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이윤기는 번역하는 일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그의 번역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로 그가 오래전에 우리말로 옮겼고, 이후에 몇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쳤다. <장미의 이름>은 워낙 어렵다는 얘기가 많고, 유럽 중세의 배경지식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다고 들어서 처음부터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오래전에 읽었다. 10년도 더 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그 당시 내가 책읽기 목록으로 참고하는 여러 좋아하는 지식인의 서재에 추천하는 책으로 올라있어 읽게 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머리말에 쓰여있던 것으로 기억하는 인상적인 문구가 떠오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원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쓰여있다는데, 굉장히 강렬해서 한 번 읽은 후 마음속에 새겨져 잘 떠나지 않았다. 옮긴이인 이윤기를 비롯해서 많은 문학가들이 카잔차키스를 동경하는 이유가 바로 저 문구의 정신에 깃들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바라는 것이 너무 많고, 두려움 덩어리이면서, 그래도 자유인은 되고 싶은 나에게도 그래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이윤기는 번역가이면서 소설도 종종 썼다. 나는 그를 번역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꽤 오래전 젊을 때 등단했고, 장, 단편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었으나, 독자들은 번역가로서의 그를 기억하고, 그의 글을 읽는다. 시나 소설을 쓰는 것은 문학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어쩌면 타고난 재능이 관여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평론가 신형철은 인생에 천재가 없는 것처럼 문학엔 천재가 없다고 얘기했는데, 아무리 힘써보아도 동일한 노력에 같은 수준으로 보답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은 그가 생전에 여러 곳에 기고했던 글을 모은 것인데, 그의 글쓰기의 일상과 철학이 담겨 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했기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글을 통해서 내 생각을 표현하고 대상을 설명하는 경우, 본질적 모습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할 때가 많다. 표현된 글에 갇혀서 실제 본연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세상은 연속적이나 언어는 비연속적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형철은 또 이렇게 말했다. 중언부언하는 것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언어라는 도구가 불완전할지라도 보다 정확하게 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
|
오랜만에 그의 책을 읽으니 내 안에 책 읽는 뇌가 모처럼 세로토닌이 발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읽으면서 문득문득 이윤기처럼 살면 좋겠다 싶다. 인생을 흔히 고해니 고통의 연속이니 하며 세상 못 살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꼭 그러기만 하겠는가? 인생은 유레카다. 발견에서 기쁨을 누리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것 없이 재미없어 어찌 살겠는가. 그는 책에서 자신에겐 행복한 징크스가 있다고 했다. 그는 뭔가에 관심이 생기면 꼭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과 환경이 생긴다고 했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작가와 번역가로서 어떤 책이나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 꼭 출판사로부터 그 분야에 대한 번역이나 조사를 의뢰받는다고. 원서를 정독할 절호의 기회가 생기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즐거움에 출판사에선 돈까지 준다고 하면서 '책 읽기', '책 옮기기'에 관한 한 자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는 꽤 행운아처럼 느껴진다. 이왕 행운아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생각해 보자. 그거 왠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만 같다. 그렇지 않은가? 남은 그렇게 좋은 일이 많이도 생기는데 나만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행운도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작가 이윤기는 자신이 그럴 수 있기까지는 어느 정도 떠들고 다닌다고 괄호 쳐 놓고 얘기한다. 작가의 괄호 친 말은 보통 내용과 크게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참고로 밝혀둘 때 쓰이기도 한다. 우린 바로 이런 괄호 쳐 놓고 하는 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행운이라는 것도 그냥 가만히 있는데 굴러들어 오지 않는다. 그것도 알고 보면 준비된 자에게 들어온다. 그러니 행운을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떠들어라. 그래야 행운이 알아듣고 그 사람에게로 갈지 모른다. 그런 것을 보면 난 왠지 작가가 인생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겸손하게 말해 '행복한 징크스'란 것이지 알고 보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가는데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좋게 말하면 책략가고, 나쁘게 말하면 꾀돌이라고나 할까.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야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관심 있어하는 쪽은 늘 책이었다. 그는 60년 대 초 한 출판사에서 초등생을 겨냥한 각각 100권짜리 소설 전집과 위인 전기을 읽으면서, '일찍이 나에게, 장차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그의 입말이 참 좋다.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사냐니. 그러고 보면 꽤 일찍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을 발견하고 가슴은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그리고 그건 훗날 번역으로, 신화 연구로, 소설가로 아깝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직함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지만,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기는 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와 움베르고 에코의 여러 소설 그중에서도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희랍인 조르바>의 번역은 그 말고도 몇 명의 번역자들이 더 있다. 그리고 이윤기를 포함해 대부분 영역을 번역한 것으로 아무리 번역이 뛰어날지 몰라도 중역의 오명을 피하지 못한다. 게다가 완역본도 최근에야 나왔다. 물론 난 아직 그 누구의 번역본으로도 읽지 못했지만 그 누구의 번역본을 읽는다면 이윤기 번역본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그의 번역본이 갖는 아우라가 결코 작지 않으며, 그 역시 그 소설은 자기 문학의 '성서'라고까지 했다. 그러니 이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번역본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또 그래서일까? 이윤기에게서 왠지 조르바의 느낌도 나는 듯하다.(나는 책으로는 못 읽었지만 영화로는 봤다. 영화 속 조르바 역을 맡은 앤서니 퀸은 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에서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낀다는 건 엉뚱하게도 그가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번역을 언급할 때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당연 이태리어로 글을 썼겠지만, 그는 이태리어를 번역했던 것이 아니고, 영어로 된 것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은 철학자 강유원 박사로부터 찬사와 오명을 동시에 받는다. 옛날 일제 강점기 아무리 유명한 작품도 영어나 일어를 중역으로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흉이 안 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독자들의 욕구가 높아져 중역은 웬만해선 읽지 않으려고 한다. 게다가 우린 학(學)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가. 물론 학문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에 완벽함을 기하는 거야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다가 사대주의에 갇힐 수도 있다. 그도 자칫 그럴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말하는데 무엇으로 반박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으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있으면 그건 우리가 알던 이윤기가 아니다. 그는 에코의 소설을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독과 오역으로 인한 질타 속에서도 '중세 이후 유럽의 예술가들이 그토록 다양하게 변주하던 신화에 대해, '창'을 '도끼'라고 썼다고 해서 '문화를 오역한 자'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111p)라며 반박했다. 그는 어쩌면 학적인 완벽함보다 사상의 자유로움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문득 자유인으로 살았던 조르바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일은 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우리나라는 단편이고 장편이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면 무조건 다 '소설가'라고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오직 장편을 쓰는 작가에게만 그 이름을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라이터(글 쓰는 사람 정도)만을 허락할 뿐이다. 그는 거기서 충격을 받았을까? 나중에 기어이 장편소설을 쓰고 기어코 노블 리스트가 되었다. 그건 좀 우리나라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미국만 해도 그렇게 장편을 쓰는 소설가를 대우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장편을 꺼려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스스로 소설은 죽었다고 말하는 건 바로 이런 분위기가 배면에 깔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쓰기도 전에 패배의식부터 갖게 되는 이 분위기는 언제쯤 걷히게 될지. 이윤기 작가는 그것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는다. 소설 가지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냐고 오히려 나무라는 듯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 책 곳곳에 깔려있다. 문득 답답해지거든 문학 선배로서의 그에 대한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호기심이 많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싶다. 책을 읽으면 그가 글을 쓰는지, 말을 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쉽게 쓴다. 한마디로 착착 감긴다. 그걸 두고 껍진껍진한 입말이라고 한다는데,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으로 글의 추세는 이렇게 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작가 박경덕은 생각하는 대로 글을 쓰지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쓴다는 '말글'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지식욕이 대단했다.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욕구만으로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보인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 틀어박혀 숨만 쉬고 살지 말자. 그런 욕구가 있어야 세상을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살 수 있다. 그런 욕구로 그는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오래 장수하며 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책상에 앉아 번역에 몰두하던가, 지중해 어딘가를 헤매고 다닐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꽤 된듯하다. 아직도 그의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
|
학부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나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언어의 전달불가능성이었다. 내 생각과 내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고 믿었고 그랬기에 문학에 더 많은 애정을 느꼈다. 문학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의 전달이라는, 애당초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직 언어로써만 고군분투하는 장르가 아니던가.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으며 알았다. 3년 전 고인이 된 이윤기 선생은 내가 고민했던 그 지점을 한층 더 깊게 고민한 작가였다. 그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곧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궁극적인 진리는 결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지만, 바로 그 언어를 통해 다가갈 수 있고, 한 점만을 건드리고 지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그의 40년 글쓰기 인생은 그런 언어와의 치열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첫 장을 펼치면 마주하는 문장들이 아주 반갑다. 젊은 시절의 이윤기 선생이 조르바의 입을 벌려 우리들에게 말한다.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드리지 자, 갑시다." 조르바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혀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예전에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추었던 춤이 더 잘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글쓰기와 번역, 언어 사용 등에 관한 이윤기 선생의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한국어를 쓰는 조르바에게도 원문 그대로의 자유로운 성향을 전하기 위하여 그가 번역가로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쓰는 데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렇게까지 재미있게 읽혔던 이유는 역시 번역가인 이윤기 선생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오독과 오역했던 사례 등 자신의 실패담도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다. <장미의 이름>을 번역할 때 있었던 오역 사례를 보면 그가 얼마나 뼈저리게 자기반성을 하는 작가인지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창작한 소설에서 가르치려고만 하는 태도를 보인 점에 대해서도 선생은 분명하게 자신을 비판한다.
선생은 후배 소설가, 번역가가 될 사람들에게 전하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멋지게 보이고 싶다고 제 생각을 비틀지 말라"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유행하는 언어에도 보석같은 낱말이 무수히 반짝인다" 등의 메시지는 글을 쓸 때마다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한 조언이다. 과시보다 소통이 먼저라는 그의 생각도 반드시 기억해둘 만한 말이다. 번역가들에게는 사전과의 싸움에 대해 먼저 강조하더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펄펄 살아 있는 저잣거리의 말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푹 익은 우리말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윤기 선생은 언어가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한 점을 건드리기 위해 치열하게 씨름한 위대한 작가였다. 살아 펄떡이는 말에 유난히 집착을 보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노력으로 인해 우리는 재미있는 글, 살아 있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펄쩍펄쩍 뛰는 조르바의 춤도 우리 눈앞에 생생히 재생될 정도로 그는 진실의 한 점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그의 글쓰기 철학을 읽을 수 있는 이 집필 노트를 어찌 글 잘 쓰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게도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진정 보석과도 같은 책이었다. 이 글들을 읽으며 엄청난 자극을 받았으니까. 나도 이렇게 살아 펄떡이는 말을 무리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생겼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문학 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추천사를 인용하며 이 서평을 마치고 싶다. 올해 가장 좋았던 책이 <밤이 선생이다>와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였는데 알고 보니 두 선생은 청년 시절 첫 직장에서 서로를 만나 오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황현산 선생이 말한다. "그의 상상력 안에서는 신화 속의 존재들과 동서양 역사상의 모든 영웅들, 무훈담이건 소설이건 온갖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가 생애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같은 자격으로 동일한 공간에 모여 있었으니, 그보다 더 밀도 높은 공간을 소유한 정신을 나는 끝내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
|
내게 1월달은 가장 바쁜 달이다. 1월의 절반이 꺽이고 카드값이 알차게 빠져 나간것을 확인했다. 오늘밤은 좀 쉬어야겠다. 하지만 쉰다고 딱히 할 일은 없다. 역시 죽으나 사나 책 보면서 쉬는게 제일이다. 그렇다고 무거운 주제, 머리 쓰게 하는 주제는 오늘밤 만큼은 아니다. 집 책장에 소담히 앉아있는 책을 펼쳤다. 이윤기 선생님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오랫동안 이윤기 선생님이 쓰신 글들을 "글쓰기와 문학"이라는 주제로 모았다. 이윤기 선생님 답게 번역과 언어에 대한 글들도 섞여 있다. 편히 쉬려고 뽑아든 산문집인데 읽을 수록 스트레스가 쌓인다. 자기가 아는 잘못도 남이 지적하면 기분이 나쁜것인가? 내가 글 못 쓰는 이유를 계속 지적 당한다. 문제는 소통이다. ~~~글 부리고 말 부릴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묻는다. 소통을 원하는가, 과시를 원하는가? *1 이런 책을 읽고 나서 글을 쓰려면 힘이 두 배로 든다. 읽고 나아진 점이 없어서이다. *2 도대체 [그리스인 조르바]는 언제 읽을 수 있을까? |
|
나는 여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어딘가 빈 구석이 있는, 세상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바람과 같은 사람이 좋다. 계절로 치자면 겨울과 같은 사람이다. 하여, 언젠가부터 나는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다. 낙엽이 지는 것이 아니라 여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쓰셨던 박경리 작가처럼 삶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월이 더해질수록 여백이 드러나는 삶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의 여백은 겨울의 눈밭이요, 지고지순한 '자유'의 등가어이다. 조르바가 그랬듯 인간은 곧 자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유를,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요즘 내 삶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지식의 짐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는 게 힘'이라는 젊은 시절의 구호는 나이가 들며 차츰 흐릿해진다. 즐거운 일이다.
이윤기 님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었다. 어제, 오늘 중국발 미세먼지로 한반도가 몸살을 앓는 마당에 한가하게 책 나부랭이를 붙잡고 앉아있는 것도 물색없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책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작가의 빼어난 글솜씨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것인가. 우리나라 번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이윤기 작가. 내가 작가의 글을 처음 읽었던 것은 모르긴 몰라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글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매끄럽던지 번역서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작가로 인해 행복했었다.
"'글 읽기'에 관한 한 나는 황희 정승만큼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한 행복하지 못하다. 길고 짧은 소설을 차례로 써내고 있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못하다. 나는 큰 빚을 진 사람이다. 나에게 '글 읽기'의 행복을 안겨준 많은 작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부모의 사랑을 아래로 갚듯이 이 빚은 독자에게 갚아야 한다." (p.36)
이 책이 나오기 전 나는 작가가 쓴 산문집은 모두 읽었었다. <이윤기가 건너는 강>과 <무지개와 프리즘>, <시간의 강>과 <어른의 학교> 등. 나는 그들 산문집 중에 지금은 품절이 된 <무지개와 프리즘>을 유난히 좋아했다. 못 쓰는 글이지만 리뷰도 썼었다 (http://blog.yes24.com/document/5406844).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그 책에서도 작가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작가 자신에 대해 말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일본어와 영어를 배웠다는 작가에게 번역일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책에서 모국어로서의 한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었다. 나의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읽었는데 웬걸 작가가 그동안 썼던 여러 책들에서 발췌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게 아닌가. 책에 대한 실망에 앞서 좋아하는 책도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읽지 않는, 되는 대로 설렁설렁 읽고는 쉽게 치워버리는 나의 잘못된 독서습관이 부끄러웠다. 한 권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 닳도록 사전을 뒤졌을 작가의 치밀함이 눈에 선하다.
"외국어 번역 공부, 나는 참 어렵게 했다.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많이 절망했을 뿐, 한 번도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을 많이, 그리고 오래 걸었다. 판화가 이철수는 길을 잃고 오래 걸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수도 있다고 위로하고, 시인 강연호는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격려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는 들을 때마다 슬프다." (p.116)
번역가 김석희 님도 그의 책 <번역가의 서재>에서 말하길 '지금도 일감을 앞에 두면 막막한 기분에 휩싸인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 책을 번역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변화시켜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일일 터이다. 천지개벽의 주체인 것이다. 한 편의 글을 너무도 쉽게, 낙서하듯 쓰는 나의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어제, 그제 중국발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았던 한반도는 이제 얼마쯤 제 모습을 되찾고 있다. 육신을 구제하기 위한 삶의 찌꺼기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 저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깊이 사유하지 않은 영혼의 찌꺼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병들게 할 것인가. 짧은 글이라도 허투루 쓸 게 아니다. 정성을 다하여 책을 읽고, 깊이 사유하여 쓴 글이었음에도 작가는 자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는데 나는 도통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다. 반성하며 이 글을 쓴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다. |
|
글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쓰기란 제목을 지닌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가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목차를 훑어 내고 저자를 확인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고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는 당연 읽어야 할 책으로 분류될 것이다. 번역가, 소설가, 신화전문가 이윤기가 들려주는 글쓰기의 노하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번역과 글쓰기에 대한 39편의 에세이를 통해 이윤기의 생생한 말과 글을 마주할 수 있다. 그가 쓴 소설과 번역한 작품을 접한 이라면 더욱 반갑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작품을 세 네 권 읽었고 읽지 않은 소설과 산문집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의 열혈 독자라 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신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소설에 녹여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더불어 문학, 번역, 언어에 대한 생각도 만날 수 있다. 문학에 대한 그의 글에서 단호함이 전해진다.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숨어 있다.
‘나는 문학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에다 이름을 지어 붙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에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지 ‘저 자신’ 에게 이름을 지어 붙이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학문은 나날이 쌓아야 하고, 도는 나날이 비워야 하듯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에다 지어 붙이는 이름은 나날이 늘려야 하고 ‘제 이름’ 에 붙는 이름은 나날이 지워가야 하는 것이다. 남의 얼굴 보고 이름을 지어야지 제 얼굴 보고 이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67~68쪽, <얼굴 보고 이름 짓기> 중에서)
뿐만 아니라 번역에 대해서도 그가 얼마나 단어, 문장에 본 뜻을 전하려 애썼는지 알 수 있다.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오역에 대한 사례도 들려준다. 그는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어준 책으로 『장미의 이름』을 꼽으면서 오역에 대한 부분을 솔직하게 개정판의 글을 통해 인정한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반성한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리스인 조르바’ 의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건 이런 그의 노력 덕분인 것이다. 정말 멋진 작가다.
이 책은 비단 문학이나 번역처럼 전문적인 글쓰기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이윤기의 글을 통해 우리는 말과 글을 제대로 사용하고 쓰고 있는지, 말이 지닌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지 묻기 때문이다. 속어, 비어, 줄임말을 많이 사용하는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부리는 말, 내가 부릴 말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한자나 영어를 병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극소수의 독자에게나마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필요를 느낄 때만 그렇게 한다. 하지만 한글 표기만으로도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져서 그럴 필요를 느낄 때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272~273쪽, <내가 부리는 말> 중에서)
많은 말을 하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강렬하다. 다만 그대로 전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단언컨대 이 책을 읽은 많은 이가 그의 책을 펼칠 것이다. 글을 통해 여전히 살아 있어 조르바처럼 춤추는 이윤기를 만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설레지 않는가? |
|
1. 글쓰기를 하면 사람이 솔직해 지는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 차분한 마음으로 - 하나 두울, 얘기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때의 나는 평소보다 더 깊이 - 감성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밤중의 조용한 시간이 어두운 침묵이 아닌, 깊은 고요함으로 변하듯이 말이다. 또,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과 글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자신이 바라고자 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가는게 아닐까. 변화하면서 성장하는 화단의 나무들처럼.
2. 이번에 읽은 책은 이윤기 선생님의 글들을 모은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이다. 이미 고인이 된 선생님의 글을 딸인 <이다희>씨가 편집해서 나온 책이라고 하는데, 서문에서 아버지와 얽힌 추억들에 대한 애잔함을 느낄수 있었다. 평론가 이남호 교수는 이윤기 선생의 글을 두고 "............투명하다. 그러나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봉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 자체가 스스로 맛을 풍긴다......" 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공감했던 말이었다. 지금 당장 어떠한 말로 표혀하긴 어렵지만 은은한 향처럼 풍겨오는 그 맛, 글솜씨, 그리고 품성처럼.
3. 책을 읽으면서 감탄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술술 익히는 글솜씨와 순간의 찰나에서 얻은 삶의 교훈을 들려주는 장면에서 감동과 함께 앎의 기쁨을 얻었지만, 그 교훈을 들려주는 문체에서는 선생님의 호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잠깐이었지만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맞아, 그래야지."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그런 감정이 책읽기에 부담을 주지 않았던건 솔직한 선생님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번역과 글쓰기, 책읽기와 작가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들이 선생님의 삶에 얽힌 경험담과 어울려 더 진솔하게 다가왔고, 덕분에 마치 어르신이 들려주는 예전 이야기를 듣는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
4. 선생님은 책의 곳곳에서 지나친 꾸밈, 앎을 이용한 권력욕과 과시욕, 그리고 지나친 허례, 허식과 틀에 박힌 사고를 경계하고 있다. 솔직하지 못하고, 잘쓰기 위해 꾸며쓰진 않았는지, 앎을 포장하기 위해 어려운 말로 덮어쓰진 않았는지를 말이다. 그렇게 되면 글을 통해 본인이 느끼고자 한 바와 타인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리란 말 같았다. 나 역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뜨끔했다.
5. 리뷰를 쓸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글짓기를 할 때, 한번 더 이 책을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진짜 글쓰기를 위한 거울 같은 책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경험의 재해석으로부터 탈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상상력이라는 날개가 있기는 합니다만 일상의 중력에 길들고 타성에 물든 이 상상력이라는 날개는 중력의 법칙을 벗어나는 데 너무나 무력하지요. 중력권 바깥은 어둠의 벽입니다. 상상력은 어둠의 벽 앞에서 번번이 격퇴당하고 말지요. 중력권을 탈출하자면 막강한 추진력 혹은 파괴적인 돌파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본문 중에서)
|
|
블로그에 포스팅을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그럴싸하게 표현하기 위해 미사여구를 붙이는 일들 말이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고, 지켜보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이런 느낌은 처음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느꼈던 즐거움보다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말하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글쓰기 방법 개인의 주관적인 사상이 들어가는 글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겐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자라온 배경이 다르듯이. 그래서 팬덤이라는 문화가 생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단순히 실력뿐만 아니라 내가 유독 좋아하는, 끌리는 무언가가 있을 법하니까. 그런 점에서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통해 알아본 작가 이윤기는 무척이나 고집스러우면서 매력적이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한 이윤기씨의 저서다. 소설가, 번역가, 신화전문가로 활동하는 그의 글에는 멋스러움보다는 토속적이랄까, 낮춰표현하면 상스러운 자연스러운 분위기,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춤추게 하는 듯한 느낌이 잘 묻어나온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라 읽어보게 된 책이었는데 조르바 특유의 말투, 그리고 솔직함은 여전히 남아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을 때 작가 이윤기의 글을 읽으며 내내 생각났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가로서 이윤기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표현되어 있는 작가 이윤기의 솔직함이 너무나 좋다. 좋은 번역가란 무엇일까? 좋은 소설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솔직한 속내는 그것을 답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을 좋은 번역가, 좋은 소설가라고 치켜세우는 것이 되므로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솔직함, 당당함이 부럽다. 솔직함에 대한 작가 이윤기의 이야기는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곳곳에 나와있다. 자신의 잘못된 번역을 지적하는 것에 대한 비판, 그리고 고은 작가가 노벨문학가을 받지 못했을 때의 솔직한 심정. 작가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읽는 내내 솔직함과 자유로움으로 마음을 편하게 하는 묘한 능력이 있더라. -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말하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글쓰기 방법 |
|
나는 진지한 번역가의 에세이를 즐겨 읽는 편이다. 반복적으로 읽게 되는 그런 특정 번역가들이 있다. 국내 번역가의 경우는 대개 유명하다. 이윤기, 안정효, 김욱동 같은 번역가의 글이다. 국외 번역가의 경우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유명인들도 있지만 중국 번역가 린추핑(林楚平) 선생처럼 국내 독자들에게 무척 생소한 분들이 대다수다.
내가 번역가의 글을 즐겨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와 책에 대한 뜨거운 관심 때문이다. 번역가 이다희의 말대로, "길을 따르지만 길에 갇히지 않는 말,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살아 펄떡이는 말에 대한 집착"을 이들 번역가들이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좀 유식하게 말한다면, 번역은 모국어의 '낯설게하기' 작업과 모국어의 경계확장 작업이다. 또한 "파악할 수 없는 것, 비밀스러운 것, 시적인 것"과 같은 번역 불가능한 것들을 역자의 모국어로 재창작하는 일이다. 물론 번역가의 품위를 훼손하는 엉터리 삼류 번역가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삼류 번역가는 번역기 프로그램에 의존하거나 초벌번역자들을 착취한다.
독일의 문예비평가 벤야민은 「번역자의 과제」(1923)라는 글에서 번역가의 과제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먼저 번역을 통해 역자의 모국어를 원전의 언어를 향해 확장하고 창조적으로 변형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원작의 의미 속에 숨어 있는 '순수언어'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진리의 언어를 드러내는 것이 번역자의 궁극적인 과제이다.
■이윤기 선생의 글쓰기 레시피 맛보기
멋있게 보이고 싶다고 제 생각을 비틀지 마라
|
|
이윤기의 집필 노트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바깥 날씨는 코끝을 쨍하게 하는 시린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데, 지금, 여기. 이윤기의 책[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고 있는 방 안은 난데없는 열공 모드로 후끈하다. 어려운 말 하나 없고, 오히려 신선하고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단어들만이 가득한 이 책을 읽는데도 나는 왜 이렇게 열이 나는가. 자칭 조르바 같은 자유인이라 일컫는데도, 어투에서 묻어나는 연륜 때문인지, 나이 지긋한 선생님을 앞에 모셔두고 그 분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있는 듯한 마음이 들어서이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건만 괜시리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 같고, 헛기침 조차도 조심스럽게 숨죽여 해야 할 것만 같은 무게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무도 없이, 단 둘만의 독대. 따뜻한 차 한 잔만을 두 손에 모아 쥐고 한 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이느라 귓불이 붉어지고 열기가 차 오른다. 각기 다른 시각에 쓴 글들이 모여 있어도 그의 말은 하나다. “글쓰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 소설가, 번역가, 신화 전문가. 책에서는 이윤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가로 이윤기를 처음 접했었다. 너무나도 유명하여 안 읽은 이가 없을 것 같던 그 책<그리스인 조르바>를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끝내 외면하고 있었는데, ‘읽어야 해, 조르바를 모르고 이생을 살아나가기는 틀린 것 같지 않아?’ 라는 마음 속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조르바를 집어 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왜 이 책을 안 읽고 있었던 거냐? 라고 물었을 때, 그 이유는 아마도 <희랍인 조르바>로 번역되었던 책의 제목 때문에 내 마음 속에 거부감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참으로 고지식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희랍인”이라는 말 하나가 손톱 옆에 자리한 거스러미처럼 신경에 거슬려서 백 마디의 찬사로도 모자랄 고전을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읽게 되었다는 것이 나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지만...그랬다. 제목의 번역 때문에 책을 집어 들기 조차도 싫었던 것이다. <희랍인 조르바>는 안되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되고. 죽을 때까지 조르바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이윤기가 내 마음의 장벽을 스르륵 벗겨내었던 것이다. “희랍인”을 “그리스인”으로 바꾼 것은 그야말로 내게는 작은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제목 하나로도 책을 만날 수 있게도 없게도 하는 번역가의 힘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임을 이윤기를 통해 알게 되었었다. 둘이서 벌인 사업이 거덜난 날 우리는 해변에 마주 앉았다. 조르바는 숨이 막혔던지 벌떡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는 중력에 저항이라도 하는 듯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되살려내고 싶었던 자유인의 모습이 이윤기의 번역을 거쳐 내 앞에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133 그 뒤에는, 어머나! 번역가로 알고 있던 이윤기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펴냈더랬다. 궁금한 마음에 혹은 아는 이름에 반가워서 덥석 그의 책을 사보았다. 중학생 때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단숨에 읽어 제끼며 그 길었던 이름들과 헷갈리는 그리스식, 로마식 이름들을 따로따로 구분하며 외느라 힘들었었지만, 신화의 황홀함은 그 번거로움까지도 달콤하게 만들었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한 권으로 축약해서 읽었던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 좀 더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실제 답사로 담아낸 사진들이 크게 한몫했고,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이윤기의 입말이 신들을 가까이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강조하는 껍진껍진한 입말 그대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영어판을 중역한 것인데, 철학자 강유원 박사로부터 오역을 260여 군데 지적받고 바르게 손보았다 한다. 번역자로서 아픈 지적이었을 텐데도 오독과 오역을 번역가의 숙명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를 견지했던 이윤기. 그는 글쓰기에 있어서 실패를 축하하고 거기에 더해 바닥을 박박 기어보라고 조언한다. ‘메덴 아간’이라는 그리스어를 ‘만사에 지나침이 없게 하라’라고 번역하는 데 그치지 말고 ‘과유불급’이라는 잘 익은 우리말로 옮기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문학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인생이 그렇게 풀려서 글을 썼으나, 그는 이렇게 자조한다. 나에게 이 세상 삶의 현상은 거대한 원어 텍스트, 내가 부리는 언어는 ‘원어를 고스란히 재생새킬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역어’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선조적 언어로써 원에 가까운 원융한 진리의 세계를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단지 한 점만을 건드리고 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25 나는 기껏해야 이윤기의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 로마 신화>,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 뿐이라 이윤기를 뭐라 평가할 수가 없다. 그저 내가 읽은 텍스트 안에서 그를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언어 천재라 불리는 그의 집필 노트를 읽고 나니, 참으로 대단한 작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평생 자신의 언어를 부리며 살아가야 하는 글쓰는 이, 작가들에게 영혼과 글쓰기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글쟁이라 일컬을 만하다. 책을 읽고 그저 줄거리를 나열하거나 짤막한 감상만을 곁들이며 글을 완성할 뿐인 나의 서평은 이제 걸음마인데, 넓은 세계를 안으로 들이기 위해 번역에 힘쓰면서 올바른 번역의 방법을 모색하고 거기에 철학까지를 더하려고 했던 이윤기는 글쓰기의 전범, 달인, 고수를 뛰어넘어서 이제는 “신”이 되고 말았다. 뛰어넘을 수 없는 산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상에 발붙이지 않고 있어서 우리는 그가 남긴 집필 노트를 바라보며 배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이윤기는 자유인 조르바를 꿈꾸며 펄떡이는 말에 집착했다. 나도 따지고 보면 무작정 책 속으로 파고들어 달래기만 하려고 했던 내 마음 속의 울분을 터뜨리고 싶어서 서평을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쓰다 보면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그것들을 조금씩 다스리고 단련시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넘어지고 깨지면서, 마침내는 바닥을 기어 봐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이윤기의 충고가 그 길고도 길게 이어질 것 같은 단련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내 마음에 반창고가 되어줄 것 같다. 정적에 휩싸인 채 숨죽여 듣던 일대일의 수업이 끝나자 내 마음엔 반창고 하나가 남았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이제야 제대로 귀에 들린다. 휘잉~ 휘이잉~.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바람이지만 나는 아무 것도 무섭지 않다. 귀한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저절로 뿌듯한 탓이다. 따뜻했던 차는 애저녁에 식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긴장하면 솟아나는 땀 때문에 땀을 닦아내기를 여러 번. 방 안은 따뜻했는데도 손끝은 차다. 다시 보글보글 물을 끓여 차 맛을 음미하고 손을 데워야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