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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잘 차려진 밥상이 있다. 반찬의 가짓수도 많고, 음식도 먹음직스럽다. 밥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육, 해, 공을 망라하는 산해진미로 그득하다. 전라도의 유명하다는 한정식을 마주한 듯 아주 걸다. 인문학 밥상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인문학을 하면 밥이 되냐?”고. 저자는 이 책 『인문학은 밥이다』를 통해 그에 대한 답을 한다. 인문학은 밥도 되고, 떡도 된다고. ‘인문학은 밥이다’고. 동양에서의 인문학은 인문人文, 즉 천문天文과 구분되는 개념이었다. 사상과 문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흔히 인문학 하면 문文 사史 철哲을 떠올린다. 저자는 이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한다. 이는 인문학을 너무 단순화 시킨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치고 인간과 무관한 것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인문학의 범위는 기존의 문, 사, 철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한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문학이 필요하단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도 결국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고 한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이 책에서 인문학의 범주에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다의 순으로 기존에 알고 있던 인문학의 범위를 넘어서 전 학문분야로 그 시야를 넓힌다. 저자가 차린 인문학 밥상은 다양한 분야의 반찬으로 차고 넘친다.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시대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1997년 IMF이후 많은 근로자들이 평생직장으로 여기던 조직에서 퇴출당했다. 그들은 퇴출된 이유가 자신들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경우를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자기개발 붐이 일었다. 서점에는 자기개발관련 서적들이 난무했고, 자기개발을 위한 강좌나 학원에는 수강생들이 붐볐다. 아마도 대학가에 스펙 붐이 일어난 것도 이때쯤일 것이다. 낮에는 직장으로, 밤에는 학원으로 자기개발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다 보니 바쁜 일상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힐링 열풍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자연을 찾고, 좋은 음식을 먹고, 여행도 다녔다. 시간을 내어 명상도 하고 사찰을 찾아 수행도 한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그런다고 근본적인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은 편안했지만, 돌아와 마주친 현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삶은 더욱 더 각박하고 힘들었다. 잠시 떠났다 마주한 현실은 떠나기 전보다 더욱 더 매정했다. ‘과연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가?’ 등의 회의와 성찰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과학이 발달하고, 잘살게 되고, 물질적인 풍요는 누리지만, 거기에 사람은 없다. 인간은 빠지고 인격은 매몰되었다. 텅 빈 가슴속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삶이 허망하고 덧없다. 왠지 모를 우울과 알 수 없는 고독감이 일상을 휘젓는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존감을 찾으며, 삶에 대한 궁극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단순히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 것이 인문학의 본질은 아니다. 인문학은 바로 질문이다. 끊임없는 성찰을 통한 질문. 비록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삶에 궁극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인문학은 그저 잠깐의 열풍과 관심으로 책 몇 권을 읽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꾸준히 공부하고 자신을 삶으로 내재화시켜야 한다. 그러기에 인문학은 평생을 해야 하는 공부이고, 바로 삶 자체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밥이다.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정신의 밥이며, 제조공정에 투입된 기계처럼 각각의 개성은 사라지고 획일화로 인해 피폐해진 현대물질문명사회에 매몰되어 가는 영혼의 자존감을 구원하는 구명조끼이다. 기회가 되어 저자에게 직접 받은 사인에 ‘뜻은 높게, 생각은 깊게, 영혼은 맑게, 삶은 따뜻하게’라고 기록해 주었다. 이 짧은 구절이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궁극의 목적일 듯하다. 저자가 차린 인문학 밥상에는 다양한 반찬이 차려져있다. 몇 첩인지 세기도 어렵다. 한데 반찬飯饌의 양이 너무 적다. 젓가락 한 두 번 가면 이내 접시가 비어버린다. 아쉽다. 일부 찬饌은 더 먹고 싶다. 더 주라 하고 싶다. 그런 독자들의 욕망을 짐작했을까. 저자는 인문학의 각 분야마다 제대로 된 음식을 소개한다. 특별히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그 음식에 대해 제대로 된 깊은 맛을 내는 전문식당을 찾아가라고. 그런 이유로 각 분야마다 제대로 된 공부를 위해 해당 분야에서 읽어봐야 할 다양한 책들을 소개한다. 소개된 책들의 면면이 결코 가볍지 않다. 책의 두께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엄두가 쉬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의 안내서를 북극성 삼아 깜깜한 밤길을 더듬어 한걸음씩 내디뎌 보는 것도 나쁠지 않을 듯싶다. 인문학의 길을 앞서 나아간 저자는 25년 공부하고, 25년을 가르치고, 25년 동안 글을 쓰겠다는 스스로와의 다짐을 지키며, 지금은 글을 쓰고 지낸다. 그런 저자이니 저자처럼 공부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오랜 시간동안 저자가 경험으로 체득한 결과물인 각 분야의 안내서를 보고 그 책들을 만나보는 것도 인문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는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큰일이다. 먹어봐야 할 음식이 이리 많은데 배는 한정되어 있으니. 하지만 무엇이 걱정이랴. 인문학이 평생 밥 먹는 것처럼 일상에서 끊임없이 해야 될 공부라면 그저 세상 유람하듯이 천천히 하면 될 것 아닌가. 혹 아는가. 우연히 찾아든 시골의 한적한 식당에서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한 특별한 진미를 맛보게 될 런지. 세상에 존재하는 않을 그런 맛을 가진 음식을.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며, 인간에 대한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다. 이를 깨우쳐 인격의 도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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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밥이다 김경집 알에이치코리아/2015.3.24. sanbaram 우리나라 대학에서 인문학은 취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하여 주변학문으로 밀려나고 있다. 그 대신 사회에서 일반인들을 상대로 인문학의 붐이 일어나 활발한 저술과 강연을 통한 교육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문학은 밥이다>의 저자는 서강대학교영문과 및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에서 교수를 지냈다. <마흔 이후, 이제야 알게 된 것들>, <나이듦의 즐거움>, <책탐>, <지금은 행복을 복습하는 순간>, <엄마 인문학>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각종 강의를 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인간을 주제로 해석해보고 결합시키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내는 힘을 길러주는 시너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문학은 밥이다>의 내용은, 1부 마음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에서는 철학, 종교, 심리학을 주제로 인문학의 내용과 역할을 소개하며, 2부 진보하는 인류와 인문학은 역사와 과학을 통해 인문학이 어떻게 진보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3부 감성을 깨우는 인문학에서는 문학, 미술, 음악의 주제로 각 분야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감성을 깨우고 있는지 그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4부 인문학은 관계 맺기다 에서는 정치, 경제, 환경, 젠더 등의 주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이야기한다. “중국에서 사상과 정치가 일체되었다는 점은 분명 서양과 다른, 뛰어난 문화의 결과물이다. 유럽은 종교로 통합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사상이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나의 학설로 통일 되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학설에 대한 불관용 혹은 탄압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직시하자.(p.55) 통치자의 입맛에 맞는 공자의 유교는 신봉되었지만 맹자나 묵자 등의 사상은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동양의 여러 왕조에서 특히 조선 왕조에서 의도적으로 맹자를 배척한 건 대담한 주장 때문이었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릴 때는 맹자에 의지했으면서 말이다. 어쩌면 맹자로 혁명을 했기에 그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맹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묵자 또한 인간평등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또한 철학적 사유는 자아를 사회와 연대시킴으로써 이기적 자아에 스스로 갇히지 않고 보편적 존재로서 세계시민 의식을 실현하게 한다. “한국교회 상당수는 근본주의 또는 복음주의적 성격이 짙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성장모델이 바로 미국 교회, 특히 근본주의로 무장한 복음주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폐해가 다양한 형태로 속출돼 사건사고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편, 근본주의가 안고 있는 편협함, 배타성, 공격성은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점이기도 하다.(p.93)” 일신교를 믿는 이들의 배타성은 여타 종교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개하게 본다거나 교화의 대상으로 보고, 더 적극적인 이들은 공격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크로아상은 유럽인들이 무슬림 전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자신들의 상징인 초승달을 빵으로 빚은 것이고, 베이글은 유대인들의 누룩 없는 빵에서 유래했다.(p.94) 이런 것들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문제지만, 협상에 임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상대방 문화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해줄 필요가 있다. “꿈에 대해서도 융은 프로이트와 다른 견해를 전개했다. 프로이트는 꿈을 개인의 무의식이 억압된 결과로 해석하고 과거 행위에서 비롯한 것으로 한정한 반면, 융은 꿈의 예시적 기능을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이 합일하는 삶을 자기실현의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융은, 의식이 인식하지 못하는 삶의 진실이 집단무의식에 있고, 그것이 꿈을 통해 삶의 목표를 일러준다고 말한다.(p.108)”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 뿌리는 갖지만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들의 차이점이 무엇 때문인지 충분히 이하여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에드바르트 뭉크는 회화적 표현에서 인간의 내면을 그려냈다. 뭉크의 그림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판하기 이전에 완성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미 그는 외적 묘사에서 탈피해 인간의 심리를 회화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했다. 뭉크의 이런 시도는 이후 칸딘스키 등이 추상미술을 통해 정신적 가치와 심리를 색체와 새로운 구성으로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p.137)” 이렇게 미술과 심리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라는 것이다. 학문간의 융합이란 둘 또는 그 이상의 학문간에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을 찾아내 또 다른 쪽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역할이다. “서아시아를 유럽인들은 ‘중동’이라고 불렀다. 아시아 대륙 남서쪽에 있는 지역이니 서남아시아 혹은 서아시아가 맞다. 예전 유럽인들에게 동양은 터키에서 인도까지였다. 그 중간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곳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중동이다.(p.168)”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용어 하나에도 유럽인의 시각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차용해 쓰고 있는 것은 의외로 많다. 아무래도 학교 교육 자체가 서양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교육과정을 갖다 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흥부전에 담긴 조선시대 행복의 우선순위를 흥부의 박에서 보면 “첫 번째 박에서 나온 풀뿌리는 귀한약재 -건강, 둘째 박에서 나온 책들 -과거 급제로 가문을 빛내라는 상징, 셋째 박에서 나온 금은보화 -물질적 풍요, 넷째 박에서 나온 미녀 -쾌락“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부전은 동생의 분노가 담긴 작품이다. 그 유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유산을 딸들에게까지 골고루 돌아갔다. 그러나 전란을 겪고 힘들어지자 장남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남 위주의 사회가 되다보니 민심을 반영한 이런 문학작품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진화론에 버금가는 지적 혁명은 천동설을 뒤집은 지동설 정도뿐이다. 지동설 전후와 진화론 전후, 세계에 대한, 더 나아가 우주에 대한 인식의 틀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는 당연히 세계를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p.240)” 서구의 사상을 지배하던 기독교의 세계관을 바꿔 놓은 것이 위에 언급한 지동설과 진화론이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재를 받았고 곳에 따라서는 지금도 완전히 인정하기 싫어하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낭만주의 하면 뭔가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달콤한 것을 연상하는 경향이 있다. 굳이 색깔로 치면 핑크색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본질은 ‘달콤 쌉싸름’한 감상이 아니다. 기존의 법칙, 질서, 보편 등의 힘에 대한 ‘저항’이다. 그래서 낭만주의 예술은 자유, 탈 규범, 개성 등을 주제로 다뤘다.(p.324) “낭만주의 치기(?)에 반발이 바로 사실주의였다. 흔히 ‘대상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사실주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반쪽짜리 이해로, 사실주의 배경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라고 볼 수 있다. 사실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다. 그 묘사의 대상인 현실은 암울하고 절망적이다. 사실주의의 배경에는 산업혁명이 자리 잡고 있다.(p.326)” 이렇게 해서 미적 판단의 기준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뀌었다. 표현미의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미적 판단이 객관에서 주관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그리는 사람’이 주체가 된 것이다. 표현미에 가장 충실했던 그림들이 바로 ‘인상파 미술’이다. p.358 “서태지는 처음에는 무성음을 피해 매끄럽게 랩을 구사하다가 점차 격렬한 비트감을 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DJ D.O.C와 신해철 등은 라임(각운)을 적극적으로 가미해 음악적인 면과 가사의 수사법에서 랩의 진화를 이끌어냈다. DJ D.O.C의 가사는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p.418)” 랩은 흑인들의 차별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다. 그러나 저항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이해며 도전이다. 이는 젊은 대중의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정신이 요청하고 표현하는 인간상이 어떤 것인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혹은 생산수단을 사유화한 상태에서 상품생산이 행해지는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애덤 스미스 등의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마르크스 등 사회주의구조와 그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그 폐해에 대해 비판했다.(p.499)”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바로 기업들의 로비와 그들의 대변자인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 그리고 주류 경제학자들의 카르텔이다.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상활을 고려하는 이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몇 차례의 경제위기 때마다 그 고통은 노동자와 일반시민이 떠맡아야 했다. 시민의 혈세인 공적자금으로 가까스로 회생한 금융기관은 시민들의 이익은 철저하게 외면한 경영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렸으며, 일반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업의 이익이 일반 시민의 이익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기업에는 온갖 혜택을 제공한 정치인들은 지표상의 성과만 강조할 뿐, 심화와 악화를 반복하는 양극화는 애써 외면했다.(p.533)” 이런 엘리트나 상류층 위주의 경제 운영을 우리는 막아야 한다. 어려움은 서민이 분담하고 그 열매는 일부 가진자들이 걷어 들이는 구조적 모순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인문학이 절실히 요구되는 건 현대사회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융합 지식의 필요성 때문이며, 또한 주체적인 자아를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p.626)” 인문학은 전문지식을 생산하는 분야가 아니다. 여러 학문을 아우르게 하고 서로 소통하게 함으로써 각자에게 더 큰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한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인문학적 사고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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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역사, 철학, 음악, 미술, 문학, 종교, 경제, 환경등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것은 지식의 한 부분이었다. 지식이 아닌 우리의 삶을 대비해서 본다면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인문학은 질문을 주지 답을 주지는 않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우리는 대답을 찾기 위해 멀리는 과거에서부터 미래를 보고 가까이는 현재를 보게 된다. 어쩌면 지표면에서 볼 수 없는 지하수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지하수가 없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지하수처럼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이끌어주는 존재가 바로 인문학이다. 나는 누구인지 살아남기 위해 잊었고, 살만해지니까 보이지 않아 잊었다. 그러다 삶이 빡빡해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금 찾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 잊었던 인문학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문학은 우리게 밥도 떡, 빵도 주지는 않기만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힘을 줄 것이다. 답을 주지는 않지만 잡을 찾도록 도와 주고, 자신의 길을 알려 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인문학을 읽고 생각하는거라 믿는다.
이 책은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은 사랑과 진리, 즉 '진리를 사랑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철학은 자신을 주체적으로 만드는 지적 통찰이고 반성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나이 도덕적 자아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를 질문을 한다.(p26-27)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것에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또한 철학적 사유는 자아를 사회와 세계와 연대시킴으로써 이기적 자아에 스스로 갇히지 않고 보편적 존재로서 세계시민 의식을 실현하게 한다.(p61)
종교는 문명의 발달과도 매우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 통일된 제국일수록 하나의 가치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 다원적 신을 숭배하는 나라는 화학적으로 융합하기 어렵지만 일원적 신을 섬기는 나라는 그게 용이하다. (p81)
개인의 종교 유무와 관계없이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 주며 거대한 사회적 구성체이다.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간의 행동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런 현상을 설명할 때 필요한 것이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마음의 과학이다. 언어뿐 아니라 표정이나 몸직, 태도 등 비언어적 요인들을 통해 심리와 행동을 짐작하게 한다(p114).
역사는 주제와 시선에 따라 다르개 보여지며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 선인들은 역사를 기록하는 자의 독립성을 엄격하게 보장했다. 그래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에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된다.
거다 러너는 "역사를 아는 것이 당신 자신의 인생과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길이며, 자신의 과거에 무지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아도 아무런 저향을 하지 못한다"라고 강조했다(p197).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면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셈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무를 것이다." 로마의 키케로의 말(p218)처럼 역사는 자신의 인식의 바탕이며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과학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진실을 확인한다. 과학으로 축적된 지식이 사회의 공공적 재산이 된다. 인류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과학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무기도 만들었던 것이다. 과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 중의 하나가 바로 과학의 가치중립성 문제이며 포기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이다.
문학, 미술, 음악은 우리의 생각의 범위를 넓혀주고 우리의 가능성을 확장시켜준다.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어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다(p283).
정치는 관계 맺기라고 한다. 공자는 정치를 덕으로 하는 것이며, 진심의 문제이고,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정치의 궁극적 목표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데 있는데(p445), 현재의 우리의 정치는 그런가를 생각하게 된다.
경제력은 현대인의 자아정체성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p445). 돈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열린사회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계층의 양극화를 고착시켰다. 도덕적 타락을 촉발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경제학은 만능이 아니다. 과학적이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차별의 역사가 바로 성일 것이다. 여성 사회학자 거다 러너는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그것은 차이다. 그 차이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게 열등감을 부여했다. 그게 이데올로기가 되면 차별이 된다"고(p446) 말했다.
인문학은 저자의 말대로 요리법이다. 어떤 재료를 가지고 어떨게 만드는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하나의 전문지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문학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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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인간을 주제로 해석해보고 결합시키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내는 힘을 길러주는 시너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문학은 밥이다>의 내용은, 1부 마음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에서는 철학, 종교, 심리학을 주제로 인문학의 내용과 역할을 소개하며, 2부 진보하는 인류와 인문학은 역사와 과학을 통해 인문학이 어떻게 진보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3부 감성을 깨우는 인문학에서는 문학, 미술, 음악의 주제로 각 분야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감성을 깨우고 있는지 그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4부 인문학은 관계 맺기다 에서는 정치, 경제, 환경, 젠더 등의 주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이야기한다. “중국에서 사상과 정치가 일체되었다는 점은 분명 서양과 다른, 뛰어난 문화의 결과물이다. 유럽은 종교로 통합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사상이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나의 학설로 통일 되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학설에 대한 불관용 혹은 탄압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직시하자.(p.55) 통치자의 입맛에 맞는 공자의 유교는 신봉되었지만 맹자나 묵자 등의 사상은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동양의 여러 왕조에서 특히 조선 왕조에서 의도적으로 맹자를 배척한 건 대담한 주장 때문이었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릴 때는 맹자에 의지했으면서 말이다. 어쩌면 맹자로 혁명을 했기에 그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맹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묵자 또한 인간평등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또한 철학적 사유는 자아를 사회와 연대시킴으로써 이기적 자아에 스스로 갇히지 않고 보편적 존재로서 세계시민 의식을 실현하게 한다. “한국교회 상당수는 근본주의 또는 복음주의적 성격이 짙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성장모델이 바로 미국 교회, 특히 근본주의로 무장한 복음주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폐해가 다양한 형태로 속출돼 사건사고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편, 근본주의가 안고 있는 편협함, 배타성, 공격성은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점이기도 하다.(p.93)” 일신교를 믿는 이들의 배타성은 여타 종교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개하게 본다거나 교화의 대상으로 보고, 더 적극적인 이들은 공격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크로아상은 유럽인들이 무슬림 전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자신들의 상징인 초승달을 빵으로 빚은 것이고, 베이글은 유대인들의 누룩 없는 빵에서 유래했다.(p.94) 이런 것들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문제지만, 협상에 임하거나 관계를 맺을 때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상대방 문화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해줄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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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638페이지의 두툼한 부피감으로 날 압도하는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는 선언과도 같은 제목에서 은근히 암시되듯이 그야말로 '인문학 입문의 결정판'과도 같은 책이다. 일단 목차로 들어가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실감할 수 있을텐데, 인문학의 텃밭과 다름없는 철학이나 종교, 역사나 문학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문학 입문서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미술이나 음악, 정치와 경제 그리고 환경과 젠더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해볼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인문학이라는 필터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게 된 건, 무엇보다 저자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다. 책으로서는 두 번째 만남인 이 저자는 일전에 '눈 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으로 만나본 적이 있다. 지금 무엇보다 왜곡되고 어긋나있는 기독교 복음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검증에 나섰던 그 책은 예전부터 비슷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그야말로 오랜 갈증이 해갈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랬던 저자이기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이름으로 나온 이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게되면 속표지에 나오는 지은이 소개글부터 읽게 되길 바란다. 그걸 읽어보면 어떻게 이 책이 나왔으며 이런 책이 가능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서른 살 무렵에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며 25년은 마음껏 책 읽고 글쓰며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살겠다고 마음먹었고, 두 번째 25년을 마친 뒤 미련없이 학교를 떠나 지금은 충청남도 해미에 있는 작업실 '수연재'에서 '나무처럼 사는' 바람을 품고 살고 있다.
읽었을 때, 참 멋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미련없이 오늘의 모습과 결별하고 원하는 대로 읽고 쓰면서 살고 싶다라는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은 그리 품었어도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된 삶에서 훌쩍 벗어나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야와도 같은 불안한 미래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작가는 과감히 실천했고 보란듯이 자신이 원했던 삶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은 밥이다'는 그러한 그의 결심과 실천 때문에 나올 수 있었고 또 그만한 각오와 내력이 스며있었기에 이 같은 분량과 전 분야를 아우르는 넓은 망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대저 두께와 내용의 질은 반비례 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 책만큼은 그렇지 않다. 전 분야를 인문학이라는 필터로 아우르면서도 내용이 무너지거나 전개가 산만하다거나 하는 일 없이 꼭 있어야 하고 필요한 말만이 담겨져 있는데 이렇게 핵심이 되는 줄기를 돋우고 그에 따른 교통 정리가 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의 내공이 쌓여져 있는 탓이 아닌가 한다. 이 책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글을 보면 25년간 자신이 학교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쳤는지 나와 있는데, '인간학'이라는 강의의 성격상 학교의 전 전공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무엇보다 먼저 수강하는 학생들의 전공에 맞춰 자신의 강의 방법을 수정해 나갔다. 즉 이공계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할 때는 이공계 지식과 연계했고 음악과 학생들에겐 또 음악적 지식과 연계해 설명하는 식으로 해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오랜 세월 인문학이라는 어떤 고정된 경계를 고수하기 보다는 강의 할 때마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과감히 다른 분야로 경계를 넘나드는. 소위 말하는 '통섭'을 실천해 온 것이었다. 이 책이 다양한 분야를 널리 아우르면서도 꽉 찬 중량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난해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입문서다. 그러니 초심자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이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건 '접속'의 경험 이다. 자본주의가 확립된 뒤로 자본주의에 특유한 생산 방식인 '분업' 또한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면서 점차 지배적 생산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고 학문 세계에까지 영향을 줘버린 것이었다. 원래 플라톤이 말했듯이 학문이란 나뉨이 없는 것인데 그 분업의 영향 때문에 학문은 지나치게 갈라지고 세분화되어서 덕택에 이전에 없었던 각종 학문들이 생겨났지만 서로간에 소통은 없는 상황이 닥쳐오고 말았다. 그래서 서로가 저마다 쌓아올린 상아탑에 갇혀 나홀로 떠드는 아우성만 있을 뿐,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그저 타인의 몰이해를 탓하며 비난과 공격만을 일삼아 함께 했다면 더욱 발전했었을 학문은 소통 부재와 분쟁에 그만 발목을 잡혀 정체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학문을 이 같은 늪에서 구해내고자 일찌기 많은 학자들이 학문 서로간의 소통을 호소했는데 바로 김경집의 이 책 역시 그러한 입장 위에 서있다.
이 책이 전 분야를 망라하게 된 진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문학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좁은 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다 널리, 다양한 분야와 상호 교류하면서 '2인 3각' 경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도와가며 같이 보조를 맞춰나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삶은 인간에게 무엇보다 하나의 총체적 경험으로 다가오는데 세분화된 학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특유한 학문적 경험만을 내세울 뿐으로 그리하여 살아가는데 현실적 도움은 주지 못한다고 한다. 학문은 결코 상아탑에 머무르는 지식이 되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실제 삶에 유익함을 주어야 제대로 된 학문이라 믿는 저자는 때문에 학문이 진정 진짜 삶에 유익함을 줄 수 있게 만드려면 무엇보다 그 총체적 경험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인문학이 무엇보다 인간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인간학은 인문학이며 동시에 인문학은 인간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교양을 함양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인문학으로 유연해진 사고방식의 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며, 인간에 대한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다. 이를 깨우쳐 인격의 도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P. 636 ~ 637)
말하자면 이 책은 지은이의 이 같은 신념을 하나의 책이라는 물리적 경험으로써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 삶과 유리되지 않는 학문, 그냥 공허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격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학문, 바로 그 인간과 세계 모두에게 지하에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모든 수목과 동물들에게 생명의 젖줄이 되고 있는 '지하수'처럼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는 인문학이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 보이는 것이다. 입문서라는 한계 때문에 세밀한 붓터치가 아니라 대략적인 스케치에 그치고 만다는 게 참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체감해 볼 수 있다. 각 분야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인문학의 모습을 보는 건 이 책을 통해 얻게 되는 덤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우리가 진짜 깨닫는 것은 지식은 결코 삶과 그리고 인격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우리를 참으로 실망시키는 지식인들이 많다. 판사나 의사, 변호사들이 여성들의 민감한 신체 부위를 몰카로 찍는가 하면 유명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분들이 지켜야 할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배신하면서까지 정치권과 야합하기도 하고 장관 후보자들에겐 마치 필수 경력이기라도 하듯 위장전입이나 탈세와 같은 범법의 전력들이 꼭 하나씩은 있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지식이라는 건 그저 돈벌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다 지식이 삶이나 인격과 유리되어 있다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탓이 아닐까. 여성학자 조여정이 쓴 '글 읽기와 삶 읽기'라는 책이 있다. 시리즈인데, 그 2권을 보면 우리가 치뤘던 도덕 시험 사례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지식이 삶 그리고 인격과 분리된 경험을 고착화시켰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예를 들어보자면 흔히들 많이 치뤘던 'O, X' 시험을 통해서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O'표 하시오.', 혹은 '나쁜 사람에게 'X'표 하시오.' 같은 것들. 그렇게 우리는아주 어릴 때 부터 삶에서 꼭 지켜야 하는 윤리마저 자세한 설명과 실제 경험으로서 알기 보다는 그저 암기라는 주입된 형태로 학습했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윤리를 태연히 위반하는데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머리 따로, 몸 따로'의 프랑켄쉬타인이 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의 근본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른바 드라마 속의 현빈이 말하는 대로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자신이 배운대로, 익힌대로만 행동해주었더라도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8할은 줄어들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정말로 예외가 되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전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그 태도에 우리의 비극이 있는 것 같다. 비온 뒤 담쟁이 넝쿨처럼 죽죽 자라나는 그 태도를 더 이상 수수방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책을 벗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인문학이 밥과도 같이 우리 삶에 실제로 아주 많이 도움이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왔지만 우리가 정말 여기서 캐내어야 하는 보석은 결코 지식이 삶과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보니 인류 역사상 모든 현인들은 무엇보다 현인의 덕목으로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삼았다. 오래 살아남은 옛말치고 틀린 말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바로 그 비웃음 속에 우리의 비극마저 잉태되어 있음을 한시바삐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당장 읽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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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괜히 어렵거나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인문학은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을 해야 책 한 줄이라도 더 보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편견을 살짝 깨준 것이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을 읽으면서였다. 하나 하나 세세하게 보면 지루한 것이 거시적으로 전체를 바라보며 훑어보게 되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막상 접하고 보니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고, 인문학적 교양지식이 풍부해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인문학에 대해 더 다양하고 심도있게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 <인문학은 밥이다>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다.
이 책은 작가 후기까지 638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의 책이다. 그 두께에서 주는 압박감때문에 <인문학은 밥이다>라는 접근성 좋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첫인상은 살짝 버거웠다. 또한 처음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거나 푹 빠져들게 되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읽다보면 궁금한 생각도 들고,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기대하며 읽어나가게 되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밥을 먹다보면 마음에 들어서 음미하게 되는 때가 있고, 그냥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그랬다. 슬슬 넘어가게 되는 이야기가 있는 반면, 꼭꼭 씹어 음미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밥도 일단 먹어봐야 그 맛을 알 것 아니겠는가! 이 책도 마찬가지로 일단 읽어봐야 그것이 먹을만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다양한 반찬을 먹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며 느끼는 경이로움, 더 깊이 알고 싶어 자료를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인문학의 가이드 북이었다.
이 책에서는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둑한 인문학적 지식을 손쉽게 채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책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앞으로의 독서 생활을 풍성하게 해줄 '읽어볼책들'리스트였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고, 어떤 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지식을 쌓아갈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부분이었다. 이 책은 인문학 공부의 시작이다. 출발점이다. 앞으로 많은 가지를 뻗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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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이 책의 목차를 차례대로 훑어보면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 총 12가지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접하고 나면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읽을 때는 좋은데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참 고통스럽다.
일단 개중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살짝 나열해보자.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 죄송...
2.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과거 학자들의 사상을 한 단어로 (소크라테스의 질문, 플라톤의 이데아, 유일신으로서의 기독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찰스 다윈의 다윈주의, 케인스 주의, 신자유주의) 단순화시켜 받아들이는 것에서 생각을 확장하여.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왜'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는 넓은 시야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할 책 몇 권의 제목이 떠오르는데, 그 책들은 읽을 당시에는 꽤 유용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인문학은 밥이다)을 그 책과 비교해보면 과거의 그 책은 어떤 사상가의 사상은 어떠했는지만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3. 여기서 다루는 12가지 학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흘러왔다. 그리고 이 책은 학문들의 큰 줄기만을 붙잡아둔다. 그것을 토대로 파악하건대, 학문과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에 기대어 존재하는 인간에서. 존재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섬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자각해왔고 그것을 표현해온 인간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책의 미술 부분의 이야기를 보면 미술의 발달이 재현미, 표현미, 인식미로 진화됐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에는 실물처럼 보이게 그린 작품을 좋은 것으로 생각했던 시대 (재현미), 미적 기준이 사물을 '재현' 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능력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했던 시대(표현미), 그리고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 각각에 의해 새롭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시대(인식미)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이 사조의 변천사는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고낭사자초로 줄여지는 시대사조. (고전 - 낭만 - 사실 - 자연- 초현실)의 이름. 고전에서 초현실주의로 갈수록 무언가를 모방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인식의 힘'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음악도 그러했다. 과거에는 귀족들에게 헌정하기 위한 음악이었고, 그들의 지원 아래에서 작업을 했던 음악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다양한 장르. 혹은 시대에의 외침을 목적으로 음악을 생산한다.
종교 역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많은 신들을 추앙했던 다신교에서 권력을 옹립하려는 기득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유일신의 기독교가 발전했고, 그 이후의 세계는 여전히 신성을 믿는 인간과 인간을 종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대립으로써 흘러오게 된다.
철학도 그러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진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의 이데아에서부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데카르트의 철학의 발전과정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의식이 엿보인다.
4. 결국, 인문학이라는 것은 과거 누군가가 내놓은 생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억눌린 세상을 부수기 위해서 탄생한 생각이었고, 우리는 그 생각을 엿봄으로써. 지금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공부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공부가 쌓이면 제목처럼 밥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과 물질로서의 치환의 의미가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유용한 힘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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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인문학 열풍이다. 나 또한 인문학을 즐겨 읽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책이 내 입맛에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닌 게 사실이다. 확실히 주관적으로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쏠리다 보니 자연스레 편식독서를 하게 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런 고민 속에 다양한 장르의 인문학을 다룬 책이 나왔다.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 참 대범한 제목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인문학 열풍이라지만 인문학을 배운다고 해서 밥이 나오냐고 질문하던 이들에게 한 방을 먹이는 제목이 아닌가! 그런데 책을 집어 들고 목차를 읽으면서 작가가 30년 동안 집대성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작가의 생각이 궁금한 책이기도 했다. 적지 않은 분량에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와 더불어 각 분야에서 읽을만한 인문학 도서의 추천은 그야말로 편식하지 않고 인문학을 접하게 하는 안내서 같은 역할까지 한다. 프롤로그만 읽어도 이 책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은 밥이다>. 그 목차 속으로 들어가 보자. 총 4부로 나뉘었지만 개인적으로 그 분야를 나누는 정의는 오히려 장으로 나뉜 구분이 더 마음에 든다.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까지. 환경과 젠더만 제외한다면 마치 대학교 학업을 듣는 듯 하지만 작가의 폭넓은 지식과 독특하면서 속시원한 의견은 이 책의 매력을 더욱 부가시킨다. 나는 보통 차례대로 책을 읽는 편이다. 저자의 의도가 있고, 그 나름의 고민으로 인한 목차이기에 목차대로 읽는 것이 가장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굳이 그러길 권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 1부인 철학, 종교, 심리학은 차례대로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분야였기에 다양한 책을 접하면서 나름의 나만의 의견이 있었기에 작가의 의견과 내 생각을 비교하며 즐겁게 읽은 추억(?)이 있는 장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4부로 넘어가 젠더를 읽었다. 다른 분야는 접해 본 적이 있지만 인문학 도서에서 젠더를 다룬다는 것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관심분야가 아니어서 못 접해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 이후로 읽고 싶은 부분을 먼저 하나씩 섭렵하면서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예를 들어 학교에서의 철학교재의 이름 나열과 사회적 배경을 무시한 각종 이론들의 열거에 대한 철학교육의 문제-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이런 부분은 종교, 역사, 문학, 정치, 경제에서도 몇 군데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나름 관심있는 분야로 다양한 도서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새롭게 소개하는 책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환경, 역사, 경제 부분에서는 저자의 깊은 고찰로 내 생각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작가 김 경집이 소개하는 각 분야의 책들을 보면서 아직도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독서란 끝이 없음을, <인문학은 밥이다>를 통해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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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배움이 실력이 되는 세상, 인문학 하라!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김경집의 30년 공부 결정체”라는 자못 흥미로운 카피가 적혀 있다. 인문학을 하라고 권하고 있고 저자가 30년간 공부해온 것을 이 책에 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되어지는 부분이다. 이 책은 600쪽이 넘는 위용(?)을 자랑한다. 최근에 잠시 손에 들었던 영영사전을 제외하고는 가장 두꺼운 두께이다. 두꺼운 책은 책꽂이에 꽂아 놓으면 뿌듯함이 있다. 하지만 완주에 대한 두려움도 생긴다. 그간 인문학 관련책을 몇 권 보아온 터라 다소의 걱정도 생긴다. 그런데 <인문학은 밥이다> 이 책은 내가 기존에 보아왔던 인문학 관련 서적과는 차이가 있다. 기존에 보아왔던 책들은 사실과 설명위주라고 하면 <인문학은 밥이다> 이 책은 내 입장에서 볼 때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단적으로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지 않고,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상” (본문 p.76), 외국에서는 희귀도서인 음악 교재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피아노 연주에 있어 필수적인 도서로 이용하고 있다는 부분, 젠더에 대한 의견 등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인문학은 밥이다>는 총 4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이 끝나는 부분에는 “읽어볼 책들”이 아주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어 관심이 가는 부분의 책들을 앞으로 더 읽을 수 있도록 친전할 안내를 보태고 있다. 1부 마음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 - 철학, 종교, 심리학 2부 진보하는 인류와 인문학 - 역사, 과학 3부 감성을 깨우는 인문학 - 문학, 미술, 음악 4부 인문학은 관계 맺기다 - 정치, 경제, 환경, 젠더 방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어 본문과 관련된 자세한 부분은 생략. “인문학은 질문하는 힘을 길러주는 바탕이며 텍스트 추종을 깰 수 있는 밑거름이다.” (프롤로그, p.10) “한국 교육의 고질병은 다름 아닌 텍스트 추종이다. 그런 텍스트 추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상상력을 부족하게 하며, 체제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순응하는 사람은 결코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다.” (에필르그, p.627) 우리나라 교육현실에 비추어 볼 때 앞이마가 서늘해지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럴듯한 슬로건을 달고 교육개혁을 외치고 금방이라도 소위 무너진 공교육이 바로 세워질 것처럼 얘기를 하다 결국 그저그런 캐치프레이즈로 전락하는 과정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질문을 이끌어낼 힘도, 질문을 할 에너지도 모두 소진한 듯한 교육이 빨리 회복되어 진정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 다만 그것을 다양하게 엮고 짜는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은 까닭에 오로지 하나의 조립 공정도만 따라할 뿐이다." (에필로그 p.622) 학교에서 배운 것이 많다는 데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 상식의 거의 전부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쌓였다고 생각한다. 그 때 배웠던 지리, 지구과학, 사회과목이 현실과 접목되면서 나에게 큰 자산이 되고 사고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밥이다>를 통해 누구나 살기위해 밥을 먹지만 그저 밥을 먹는 것과 밥을 잘 먹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인문학적 지식이 계속 축적되었으면 좋겠고 내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들이 퍼즐의 그림이 완성되는 하나의 지식으로 구현되었으면 좋겠다는 과욕을 또한 가져 보게 하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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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문학은 밥이라고 했을까? 이런 말을 많이 들어왔고 왜 밥이라고 했을까?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일용할 양식을 먹고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귀한 우리 식탁의 양식인데하는 의구심이 생겼었습니다. 그런데 귀한 책을 읽다보니 정말 인문학은 밥이구나하는 것을 정말 깨닫게 되었습니다. 평범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밋밋하지만 우리의 영양식이고 지루한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재미있는 etc. 무언가 특별나지 않고 지루한것 같으나 지루하지 않는 꼭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은 밥이다책속에는 정신적으로 우리가 평범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알아나가야하는 상식으로 정신적으로 피와 살이 되는 학문이지않나 봅니다.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미술, 음악etc.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알아야할 상식
예를 들어 종교적인 면으로 본다면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한데 우리 주변에는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다신교를 믿는 종교, 내 자신을 믿는 종교등 ... 카톨릭, 개신교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불교는 어떤 신을 믿고 개신교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가? 사회, 정치적인 면은 어떻게 우리 나라가 전쟁이후 정치 경제 사회문화가 발전 되어 왔는가? 쉽다면 쉬운 것이지만 책속에서 알지 못한 옥석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옥석이란 그래도 평범한 상식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 모르고 있었던 상식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미술의 행복한 눈물의 의미... 즉 우리 인간은 눈물을 흘릴때 괴로워서 힘들어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지만 때로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릴때도 있습니다. 과연 행복한 눈물의 의미는 독자들 각자의 몫이라 남겨둡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케인즈와 프리드면의 이야기 공리주의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 등등 우리 인간의 욕망은 한도 끝도 없기에 가지면 가질수록 배가 고프고 아쉽고 더 가질려고하는 욕망이 어디에서 왔는가 이 책을 읽으면 해답을 얻을수가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