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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리즈 무어 <다른 누군가와 만나라 그리고 관계를 맺어라>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진다. 그 무게를 온전히 짊어 질 것이냐 아니면 피할 것이냐는 온전히 자신이 선택해야만 한다. 삶은 행복으로만 가득 차지 않는다. 어느 존재(사람, 물건, 사건 등)로 인해 우리는 상반된 감정을 갖는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사랑스럽거나 외롭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라는 감정을 받으면서 자신의 삶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진다. 그 무게를 누구는 지긋이 응시하면서 받아들이려 하고, 다른 이는 그것을 외면한 채 숨는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아서와 샬린은 그 무게를 짊어지지 않았다. 아서는 키190cm, 몸무게 250kg인 초 고도비만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었다. 그리고 젊은 시절, 그가 소중하게 여겨 자기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마르티마저도 그의 곁을 떠났다.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자랐던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이 두려웠다. 아서는 자기가 그들에게 관심을 주면 그들은 자신 곁에 잠시만 있을 뿐 결국엔 떠나게 될 거고 그에 따른 아픔(외로움)을 온전히 겪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그가 한 행동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집 안에서만 생활하면서 점점 외로움이 깊어져 갔다. ‘나 홀로 있다’ 라는 감정을 추스르려고 그는 음식에 집착했다. 샬린도 아서와 같이 무게를 짊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영웅 숭배를 했다. 그녀는 자신을 인생의 주인공으로 여기지 않는 채, 다른 이를 추종했다.아서를 자신만의 영웅을 만들어 섬기고, 샬린의 아들인 켈이 다니는 고등학교 교직원들을 그녀만의 영웅으로 섬겼다. 어릴 때부터 외롭고, 불행했던 그녀에게 영웅을 자신의 현실을 외면한 수단이 였을 것이다. ‘현실은 힘들고, 지금에 나 로써는 그(영웅)처럼 될 수 없다’고 스스로 여긴 샬린에게 영웅 숭배는 일종의 대리만족이였을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말이다. 이를 통해서 잠시나마 외로움을 덜 수 있었으나, 결국엔 그녀도 외로웠다. 외로움을 덜기 위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술을 마셨다. 마시면 마실수록 점점 정신은 혼탁해져 갔다. 그리고 일자리와 주변 사람도 떠나 스스로 집에만 있는 외톨이가 되었다. 샬린의 아들인 켈도 이들 정도는 아니지만, 그도 외로웠다. 자신의 아버지는 네 살 때 집을 나갔다. 그 이후 엄마 샬린과 같이 살았다. 샬린이 점점 술에 빠지면서, 그는 예전에 했던 엄마의 역할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면서 마음 한 구석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커져갔다. 다락방에 놓인 야구용품들을 보면서 켈은 ‘아버지는 그 팀을 좋아했고, 이 선수를 좋아했구나라’라고 상상했다. 집 한쪽에 남긴 아버지의 물건을 바라보면서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하지만 켈은 아서와 샬린과 달랐다. 그녀(샬린)가 죽고 나서 켈은 세상 속에 홀로 있었다. 아직까지 고등학교 학생이면서 돈도 없었다. 갑자기 그에게 닥친 ‘무거워진 무게’를 그는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도움을 받았다. 사진 속 아버지에게 엄마의 소식을 전하려고 켈은 출생신고서에서 발견한 그의 이름을 바탕으로 수소문해서 현재 근무지까지 찾아 갔었다. 그와 만나서 엄마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켈의 숨겨진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켈은 엄마의 본 모습을 보려고 했다. 샬린과 아서 둘이 나눈 편지를 봄으로써, 그가 본 샬린(알코올 중독, 은둔형 모습)의 다른 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엄마를 이해하려고 했다. 켈은 자신의 무게를 짊어졌다. 우리는 외롭다. 순간은 행복할 수 있어도, 외롭거나 불행은 피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는 ‘외로움은 떨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어쩌면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일 수 있겠구나 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홀로 자신만의 세계에만 있으라는 말을 아닐 것이다.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응시해라. 그 무게를. 인간은 외로운 존재여서 다른 누군가와 만나라 그리고 관계를 맺어라. 그것이 숙명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세일 것이다. 아마 작가는 이렇게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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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표지만 봐서는 크게 떠오르는 느낌이 없었다. 가을날이라 여겨질 배경색이 눈에 들어왔는데, 저자의 사진은 참으로 이쁘다라는 것. <이책은> 100명 모집 서평단 당첨 도서. <저자는>
<책내용 맛보기>
<책읽은 소감>
북테일러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아련한 슬픔이자 마음 속에서 절절이 자연적으로 스며 나오는 눈물이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감성을 자극하는 건지 알 순 없으나 나의 내면이 젖어들음은 단순히 가을날이라고 치부하기엔 왠지 머쓱한 느낌. 어떤 무게였길래 제목을 무게로 했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여러 뜻을 담고 있었다. 우선 주인공인 아서의 거대한 몸무게. 그 몸무게에 대적할만한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감의 무게라 해야나...삶의 무게이자 인생의 무게였다.
책의 구성은 그렇다. 아서의 집 안, 샬린의 일상, 켈의 생활. 아서의 집은 멋진 외관에다 집 안에도 없는 것만 빼고는 다 있다. 건축가인 아버지가 어머니와 살 던 곳. 어머니는 나날이 살이 쪄 아버지가 극도로 혐오하는 상태가 되었고, 그럴수록 어머니의 식욕은 더 늘어났다. 입지도 못할 옷이 늘어나는만큼 어머니의 몸무게는 더 늘었으며 아버지는 출장이 점점 더 길어지더니 9살 때 급기야는 완전히 떠났다. 어머니의 외로움을 늘 보아오던 아서는 명랑하고 밝은 성격은 아니었고 자존감 강한 사람도 아니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없도록 아버지의 역량은 컸으나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미 살고 있던 모자와 결혼을 한다. 그런걸 목도한 그가 어머니처럼 살이 찌는 과정을 반복하는 아이러니함이여.
경제적 어려움이 없으니 밥벌이의 지겨움이나 심각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 그가 세상에서 상처를 입고 은둔자로 살아가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안식처. 온라인 쇼핑물을 통한 택배기사가 가져오는 물건들이 세상과의 소통이 되고, 배달음식이 간혹 올 때 그들을 위해 마치 퇴근한 척하며 팁을 건네기 위한 현금 보유. 그나마 몸담고 있던 야간 교직 생활에서 불명예 퇴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샬린과의 만남, 이어지는 교류들. 육체적 관계는 없었으되 그녀를 사랑했던 건 확실하건만 샬린이 어느날 사라졌다. 그녀를 관찰하고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행동에 공감하면서 자신도 그런면이 있구나를 알았는데 떠난 이유를 알지 못하나 다른 친구가 생기면서 잠시 샬린은 묻어 두었다. 그런 샬린이 언젠가부터 편지왕래가 생기면서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네들은 야간 학교 시절의 그 마음이자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그런 그녀가 아들이 있다며 사진과 전화번호를 보내 온다. 아들이 입학할 대학에 관하여 의논을 하고 싶다며 방문 의사를 비치니 십 년간을 두문불출한 아서는 무지 긴장을 한다. 그들 모자를 위해 쓰레기장을 방불케하는 자신의 집을 청소한 도우미를 부르게 된다. 첫 출근인 욜란다가 등장하는데 그녀 역시 열 아홉의 발랄한 아가씨. 해맑은 그녀를 보면서 아서는 자신의 집이 엉망인게 미안하고...손님 맞을 준비를 위해 자신이 잠시 들뜸과 동시에 욜란다 라는 외부 사람때문에도 마음은 흥분된다. 욜란다는 몇 번을 오다가 사라지는데, 불현듯 어느날 찾아온다. 임신 5개월여...남친과 헤어졌으며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도 끊기고 숙식제공을 받으며 기거한다.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은 그녀를 위해 십 년간을 나가지 않은 공원 산책을 나가는데...오마던 샬린의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
샬린은 대학을 일 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아서와의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 교류를 하게 되는 샬린. 샬린은 여러 면에서 다른 학생들과는 많이 다른데, 일테면 좀 어둑했다는 느낌이다. 덜 떨어진 질문을 하거나 생뚱맞은 의견을 내놓는데 그런 면이 아서의 관심권 안에 들어감을 그녀는 모른다. 그런면에서 아서도 독특한 유형이다. 9살 때 건축가이던 아버지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켈을 임신했고 그 사실을 안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은 중단되고, 켈의 아버지는 맘에 들어하지 않으셨다. 두 분은 교통사고로 그나마 돌아가시고, 켈이 네 살때 아버지는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샬린의 켈을 향한 사랑은 지극하다. 아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경제적인 부분에서 힘이 들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샬린은 알콜중독자가 되어 거실이 방인 듯 지낸다.
켈은 엄마 샬린과 둘이서 의지하며 사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살뜰히 아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왜 떠났는지 돌아오지 않는지 차마 묻지 않는다. 나날이 망가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건 지겹다. 술에 쩔어 토사물로 얼룩진 옷이며 감지 않은 머리에서나 몸에선 역겨운 냄새가 나고, 엄마의 정수리는 어느새 민둥산이다. 전기세 내는걸 잊어서 단전이 되기도 하면서 자신이 챙겨야함을 알아간다. 야구에 소질이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고 인정을 받는데 엄마는 고등학교를 자신이 사는 동네가 아닌 곳으로 정한다. 그 곳은 딴 세상으로 고상하고 지적이며 부유한 사람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 그렇다보니 자신은 친구들도 없고 조금은 기가 죽어 지낸다. 그나마 야구를 잘해 자존감이 낮지는 않다. 엄마는 대학을 부르짖지만 자신은 엄마 옆에 있어야하고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싶어 대학은 염두에도 안 둔다.
엄마가 아프다. 평상시에도 아펐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엄마가 자살을 위해 편지를 써놓고는 눈을 뜨지 않는다. 병원에서는 가망성 희박함을 알려오지만 켈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 와중에 친구를 때리고 과속운전을 하고...경찰서에 연행된 그에게 엄마의 죽음이 전해지는 전화. 그렇게 엄마는 떠났고, 엄마의 집이자 자신의 집에는 무서워서 외로워서 이상해서 들어갈 수가 없다. 친구집에서 기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준다. 거절하려다 도움을 고맙게 받는 쪽을 선택한다. 용커스에서 학교에 가질 않은게 다행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친구네 부모님들은 다 안정된 삶에서 켈을 밀어내거나 비틀린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켈이 엇나가지 않는 이유가 된다. 자신의 친부를 찾아나서니 실상은 친부가 아니나 친부역을 자청했다고 한다. 독특한 엄마의 성격과 맞지 않아 각자의 삶을 향했으나 자신도 친부는 모른다니. 엄마가 지정한 아서가 친부라는데...엄마의 부고를 편지로 전하면서 서신을 동봉하니 아서 역시 친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린다.
아서의 일상을 읽을 땐 이렇게도 삶이 영위되는구나. 보통 은둔자라면 '히끼꼬모리'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서는 그렇게 별난 은둔자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과의 소통이 될만한 단초가 없어서 세상 속에서 고립되기를 바라며 은둔자의 삶을 선택한 케이스였다.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는게 무엇보다 은근히 그 삶을 즐기는 경지도 되었으리라. 마음이 모나지 않았으니 욜란다를 기꺼이 보듬어주고 켈을 자식으로 여기고픈 마음을 먹는다. 욜란다나 켈이나 자신이 평생을 살았으되 가지지 못한 자식들이 아닌가. 한때는 샬린과 다른 친구를 만나면서 자식들을 키우는 미래를 꿈꾸었건만 자신의 유년시절을 돌이켜보건대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뚱뚱하게 살쪄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가엾은 엄마를 생각한다면 자신도 그런 길을 가지 말아야는데, 싫어하면서도 닮는 경우가 있구나. 그래도 세상을 향한 욜란다와 켈이라는 인간 관계로 인해 아서는 몸무게가 줄어드는 상황을 맞이했으니...
자살한 사람을 무지 혐오한다. 남겨진 사람들의 사는 동안내내 남겨진 상처들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한 사람을 추모하는 행위도 그닥 곱지않은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 역시도 내 개인적 견해일뿐. 자살을 미화하는 것도 달갑지 않다. 허나, 여기선 샬린이 자살을 했는데 미워할 수가 없다. 어린 아들을 혼자서 키우느라고 아둥바둥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루푸스병을 앓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보니 자신의 병을 돌볼 새가 없음이라. 그래서 알콜중독이 되었고...행복전도사라던 최윤희 부부가 자살을 했는데 그 통증은 말로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차라리 죽음이 안식일 사람도 있긴 한가 보다. 켈이 엄마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얼마나 가여운지. 그 부분은 울면서 읽어냈다. 가슴이 아려서,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친부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가 아니다. 아픈 엄마를 위해 좀더 잘해 주지 못함을 반성하는 켈. 엄마가 조금만 더 기다려줬다면 자신이 모실 수 있었는데 자책하는 켈. 그런 그이기에 이웃들의 도움은 기꺼웠으리라.
가을날이 깊어간다. 감성적이면서 비이성적인 책 한 권을 만난 시간은 행복했다. 섬세한 심리묘사가 되면서도 무거운 내용을 칙칙하지 않게 그려내는 힘. 냉소적이지 않게 피력하는 글. 그건 저자의 사고가 매우 밝은 사람이 아닐까 라는 선입견은 사진의 모습이 이쁘고 밝아서이다. 같은 표현을 해도 배배 꼬이고 냉소적인 글이 있는가 하면, 도대체 음습하고 음험한데다 뭔지 모를 불쾌함까지 동반하는 글도 있다. 때론 엽기적인 글도 있으며 도대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읽긴 읽어도 모를 글이 있다. 깊어가는 가을날은 뭐든 거둬들이는 계절.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게서 인간은 얻어지는게 많다. 나는 이 가을날 잘 만난 책들 덕에 모처럼 감성에도 젖어보고 행복하다. 계절성 우울증과는 별개로. 한 해가 저물어가는 가을날 한복판에서 이러저런 생각이 많다. 가을날은 뭘해도 좋은 계절. 잘 만나진 책들에게서 눈물도 흘리며 감정 순화를 하고, 그 기분을 적어보고 행복하다. 책이 없다면 어찌 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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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조니 뎁이 주연한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란 영화에서 길버트 그레이프의 엄마가 엄청난 무게의 거구로 나왔다. 아버지의 자살의 충격을 견디지 못해 거구의 몸매를 가진 엄마를 보살피며 가족을 돌보는 길버트 그레이프의 이야기였다. 그 영화에서 엄마는 엄청난 무게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거의 침대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침대에라도 내려올라치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내려올수 있었던 영화였다. 그때의 난, 세상에 저런 거구의 몸을 사람도 다 있구나 싶어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침대에서 죽어가는 엄마 때문에 눈물을 흘렸었다. 이 책을 받아 책을 읽으려고 하며, 책의 내용을 훑어보니 문득 그 영화 생각이 났다. 아마 이 책 속의 아서 오프도 길버트 그레이프의 엄마의 무게만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자신이 충분히 이겨나갈 만한 시련이 찾아온다고 했다. 삶이 너무 허무하기 때문에 삶의 고통 또는 시련을 주는 것인지, 때때로 우리 삶에는 시련이 찾아온다. 우리는 그 시련을 견디고 곁에 있는 이들로 인해 그 시련에서 헤어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혼자 왔다가 혼자 스러지는 존재다.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삶을 이어가고, 삶 속에서 기쁨이 가득한 존재들을 만나기도 한다. 25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20년 가까이 집안에서만 은둔했던 아서 오프에게 한줄기 빛처럼 그를 만나러 오겠다는 샬린 터너의 편지를 받았다. 샬린은 과거 아서가 학생들을 가르칠때 자신의 학생이었다. 20년 가까이 지나도록 서로는 편지를 나누었고, 뜸하다가 최근에 다시 편지를 받은 것이었다.
집 밖에 나가지 않은지 20년 가까이 되는 은둔자 아서 오프. 거대한 무게를 자랑하는 자신의 몸, 몸무게를 재 보지 않은지도 오래되었던 그는 자신의 몸을, 집을 샬린에게 그대로 보일수 없어서 청소업체에 전화해 청소해 줄 사람을 구한다. 아서 오프는 샬린의 편지로 인해 세상과의 소통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해 본지도 꽤 오래되어 사람과의 관계에 수줍어 했던 그지만, 그보다 마흔살 가량 어린 청소부 욜란다를 향해 마음을 열게 되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서 움직이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굉장히 좋았던 아서는 욜란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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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과도한 자신의 무게때문에 집안에서만 은둔했지만, 샬린으로 인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뗐던 것이다.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샬린의 부탁으로 샬린의 아들인 켈 켈러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다. 켈 켈러에게 대학 입학을 향한 조언도 건네고 싶어졌고, 켈에게 전화도 여러번 했다. 켈과 통화를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매일 밤 나는 내일은 달라지고 새로워질 거라고, 좀 나아질 거라고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고 자신에게 말한다. (247 페이지)
자신과 이름이 같았던, 자신이 네살때 떠나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는 켈 켈러.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더욱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켈 켈러는 아픈 엄마를 돌보고 있다. 부자인 친구들과는 다른 가난한 동네 용커스에서 살지만, 늘 술에 취했는 엄마를 버릴수도 없다.
자신이 사는 곳을 숨기고, 엄마의 상황을 숨기고, 모든 것을 숨기고 싶었던 켈 켈러는 아픈 엄마 때문에, 늘 취해 있는 엄마 때문에 그 또한 늘 외로웠다.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여자 친구에게 가고 싶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속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따스함 속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늘 사람들의 도움을 거절할 줄만 알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걸, 따뜻하게 대해주는 걸 저도 모르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켈 켈러 또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신들이 가진 외로움 때문에 샬린 터너와 아서 오프가 이어졌듯, 이제 켈 켈러와 아서 오프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진 모든 무게, 그들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조금쯤 가벼워 질 때도 되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우리는 언제까지나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그건 너무 외로우므로, 그건 너무 슬픈 일이므로. 외롭게 움츠려있는 이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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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무게가 2kg이 늘었다. 평소에 3kg 정도만 더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는데, 오히려 2kg이 더 늘었으니 이제는 5kg을 더 줄여야 한다. 몸무게가 늘어가는 것을 굳이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아도 알고 있다. 거의 한달 가까이 폭식을 하고 있었고 평소에 먹는 양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체중계보다 내 몸이 더 잘 알고 있다.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보통 잠을 자려고 했던 것에 비추어보면, 이번의 폭식은 예외의 일이다. 한때 폭식으로 평균 몸무게의 10kg 정도를 늘여본 적이 있던 터라, 다시 그때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한 번의 경험으로 그 기억은 충분하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음식으로 뱃속을 채우는 그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가 허기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속에 채워 넣을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음식으로 뱃속을 채워 넣는다. 마치 음식이 그 모든 허기짐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말 그대로 착각이다. 뱃속에 채워진 음식이 순간적인 포만감은 줄 지언즉, 영원성을 주지는 않는다.
무엇이 시작이었을까. 이 남자, 아서 오프. 몸무게가 250kg에 육박한다. 그마저도 넘을지 모른다. 체중계에 올라간 지가 몇 년은 되었으니 아마도 그 정도일 거라 추측할 뿐이다. 한때 대학교수였고 불미스러운 소문으로 학교를 그만둔 뒤, 그는 은둔자가 된다.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세상과는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한다. 움직이지 않았고, 우편물을 수거할 때 말고는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대량의 음식을 흡입했다. 그리고 초고도 비만의 거구가 되었다. 그런 아서에게 유일한 소통의 대상은 20여 년 전에 알고 지냈던, 사랑했던 제자 샬린뿐이다. 둘은 그사이에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편지가 오고갔을 뿐이다. 그마저도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어느 날 샬린에게 전화가 온다. 자신의 아들의 대학 진로 문제에 대해 도움을 청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의 전화가 왔지만 그게 끝이다. 이야기는 거기서 멈춘다. 잠깐 아서를 설레게 했던 샬린 소식은 다시 끊어졌고 아서는 평소의 삶으로 돌아온다.
샬린의 아들 켈 켈러. 열아홉의 고등학생이다. 공부는 못하지만 야구는 잘한다. 대학이 아닌 야구로 진로를 정하고자 하지만 엄마는 대학을 원한다. 하지만 켈에게는 자신의 진로만큼이나 엄마의 상태가 걱정이다. 술과 약에 취해 거의 정신을 놓고 사는 엄마. 맨 정신일 때는 오직 자신의 대학 진로 문제만이 전부인 엄마. 엄마는 언제부터 술에 중독이 되었고, 엄마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무엇일까. 열아홉 소년이 짊어지기에는 이 환경이 상당히 무겁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켈에게는 야구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할 텐데...
철저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세 사람이다. 샬린, 켈, 아서. 술과 약에 중독된 샬린, 운동이 살길인 것처럼 보이는 켈, 음식만이 전부일 것 같은 아서. 고립된 하나의 세상에서 유일한 생존자들 같았다. 각자의 세상에서 혼자인 것 같은 사람들. 이들에게 뭔가 하나가 주어져야 한다면 오직 그것을 택하겠다는 마음처럼 보이는 한가지씩이었다. 이들에게 공통된 질문은 ‘왜?’였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이들의 하루하루 모습이 계속될수록 비춰지는 것은 결핍으로 인한 그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게 각자에게 술이나 운동이나 음식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들 모두 혼자였다. 가족이 있으나 없는 것과 같은 아서, 켈과 샬린은 모자사이지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가족관계다. 모든 것은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처럼, 처음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던 가족은 그 결핍의 모습을 계속 이어간다. 결핍은 외로움을 가져오고 그 외로움을 채워줄 것들로 가득한 중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계속되는 허기짐.
켈과 아서, 두 사람의 고백 같은 독백으로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 처음을 찾아낸다. 아서에게는 비만의 엄마가 있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만나지는 않는다. 켈의 아버지는 켈이 4살 때 집을 나갔고 엄마인 샬린은 빈곤의 마을이 아닌 좋은 환경의 고등학교에 켈을 입학시킨다. 뭔가 점점 아귀가 맞지 않는 삶이 이어졌고, 지금 두 사람의 모습에 이르게 된 것이다. 쓰레기장 같은 집, 푹 꺼진 소파, 울리지 않는 전화벨, 집안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도 숨이 차는 아서. 분위기가 어두운 집, 늘 TV 앞에서 술에 취한 채로 앉아있는 엄마, 자신과는 전혀 다른 환경의 동급생들을 바라봐야 하는 켈. 전혀 접점이 없는 아서와 켈이 서로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사이에 샬린이 있었다. 샬린이 아서와 주고받는 편지들, 켈의 진로문제를 꺼내면서 시작된 통화 사이에 뭔가가 있다.
이야기는 점점 환기되는 듯, 조금씩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아서의 집에 찾아온 청소용역인 욜란다의 등장은 고립된 삶을 즐기는 듯 보였던 아서에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한다. 어쩌면 그 전에 아서를 방문하겠다고 말한 샬린이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소망하는 것을 채우지 못한 결핍이 만들어낸 샬린의 허황된 망상, 그런 샬린을 맞을 준비를 하는 아서.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두 마음은 외로움으로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한 사람을 집밖으로 걸음하게 하는 계기를 만든다. 누군가의 등장을 받아들이고,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하고, 십몇 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걸음을 내딛게 만들고 있다. 각자가 만들어낸 중독을 하나하나 떨쳐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된 켈은 동급생들과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갈 시선이 생긴 듯하다. 여자친구인 린지와의 관계가 어긋나고 멈출 것 같았는데, 의외의 전개에 희망적이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소통의 좋은 예를 그대로 보여준 듯하다. 모든 것을 꺼내어놓고 이야기했을 때 형성되는 관계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일지 모를 이에 대한 기대감이 사그라졌을 때 실망이 아닌, 세상을 배우는 시선이 채워졌다. 테스트에서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서 차선의 선택을 준비한다. 자신이 가진 삶의 무게가 가늠이 되어졌을까. 온전하지 못한 가족이 만들어낸 삶의 공허와 결핍, 외로움이 이들 각자에게 준 것은 그리 반길만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까지 안겨주었으니, 결국은 버려야 할 것들만 안겨준 것이다. 아픔과 고통이 함께였지만, 많은 경험이 지나갔다. 아서의 비만은 점점 가벼워질 것 같고, 진짜 혼자가 된 켈은 단단한 심장으로 세상과 소통할 것 같다. 결국은 결핍이나 외로움, 삶의 무게,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고 자기 자신이 뛰어 넘어야 할 벽이라는 것.
어느 날 아침, 켈이 친구 디의 집에서 아침의 빛을 차단한 검은 커튼을 열었을 때, 알았다. 아, 이제 다시 시작이겠구나. 좋은 않은 결과를 받는 일에도 다시 어두워진 커튼을 열겠구나 싶었다. 혼자가 아닌 사람들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으니, 같이 호흡하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지 않겠는가. 반면, 아서가 호스트가 될 디너파티도 궁금해진다. 욜란다와 함께 준비하는 음식들, 처음으로 찾아오는 손님들,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집, 모두가. 사람과 함께 어우러지는,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아서를 그리게 된다. 문 하나만 열면 되는 것이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닫힌 문 너머의 것들을 안 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잘,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었으나 쉽지만은 않은 책이기도 했다. 켈과 아서.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의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접점을 찾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너무 다른 두 사람의 환경과 모습들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쉬울 리가 없다. 그렇게 다른 모습 안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들이 내가 봐야할 것들이었다. 서로 다른 듯한 모습, 하지만 품고 있는 마음속의 허기짐, 그걸 채우는 방식들. 결국은 내가 나를 뛰어 넘어 그 시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무언가를 극복하고 회복해야 하는 순간에 만나기에는 더없이 좋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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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도서는 출판사의 지원을 받은 도서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인생의 무게에 대하여서 생각을 해보고 그러한 무게를 경감을 하기 위하여서 자신의 반려자를 찾고 가족을 이루는 경우도 있는데 인생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다고 하여도 혼자가 아닌 동반자가 있다면 무게의 중심이 변화를 하면서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효과를 볼수가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동반자에 대한 필요성을 아주 많이 느끼고 있지만 자신들의 어깨를 누르는 무게에 눌려서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 위하여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성을 만들어서 그 안으로 침잠을 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과 그러한 자신만의 무게에 눌려서 시간이 갈수록 왜소해지는 모습에 대하여서 반감을 가지고 자신만은 그러한 인생이 아니라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면서도 자신만의 무게로 인하여서 괴로워하는 아직은 어리지만 이제 곧 인생에 대하여서 많은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 접어들어가는 소년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무게에 눌려서 집안에 칩거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인 과거의 대학교수 아서에게 어느날 지인에게 연락이 오고 그 사람이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서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할 수가 있는 아들을 위하여서 무엇을 해줄수가 있는지에 대하여서 도움을 구하면서 아서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에 대한 중심점의 변화가 발생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유일하게 편지를 통하여서 연락을 하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유지를 하였던 과거의 학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한 요청이 그동안에 외부와의 관계를 가지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면서 더욱 자신만의 도피처로 생각을 하였던 음식의 과도한 흡입으로 인한 문제인 과체중이 자신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문제로 작용을 하고 체중에 대하여서 잠시 뒤로 미루고 자신의 어지러운 집안을 청소를 하기 위하여서 외부에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주기 위하여서 찾아온 여성과 대면을 하면서 그동안의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서 다시 한번더 돌아보는 기회가 생기는 모습을 보이고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미지의 존재인 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인의 아들과의 만남에 대하여서 기대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동안에 속이고 있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서 진실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답장으로 인하여서 더욱 깊은 늪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거칠수가 있었던 아서가 자신의 집안을 치우기 위하여서 찾아온 여성인 욜란다를 통하여서 무게를 줄이는 방법이 혼자만의 방식으로 처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자신만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깨에 있는 무거운 추를 합쳐서 고민을 하면서 서서히 줄여가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인생의 모습을 설계를 하면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하여서 노력을 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상대적으로 이미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노년으로 접어들어가고 있는 아서의 처지와 새롭게 시작을 하는 인생을 보람차게 보내기 위하여서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켈의 처지는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부터 차이가 등장을 하고 있는데 일정한 수입원이 없기 때문에 빈민가에서 살면서 어머니에게 들어오는 연금으로 생활을 하는 켈의 모습과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이 되어지는 아버지 이지만 돈으로 그의 인생에 대한 도움을 계속하여서 주고 있는 돈이 부족한 생활은 아니고 인생의 무게로 인하여서 고민을 하는 중년의 남성이 서로의 비슷하면서도 반대가 되어지는 입장을 알지를 못하면서도 관련성을 가지고 이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켈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지만 자신의 집에서 다닐수가 있는 고등학교가 아닌 먼거리에 있는 자신의 가정환경과는 다른 부유한 학생들이 주로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일종의 아웃사이더로 활동을 하지만 지식이 아닌 자신의 육체능력을 이용을 하여서 야구부의 에이스로 활동을 하면서 인생을 바꾸어줄수가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야구를 선택을 하면서 깊이 매진을 하기를 원하지만 한명만 남은 가족인 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을 위하여서는 대학에 입학을 하여서 공부와 야구를 병행을 하는 것을 원하고 있는 입장이라는 사실이 아직은 어린 켈에게 많은 고민으로 다가오고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왜곡이 되어있는 환경에 대한 몰입과 방해가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려운 인생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의 모습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서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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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진 두 남자의 이야기다. 그 짐이 한 남자에게는 몸무게라는 겉모습으로 드러나고 또 한 남자에게는 아버지의 부재로 나타난다. 대학교수였던 아서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헤쳐 나가기보다 은둔을 선택하면서 그로부터 십여 년간 집밖을 나가지 못한다. 요즘 세상은 자신이 원한다면 굳이 바깥으로 다니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하다. 만나는 사람 없이 온라인으로 모든 물건들을 사들이고 대문 밖을 나가지 않던 아서는 자신의 불안한 마음과 외로움을 먹는 것으로 해소하려다보니 어느 새 200kg을 훌쩍 넘긴 체중을 갖게 되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몸무게다. 아서는 자신의 집에서도 2층 계단을 오르지 못해 1층에서만 간신히 생활하고 있었다. 아서가 홀로 사는 집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아서에게 한 학기를 배운 적이 있으면서 아서와 서로 마음이 잘 맞았던 샬린이 아들 켈을 데라고 살고 있었다. 샬린 역시 탈모와 비만, 병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아들을 아서에게 부탁한다. 아서와 샬린의 아들 켈, 이 두 남자의 이야기다. 상투적이라면 아서와 켈은 죽은 샬린에 대한 기억을 추억하며 남은 삶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주인공이 교차적으로 화자로 등장해 진행하는 이 이야기가 끝이 날 동안 두 사람은 만나지 않고, 샬린의 마지막 편지는 거짓으로 드러난다. 아서는 자신이 어릴 때 집을 떠난 아버지가 다른 가족을 갖게 된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 후로 계속 아버지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가족과 친구가 없으며 자신이 혼자 빈 집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스스로를 집안에 가둔다. 이런 아서를 집에서 나오게 한 인물은 자신처럼 외로움에 갇혀있던 샬린의 편지와 전화였으며, 더 적극적으로 아서를 사회 속으로 밀어 넣은 사람은 미혼모 욜란다였다. 이미 헤어진 남자의 아이를 가진 욜란다는 아서의 집에 청소부로 방문한다. 자신의 문제가 더 급했던 욜란다에게 아서의 비정상적인 몸무게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서는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많은 혜택을 가진 사람이었다.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마르티, 샬린, 욜란다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며 곁에 있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술과 약물에 중독된 채 살아가던 엄마와 가난으로 인해 절망으로 걸어가던 켈의 주위에도 정이 넘쳐났다. 엄마의 죽음이 켈을 힘들게 하지만 그런 켈을 걱정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켈은 힘을 낼 수 있었다. 두 주인공 아서와 켈을 통해 우리가 극복해야할 것은 주위의 환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된다. 아서는 자신의 불행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자신을 포기했다. 그리나 자신에게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그는 힘을 얻는다. 켈 역시 사면초과였다. 그러나 켈은 열등감에 빠지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했다. 켈이 양부가 주는 100달러의 돈을 받고 그 돈으로 바닥을 보이던 차에 기름을 넣어 자신의 길을 되돌아 올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앞으로 자신이 가야할 곳에 갈수 있게 된 것도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서와 켈의 경우를 통해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야말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줄줄도 받을 줄도 몰라서 쓸쓸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 모두가 걸어가는 삶의 길에 빈손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 크고 작은 짐을 안고 가는 것이다. 이때 내 몸에 이고 진 짐이 겨우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내가 가진 짐이 적다면 남의 짐을 덜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도움을 받을 처지 이면서도 아서의 외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욜란다, 단지 아들의 학교친구라는 이유로 갈 곳 없는 켈을 재워주고 먹여주는 많은 이웃들의 모습, 그리고 아서의 옆집에 살며 아서에게 따뜻함을 보여주는 수잰 같은 등장인물들이 있어서 아서와 켈, 더불어 이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소설이었다. 훌륭한 사람들은 굳이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남을 도우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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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를 나타내는 영단어로 Heft보다는 Weight가 더 익숙하다. 이 두 단어 모두 무게를 나타내는 단어로 weight는 체중, 무거운 것..등 보여지고 느껴지는 그 무거움을 나타낸다면 heft는 무게라는 의미보다 짐이 되는 것,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는 '삶의 무게'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점점 내 어깨위에 하나 둘 씩 쌓여가는 것들로 인해 점점 힘겨워지는 것..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제각기 자신의 어깨에 그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인생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짐을 지워지게 하는 것이 내 스스로일 수도 있지만 더불어 가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또 걸어 나가야하는 사회라는 환경속에서 그 짐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짐의 무게를 더해주는 것도 또 덜어주는 것도 결국은 사람, 관계, 소통.. 이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한번 하게 된다.
가족.. 일단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가장 일상적인 것은 아버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 또는 형제 자매들.. 그들에게는 각각 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주어지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형성이 된 것이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 역할을 하며 서로 공존하는 것이냐에 따라 그 가족은 더욱 견고해질수도 아니면 울타리가 무너져 해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나올때도 있고 반대로 그래도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말을 할 때도 있고...가족 구성원의 존재 여부보다는 그 구성원들간의 관계와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외로움, 결핍, 다가가지 못하는 희망..이런 앓이를 하고 있는 이들 아서. 켈. 살린. 욜란다...의 이야기이다 . 그들은 그러한 앓이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에 의존하게 되고 그것에 중독이 되어 간다. 세상과의 소통.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라는 처방이 아닌 폭식, 술, 격렬한 운등등... 아서와 켈이 자신의 이야기를 교차하듯이 해 나가는 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이 이야기는 그들의 지켜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아서는... 유명한 건축가인 아버지가 있었고 , 지금도 존재하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가족을 뒤로 하고 일을 핑계삼아 유렵으로 떠나버렸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온 옛집에 들어가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해 버린다. 그렇게 10여년을 집밖을 나오지 않은 채 몸의 무게는 늘어가지만 외로움의 공간은 점점 커져만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유일한 소통 출구는 대학 강의 시절 자신의 강의를 듣던 샬린과의 편지왕래였다. 편지를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유일한 타인과의 대화였다. 우연한 기회에 아서의 집을 찾게 된 욜란다.. 작은 소녀인 그녀를 통해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씩 맘을 열어가는 아서.. 결국 켈과 만나게 되고 그렇게 그를 힘겹게 했던 무게는 줄어들고 외로움의 공간은 점점 사람들로 인해 채워져 가고 있었다.
샬린은.. 그녀는 꼭 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서가 강의를 하는 그곳에서 수강을 했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를 만났다. 어찌보면 아서는 그녀가 꿈꾸던 이상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갑작스런 임신, 떠나버린 남자와 남겨진 아들.. 그 아들을 양육하면서 힘겨웠던 상황을 술에 의존했다. 그리고 택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린 것.. 그리고 아들에게 남긴 편지 한장.. 그 편지 한장으로 켈은 아서와 연결이 되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 그녀가 안타깝기만 하다.
켈은.. 아버지라고 믿었던 사람은 어린시절 그들의 곁을 떠나버렸고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따뜻한 엄마가 아니라 항상 술에 취해있다. 그에게는 야구라는 돌파구가 있었다. 엄마는 대학을 가라고 하지만 자신은 야구선수로 성공을 하고 싶었다. 엄마의 방문에 붙어 있던 쪽지 ' 켈 들어오지마. 경찰을 불러.사랑해. 엄마가' 를 본 켈.. 엄마의 자살기도 그리고 그렇게 점점 생을 놓아버리는 엄마의 모습.. 친구들에게는 사실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그 아픔을 끌어안고 힘들어한다. 엄마는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고 오히려 엄마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모든이에게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맘이 편안해지고 모두가 자신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음을 발견하며 그의 무거웠던 짐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마의 편지 속의 인물이었던 아서를 찾아가게 된다.
그들은 서로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이들이다. 다만 샬린을 통해서 알게 된 이들이다.. 그들의 지켜보는 내내 웬지 같은 인물이 다른 형태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 하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블루클린에 있는 아서의 집과 용커스의 켈의 집 그리고 팰스 랜딩의 그의 학교 정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두 인물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자칫 정적이고 지루할 수 있지만 낡고 오래된 집, 아서가 먹은 음식들의 묘사와 함께 하는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용커스와 팰스랜딩이라는 대비되는 지역을 오가는 켈의 심정 그리고 그의 일탈등은 거부감이나 지루함보다는 더욱 따뜻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는 힘이 있었다. 이런 것이 작가의 표현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그들은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아서는 집밖으로 그리고 켈은 편지속세만 남겨두고자 했던 이에게로.. 한걸음씩.. 그리고 그런 켈을 기다리는 아서의 설레임.. 드디어 창 밖으로 도착하는 그을 바라보는 아서의 모습으로.. 그 다음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 놓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무게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서로 어색하지만 두 팔로, 가슴으로 끌어 안는 따뜻한 포옹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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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와 '은둔자'라는 말은 굉장한 느낌 차이가 있다. 전자가 철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등교거부'에 가깝다면, 후자는 지성을 밑바탕에 두고 있어 훨씬 지적인 이미지다. 백이와 숙제처럼 고고하게 굶어죽든, 세상을 바꿔보려고 애쓰는 공자를 비웃던 접여·장저·걸닉처럼 일찌감치 세상을 포기했든, 나름의 사정과 철학이 있어 보여서 은둔형 외톨이의 방황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하지만 둘 다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무게>는 10년 간 집안에 모습을 감추고 산 전직 대학교수와 가난하지만 야구에 재능이 있는 소년의 이야기다. 설정만 보면 다들 떠오르는 영화가 있을 거다. 소년의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이끌어내는 전설적인 작가, 그리고 세상과 담을 쌓은 그를 밖으로 한 걸음 내딛게 도와주는 소년의 우정을 그린 <파인딩 포레스터>, 사고로 시력을 잃고 퇴역해 삶의 의욕을 상실한 괴팍한 전직 장교와 문제아들의 말썽에 휘말려 부당한 처우를 당하게 된 의지할 곳 없는 모범생의 여행을 다룬 <여인의 향기> 등이 연상되지만, 여성 작가인 리즈 무어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남자와 소년이라는 코드를 색다른 방식으로 엮어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남자-아서 오프
p.358-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니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나는 고독할 운명이라고 느꼈고, 언젠가 고독이 나를 찾아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고독이 나를 찾아냈을 때 난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반기기까지 했다.
아서 오프는 어릴 적부터 천성적으로 고독을 좋아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날이면 스트레스 때문에 식탐을 조절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늘 바빴고,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관심을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을 핑계로 떠나서 새 가정을 꾸몄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죽음이 아서의 공복감을 더 키웠는지 체중도 더 불었다. 대학교수가 되고 샬린 터너라는 여제자를 만나게 된다. N극은 자기와 다른 S극을 끌어당기지만, 고독은 자기와 같은 고독을 끌어들이나 보다. 외로운 사람은 다른 외로운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고 스무살 나이 차이에도 우정과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사정이 생겨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고, 가끔 편지만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돼버렸다. 더 이상 교수와 제자 사이가 아니었지만 학교에선 둘의 관계를 문제 삼았고, 그때부터 아서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먹는 것을 제어하지 않게 됐다.
p.357-10년 동안 철저하게 혼자 지내면서 나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래, 음식도 있긴 했지만, 그것 말고도 내게는 외로움의 대령(大靈)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의 외로운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면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에는 달콤한 낭만이 있으며 그래서 내가 더 고결한 거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내 고독에는 목적이 있다고, 아, 틀림없이 그렇다고.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中에서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휴 그랜트가 캐럴 한곡을 히트시킨 아버지 덕분에 평생 놀고 먹었듯, 물 건너 런던에 사는 아버지는 풍문으로 근황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한 건축가여서 아서는 일을 하지 않고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쉰여덟의 나이에 그의 몸무게가 250킬로그램 가까이 나가게 됐을 때 샬린이 20년 만에 갑자기 연락해 온다. 아들의 대학 진학을 도와달라며 방문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아서는 동요한다.
사람들은 엉망이고 싶어서 혼자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남의 시선 따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고독을 즐기는 거다. 하지만 다시 남의 시선을 받게 될 줄 몰랐던 아서는 당황한다. 엉망인 집을 치우기 위해 가사 도우미를 부르고, 그것으로 예정에 없던 욜란다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사람의 손길이 닿자 집안은 생기가 돌았지만, 아서는 촉각을 곤두세워 욜란다를 의식하느라 피곤하다. 자신의 한심한 꼴을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면 그렇게 좋아하던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점점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서는 욜란다에게 길들여지고, 그녀를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많아진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中에서
기다리던 샬린의 연락은 끊기고, 욜란다는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인다. 외로운 사람은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너무 앞서 나가는 경향이 있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샬린 모자와 함께 할 상상을 하더니 이제는 버림받은 욜란다를 입양할 생각까지, 아주 잠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엿보기도 한다. 외로운 사람은 다가가고 싶어하면서도 상대가 다가오는 것은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용당하면 상처받을 것 같으니까 거리를 두고 싶다. 하지만 아서가 욜란다를 받아들이자 욜란다도 아서의 닫힌 마음을 서서히 열기 시작하고, 그를 세상 밖으로 인도한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소년-켈 켈러
p.93-결국 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해야 한다. 언젠가는 얘기를 해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앞에 놓인 것들이 보이지 않는 듯 연기를 해왔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 中에서
켈 켈러는 술취한 엄마가 있는 집에 돌아가기 싫어한다. 못 배운 게 한이었던 엄마는 켈을 무리해서 부자 동네 고등학교에 보내지만 친구들이 있던 가난한 동네에서도 외면당하고, 부자 동네 아이들 사이에도 속하지 못한다. 엄마는 성적도 좋은 편이 아닌 켈을 대학에 보내려 하지만, 정작 켈은 재능을 보이는 야구로 지금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엄마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면서 차라리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은 나쁜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던 어느 날, 상상은 현실이 된다.
p.151-그동안 밤에 집에 와서 이런 모습의 엄마를 본 것이 단지 오늘을 위한 연습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켈은 엄마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며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던 집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친구 집을 전전하다 짝사랑하는 여자 린지 때문에 사고를 치고 만다. 이 때쯤 나는 드디어 아서가 켈을 만나러 오겠구나, <여인의 향기>의 알 파치노처럼 켈을 위해 변론하고 보호해주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 리즈 무어는 둘의 만남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끝내 전화를 받지 못해서, 말할 용기가 없어서 서로 계속 엇갈리기만 한다.
영화 <여인의 향기> 中에서
갈 곳이 없어진 켈은 켈러라는 성을 준 얼굴도 잊어버린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더 큰 고독을 안고 돌아온다. 하지만 동정받기 싫어하던 켈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도움을 받으며 서서히 안정되어 간다.
p.388-그 사람에 대해 더는 알려 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정말 죽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엄마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엄마는 자신의 인생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끊임없이 알아보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엄마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것이며, 나를 향한 엄마의 소망도 실현될 것이다.
이 작품의 연출에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아서의 이야기에서는 대화가 큰따옴표“” 안에 들어있어서 목소리, 그러니까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반면, 켈의 이야기에서는 쉼표나 '-'로 구분될 뿐이어서 먹먹함이 있다는 거다. 앞에서 말했던 은둔자와 은둔형 외톨이의 차이로 보자면 성숙한 대화와 미성숙한 대화의 대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p.350-그래, 나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마음이 열린다는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p.396-우리 두 사람의 삶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달리 살 수도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샬린은 아서와 켈에게 서로를 선물로 줬지만, 둘의 만남은 미뤄지고 미뤄지다 책장을 덮은 이후로 예약된다. 두사람은 그동안 불행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던 탓에 아직까진 고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어쩌면 고독의 달콤함이 그리워질지도 모르지만, 용기내서 마음의 문을 연 남자와 소년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마음의 짐,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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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이 살이 더 찐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착한 사람은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는 대신 음식을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경향이 높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살이 찐다는 것이다. 몸무게가 '정확히 몇 킬로그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220킬로그램에서 270킬로그램 사이쯤 될 거'라는 아서 역시 착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오랫동안 단둘이 살았던 아서는 학창시절엔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고, 교수로 재직하던 대학에서는 쫓겨났으며, 하나뿐인 여자친구마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대신 그는 먹었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단 한 번 사랑이 찾아온 적이 있다. 제자였던 샬린 터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치과 접수 창구에서 일하던 그녀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 아서가 재직하던 대학에 등록했다. 공부에는 재능이 없어 엉뚱한 질문만 하기 일쑤였지만 아서는 그녀가 좋았다. 한 학기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취를 감춘 그녀가 편지를 보낼 때에도 정성스럽게 답장했다. 비록 전보다 훨씬 불행해진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위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가까이 편지를 쓰지 않았던 샬린이 아서에게 전화를 해서는 고등학생 아들 켈의 대학 입시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샬린에게 아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아서는 당황했다. 그동안의 거짓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용기를 내어 잘못을 비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당신이 나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내가 무지막지하게 살이 쪘다는 거에요. 당신과 만나던 시절만 해도 그저 퉁퉁한 정도였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요즘 나는 때를 가리지 않고 먹고 싶은 대로 먹어요. 먹는 양을 줄여보려는 노력을 안 한 지 꽤 되었는데, 꼭 그래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죠.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아파서 누워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예닐곱 발자국만 걸으면 벌써 숨이 차고 굉장히 창피하기도 하고, 꼭 어딘가에 갇혀 있는 첼로나 값비싼 총이 된 느낌이 들기도 해요. (중략)
두 번째로 알아야 할 건, 20년 동안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뒤로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어요. 그것 말고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말이 많이 있어요. 예전 친구나 동료들 얘기는 생각나는 대로 쓴 거였어요. 학교를 그만둔 지 18년이 되었거든요.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건,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이제 나는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pp.13-4)
저만 섭식장애에 시달리고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인 줄 알았던 아서는 몰랐지만, 샬린과 아들 켈 역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샬린은 켈을 억지로 부유층 학교에 진학시키고 대학에 들어가도록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켈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운동에만 빠지자 술과 약물에 의존하며 삶을 포기한다. 켈은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못해 아버지가 좋아했던 야구에 빠져든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부유층 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부자인 친구들을 이용만 할 뿐 진정한 우정을 나누지는 않는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사실은 서로를 그리워 하면서도 아서와 샬린, 켈은 고독을 자처한다. 아서와 샬린은 집밖으로 나오지 않고, 켈은 어머니 샬린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도 나누지 않는다. 아서와 샬린은 연애는커녕 친구, 이웃과의 소통도 기피하고, 켈은 사람을 사귀되 속마음을 터놓을 만큼 깊이 사귀지는 못한다. 이렇게 비정상적이리만큼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알게 되고 보듬어나가는 과정이 소설 <무게>의 핵심 줄거리다.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짐이 되는 것,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 복잡하고 힘겨운 것, 진지하고 심각하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뜻하는 영단어 'heft'로 규정했다. 역자는 'heft'를 '무게'로 번역했으나, 정확히는 삶의 무게, 짐, 부담, 십자가, 소명 등 정신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뜻을 가진다. 소설 <무게>의 인물들 역시 저마다 큰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 아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젊은 시절의 꿈을 한 순간의 실수로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깊은 후회를 안고 있다. 샬린은 여러 번 빈민가를 탈출할 꿈을 꾸었으나 결국에는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몸부림치다 술과 약물에 빠져든다. 아들 켈만이라도 제대로 살게 해주고 싶지만 쉽지 않다. 켈은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죄책감이라는 모순된 감정 때문에 괴로워한다. 세 사람은 자신이 지고 있는 무게를 좀처럼 나눠지지 못한다. 이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짐만 지고 가기에도 바쁜 세상에서 남의 짐을 보고 그 무게와 고통을 헤아려 주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행여 남이 자신에게 더 큰 짐을 떠맡길까봐 움츠리고 등돌리는 사람이 태반이다. 아서처럼 집 안에 쳐박혀 음식을 먹는 것으로 갈증을 대신하거나, 샬린처럼 술에 의존하거나, 켈처럼 거짓된 관계를 반복하는 사람이 현실에도 많다. 다행히도 아서와 켈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자신의 짐을 같이 져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큰 용기를 얻는다. 종국에는 타인으로만 여겼던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삶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전보다 더 희망적으로 보게 되는데, 그 과정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무거운 것을 혼자 들면 그저 괴롭고 버거운 일에 불과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들면 훨씬 수월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친구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가벼운 소설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묵직한 울림이 있었고, 비정하고도 어두운 사회 이면을 그리면서도 따뜻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점이 좋았다. 아서와 켈의 시점을 교차하는 서술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관점에서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가 있었고, 나이, 관심사, 생활방식 등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샬린이라는 한 여성을 통해 연결되고 이어지는 구성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착하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이용 당하고 상처만 입었던 아서가 결국에는 샬린과 켈, 욜란다, 이웃 주민 등 수많은 만남과 인연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고 기뻤다. 자기처럼 외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가난한 여대생 샬린에게 손을 내밀었던 아서의 따뜻한 마음이 늦게나마 보답을 받은 것 같았다. 착한 사람, 화내지 않는 사람, 욕심내지 않는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오는 '해피엔딩'이 그리운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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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어느 은둔자의 고백>에서 쉰여덟의 은퇴한 대학교수인 아서는 체중 250킬로그램으로 심각하게 뚱뚱하다. 십 년이 넘도록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살고 있는 아서는 바깥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침대>에서 주인공 맬컵의 체중은 무려 600킬로그램에 달한다. 그는 20년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며 삶고 있다. 장용민의 <궁극의 아이>에서 앨리스는 삼 년 전 마지막으로 쟀을 때의 몸무게가 168킬로그램이었다. 그녀 역시 지난 몇 년간 단 한 발자국도 집 밖을 나선 적이 없다. 보행기 없이는 집안에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로, 음식이 유일한 낙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집안에서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가 되기까지 체중이 늘어나는 것을 방치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먹는 행위를 통해서만 위안을 얻게 된 계기는 뭘까. 무엇이 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자기 스스로를 내면 속으로 가둬둔 걸까. 그들이 지니고 있는 그 '무게'가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면서 버텨내야 하는 삶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걸까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겉으로는 성공한 아버지도 있고, 물려받은 재산도 있어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아서와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청소 일을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는 욜란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야구를 하고 싶어하는 켈, 돈 때문에 학업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이가 생겼으나 남편이 나가버리자 술에 빠져 살아가는 샬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는 외로운 인물들이다. 그리고 음식, 술, 야구 등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언가에 중독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삶을 버티게 하는 것이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주변에 의지가 될 아무도 없었기에 기댈 곳조차 없었던 것이다. 집 안에만 살며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던 아서는 예전 여자 친구이자 자신의 학생이었던 샬린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아들에 대한 부탁을 하자,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치우기로 하고 청소 도우미를 부르게 된다. 청소를 하러 온 어린 욜란다와의 관계를 통해서 아서는 차츰 타인을 향해 다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특히 편지를 통해 샬린과 소식을 주고 받으며 했던 ‘자신은 괜찮다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거짓말을 다시 진실에 대한 고백을 하게 되기까지의 그려지는 심리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예전에 나는 기도를 했다. 욜란다가 이 집에 온 뒤로 중단했지만, 예전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도하고 밤에 잠들기 전에 또 했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허덕이는지 상기해보곤 했다.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고, 매일 누군가는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고결한 은둔자가 되고,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처럼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고, 그러다 외로운 대령을 줄기차게 바라보며 도움을 구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사실 겉으로는 강한 척, 당당한 척 하는 이들이 알고 보면 속은 더 여린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에 일종의 보호막을 쌓아두곤 하기 때문이다. 리즈 무어는 아주 섬세하고도 꼼꼼하게 그런 부분들에 대한 심리 묘사를 탁월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자기 안에만 갇혀 있는 캐릭터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독자들을 그들의 삶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서와 켈의 이야기가 하나씩 배치되면서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만, 사실 이들 두 사람의 삶에는 전혀 교집합이 없다. 켈의 어머니인 샬린의 비중이 매우 작기 때문에 두 사람을 연결 시켜줄 만한 부분이 더욱 없어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마지막 즈음에 결국 두 사람이 만나게 될까.에 대한 것도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궁금했다. 물론 결말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앞으로 이들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결말이었다. 우리는 흔히들 뚱뚱한 사람을 게으르다고 치부하며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론적으로 그들이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하고, 운동을 피하는 등의 게으른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먹는 것을 즐기는 것만큼의 자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체질적으로 마른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꽤나 피나는 노력을 한다. 먹고 싶은 걸 참아야 하고, 먹은 만큼 칼로리를 소비하기 위해 꾸준히 운동하며, 과식을 한 다음 날은 금식을 한다거나 자기 스스로의 규칙을 가지고 관리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은 내면의 상처나 과거의 있었던 일 때문에 스스로를 그렇게 방치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물론 이걸 성급하게 일반화 시킬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겉모습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 내지는 보여지는 부분이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정도의 소박한 깨달음 정도는 얻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 프로그램에 나가 필 박사에게서 포옹과 구원의 약속과 위안이라는 축복을 받는다는, 도저히 실현 가망 없는 환상을 품고 있다. "당신은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여자들에게 말한다. "당신은 존중 받을 자격이 있어요." 이 작품의 이야기는 매우 술술, 잘 읽힌다. 그래서 삶에의 무게라던가, 각자가 짊어지는 짐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그냥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주제인 것이다. 언젠가 정신적인 영혼에 질량이 있다는 것을 실험한 사례가 있다. 질량 보존의 법칙 하에서 영혼의 무게를 측정해보겠다고 미국의 한 의사가 실험을 한 것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사망 전,후 몸무게를 정밀 측정하고 사망 시 발생하는 과학적 질량의 변화 요소를 배제하고 남은 무게가 곧 영혼의 무게일 것이다라고 믿었던 그가 내린 결론은, 죽을 때 줄어드는 질량 21g이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었다. 이걸로 영화도 만들어진 적이 있으니 아마 다들 기억할 것이다. 꼭 이런 과학적인 분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영혼에도 무게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이 오로지 수분과 지방 등의 물질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하면 어딘지 씁쓸하지 않나. 그래서 서두에 언급했던 작품 들에서, 이렇게 비정상적인 체중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이들이 물질적인 몸의 무게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무게를 살찌울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그들에게 조금 더 관심과 사랑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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