는 언어의 강력한 힘을 경험하고 믿기에 이런 요소까지 정희진 다움으로 보게 된다. 누누이 강조해왔듯이 나는 삶-글쓰기-사회의 관계와 연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별히 리베카 솔닛이나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아끼는 이유도 삼각구도가 탄탄히 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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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빅 퀘스천을 던져 결연하다 못해 비장하다. 흔들리는 순간 잡아주는 언어의 강력한 힘을 경험하고 믿기에 이런 요소까지 정희진 다움으로 보게 된다. 누누이 강조해왔듯이 나는 삶-글쓰기-사회의 관계와 연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별히 리베카 솔닛이나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아끼는 이유도 삼각구도가 탄탄히 서로를 받치기 때문이다. 겉돌거나 따로 놀지 않는 일체감과 질서 부여 감각이 믿음직하다.

 저자는 융합 글쓰기라는 슬로건이 지식의 양이나 축적(‘더하기의 이미지)으로 둔갑되는 현상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만능통치약 같은 융합과 통섭consilience 개념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을 공격한다. 정 작가에게 융합은 자기 가치관과 위치와 당파성을 발판으로, 이동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동이다. 한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작지만 새로운 세계의 탄생 가능성에 주목하고 응원한다. 삶의 의지를 꺾는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더 나은 삶을 설계하도록 안내하는 대체 불가능한 나의 언어를 목표로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고 떠드는 나열이나 짜깁기와 달리, 발언자의 철학과 비전이 맑게 투영된 언어는 밖으로 내민 손이 된다. 앞에서도 몇 차례 강조했듯이, 정 작가는 어설픈 뒤집기나 전체 맥락이나 역사를 모른 채 과격한 떠듦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안적 언어내로남불경쟁이나 여혐/남혐’, ‘진보/보수의 대립counter 구도와 완전히 다른 길을 연다고 첨언한다. ‘전환(trans-) 혹은 의미의 도약을 이룬 글은 우리가 아는 지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공부의 즐거움과 성과를 극대화하는 실천이자, 내 생각을 분명히 알고 더 필요한 앎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경계 넘기(rooting and shifting 근간 다진 후 이동)(16)”라고 정의한다.

 학업을 마치고도 주춤하는 내게 지도교수님은 배운 지식을 사회에 돌려주지 않음은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는 약자와 지구에 봉사해야 한다(19)”와 일맥상통할 것 같다. 저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쓴 끝에 이전에 아는 것에서 탈출하는 글은,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19)”에 가깝다고 말한다. 자기 연민에 빠진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trans-former(이전의 것을 초월) 하라고.

 다시 말해 저자에게 융합적 글쓰기는 수직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 다른 의미의 생명체를 만드는(21)” 유사 창조행위다. 그런 글이 독자와 소통하며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생산(20)”에 이바지하게 된다.

 추신. 가끔 보면 남의 어투와 표현력을 자기 것처럼 도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옷 훔쳐 입는 빙의 대신 너답게 말하는 연습을 하라 ~

이달의 사락 s********d 2023.03.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