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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는 인생이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믿었다. 다이얼을 돌려서 조정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로 생긴 불확실성 또한 기대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p.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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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편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 앞세대의 노력으로 더 나은 선택의 길이 열린 후대들.
선자의 아버지는 언청이다. 이것은 유전이며 원래 좋은 혼처 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노력해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 여건을 갖췄다. 그래서 그는 그런대로 괜찮은 혼처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시대의 보통 아버지들하고 다르게 자식한테 손찌검 한 번 하지 않고 아내와 딸을 존중해주는 아버지였다. 일제강점기 보통 집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선택의 길이라는게 거의 없었을 거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먹고 살려고 애를 쓰는 삶이 있을 뿐이었을거다. 그러나 선자는 자기를 존중해주는 부모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있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가질 수 있었을 것 같다. 비록 그게 한수란 유부남한테 속아서 성관계를 갖게 된거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것은 선자가 선택한 일이었고, 어쩌면 그것이 생존하기도 버거운 선자의 삶에서 스스로 결정한 유일한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래서 선자는 극도로 한수의 도움을 거부한건지도 모른다. 아들 노아를 자기 힘으로 키우려고 한 것은 선자의 인생에서 지키고자 했던 자기의 정체성이었던 것 같다. 그걸 자식욕심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냉정히 보면 그렇다. 노아에게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노아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게 이성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뺏기고 싶지 않았을 거다. 환경에 휘둘리며 살아야만 하는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자기의 자부심이 노아였을 테니 말이다.
이 집안은 대를 내려갈수록 자식에게 조금씩 더 선택의 기회가 있는 삶을 주려고 앞세대가 노력을 해왔던 것이다.
1 한수의 도움을 받는 것. 선자가 한수의 도움을 거부하는 이유라면 첫째, 이삭에 대한 미안함. 둘째, 유부남인 것을 속였던 것에 대한 반감. 셋째,자식에 대한 애정 집착.의무감. 등이 큰 만큼,, 노아를 뺏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서.. 가장 이성적이라면 노아에게 한수가 친부라는 것을 말하고, 노아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게 맞다고 봄. 양육을 책임졌던 모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를 갈라놓을 권리는 없음.
2. 경희와 창수.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경희의 본질이 부정되는 거라는 점에 동의함. 그렇다고 요셉이 죽기만을 창수가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도 할 짓이 못됨. 따라서 창수는 요셉과 경희를 떠나서 자기 인생을 사는게 맞고, 만일 요셉이 죽는다면 그때 과부가 된 경희한테 구애해 볼 수 있을 것 같음.
3.한수가 아버지라는 것을 안 노아.
자기가 지키려고 했던 자기의 정체성이 환경에 의해 부정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을 노아는 아마도 느끼지 않았을까 싶음. 자기 삶이 부정당함. 아키코와 헤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됨. 가족과 인연을 끊고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파친코 실장으로 산 인생이 노아에게 의미가 있었을까. 파친코 실장이지만, 거의 건실한 기독교인의 삶을 산 노아. 점심 후 갖는 삼십분 남짓한 독서시간이 자기가 꿈꾸었던 자기 삶의 시간이었을 같기도 함. 어머니의 방문 후 자살. 그렇게 부정하려고 했던 자기의 출신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됐겠지. 45살에 또다시 새 인생을 살 수도 없는거고. 책의 뒷부분에서 솔로몬은 자기 삼촌인 노아에 대해 일본인이 못돼서 자살한 사람이라고 폄하하던데, 나는 일본인이 되고 안되고가 노아한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노력과 의지로 만들려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이 부정당해져 버리는게 견딜 수가 없는거라고 봄. 특히 노아같이 어찌보면 매우 고지식한 사람에게 부모와의 관계는 윤리적인 문제하고 직결되기 때문에 늪이 될 수도 있지.
4 선자 선자가 한수의제안을 받아들여 한수의 첩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경희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창수를 따라가지 않은 게 나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창수는 아마 북에서 총살당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니까. 하지만 선자의 경우라면 편하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음. 그러나 결과적으로도 좋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됨. 한수는 극도로 이기적인 인간임. 자기 마음에 안드는 짓을 했다고 대뜸 어린 접대부를 폭행해 인생을 부숴버리는 짓을 했듯이, 만일 선자가 첩질이나 하는 그저그런 여자짓을 했다면 선자도 폭행으로 몸이 망가져버렸을지도 모르고, 아들 이삭도 한수에게 뺐겼을 가능성이 높았겠지. 선자가 자기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한수가 끝까지 존중하게 된거지. 선자의 삶에서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노아의 죽음에 대해 선자가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던 것임. 물론 괴로워하기야 했겠지만, 자기의 방문 후 노아가 죽었으면, 후회와 죄책감으로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음.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게, 선자의 노아에 대한 사랑이 노아를 바라보는 사랑이 아니라는 점임. 기본적으로 선자는 노아에게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역할 놀이. 자식 소유욕 등 이기적인 사랑을 한거임. 자기의 부족한 것을 아들통해 채우려고 한거임. 아들로선 숨막히지. 노아같이 고지식한 인간에게는 특히나.
5.모자수 가장 현실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을 인물. 자기 출신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고, 세상에 분노하며 자신을 함몰시키지도 않으며, 가장 현실적으로 선을 지키며 자기 삶을 잘 꾸려간 인물임. 이삭과 선자의 아이였기 때문일까. 한수와 선자의 아이가 노아가 아니라, 모자수였다면 이런 질문은 의미없겠지. 인간이 성인이 된 후의 가치관을 갖고 아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6. 솔로몬.
양진.--선자.--노아와 모자수---솔로몬
4대의 마지막 주인공 솔로몬. 경제적으로는 매우 유복한 가정환경..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상 한계. 미국유학으로 신분의 한계를 벗어난 삶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그 역시 출신에서는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파친코를 물려받는 삶을 선택.
뿌리에서 자랐지만, 그 뿌리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그 뿌리에 잡히는....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좀 그런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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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처럼 2권에서는 등장인물 중 모자수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이후 그의 아들 솔로몬의 이야기도 꽤 차지하지만, 중간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일까. 형 노아의 이야기에 비해 확실히 많이 등장했던 것 같다. 두 달전 읽을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작가가 일부러 두 형제의 삶을 비교하려 의도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기는 했다. 물론 노아와 모자수 둘 사이의 형제애는 끈끈했지만 말이다.
파친코를 2번째 읽으면서 느낀 2권의 차이는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 외에 1권이 등장인물의 배경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면, 2권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각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되었던 부분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 왜 결국엔 '파친코'인가를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가족이지만 생각도 성격도 다른 등장인물의 특성 묘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으며 그들이 특히 노아 조차도 '파친코'를 삶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인 이유를 나는 두 달 전 읽었을 때의 생각과 달라지지는 않았다. 패망한 일본이 그들을 내 쫓을 수도 반길수도 없는 시대에 그들이 잘나가도록 돕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지만, 그들이 경멸하는 '파친코'라는 사업을 허락해 줌으로서 그들을 비난하고 자신들은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핑계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을 반기지 않는 모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그들에게 유일한 숨구멍이 아니었을까. 싸움을 하지도, 위법을 저지르지도 않지만 따가운 시선에도 늘 정정당당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그들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그들을 한 마디로 정의한 말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라는 말로 소설의 포문을 연 이유가 아닐까.
이 번 역시 그리고 1권에서 같은 부분의 내용이 읽기 힘들거나 이해가 안 되었던 것처럼 2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읽기 힘들었던 부분은 여자 등장인물들의 가치관을 표현해 주는 부분이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며 이제 생의 마감을 맞이해야 될 나이가 된 그들의 진짜 솔직한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인데, 대게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솔직한 마음들과는 정반대의 가치관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두 번째 읽는 이 번 역시 참 읽기 어려웠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 번판 2권의 끝에는 작가의 감사의 말 외에 이전 책에서처럼 해설이나 번역가의 말은 실리지 않았다. 원래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전판에서 도움을 받았기에 이번에는 어떤 해설이 실렸을까 궁금해 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같은 내용을 여러번 읽는 일이 드문 내겐 이번 소설을 읽는 시간이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등장인물에 대해 또 어떤 부분을 새로이 느끼게 될까하는 기대는 읽으면서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덕분에 몰랐던 단어도 많이 알게 되었고, 번역에 따라 느껴지는 내용의 흐름이 어떤지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젠 진짜로 드라마 시즌2에서는 이 책의 나머지 내용이 어떻게 표현을 할까 궁금해하며 기다려본다. 종교적인 부분에 대한 표현도 그렇고, 실제로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사는 이들의 이 책이나 드라마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보면 분명히 호불호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내용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특히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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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랜만에 천 쪽에 가까운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다. 디지털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책에 몰입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는 놀라운 흡입력을 가졌다. 주변에 어떤 소음이 있든, 책의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시작하든 나는 불과 십초 내에 책의 현장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총 3대의 가족이 등장하고 시간과 장소가 여러 번 전환되는 대서사인 만큼, 파친코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지면의 한계와 나의 내공 부족으로 겨우 몇 가지의 이야기만 할 수 있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먼저, 소설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얘기해보고 싶다. 작가가 이 책을 완성하는 데에는 자그마치 몇십 년이 걸렸다고 했다. 처음 잡았던 방향을 완전히 틀었고, 더 사실에 다가가기 위해 그곳에 살며 수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그래서 였을까, 소설 속 묘사는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 시대, 그 장소에 가본 적 없던 내가 책만 펴면 단 몇 십 초 내로 그곳에 있었다. 묘사 하나 하나가 생생함을 넘어서 정성스러웠다. 어떤 것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았다. 색깔, 냄새, 형상,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총동원됐고 그 순간의 분위기와 공기의 흐름까지 표현되었다. 또, 아무렇지 않은듯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이 좋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했고, 흥분하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목소리 때문에 나는 작중 인물들의 죽음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고, 더 슬펐다. 그리고 이 담담한 목소리의 이면에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더욱 몰입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려 한다. 한마디로 이민자 혹은 이방인의 삶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아픔을 겪으며 의지와 관계없이 타국에서 생을 이어간다. 저마다의 생존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 혹은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그들에게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이 그들의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 1세대로 일본에 정착한 선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한다. 가난했고 행색이 추레했으며,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부산 사투리의 말씨는 그녀가 일본 땅에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존재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직접 본 이가 아니라면 그런 이들이 살고 있다는 걸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둘 째 아들인 모자수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형 노아는 일본인이 될 수 없는, 더러운 야쿠자 조선인의 피를 물려 받았다는 운명을 바꿀 수 없음에 좌절하고 자살하지만 모자수는 바꾸려했다. (이 둘 모두 방향이 어찌 되었든 유일한 선택지가 파친코였다는 사실은 슬픔이자 아이러니다.)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으로 부유해졌지만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다른 삶을 열어주려 했다. 서양인, 일본 상류층과 서구화된 교육을 받게 하고 외국 생활을 하게 한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을까,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질 뿐이었다. 솔로몬은 이 땅에 살기 위해 지문을 등록해야 했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곳의 사람들과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 했다. 보이는 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더 무서운 법이다. 솔로몬 가족의 힘을 빌어 원하던 부동산을 손에 넣었던 일본인 가즈는 그에게 억울한 오명을 씌운 채 하루 아침에 해고해 버린다. 결국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했고,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던 솔로몬의 마지막 종착지도 파친코가 되었다.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놈 취급을 하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방인의 삶은 이런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기 위한 허락을 구해야 하는 삶. 우리는 선자와 그녀의 3대의 가족들이 살아낸 삶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도 바꿀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이민자가 되어버린 이들의 아픔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조승연 작가와의 짧은 인터뷰 영상을 보고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이방인이 아닌 삶을 사는 나에게 타국의 동포들이 인종을, 출신을 이유로 차별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낯선 사실이었다. 이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장면이기도 했다. 우리 각자의 정체성은 누가 정하는가?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미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핏줄을 받았다고 해서 미국인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이방인들의 아픔은 타인의 정체성을 함부로 규정하는, 우리의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시각에서 비롯된다. 영상 속 이민진 작가가 언급했던 'Global Citizenship'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세상 어디에도 차별이 없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의 끝에 '파친코'의 의미에 대해 떠올려 본다. 파친코는 다른 번듯한 직업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재일 교포들에게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한편으로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완전한 일본인이 되려고 했지만 자살을 택한 노아에게도, 재력으로 운명을 바꾸어보려 했던 모자수에게도, 큰아버지/아버지와 달리 부유하고 서구화된 환경에서 자란 솔로몬에게도 마지막 종착지는 늘 파친코였다. 또, 파친코는 일본인들이 재일 동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기계를 조작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게임 업장. 왠지 모르게 찝찝하고 불법이 자행될 것만 같은 의심어린 시선. 그들이 견뎌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친코는 인생이라고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다이얼을 돌려 조정할 수는 있지만 변수들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하지만 내가 행운의 주인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자꾸만 걸게 하는. 불확실성과 희망의 집합체말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나지만, 나는 이민진 작가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녀는 한국인을 애정 가득 담은 시선으로 본다. 책 속 주인공 한 명 한 명에 대한 정성스러운 묘사도, 그녀가 자이니치를 소설의 소재로 삼은 이유도, 모든 것이 그녀의 애정을 대변한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도 나는 놀라웠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자신을 이루는 한국이라는 요소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 결국 인종과 출신을 불문하고 어우러지는 세상을 추구하는 멋진 가치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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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아이들과 외식을 했다. 속이 좋지 않다는 마나님을 뒤로하고 양꼬치도 먹고, 꿔봐로우도 먹었다. 달봉이가 나온 김에 노래방에 가자고 해서 다녀왔다. 달봉이랑 별봉이는 자신들은 MZ세대라 코인 노래방에 갈 건데 가봤냐고 물어본다. "30년 전쯤 노래방 나왔을 땐 전부 코인 노래방이었어. 이런 걸 레트로나 뉴트로라고 하는 거다"라고 말해줬다.
1권을 보는데 보름이 걸렸는데, 2권을 마무리하는데 하루면 충분했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아니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하려고 했을까? 한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식들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 사랑의 결실로 열어 본 상자는 희망만 남아있는 판도라의 상자와는 다르다. 희로애락이 있고, 당연히 희망도 있고 가장 많은 것은 사랑이란 포장지에 곱게 쌓인 인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여러 번 든다.
선자는 일본에서 자식들에게 헌신하며 살아냈다. 하지만 하나의 자식은 정체성을 갈등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 곱게 자란 화초처럼 거센 찬바람에 고개를 떨구고, 또 다른 하나는 잡초처럼 살아가는 길을 택했다고 보이지만 모진 풍파를 겪고 또 살아내고 있다. 어디서나 귀한 약초처럼 크기 바라는 손자는 또 그 굴레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또 살아낼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한국인 작가라면 당연히 왜놈이란 비판이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일본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일본과 왜라는 이중적 이미지가 나에게도 남아 있다. 과거의 뛰어난 결과를 존중했지만, 이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계들이 많아지고, 시대의 변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 일본, 경제적 상황을 보면 전망이 그리 밝지도 않다. 이것이 기쁘기만 한 일도 아니다. 단지 자국에 원자폭탄을 던진나라, 망한 나라를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성장시켜 준 나라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비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그들은 그 비굴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변국에 비슷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 같다. 100년 전 생각을 갖고 사는 나라. 그러나 우리는 또 오늘의 상황을 직시하며 또 살아낼 것이다.
파친코, 빠징꼬 무엇이 맞는지 관심 없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생존수단이란 것을 이해하고 또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세상 누구도 성인군자를 입에 올리고 요구하기 쉽지만 스스로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나쁜 일을 서슴지 않는 것은 어디에서도 언제나 옳지 않을 뿐이다.
#이민진 #신승미 #소설 #파친코 #kho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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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이 소설 제목이 왜 “파친코” 인지에 대해 알게되었다. 1권에서는 그저 선자를 둘러싼 인물들이 일제에 맞서 어렵게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졌는데 2권에서는 선자의 아들인 모자수, 결국엔 노아, 또 어쩔수 없이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 까지 파친코 사업을 하게 된다. 그들의 삶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동력이 “파친코” 였던 것이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 일본에서 태어나서 조선에는 한번도 가본일이 없지만 부모가 조부모가 조선인인 이유로 일제의 강제침략 이후 미국과 소련의 임시 통치로 분단되어버린 조선에 대해 내가 남한인인지 북한인인지 선택해야만 했고 그에 따라 취급되어졌다. 일본은 당연하고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외국인일수밖에 없는 솔로몬은 미국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와 영국 투자은행에 취업하게 되지만 이용을 당하게 되고 결국엔 그들이 할수 밖에 없는 “파친코” 사업을 이어받게 된다. 참 씁쓸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사는 일본국민들도 이런 처사를 당했을까 일본으로 가면 자국민으로써 대우를 받을 수 있었겠지?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소설이었고 목차가 년도로 되어있어 그 당시 배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 1980년대 였는데.. 어렸지만 내가 살았던 시절이어서 나는 깨닫지도 못했고 의식조차 못했던 솔로몬같은 경계인의 삶이 무겁게 다가왔다. 선자의 10대에서 선자의 60대까지 천지개벽한 한국의 경제 정치적 상황이 선자의 인생에 오롯이 담겨있다. 참 묵직한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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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TV로 먼저 접하고 끊기는 바람에 소설로 완독하기로 마음먹었네요 그 이후 이야기들이 파란만장합니다. 너무나 기막힌 삶에 놀라고 안타까운 역사에 애석해하는 마음이 드네요 더이상 이야기하면 스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가 될 지 모르 지만 전개가 다소 다르니 소설을 읽으시고 드라마를 시청하여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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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작가님의 파친코 2를 읽고 쓰는 리뷰입니다. 파친코 2 표지도 너무 예뻐요. 1권에 이어 예약구매를 해서 겟! 했습니다 ㅎㅎ 파친코는 드라마에서도 그렇지만 정말 대작이잖아요. 어떤 리뷰를 보니까 파친코 내용을 해석했는데 성서를 차용하더라고요. 그만큼 해석의 여지도 열려있는 재미있는 소설인 것 같습니다. 드라마도 시즌 2를 기다리고 있는데 소설을 다봐서 너무 아쉬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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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세를 탔던 작품이라... 딱히 줄거리를 몇 자 적는것이 리뷰가 될지 모르겠다. 일제 강점기의 굶주림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선조들의 삶이 바다건너 일본과 미국으로 건너간 후 대를 잇는 후손들이 그들의 삶을 이어받아 얽히고 섥혀 뿌리를 내리고 멸시당하면서도 나름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꿎꿎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있어서는 안될 시기를 거친 우리나라의 치유되지 않는 몇 십년의 삶에 민초들이 겪어야했던 삶의 부침과 그들의 후손들이 타국에서 겪어야했던 멸시와 배척을 딛고 살아가는 한인들이 날줄, 씨줄이 만나는 것처럼 일 저리 부딪혀 만들어내는 땀내나는 삶의 흔적이 이 책에 있다 하겠다. 파친코를 하여 가게를 일으킨, 그리고 그와 얽힌 여인들의 삶... 치유보다는 그걸 넘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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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소설을 꼽으라면 단연 《파친코》가 떠오른다. 지금껏 내가 몰랐던 세상을 보여주며 세상을 한 걸음 다가가서 바라볼 수 있도록 소설로 풀어나가니 말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든 다른 매체로 접했다면 이렇게까지 임팩트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 소설이 세상과 접할 수 있는 창구이자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통로였던 셈이다. 이렇게 재일조선인, 자이니치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었으니, 이 소설이 특별하다. 게다가 몇 개월의 시차로 두 가지 버전의 책을 모두 읽어볼 수 있었던 점도 특별하다. 번역을 달리하여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니 읽는 맛도 달라졌다. 대략 알고 있는 내용에 더해 디테일한 심리묘사가 펼쳐지니 정말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이 책을 읽어나갔다.
이 책의 저자는 이민진.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다. 이 책은 신승미 번역, 인플루엔셜 출판사 책이다.
회복과 연민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 _버락 오바마(미국 전 대통령) 터전을 찾고자 애쓰는 이민자들의 희생에 관한 강력한 명상. _주노 디아스(《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작가) 역사가 의도적으로 지우려 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풍부한 헌사. _(《가디언》) 계급, 종교, 소외당한 역사와 문화 등 거대한 이슈들을 담아낸 역작. _(《내셔널북리뷰》) 계급과 문화 차이로 씨름하는 한 가족의 다채로운 태피스트리를 능숙하게 엮어낸 걸작. _전미도서상 심사평
전 세계 33개국 번역 출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뉴욕타임스》, 《USA투데이》, 아마존, BBC… '올해의 책' 2017년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 (책 뒤표지 중에서) 이 소설 《파친코》 2권은 2부와 3부로 구성된다. 2부는 모국(계속) 1939-1962, 3부는 파친코 1962-1989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권에는 노아와 모자수, 솔로몬의 이야기가 더 많이 펼쳐진다. 애환도 많고 탈도 많은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다. 요즘 노아는 일본에 사는 조선인은 더 이상 일본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면 강제로 추방될 수 있다고 모자수에게 주의를 주었다. 노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경찰을 존중해야 하고 설사 경찰이 무례하게 굴거나 잘못해도 공손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17쪽) 조선인이 일본에서 멸시받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이 소설을 읽으며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상황에서도 제각기 다른 삶의 태도를 볼 수 있었다. 노아와 모자수는 같은 형제이면서도 삶의 태도에 차이가 있었다. 막연하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건사고가 많았으니, 때로는 이렇게 소설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가려진 어느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소설이기 때문에 더 실감 나게 그 현실이 전달된다. 그들의 마음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책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 이번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노아의 이야기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니 한편으로는 분노의 마음이 일었다.
저자는 1989년에 이 이야기의 착상을 얻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90년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로스쿨에 다녔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변호사 일을 그만둔 후,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이미 1996년에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대학 시절 들은 이야기를 소설화해서 뉴욕예술재단 지원금을 받았다. 그 지원금으로 강의를 듣고 베이비시터를 구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책을 출판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재일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믿음이 통했다고 확신했다. 2007년, 남편이 도쿄의 일자리를 제안받았고, 그곳에서 일본에 사는 조선인 수십 명을 현장에서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으며, 그 이후 기존 원고를 치우고 2008년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이렇게 한 가지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쓰고 고치고 다듬고 갈아치우기를 거쳐서 최적의 상태에서 선보이기도 한다. 오랜 시간 발효되어 우러난 이야기에 시대적인 상황까지 맞아떨어져야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를 뜨겁게 울린 한 가족의 대서사극 삶의 회복력과 존엄성,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담아낸 문화와 세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고전의 탄생! (책 뒤표지 중에서) 재일조선인, 자이니치,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서, 내가 그 상황이 되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이들의 삶을 간접경험하면서 그들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이해의 폭을 넓혀보기도 했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사색의 시간이었다. 역사 속 개개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철저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이 소설이 주는 여운이 꽤나 오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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