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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 리처드 플래너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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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억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잊을 수 없도록 선명했던 현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각색되어지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기억이 윤색되어져야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고통의 순간이 매번 현실처럼 생생하게 회상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일본에는 죽음을 앞둔 시인이 마지막으로 시를 짓는 모습을 공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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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억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잊을 수 없도록 선명했던 현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각색되어지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기억이 윤색되어져야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고통의 순간이 매번 현실처럼 생생하게 회상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일본에는 죽음을 앞둔 시인이 마지막으로 시를 짓는 모습을 공개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그 시들을 모아 임종시로 묶어낸 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읽는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전통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이 18세기 하이쿠 시인인 시스이가 임종시로 남겼다는 동그라미 하나를 의미 깊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동그라미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났다. 삶이 시작되어야 비로소 죽음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책 속에는 일본의 하이쿠와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들이 중요한 모티브 역할을 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외진 섬에서 나고 자란 도리고 에번스는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좀 더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으로 남들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는 자신의 삶에 조금은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는 더 어두운 구석으로 그를 몰고 갔다. 평생 그를 힘겹게 만들 기억이 될 일본군 포로가 된 것이다. 세계 2차대전 때의 일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일본군 포로의 삶은 죽음과 똑같은 무게였다. 버마의 정글에서 별다른 장비도 없이 철도를 만드는 노역에 투입된 포로의 삶은 비참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비참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비참이  정직하게 그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제사(題詞)는 파울 첼란의 "어머니,그들은 시를 써요."다.  일본인들의 이중성과 저열함을 고발하는데 이 구절만큼 적합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공감했다.

 

일본군은 포로들을 하나의 도구로 보았다. 망가지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되는 부속품이었다. 그래서 포로들이 끊임없이 죽어야 했다. 맨손으로 만든 선로 곁에는 죽은 포로들의 뼈와 가죽이 함께 있었다. 의사며 장교였던 도리고 에번스는 원하지 않았지만 천 명 포로의 리더가 되었다. 아침마다 일터로 나가야 하는 사람의 숫자를 맞추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의사로서 애써 살려놓았던 환자들은 일터로 나가면서 죽었다. 자신이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었다는 사실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 시간을 밟고 그보다 조금 강한 사람들이 조금 더 살았다.

 

철도건설현장은 일본군의 저열함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사람 목숨을 그 어떤 사물보다 더 하찮게 여겼던 나까무라 소령과 고타 대령이 전후까지 살아남아서 삶에 아첨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딱했다. 자결하지 않고 포로가 된 이들을 그토록 멸시했던 일본군인들이 이름을 바꿔가며 숨어살다가 세월이 지나자 전쟁의 향수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인간 속에서 괴물을 봐야하는 고통이었다.

 

우리의 삶은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동그라미다. 그 동그라미의 크기를 만드는 것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 일 것이다. 그 걸음을 옮기는 동안 우리는 친구와 연인을 만나고 사랑의 의미를 찾으며 희로애락의 시간을 보낸다. 마침내 희로애락의 시간이 잠 속에서 걸러지고 잊혀지면서 마지막 발자국을 뗄 때가 돼야 이 땅에 온 것이 어차피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제 대부분 자신이 온 곳으로 떠났다. 그들이 잊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작가는 책을 쓰고, 독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붙잡는다.

 

모임 자리에서 남자들은 군대이야기, 여자들은 산통을 즐겨 주제로 삼는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고통은 무뎌지고 조금씩 떨어져나가 마침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장 단단한 청춘의 기억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남았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전쟁도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라서 군대에 가야하고,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버마의 정글에서 철로를 만들기 위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던 그런 군대는 사라져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이 아픈 기억을 여러 갈래로 끌고 와서 마침내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잊기 힘든 기억을 가지게 된 나는 1940년대 버마 정글에서 벌어진 고통에 대해 한동안 떠들고 다닐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이 이야기는 잊게 되겠지만 기억의 어느 곳에는 이미 각인되어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때때로 삶이 아프다는 것을 느낄 것 같아 마음 무겁게 읽은 책이다.

t******e 2018.01.29. 신고 공감 16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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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받지 못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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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상상도 못할만큼 잔혹한 방법으로 엄청난 인명을 학살하고, 학대하고, 억압한 대가로 핵심 세력들이 전쟁에 패한 후에도, 그 땐 그것이 선의였다고 천황을 위해 확장하고 뻗어나가 세계를 재패하게 될 천황과 제국을 위해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여전히 믿으며, 편안한 일상 속에서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 이웃에 봉사하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조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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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죄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상상도 못할만큼 잔혹한 방법으로 엄청난 인명을 학살하고, 학대하고, 억압한 대가로 핵심 세력들이 전쟁에 패한 후에도, 그 땐 그것이 선의였다고 천황을 위해 확장하고 뻗어나가 세계를 재패하게 될 천황과 제국을 위해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여전히 믿으며, 편안한 일상 속에서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 이웃에 봉사하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사과도 없이, 전범 재판조차도 없이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그 전범집단을 단죄하지 않고 사회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단죄되지 못한 역사, 뉘우치지 못한 역사,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없는 역사는 그 역사의 고통과 책임을 여전히 피해자와 역시 피해자에 불과했던 권위에 복종했던 약자의 말단에게 전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비현실적인 치명적 사랑과 비현실적인 포로 수용소의 강제 노역. 가슴 밑바닥 그 섬세한 잔뿌리까지 치밀한 언어로 직조한 위험한 사랑과,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의 극한을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선명한 UHD 화질로 나노 마이크로 단위까지 카메라를 들이대고 내보내는 다큐같은 포로 생활. 이 절대로 타협 불가능한 두 이야기가 현재와 과거, 과거 속의 미래, 과거 속의 과거, 많은 등장 인물들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쏟아낸다.

개인의 생각과 의지가 모두 박탈된 채로 전체 속 이름없는 부품이 되어 바닥까지 드러난 에너지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쥐어짜는 혹독한 노동의 끝에 비참한 죽음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했을까. 일본이 한 짓은 평범한 우리와 다름없는 유전자의 조합을 가진 인간이 한 짓이지 동물이나 외계인이 한 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토록 충실히,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잔혹한 만행을 우주적 선의로 믿으며 전장 속을 누비고 전후에는 자상한 부모 봉사하는 시민으로서의 선의를 베풀며 살아가는 나카무라의 계속되는 삶과 사고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 단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폐허를 일구며 후대와 섟일때 스며드는 가치관을 주목한다. 반성하지 않은 전범들의 계속되는 삶을 끄트머리까지 집요하게 쫒아가 꾸역꾸역 마지막 조명을 비춘다.

작가가 원한건 그 끔찍했던 기억의 리얼리티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계속 그러니까 역사이기 때문이다. 버마 철도 건설에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 이야기로 끝맺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전쟁이 처리되는 침략국과 자본주의의 밀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국으로 포장된 전체주의와 왜곡된 역사책을 통해 후대에 그들만의 선의가 차곡차곡 계승되고 있음을. 그리하여 기억해야한다.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았기에 진정으로 단죄받지 않았기에 아직 끝나지 않은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그들을 대신하여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그렇게 죽는 이유를 오로지 그나마 받지도 못한 50엔 말고는 떠올릴 수 없었던 조선인 경비병들의 외로운 죽음을.

도리고는 죽음이 일상화된 곳에서 만연된 죽음을 유예시키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매일매일 영양 실조와 콜레라와 구타와 강제노역으로 죽어가는 포로들을 목격하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마지막까지 살리려고 애쓴다. 어차피 몇일 후면 죽을 사람들 한 둘이 더 먼저 죽거나 더 나중에 죽거나 큰 차이가 있을것 같지 않지만 그렇게 버티고 버텨 살아난 사람들이 전쟁의 끝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 뒤돌아보면 ‘장하다 살아남아줘서’지만 당시 전세는 기울었을 테고 연합군이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을테니 혹독한 노동과 짐승보다 못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할 희망을 붙드는 이유가 찾아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유보다 더 많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어긋나서 비껴간 사랑이 있다. 전쟁이 가져다 주었고 전쟁이 갈라 놓은 사랑. 헤어지지 않고 이어졌더라면 일상과 권태와 자잘한 의견 충돌로 얼만큼은 희석되고 또 얼만큼은 분해되고 증발해가고 말았을지도 모를 그 알 수 없는 감정 사랑이 그토록 평생을 잊지못하고 그리워만 하면서 실체없이 마음을 차지했던 이유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이 비껴가면 그 비껴간 간극의 아슬아슬함 만큼이나 남은 평생동안 부풀어간다. 환상으로 물을주고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 영양을 공급하여 크고 든든한 나무로 가슴속에 뿌리박은 그 비껴간 사랑은 다른 이에 대한 또 다른 맹세와 약속을 배신하고 속임으로서 잉태된 것이기에 독자들에게조차 온전하게 지지받을 수 없는 불길한 사랑이다. 하지만 응어리의 씨앗 배속에서 칼날이 휘젓고 찌르는 느낌의 실체를 알고 났을 때 그리고 남편과의 한세대가 넘는 나이차를 알게 되었을 때에야 에이미의 간통 역시 단순한 욕망과 육욕에의 갈증 만이 아닌 폭력적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가늠하고 마음 아팠다.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라는 한 미국 유명인의 인용이 뒷표지에서 눈에 띈다.각기 다른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 세상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꼬이고 얽히는 대신 사랑 파트는 도리고와 에이미의 불륜에 따르는 치명적 감각의 묘사가 주를 이루고 피와 살이 튀고 사지가 절단되고 창자와 장기들이 널부러져 나오는 전쟁 대신 전쟁 파트는 전쟁만큼이나 끔직한 수용소 실상을 묘사한다. 그토록 무고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를 그때도 찾지 못했고 지금도 찾지 못했다. 프랑스도 일본도 나폴레옹도 천왕도..


g******1 2018.02.18. 신고 공감 12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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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을 갈망하는 것!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을 갈망하는 것!" 내용보기
평생동안 오래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고통인 것도 없다. 전쟁을 겪여본 세대는 아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글로 만나보고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었던게 사실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고통을 안겼다. 그 기억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풀어내지만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들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전쟁은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상처의 흔적때문에 괴로워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삶을 갈망하는 것!" 내용보기

평생동안 오래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고통인 것도 없다. 전쟁을 겪여본 세대는 아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글로 만나보고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었던게 사실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고통을 안겼다. 그 기억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풀어내지만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들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전쟁은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고 상처의 흔적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또하나의 전쟁의 기억을 나타내는 글을 만났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포로로 일본의 타이 미얀마 간 철로를 건설했던 곳에 있었던 군의관 도리고 에번스. 그의 현재와 과거의 기억들 속에서 우리는 또다른 전쟁을 경험한다. 도리고에게는 교사인 약혼녀 엘라가 있다.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때 형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고모가 죽었지만 고모부와 연락하고 지낸다며 그를 한번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 고모부인 키스 멀베이니를 찾아 간 곳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언젠가 서점에서 빨간 동백꽃을 꽂고 있었던 여자였다. 서점에 있었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었던 여자가 키스의 아내 에이미였다.

 

도리고는 에이미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키스가 말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에이미와의 사랑은 그의 나머지 모든 삶을 관통한다. 엘라와 결혼해 있으면서도 많은 여자를 만나 외도를 습관처럼 하게 되었다.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전쟁 시기에 만났던 에이미의 흔적을 찾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여러모로 성공한 현재의 위치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치명적인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그는 과거를 자꾸 생각해봤자 더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엄청난 슬픔을 느꼈다. 어떤 몸짓, 냄새, 미소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그것을 데스마스크처럼 고정된 틀에 넣고 굳히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 마스크는 그가 손을 대자마자 다시 먼지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488페이지)

 

소설은 도리고 에반스의 기억만 좇아가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포로들을 시켜 철로를 건설했던 일본군 나카무라와 조선인으로서 경비병으로 근무했던 최상민의 시선도 바라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난후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던 명단에 이름이 적혀져 있었지만 다른 방법으로 승승장구하며 살았던 나카무라의 모습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는 자들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반면 조선인 최상민의 독백은 나라없는 자의 설움을 엿보게 한다. 그저 돈을 주겠다고 해서 경비병에 지원해 전쟁 포로들을 감시해왔던 그들. 재판에서 사형을 당하는 날까지 자기가 받지 못한 50엔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오래전 서울 대한극장에서 상영했던 영화 「마루타」가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일본이 자행한 생체실험에 참여했던 한 의사의 독백 부분이었다. 이들은 죽지 않은 대상을 해부하면 중요한 과학적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며 살아있는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해부를 자행했다. 의사이기때문에 그의 말을 듣고 스스로 해부대위에 누웠다는 한 군인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전적을 이야기하듯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 의사의 독백이나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던 나카무라의 부하 도모카와의 말 한 마디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결국 남은 것이라고는 더위와 비구름, 벌레와 새와 동물과 식물밖에 없었다. 그들은 과거를 알지도 못하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인간은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은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자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름이 구름답게, 대나무가 대나무답게 사는 것. (375페이지)

 

과거를 잊기 위해 애써왔지만 과거의 기억속에서 살아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전쟁이 가진 고통, 상처의 흔적들. 아무 희망도 없는 곳에서 희망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읊었던 하이쿠의 문장들은 이 소설의 백미다. 잔혹한 전쟁을 시 구절로 다르게 볼 수 있고, 시 구절로 인해 우리는 벗어나고 싶은 자들의 강한 목소리를 듣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전쟁은 삶의 또다른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게 다시는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잔혹함일지라도.

YES마니아 : 플래티넘 h*****9 2018.02.14. 신고 공감 12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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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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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문학동네/2018.1.5.sanbaram   도리고 에번스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려운 환경에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의과대학을 졸업한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 가까운 곳에 사는 고모부를 찾아갔다가 새로 결혼한 고모부 부인 에이미를 만난다. 그녀는 도리고가 책방에서 인상 깊게 만난 여자다. 결국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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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문학동네/2018.1.5.

sanbaram

 

도리고 에번스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려운 환경에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의과대학을 졸업한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을 때 가까운 곳에 사는 고모부를 찾아갔다가 새로 결혼한 고모부 부인 에이미를 만난다. 그녀는 도리고가 책방에서 인상 깊게 만난 여자다. 결국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에이미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다 오스트레일이라 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일본군 포로가 된다. 일본군은 타이의 밀림지대에 버마로 가는 철로를 건설하기 위해 연합군 포로를 공사현장에 투입한다.

 

열대우림 철로 건설에 투입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은 보급품이 원활하지 않아 겨우 생명을 유지하며 노예처럼 강제 노역에 시달린다. 기후 관계로 콜레라, 이질, 말라리아 등의 질병과 열악한 환경에 의한 피부병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일본군의 폭행으로 목숨을 잃는 포로가 속출한다. 천황폐하의 명령을 빙자한 철로의 조기완공을 위한 일본군의 폭력과 이를 보좌하는 조선인과 대만인 경비병,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 간의 신경전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또한 여러 가지 질병과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도리고 에반스는 의약품이나 위생용품이 없어 조악한 수술도구를 자체 제작하여 썩어가는 살을 도려내며, 질병으로 죽은 포로들의 화장까지 해가며 포로들의 큰형님 역할을 한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게 된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은 전범 재판에 일본인들을 회부하지만, 정작 우두머리인 고타 대령은 무죄로 석방되고 나카무라 소령은 도피 했다. 그러나 경비병인 조선인 최상민은 오스트레일리아 이름 고아나로 전범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숨어 지내던 나카무라는 만주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생체 실험에 참여한 사토 카메야라를 만나기도 한다. 고타 대령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어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다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죽는다. 고타대령은 회사의 사옥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그동안 자식들은 아버지의 연금 수령을 위해 사망사실도 확인하지 않았었다. 한편 포로 생활 중에 함께했던 병사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생활하면서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지만 포로생활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각자의 생을 마감한다.

 

한편 도리고 에번스는 전쟁 영웅이 되어 유명 인사가 된다. 포로 생활 중 기다리던 약혼녀 엘라와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지만 외도가 심했다. 이 여자 저 여자와 섹스를 나누면서도 항상 죽었다는 에이미를 생각한다. 가족과 여행을 하기로 한날 형의 심장마비로 시드니에 들렸다가 하버브리지에서 에이미를 보지만 아는 체를 하지 못한다. 자식들에게도 관심이 없던 에번스는 처형네 집에 갔다가 산불에 갇힌 식구들을 구사일생으로 구하지만 거기 까지다. 그리고 그는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돌아오지 못한 채 포로 수용소에서 만났던 병사들을 만나는 꿈을 꾼다.

 

“19431025일 증기기관차 C5631호가 일본인과 타이인 귀빈들이 탄 삼량 열차를 매달고 완성된 죽음의 철로를 처음으로 달렸을 때, 그 바퀴 밑에는 공사 중에 스러진 사람들의 뼈가 한없이 깔려 있었고, 그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인 구천 명중 삼분의 일의 유해도 포함 되어 있었다.(p.41)” 현재 증기기관차 C5631호는 일본의 비공식적인 전쟁기념관인 도쿄의 야스쿠니신사에 자랑스레 전시되어 있다. 이 신사에는 증기기관차 C5631호 외에 봉안자 명단도 보관되어 있다. 1867년부터 1951년 사이 일본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백만 명 이상의 명단이다. 이 신성한 신사에 봉안되는 것은 모두 사악한 행동을 면죄 받는다는 뜻이다.

 

다키가 균형을 잡자마자 세 경비병이 다시 대나무 작대기와 곡괭이 자루를 들고 달려들어 그가 쓰러질 때가지 매질을 했다. 이렇게 해서 매질을 하다가 다키가 쓰러지면 발길질을 한 뒤 그를 질질 끌어 일으켜 세우고 다시 매질을 하는 과정이 반복되기 시작했다.(p.364)” 그는 그날 밤 늦게 발견되었다. 변소에서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둥둥 떠 있었다. 비가 휘저어 놓은 똥이 가득한 길고 깊은 참호가 바로 그들의 공동변소였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포로를 노예 취급하며 죽이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그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되어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법정에서 신문당할 때 최상민은 조선인 부사관인 자신이 포로의 살해를 지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설명하려고 애썼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인 변호사들은 고타 대령이라는 일본인 장교의 조사 내용을 근거로 그가 지시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고타의 진술 때문에 벌써 조선인과 대만인 경비병 여러 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 최상민은 또한 고타 대령이 나중에 무혐의로 석방되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최상민은 쿠니를 처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그 시점에 쿠니는 이미 캠프 안에 없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뒤죽박죽 뒤섞이고 불완전한 캠프 기록은 그의 말을 뒷받침해주지 못했다.(p.394)” 열다섯 살 때 최상민은 일본인들이 제국 내의 다른 지역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일할 사람들을 뽑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봉급은 매달 50엔이었다. 열세 살이던 여동생은 일본인들에게 비슷한 돈을 받고 정신대가 되어 만주국으로 갔다. 병원에서 병사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될 거라며 몹시 기뻐했다. 동생은 글을 전혀 몰랐으므로, 그는 그 뒤로 동생의 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와 동생은 죽을 때까지 일한 품삯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한을 안고 죽었다. 부자 나라가 된 일본은 아직도 그 문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죄수들에게 생물학 무기를 시험하는 일, 탄저균, 가래톳페스트, 그렇게 들었어요. 죄수들에게 화염방사기와 수류탄도 시험했다더군요. 최고위급의 지원을 받은 대규모 작전이었습니다. 지금 나이토 씨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에요. 왜냐고요? 우리 정부도 미국도 과거를 파헤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요. 미국은 우리의 생물학적인 연구에 관심이 있습니다.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우리는 그런 무기들을 중국인에게 시험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걸 조선인에게 쓰고 싶어해요.(p.437)” 교수형을 당하는 건 운이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뿐이라고 말하는 사토 카메야라는 미국은 이제 일본과 거래를 원한다고 한다. 우리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나카무라가 말했다. 정말 후안무치한 인간들이다.

 

지금은 죽었지만 살아 있는 부처가 되려 했다는 이 노인의 침대 옆 탁자에는 바쇼의 위대한 기행문인 오쿠로 가는 좁은 길한 권이 놓여 있었다. 하시모토는 그 낡은 책을 들어 마른 풀잎으로 표시된 페이지를 펼쳤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은 영원의 여행자들이다. /그는 책 속의 구절을 읽었다. /흘러가는 한 해 한 해도 그렇다.(p.444)” 살아 있는 부처가 되고 싶었던 고타 대령이 습관처럼 외우던 하이쿠의 출처인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을 그는 저승의 길동무로 삼았다. 전쟁 중에 그가 죽인 이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도리고 에번스는 새벽 세시에 파라마타의 교차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시각과 장소, 그리고 그의 음주측정검사 결과는 나중에 결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공중을 날고 있음을 깨달았다.(p.528)” 방탕한 생활을 하던 도리고 에반스의 삶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사고를 낸 차는 주정뱅이 청년들이 훔친 차였고, 이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쟁영웅이 중상을 입었다고 발표되어 국민의 애도를 받게 된다. 이렇듯 전쟁은 현실을 왜곡하고 많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고 끝났다. 힘 있는 자는 살아남게 되고 없는 자는 고통 속에서 살다 생을 마무리 하는 부조리를 고발하는 소설이다. 지금도 여전히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세계 곳곳에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저자 리처드 플래너건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 우스터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어떤 강 안내인의 죽음>, <한 손으로 치는 손뼉 소리와 영연방 작가상을 받은 굴드의 물고기를 영혼의 역사 이야기라 한다. <미지의 테러리스트>, <원하다>, <탈출노트>, <퍼스트퍼슨등의 소설이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2014년 맨부커상과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문학상을 수상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17세기 바쇼의 하이쿠 기행문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문판 제목을 딴 것으로, 작가는 실제로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포로였던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쳤다.

 

이달의 사락 k******4 2018.02.12. 신고 공감 12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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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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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구매했다. <저자는> 저 : 리처드 플래너건 ---발췌하다Richard Flanagan1961년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주 출생. 영국 옥스퍼드 대학 우스터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세계의 큰 테마는 자신의 고향과 역사에 대한 기억으로, 그는 42개국 이상에 소개된 동시대 최고의 호주 작가로 손꼽힌다. 한 뱃길잡이의 삶과 가족사 이야기를 다룬 첫 소설 『어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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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구매했다.

 

<저자는>

 저 : 리처드 플래너건 ---발췌하다

Richard Flanagan 1961년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주 출생. 영국 옥스퍼드 대학 우스터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세계의 큰 테마는 자신의 고향과 역사에 대한 기억으로, 그는 42개국 이상에 소개된 동시대 최고의 호주 작가로 손꼽힌다. 한 뱃길잡이의 삶과 가족사 이야기를 다룬 첫 소설 『어떤 강 안내인의 죽음Death of a River Guide』(1994)과 자국에서만 15만 부 이상이 나간 슬로베니아 이민자들 이야기 『한 손으로 치는 손뼉 소리The Sound of One Hand Clapping』(1997)를 발표해,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수작들이 나왔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두 초기작에, 앨리스 먼로와 이언 매큐언을 제치고 2002년 영연방 작가상을 수상한 『굴드의 물고기 책Gould’s Book of Fish』(2001)을 보태어, 작가는 ‘영혼의 역사’ 이야기로 요약한다. 이후 9.11 테러와 그 이후를 다룬 『미지의 테러리스트The Unknown Terrorist』(2006), 영국 탐험가 존 프랭클린 집안에 입양된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 소녀 이야기와 소설가 찰스 디킨스 이야기가 나란히 펼쳐지는 『원하다Wanting』(2008) 등의 장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하는 한편, 배즈 루어먼 감독의 영화 <오스트레일리아> 제작에 참여하며 각본가로도 활약했다. 2013년 이 책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로 다시 한번 비평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플래너건은 2014년 맨부커상과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시리아 난민에 대한 논픽션 『탈출 노트Notes on an Exodus』(2015)와 장편소설 『퍼스트 퍼슨First Person』(2017) 등이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17세기 바쇼의 하이쿠 기행문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문판 제목을 딴 것으로, 작가는 실제로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포로였던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쳤다

<책읽고 느낀 바>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수상하며 이 상은 더 관심을 받았다. 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이 책은 544페이지만 800여 페이지를 읽은 것처럼 힘들었다. 12년간의 집필에 매달려 완성한 5개의 판본 중 최종판이었다는 건 책을 읽고서 알았다. 많은 찬사 글귀들 중 리처드 플래너건은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를 썼다! /앨런 츄스(미국공영라디오방송 해설가, 작가)의 글이 와 닿은 것도 이 때문이리라.

 

  몇 년 전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었었다. 책취향은 달라서 이 책을 높이 사는 이도 있으나 나는 읽었다는 것에 의미를 뒀었다. 다만 살아오는 동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기억은 틀릴 수도, 윤색될 수도, 생각하고 싶은 대로 각인되어 기억할 수도 있음을 말이다. 정치인들이 말을 바꾼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순전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를 읽고서다.

 

  사람은 망각이 있어서 산다고 했다. 잊지 않으려해도 대개는 잊히기에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다. 트라우마를 정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술도 있다. 기억하려해도 잊히는 것처럼 잊지 않으려해도 잊히는 것들도 있었다. 생지옥이자 아수라장이 따로 없는 정글의 전쟁은 싸움이었다. 적과의 싸움이 아닌 정글에 철도를 만드는 작업. 라인 건설을 위해 투입된 전쟁 포로들의 이야기는 외과의 도리고 에반스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다는 건 살아있음이라. 주어진 명령만이 있는 곳. 기계같은 움직임만 있고 할당량을 채워야만 휴식이 주어지는 곳.  챙이 넓은 모자와 생식기 부분만 가릴 수 있는 천조각이 옷의 전부인 포로들. 그들이 위치한 밀림은 대나무가 빽빽하고 야생의 살아있는 것들은 포로들을 괴롭히는 것들이었다. 끔찍한 우기, 이, 콜레라, 굶주림, 학대, 감염...이것이 인간인가, 이렇게도 살아 있을 수 있구나...담담히 읽어낼 수 밖에 없었다.

 

  도리고 에반스는 아내인 엘라를 만났을 때 그녀의 지적이고 청초한 모습과 그녀가 가진 집안 배경 등에 마음을 빼앗겼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을 터라 호감이 갔다. 운명적 끌림이었을까. 우연히 갔던 서점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이 고모부의 새 아내라니. 세 살 차의 에이미는 강렬한 사랑이었다. 단순한 끌림이 아닌 평생을 지울 수 없던 사랑, 그가 확신할 수 있었던 그리움이자 갈망이요 알 수 없었던 오랜 고독의 산물이었다.

 

  병사들은 도리고 에번스를 면전에서는 대령이라고 부르고, 다른 데서는 큰형님이라고 불렀다...큰형님은 도리고 에번스와 똑같은 얼굴, 습관, 말투를 지닌 다른 사람이었다. 큰형님이 고결한 행동을 할 때 도리고는 그렇지 못했고, 큰형님이 자기희생을 할 때 도리고는 이기적으로 굴었다.

  그는 자신이 이 역할 속으로 더듬더듬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 길어질수록, 주위의 병사들은 그가 맡은 역할을 더욱 강하게 확인해주었다. 마치 그들의 의지가 그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반드시 큰형님이라는 인물이 존재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인물이 정말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병사들의 존경심, 속삭이는 목소리로 늘어놓는 혼잣말, 그의 평판 등이 덫처럼 그를 죄어들어 그로 하여금 전혀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가 모범을 보여 이끈다기보다, 병사들이 분에 넘치는 찬사로 그를 이끌고 있는 형국이었다. 69~70페이지 

   어떤 위치에서 책임을 맡는다고 해서 도리고 에반스 같지는 않다. 그가 고뇌하는 건 대령이면서 큰형님 소리를 듣기에 자신의 내면과는 다른,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남자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주군에게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던데 병사들의 믿음을 저버릴만큼 그는 모질지 못했다. 한 길 사람 속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가 뼛속까지 악랄하고 치졸한 사내는 아니었다. 번민하는 의사의 본분이자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결코 끝나지 않은 비명처럼 시간이 쌓였다...일 분이 마치 평생 같았고, 어떤 때는 비참함과 공포가 가득한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결코 오지 않을 모종의 대단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그들은 다른 우주로 휩쓸려와서 개미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우주에서 중요한 것은 철로뿐이었다. 그들은 라인의 담당구역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노예처럼 일했다. 그들에게 도구라고는 밧줄과 장대, 망치와 쇠지레, 짚바구니와 괭이뿐이었다. 그들은 등과 다리와 팔과 손으로 라인이 들어설 자리의 정글을 베어내고 바위를 부수고 흙을 옮기고 침목과 레일을 운반했다. 벌거벗은 노예인 그들은 굶주린 채 얻어맞으며 탈진 지경을 넘어설 때까지 일을 했다. 그리고 벌거벗은 노예로서 라인을 위해 죽어가기 시작했다. 70페이지 

  전쟁에서 포로가 된다는 건 비참함. 어느 나라의 포로가 되느냐가 관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본의 포로가 된다는 건 최악의 패를 가짐이었다. 일제 36년 치욕을 생각하자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으나 세계 제패를 꿈꾸는 일본 야욕은 너무나 찬란했다. 자신들의 종족이 아닌 사람은 오로지 도구였다. 전쟁포로가 아닌 노예였다.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흉포해질 수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매맞는 아내가 습관이 되면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게 조금은 이해되었다. 집단 광기가 번득이는데 있어서 굶주림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하는 상황이 된다.

 

  갈리폴리 콘케슬러가 여자를 만질 수 없어서 벌을 받은 기분이라고 말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여자를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시절 또한 오래전에 지나갔다. 지금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먹을 것과 휴식뿐이었다.....오스트레일리아는 이와 굶주림과 각기병 앞에서, 도둑질과 매질과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노동시간 앞에서 갑자기 의미를 잃어버렸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졸아들고 쪼그라들었다. 쌀 한 톨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보다 더 컸고, 매일매일 커지는 것은 챙이 늘어지고 낡아빠진 모자뿐이었다...그리고 사망자는 계속 쌓여갔다. 71페이지

 

  다들 대령님께 이것을 드리고 싶어합니다. 취사병이 말했다.

  왜? 도리고 에번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왜 스테이크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가? 그는 정말이지 절발할 정도로 이것을 먹고 싶었고, 병사들도 그에게 일종의 공물로 이것을 바치고 싶어했다. 누구도 그에게 이 고기를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을 터였다. 그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 스테이크가 또한 일종의 시험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는 이 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며, 이 시험은 모두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가져가. 도리고 에번스가 말했다.

  그러고는 입안에 넘쳐흐르는 침을 꿀꺽 삼키려고 애썼다. 이러다 미쳐버리든지, 아니면 정신이 나가서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르거나 굴욕을 자초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진정되지 않았음을, 저들이 자기한테서 원하는 많은 것, 그러니까 성인이 성인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이 손에 없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병사 천 명을 이끄는 지도자였으며, 이 병사들은 묘하게 그를 이끌어 원래의 그와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려고 했다. 73 페이지 

  병사들이 대령님이자 큰형님을 대하는 방식이다. 전쟁 포로이면서 정글 안에서 물자 보급도 거의 끊겼다. 득시글대는 것들은 포로들의 건강을 빼앗는 것들뿐인데 그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굶주림 속에서 먹을 걸 나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보여지는 도리고의 위치는 믿음이다. 신뢰가 바탕이 된 관계. 외과의 도리고는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 치유가 아니더라도 늦추는 치료를 했다. 극한 상황에서의 신뢰감은 그래서 더 빛났고 시험에 들게 한다고  반신반의했다.

 

  나카무라 소령님은 포로들이 운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나카무라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들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이 전쟁이 잔혹한 것은 사실이다. 후쿠하라 중위가 통역했다. 어떤 전쟁이 그렇지 않겠나? 하지만 전쟁은 곧 인간이다. 전쟁이 우리의 본모습이며, 우리의 일이다. 철로가 인간을 죽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짓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철로다. 전진에 자유는 필요하지 않다. 자유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나카무라 소령님은 전진이 다른 이유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의사 양반은 자유 없음을 외치지만, 우리는 정신력, 나라, 천황 폐하를 말한다. 의사 양반은 잔인하다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운명이다. 우리가 있든 없든, 이것이 미래다. 100페이지

 

  허허, 이런 놈들이 일본인이었다. 세계 제패를 꿈꾸고 실행하는 자들. 자신네 민족만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들. 하긴, 이런 철학(?)이자 신념이 있어야 명령에 따르고 이행하지 싶다. 섬나라 것들의 호전성과 남의 것을 탐하는 야욕은 하루이틀에 길러진 것들이 아닐터.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대대손손이 그렇게 흘러나오는 뿌리인 것을.

 

  일본 정신은 이제 곧 철로를 따라 매일 버마까지 이동할 것이고, 버마에서부터 인도까지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서 다시 세계를 정복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본 정신이 바로 철로고 철로가 바로 일본 정신인거야, 나카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 거지. 163페이지 

  라인 건설의 명쾌한 논리이자 일본 제국이 실현시키고픈 염원이다. 미친놈들.

 

 

  살려줘! 다키 가디너가 신음했다. 살려줘!

...

그래도 구타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닌 다른 것, 무엇이든 좋으니 다른 어떤 것을 믿을 수 있어야만 자신도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않았고, 들으면서도 듣지 않았고, 알면서도,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알지 않으려고 애썼다.....

  포로들은 쫄쫄 굶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저녁식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빈약하다 해도 진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직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 매질 때문에 그들은 음식을 먹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작 작은 주먹밥 하나만으로 하루를 버티며 일을 했다. 더위와 빗속에서 노동을 했다. 바위를 깨고, 흙을 나르고, 거대한 티크나무와 대나무를 잘라 옮겼다. 일터까지 7마일(11km)을 왕복해서 걸었다. 그런데 매질이 끝나거나 다키가 죽을 때까지 그들은 저녁을 먹을 수 없었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소망 하나는, 어느 쪽이 되었든 이 일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것이었다. 355 페이지 

  그랬다. 모두의 결집을 위한 필요 조치는 타깃을 패죽이는 일이었다. 그가 죽든 말든 그건 상관없었다. 포로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해 쓸데없는 시비나 반항을 차단하는 일. 자신들하고 별반 다를 것 없는 포로가 매맞는 광경을 보면서 애써 외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그래도 감정이 좀 남은 상태였다. 빨리 끝나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주식과 휴식을 원하는 걸 매정하다 말할 수 없다는데 기가 막힐뿐.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눈다. 일본은 특히나 우리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요악인데 이번 책으로 더 이가 갈렸다. 그네의 이중성이 뼛속부터 훈련된 정신인 게 무서웠고 여전히 꿈꾸는 세계 제패의 꿈이 두렵다.

 

  라인 건설에서 죽어간 포로들의 참상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죽은 자는 잊히고, 그렇게나 참혹했건만 일상에서 잊혔다는 게 기막히다. 냄새는 기억하되 생각나지 않는 것. 얼마나 큰 내상이었으면 기억조차 못할까. 라인 건설 전과 후의 삶이 달라진 걸 어디서 보상 받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두려워서, 답답해서 그 일을 아는 사람만이 교감할 수 있다는데 숨통이 트인다. 그럼에도 잊힌 기억이 될 수 있다는게 기막히다. 단기 기억 상실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살아내기 위해 잊는 것, 그것만이 살 길 이었나 보다.

k******5 2018.02.18. 신고 공감 10 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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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어디서 자신을 잃어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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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잃어버린 한 중년 여성의 안타까운 사연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 그녀의 삶은 자녀를 잃어버리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자녀를 잃은 후 그녀의 모습이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자녀를 잃어버리기 전의 삶에 두고 왔다고 말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웃는 것뿐이다. 기쁜 일에도 웃고, 슬픈 일에도 웃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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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잃어버린 한 중년 여성의 안타까운 사연을 글로 읽은 적이 있다. 그녀의 삶은 자녀를 잃어버리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자녀를 잃은 후 그녀의 모습이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자녀를 잃어버리기 전의 삶에 두고 왔다고 말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웃는 것뿐이다. 기쁜 일에도 웃고, 슬픈 일에도 웃고, 화가 나도 웃는다. 의사는 그녀의 뇌의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이 망가져서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진단을 했다.

한때는 사람이란 감정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과연 사람 안의 감정이 무한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사람마다 일평생 사용할 수 있는 감정의 양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너무나 큰 충격으로 급격히 감정을 모두 소진하고 나면,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감정은 바닥이 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감정이 바닥이 난 사람은 그 후에 어떤 삶을 살까? 자녀를 잃은 여인처럼 그냥 빈 껍데기뿐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란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도리고 에번스'는 호주에서 성공한 외과의사이자, 2차 세계대전의 국민적인 전쟁영웅이다. 그는 전쟁 중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으면서도 그곳에서 자신보다 동료들을 돌보는 행동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포로에서 귀환해서도 죽은 동료들의 가족을 돌보며 영웅적인 행동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존경과 칭송을 비웃는다. 마치 사람들의 놀이에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칭송을 받지만, 자신이 존경받을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받는 칭송을 부담스러워하고, 스스로를 가식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스스로 자신을 무너뜨리는 삶을 살아간다.

"도리고 에번스는 미덕을 싫어하고, 미덕이 찬양받는 것도 싫어하고, 그에게 미덕이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싫어하고, 덕이 있는 척 행세하는 사람들도 싫어했다. 나이가 먹으면서 덕이 있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을수록 그는 미덕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는 미덕을 믿지 않았다. 미덕은 잘 차려입고서 갈채를 기다리는 허영이었다. (P 75)"

소설의 초반에는 도리고의 어린 시절의 삶, 그리고 군 입대를 전후로 한 짧은 삶만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기에 도대체 이 남자의 불만이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냥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의 투정 정도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은 점점 더 도리고 에벤스가 남려 두고 온 또 다른 도리고 에벤스라는 남자의 삶으로 들어간다. 그가 자신을 두고 온 곳은 '라인'이라고 부르던 2차 세계대전 당시 타이-미야마 간 일본군의 철도 건설 현장이다.

"전쟁 포로들이 그 뒤에 이어진, 서서히 광기 속으로 빠져들던 그 시기를 간단히 라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뒤로 영원히 그들에게 세상의 인간은 두 종류뿐이었다. 라인 위에 있던 인간들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 인간들, 아니, 어쩌면 한 종류뿐인 것 같기도 했다. 라인에서 살아남은 인간, 아니, 결국에는 이조차도 적절하지 않은 표현 같았다. 도리고 에번스는 라인에서 죽은 인간들밖에 없다는 생각이 점점 심하게 시달렸다. 오로지 그들에게서만 사람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고통과 지식을 무서울 정도로 완벽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P 43)"

도리고가 자신의 감정을 두고 온 또 다른 시간이 있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 만났던 '키스 멜베이니'라는 친척의 아내인 '에이미'와 만났던 시간이다. 그는 전쟁터로 떠나기 전의 불안함과 허무한 감정에 휩쌓여 있다가 우연히 에이미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 여성을 만나는 순간 그는 이미 자신의 마음이 그녀에게 빼앗긴 것을 안다. 그리고 나중에 에이미를 다시 만났을 때는 그녀가 자신의 고모부였던 남자의 새로운 아내인 것을 안다. 둘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사랑하지만, 상황은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렇게 도리고는 전쟁터로 떠난다.

이렇게 도리고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별과 라인에서의 끔찍한 기억을 간직한 채 귀환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도리고는 예전의 도리고 에번스가 아니다. 도리고 에번스는 에이미와의 아름다운 추억 속에, 라인의 끔찍한 밀림 속 철도공사 현장에 자신을 두고 왔다. 이제 그는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존경을 받고, 강연을 하며 살아간다. 아버지이자, 의사로서, 그리고 전쟁영웅으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비록 껍데기일지라도...

이 소설의 대부분은 끔찍했던 시암 정글의 철도공사현장을 묘사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의 1만 명 정도가 일본에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군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만드는 정글의 철도공사현장에 투입된다. 일본군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하나의 기계로 여길 뿐이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도리고는 그곳에서 포로의 지휘관으로서 동료들을 돌보는 동시에 그들을 치료한다. 동료들은 그를 '큰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르지만, 정작 자신은 건강한 군인들을 선별해 죽음의 일터로 내모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마치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그리스 신화의 '카론'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이 기억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얼마 전 읽었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의 저자는 2차 세계대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의사였다. 그는 끔찍한 수용소 생활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묻지 말아달라고... 수용소에서 그가 건진 것은 그의 육체적 생명이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빅터 프랭클이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가 도리고가 잃어버린 자신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비록 오래전에 상영되었지만 [얼라이브]라는 영화가 있다. 안데스산맥에 추락한 페루의 축구선수를 다룬 이야기이다. 그들은 눈 덮인 안데스산맥에 추락했고,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시체를 먹었다. 그리고 평생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들은 동료의 시체를 먹으며 육신의 생명을 유지했지만, 서서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아마 그들도 평생 꿈속에서 안데스산맥을 헤매지는 않았을까?

이 소설은 언뜻 전쟁의 끔찍함을 고발하는 소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디에선가 우리의 감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젊은 날의 그 뜨거운 열정과 감정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점점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메말라 가는 나 자신을 느낄 때면, 나 역시 나의 감정을 인생의 어느 부분엔가 놓고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도리고 에번스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미 오래전에 깨끗이 개간된 멀고 먼 티크 정글에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시암이라는 나라에서,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는 남자가 마침내 잠들었다. (P529)"

껍데기만 남은 채 남은 인생을 살아갔던 한 남자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i*******3 2018.02.18. 신고 공감 10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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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곱씹을수록 깊고 진한 향이 나는 길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곱씹을수록 깊고 진한 향이 나는 길" 내용보기
2014년 맨부커상과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인 일본제국군의 고타 대령은 『오쿠로 가는 좁은 길』에 일본 정신의 천재성이 요약되어 있다고 말했고, 나카무라 소령은 일본 정신이 바로 철로고, 철로가 바로 일본 정신이기에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먼북으로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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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맨부커상과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품이다. 작품 속 인물인 일본제국군의 고타 대령은 오쿠로 가는 좁은 길에 일본 정신의 천재성이 요약되어 있다고 말했고, 나카무라 소령은 일본 정신이 바로 철로고, 철로가 바로 일본 정신이기에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먼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이 작품의 영어판 제목인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이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작품의 내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지옥의 지붕을 걷는다.

꽃을 응시하면서.

 

                                   잇사

 

글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있고, 각 부분은 위와 같은 시 한 편과 함께 시작된다. 짧은 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가 시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은 후에 다시 시를 만나면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시를 읽으며 떠오르는 장면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책의 내용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라인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수용된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상급 군의관으로서 포로 천 명의 지휘관 역할을 맡았던 도리도 에번스 대령을 포함한, 철로 건설의 현장에 있던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날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인 전쟁 포로 뿐만 아니라 그들을 노예처럼 다루던 일본군의 입장도 담겨 있어서 책의 내용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전쟁 포로들은 라인의 담당구역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노예처럼 일본군을 위해서 철로를 건설하는 작업을 했다그들은 굶주린 채 얻어맞으며 탈진 지경을 넘어설 때까지 일을 했다.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하고, 의약품도 거의 없었던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또 죽어갔다.

 

펠라그라병으로 손가락 여러 개를 잃은 레스 휘틀, 눈 멀고 몸이 붓고 궤양이 생긴 잭 레인보우, 자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계산하면서 매번 자신의 운이 좋아지고 있다고 믿었던 다키 가디너, ‘기상신호와 일상사가 되어버린 장례식에서 나팔을 불던 지미 비글로, 전쟁포로수용소의 생활을 스케치와 삽화로 남긴 가이 헨드릭스. 전쟁포로수용소에 있는 이들 모두는 도리고 에번스를 면전에서는 대령이라고 부르고, 다른 데서는 큰형님이라고 부르며 정신적으로 그에게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버텨내었다. 도리고 에번스는 전혀 그렇지 않을지라도 이들을 위해 단호하고 확신 있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일본군의 포로로 일본군을 위해 철로를 건설하는 작업을 하며 힘겹게 보낸 시간들과 그곳에서 벗어난 전쟁 후의 생활이 대비되면서, 과연 이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전쟁 상황에서 그리고 전쟁 후에 겪는 그들의 혼란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전쟁 전 노스호바트에 있는 니키타리스의 생선식당에 있던 진열장의 수족관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들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했던 다키 가디너그 유리상자에 갇혀 밖을 내다보는 물고기들은 전쟁포로였다고고향에 돌아가면 니키타리스의 생선식당에 가서 거기 있는 물고기들을 전부 떠내서 부두로 데려가 놓아줄 거라 했던 그무슨 짓이든 해서 그 물고기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 보낼 거라는 그를 떠올리며 전쟁 후에 갈리폴리 폰케슬러양머리 모턴지미 비글로는 밤늦게 엘리자베스 거리를 걸어 니키타리스의 생선식당으로 간다그리고 다키 가디너가 살아있었으면 했을 그 일을 한다. 오랜 과제를 끝내고 평온해지는 그들의 마음이 전해져서 읽을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되는 장면이다.

 

끊임없이 어제를 살고 있는 그 기분은 어떨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불쑥 불쑥 나타나고, 매일 어제를 반복하며 사는 그 기분은. 함께 했던 이들만이 알고 느낄 수 있는, 기억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그날들. 큼직한 스테이크의 속이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을 보고서 다시 그날로 돌아간 듯 살이 썩어가는 냄새가 도리고를 에워싸는 장면에서는 나도 순간 멈칫하게 된다.

 

천 명으로 구성된 에번스의 J부대. 서로에 대한 믿음만 남은 채 모질고 힘든 세월을 이겨낸 생존자들이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믿음에 더욱더 강하게 매달린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놓아버리면, 그들의 삶 또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이 영원히 하나여야 한다.

 

그들은 빠르고 이상하게 죽어갔다. 자동차 충돌사고로, 자살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질병으로. 문제를 지니고 태어나는 아이들도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결혼 생활이 휘청거리는 사람도 너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도시를 떠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시에 머무르며 술을 지나치게 마셔대거나 아니면 약간 미쳐버렸다. 그러나 매일 모든 면에서 조금씩 나아졌다.

 

매일 모든 면에서 조금씩 나아진 그들은 자연스럽게 잊혀진 기억 덕분에 편안해지는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어제처럼 생생하던 그날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서 오늘을 이전보다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 

 

일본제국군의 제2철도연대에 소속된 소령이었던 나카무라 덴지. 국가와 제국의 운명에 자신의 삶을 바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일본 정신은 철로를 따라 매일 버마까지 이동할 것이고, 버마에서부터 인도까지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서 다시 세계를 정복하게 될 거라 믿었다.

 

세계적인 일본 제국을 세우겠다는 꿈이 방사능에 날아가버린 뒤, 철로 건설은 이제 목적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일본인 기술자들과 경비병들은 수감되거나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남아 있던 노예들은 해방되었다.

 

미국 공군병사들을 마취제도 없이 생체해부한 의사 사토 카메야. “교수형을 당하는 건 운이 없거나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뿐입니다. 아니면 조선인이거나.”라고 한 그의 말처럼, 전쟁 이후 고타 대령은 무혐의로 석방되고 B급 전쟁범죄 용의자로 언급되었던 나카무라 소령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아무도 해친 적이 없는 포로수용소 경비병이었던 모가미 겐지가 오히려 처벌을 받는다.

 

전쟁 후, 나카무라가 착한 사람으로 변신하여 거미나 모기조차 해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대령이었던 고타 시로의 도움으로 일본 혈액은행에 입사하게 되는데 해골만 남은 인간들이 비를 맞으며 진흙 속을 기어가는 악몽을 꾸는 것이 그가 받는 유일한 벌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도리고는 전쟁터로 출정 전, 애들레이드의 서점에서 에이미를 우연히 만나는데 그녀가 고모부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고도 위험한 사랑을 한다. 에이미로 인해 거의 마비에 가까운 압도적인 혼란을 느끼다가 도리고의 약혼자인 엘라의 거짓말로 인해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은 엇갈리게 된다.

 

그리고 삼 년 반 동안 전쟁포로였던 도리고는 약혼녀였던 엘라와 결혼한다. 결혼 생활에 대해, 처음에는 남편으로서 나중에는 아버지로서 실패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대외적으로 좋은 면만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나쁘고 못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내가 아닌 사람과 처음으로 잤을 때다. 그가 끊임없이 외도를 하는 것은 이 때문일까? 에이미의 부재가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는 그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가족들이 불길 속에 갇혀 있을 때, 온힘을 다하여 가족을 구하는 도리고 에번스를 보며 그의 본심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에이미와 이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아파하고,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저 하늘 나라에서는 영원한 평화를 누리길 바란다.

 


중년에 다시 독서 습관을 들인 그(도리고)는 어디에 있든 항상 그렇게 책을 놓아두었다. 그 결과 그가 내린 결론은 좋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고, 위대한 책을 읽고 나면 반드시 자신의 영혼을 다시 읽어봐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 책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글귀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섬세한 손길과 정성이 전해져서 책장을 넘기는 것 자체가 감동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처음보다 천천히 읽으면서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나의 영혼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리라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신음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역사의 현장에 있던 그들의 삶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소설 속 세상에 스며들면서 자비섬 고지대에 있는 전쟁포로수용자의 비참한 삶에 아파하게 된다곱씹을수록 깊고 진한 향이 나는 저자의 글이 책장을 덮은 후에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s********0 2018.06.30. 신고 공감 9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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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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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맨부커상 수상작과는 달리 좀 안 읽혔다. 초반에는 좀 지루한 느낌이었고, 과거의 기억과 현실을 오가는 때문인지 앞뒤로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작품의 도입 부분부터 감정을 절제한 자제력 있는 깔끔한 문장과 작가의 감성이 느껴졌다. 오히려 담담한 절제미가 눈물을 자아내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형 톰이 전쟁에서 돌아왔는데,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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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맨부커상 수상작과는 달리 좀 안 읽혔다. 초반에는 좀 지루한 느낌이었고, 과거의 기억과 현실을 오가는 때문인지 앞뒤로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작품의 도입 부분부터 감정을 절제한 자제력 있는 깔끔한 문장과 작가의 감성이 느껴졌다. 오히려 담담한 절제미가 눈물을 자아내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형 톰이 전쟁에서 돌아왔는데,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는 장면...)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는 문학을 통해서 간접체험 한다. 직접 체험한 사람의 심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문학 작품을 통해 그 참상을 감정이입하며 공감하게 된다. 전에 읽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삶의 의미 찾기가 주제였다면, 이 작품은 열린 공간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포로였다는 점은 비슷하다. 오히려 더 가혹하다고 할까. 동료들 앞에서 구타를 당하고 모든 수치스러움을 견뎌야 한다.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선악, 상실감으로 인한 무기력 등 복잡한 내면의 심리를 이토록 세밀하게 그릴 수 있을까 싶다.

 

 이 작품의 내용을 알기 전에 제목만 봐서는 시적인 느낌이 강했다. 일본의 와카[和歌]와 함께 일본 시가문학의 커다란 장르를 이룬다는 하이쿠가 등장한다. 17세기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고전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어판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에번스가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말하는 장면과 하이쿠를 언급하는데, 그 시적 우아함과는 전혀 상반되며 오히려 그 참혹함의 대비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라인에서 살아남아 현재 잘나가는 의사이자 화려한 전쟁영웅이 된 외과의 도리고 에번스다. 의도하지 않게 언론과 방송의 주목을 받으며 어느새 유명(有名) 인사가 되었지만, 마음은 몹시 불편하다. 도리고 에번스가 젊은 날 전쟁터로 출정 전 우연히 만난 키스 고모부의 아내 에이미와 나눈 사랑에 대한 기억과, 차후에 철도건설 현장의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겪는 잔혹하고 비참한 현실이 주된 이야기 배경으로,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교차하며 괴로워하는 삶의 어둡고도 치열한 현장을 보여준다.

 

 굶주림과 전염병과 폭력이 난무하는 빗속의 정글에서 철도 건설 현장에 투입된 포로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참혹함 그 자체이다. 주먹밥 하나로 하루 일정을 마쳐야 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도 채울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상황이라 먹을 것과 휴식만이 간절하다. 기계도 없이 정과 망치 하나만으로 정글을 베어내고 바위를 깨서 길을 내야 하는 과정이다. 간혹 오리 알 이나 작은 야자당 한두 개를 구경하게 되면 그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대하듯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을 대하듯이희망을 가진다. 어디 굶주림뿐인가. 군화도 없이 맨 발로 작업복은커녕 거의 알몸이다시피 한 몸으로 이동하다가 죽기도 한다. 철도 건설이 진척되기도 전에 시체가 쌓이기 시작한다.

 

 이에 일본군 사령부는 안달이 난다. 완공 시한을 두 달이나 앞당기며 채찍을 가한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일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도 고타와 나카무라는 잇사와 부손, 바쇼의 하이쿠에 공감하면서 점점 감상에 빠져든다. 철도가 인도 침공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 바쇼의 아름다운 시와 더불어 온 세계가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들뜬다. 철도의 완성은 일본 정신이며, 유럽인이 못한 일을 자신들이 해냄으로써 우월한 인종이라는 것을 알리는 계기가 되고 그 정신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할 거라는. ()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에 관한

키스 멀베이니와 에이미의 어긋난 사랑은 도리고와 엘라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도리고의 마음에는 에이미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욕망, 끝없는 바람기가 계속된다. 아내와 자식들과의 불협화음을 이룰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의 육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 그건 아니다. 절제할 수 없는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한 배려의 결여, 윤리적인 의식의 결여에 다름 아니다.

 

 만약, 에번스가 빅터 프랭클 처럼 삶의 의미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원()의 일상으로 돌아온 후반의 삶은 좀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그 자체가 감사함이 아닌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 모든 모임, 가족관계에서 외로움과 지루함을 느낄 틈이 어디 있겠는가. 외양만 영웅이 아니라 내적으로 성숙한 영웅으로서 희생자 가족이나 지역사회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한 노력 없이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는 없다. 그냥 자신의 마음을 따라 충족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질서한 아수라장이 될 것인가.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그렇게 먹칠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악에 관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악을 저지르는 자는 의외로 원래 악한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고타는 하이쿠를 읊고 낭만을 아는 사람이지만, 천황의 명령을 따라야 된다는 명제 하에 사람의 목을 치는 기술도 마다하지 않고 배운다. 처음엔 속으로는 죽도록 겁에 질렸지만, 한 번 해냄으로써 죽어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 과정을 나카무라한테 얘기하는 장면은 끔찍하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도 달지 말고 철도 완성의 임무를 마쳐야 한다는 말이다. 굶주림, 영양실조, 콜레라, 각기병 등 전염병, 폭력에 시달리다가 인원은 점점 줄어드는, 죽어도 불가능한 상황에 포로 백 명은 스리파고다패스 구간 근청의 캠프로 보내라는 명령이다. 버마 국경을 따라 북쪽으로 약 150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한다. 기계나 연장도 추가 지급 없이 인력은 부족한 상태로 어쩔 수 없지만다른 길은 없다. 포로를 철도 건설의 원료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집착과 광기를 본다.

 

동료들의 죽음에 관한 상실감

 전쟁 포로가 되어 생사를 함께 하다보면 미우나 고우나 동료애가 싹트기 마련이다. 전쟁에 관련된 작품을 많이 접했지만, 이토록 처참한 내용은 처음인 것 같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희망을 떠올리며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하는 장면은 애잔하다. 덩치가 크고 건장했던 타이니가 일본인이 정한 할당량을 더 빠른 시간에 해내어 죽음을 목전에 둔 동료들의 미움을 받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점점 해골이 되어간다. 거기에 더욱 잔인해지는 경비병들의 매질까지,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다. 다키 가디너는 그가 싫지만,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한 명이 죽어나갈 때마다 자신이 죽어가는 것이다.

 다키는 그와 오리 알 한 개와 주먹밥 하나를 나누어 먹는 장면은 눈물 젖게 만든다. 타이니는 마치 성체를 받듯이 두 손으로 받아 둘이서 캄캄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한 입 두 입 음미하면서 천천히 먹는다.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 중 스케치 재주가 있던 토끼 헨드릭스, 괴저로 다리가 썩어 수술을 받던 잭 레인보우 등 하나씩 죽어간다. 활활 타는 동료의 주검을 본다. 그 상황을 에번스도 그 누구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이다. 바지에 똥을 지리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던 다키는 똥 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에 절망하고 우리가 되어간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관한

일본의 패전으로 포로들의 지옥 같은 악몽은 끝이 난다. 그리고 이들을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았다.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막으려고 담배를 피우고, 죽음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농담을 주고받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새기려고 음식을 먹었다. 다키 가디너는 자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계산하면서 매번 자신의 운이 좋아진고 있다고 믿었다.’(P50)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서 온갖 것에 희망을 걸고, 순전히 환상에 대한 믿음으로 살았지만 운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잔인한 세월을 보낸 뒤 이제 트라우마로 고생한다. 가족과 불협화음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도 정상적이지 않다. 마음은 온통 동료들의 시체가 쌓인 정글에 머물러 있다.

 

 전범을 처벌한다는 신문기사가 나고 재판이 시작되지만, 고타나 나카무라는 그 벌이 미약하거나 피해간다. 그런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는데, 처벌은커녕 선한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추악한 가식으로 무장한 선() 이다. 인간의 내면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동물이 인간이라고 했던가. 천황의 명을 받들며 살기 위해 온갖 악행을 쌓더니, 이제는 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선을 가장한다.

 

 일본군의 경비병이었던 최상민의 삶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겁 많은 선량한 소년이 악의 우두머리의 하수인이 되었다가 사형수 신분이 되었다. 일본인 가정에서 하인으로 숙식과 매달 6엔의 봉급과 매질을 견디다가 매달 50엔을 준다는 말에 경비병이 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돈을 위해 살았던 그는 내 돈 50엔을 외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빈곤한 가정, 시대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돈 만을 쫓은 삶이 이런 결과를 만든 건 아닐까. 학습한 악()은 그대로 전이된다.

 

 철도 라인의 삶이 선()상의 삶이라면 그 후의 삶은 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삶, 죽음이 삶이 되고 삶이 죽음이 되고 그것이 계속된다. 여기서 에번스가 떠올렸던 빛이란 어둠의 그늘에서 간절히 바랐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 억압되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갈 자유, 자연속에서 호흡 할 자유 말이다. 전쟁의 한 가운데 포로가 되어 한 배에 탄 동료들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가 죽으면 내가 죽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하루하루가 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가혹한 굶주림과 병약해진 몸으로 서로 살아남기 위해 견뎌내는 몸부림이 너무 가혹하다. 작가는 큰 틀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그 아래에서는 인간관계의 내면 심리를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선과 악, 증오, 부끄러움의 내밀한 마음이 아프도록 절절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안정을 찾아가는 가운데 모든 것은 점점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조금씩 잊어간다. 선악의 주고받음도. 평온한 일상은 지루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포스가 절벽 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중에도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는 어떻게든 단죄를 받아야하며 그 기억은 잊어서는 안 된다. 연합군 중에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네들의 이기적인 광신을 위해 희생된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모르는 많은 상흔의 실상이 이렇게 문학작품으로 많이 나와야 한다. 마치 이건 꿈이 아닐까, 저 너머의 세계, 꿈에서도 만나기 싫은 세계를 들여다 본 기분이다.

 

 

    

 

h*****7 2018.02.25. 신고 공감 8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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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내용보기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이하나, 안타까운 마음 부여잡고 도리고를 따라 정글 라인을 헤매고 태즈메이니아 산불지역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달리다보니 어느새 18세기 하이쿠 시인 시스이의 임종 시에 닿고 말았다. 원 하나만 오롯이 그려진 불가사의한 게송. 그건 젠체하는 장식물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붙박인 북극성처럼 거역할 수 없는 엄정한 이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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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어이하나, 안타까운 마음 부여잡고 도리고를 따라 정글 라인을 헤매고 태즈메이니아 산불지역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달리다보니 어느새 18세기 하이쿠 시인 시스이의 임종 시에 닿고 말았다. 원 하나만 오롯이 그려진 불가사의한 게송. 그건 젠체하는 장식물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붙박인 북극성처럼 거역할 수 없는 엄정한 이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별빛을 좇아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먼 북에 도달한 자만이 끄덕일 수 있는 비의였다.

 

 

먼 북은 어딜까

 

모두들 바라보는 북극성, 우린 뭘 좇으며 살아갈까? 무엇이 일상에 침잠해있는 우리를 일으켜 생의 의지로 달뜨게 할까? 안온한 삶의 조건이 보장돼 있던 도리고에게 모든 일은 식상하고 의미 없었다. 그를 일깨운 빛은 무엇이었을까 

 

밤에는 엘라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학작품에서 배운 사랑의 구절들과 표현에 푹 빠지려고 애썼다. 편지는 길고 따분하고 거짓이었다. 책에서 읽은 적이 없는 생각들과 감정들이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이것이 사랑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키스의 아내를 향해 소용돌이치는 증오와 욕망을 느꼈다. (115)

 

아이를 갖게 한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아내로 맞은 남편, 무미건조하게 의무감으로 대하기만 하는 그와 가식적인 결혼생활을 이어오던 에이미에게 반짝 다가온 별은 또 무엇이었을까 

 

에이미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그 키 큰 의사에게 했음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클럽에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 이유도, 그가 방을 나가려고 할 때 자신이 그를 붙잡은 이유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다질 뿐이었다. (155)

 

그건, 사랑이었다. 간절히 닿고 싶은 욕망이었다. 본능적 이끌림이었다. 그 지향점이 있었기에 태국 밀림 속 흙구덩이,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견딜 수 있었다. 복귀한 다음에도 권태로운 일상을 버텨내며 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구역질나는 남편과의 관계를 인내하고 조롱도 참아내며 가난을 이길 수 있었던 힘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사랑은...

 

사랑을, 당의정을 입힌 기호품으로 여기곤 한다. 달콤하고 따스한 이미지만 선망하고 소비한다. 그런 환상에 휘둘려 있으니 실망하게 마련이다. 사랑은, 독이 든 사과다. 다만 독이 한쪽 면에만 퍼져있고 나머지 부분까진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 덥석 베어물다보면 독이 잔뜩 오른 부분일 수 있다. 알아챘다면 뱉어내거나 참고 다른 델 맛보면 되는데, 그 당연한 이치를 놓치곤 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런데 독은 때론 치명적이기도 하다. 그러니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벼랑 끝에서 한 걸음 내딛듯 생을 던져야 한다. 에이미는 사랑의 양면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를 전면적으로 파괴하기도 한다는 것을 머리론 분명 헤아렸다. 그런데도 묘한 떨림 앞에 이치와 계산은 까무룩 사라져버렸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알면서도 삶을 소진할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은 비극이었다.

 

등 뒤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의 몸을 느끼며 사랑은 선도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키스와 함께 있을 때 반드시 항상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고에 대한 감정이 항상 딱히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에이미에게 사랑은 우주에 닿는 것, 한 사람 안에서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멸절이었다. 그녀는 누워서 등 뒤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키스를 느끼며, 사랑은 기쁨과 즐거움만큼이나 불행과 잔인함과 망각에 힘을 소진한 뒤에야 비로소 끝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렇게 누워 뱃속에서 깨진 유리 파편들이 굴러다니며 베고, 베고 또 베는 것을 느꼈다. (202)

 

 

그 길은 왜 그리 좁을까

 

아무리 애써도 결국 한 점, 예정된 비극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별짓 다하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길길이 날뛴 후 언뜻 돌아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만 못한 경우도 있다. 왜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걸까, 사랑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물고기들은 모두 파면을 따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으며, 부서지는 파도의 손에서 탈출하려고 미친 듯이 헤엄치고 있었다. 그래도 파도는 항상 그들을 힘으로 붙들고 제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갔다.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그 물고기들이 예정된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에이미는 부풀어 오르는 파도를 따라 자신 또한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기대와 흥분으로 긴장했다. 자신의 파도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만약 잡아낸다면 자신과 물고기들이 어디로 실려 갈지 알 수 없었다. (157)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고의 눈에 에이미가 반짝 들어온 것, 에이미의 남편이 도리고의 고모부였던 것, 도리고가 돌본 가디너가 형 톰의 사생아였던 것, 고타 대령과 나카무라 소령이 하이쿠를 좋아하는 미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은 본질이나 필연이 아니다. 우연이고 실존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로 넓힐 수 있는 길이 결코 아니었다. 예측 불허의 바람에 휩쓸리고 통제할 수 없는 격랑 가운데 내던져진 존재로선 어이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지적 설계에 따라 예정된 결말로 이어지는 한 길, 좁디좁은 길 외에 다른 노선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거센 풍향을 거스를 수 없는 작은 새처럼, 운명을 거역할 수 있는 인간이란 없는 것이다.

    

도리고와 에이미의 길은 엇갈리게 세팅돼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합류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간절히 원하고 견결하게 노력하면 파도를 되돌리고 길을 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실낱같은 끈을 놓지 않았다. 도리고는 전장으로 떠나면서 에이미에게 기다리라고,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고백한다약혼녀 엘라가 엄연히 있었지만 뇌구조의 작은 점도 차지하지 못했다. 에이미도 약속을 믿고 질곡을 견딘다. 그러나 도리고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남편 키스 멀베이니, 에이미가 폭발사고로 숨졌다는 신문기사를 보낸 아내 엘라 랜즈베리의 거짓은 일말의 가능성마저 앗아가 버렸다. 그 순간 이들은 죽어버렸다. 의미가 사라진 후 남은 삶은 구차하게 연명하는 셈이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으랴

 

파도에 떠밀려 결혼이란 형식을 수용한 도리고는 겉돌기만 했다. 잦은 스캔들은 엘라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도리고의 무신경과 무책임에 절망했다. 에이미와의 관계에 넌덜머리가 났었는데 늙수그레한 즈음까지 불륜을 거듭하는 남편이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이들도 아빠를 데면데면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때 도리고를 향한 손가락질은 얼마나 따가웠을까? 그는 지탄받아 마땅한 존재였을까? 가족도 모르는 냉혈한이었을까? 도리고의 심경은 어땠을까? 섹스를 탐닉하며 희희낙락 즐겁기만 했을까아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에이미와의 사랑을 지켜내지 못하고 세속적인 셈법에 따른 정략적인 결혼을 했다는 자책이 그를 늘 억눌렀다. 괴로움을 반항과 일탈로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움의 대상이 엘라나 가족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무기력했던 자신이 한심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던 것이다. 전쟁의 트라우마도 그를 괴롭혔다. 전쟁 중에나 전후 기념사업 때에도 그는 사랑과 인술의 화신으로 칭송받았다.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고. 그런 도리고의 뇌리에 맴도는 것이 다키 가디너를 체벌할 때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일이다. 사랑하며 지켜줘야 할 어린 양의 처참한 고통을 끝내 모른 체 해버렸던 것이다. 엘라는 그런 도리고를 이해하지 못했고 안아주지 않았다.

 

삼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사람을 세 명이 망가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중략)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동의했고, 저 진동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도리고는 가장 먼저 박자를 맞췄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한 일이 거의 없으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동의한 것이다. (중략)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365)

 

에이미를 잃고 전장에서 자존감도 상실한 그는 엇나갔고 엘라는 도리고를 미워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에 진저리치며 스스로를 갉아먹어 나갔다.

 

그를 향해 칼날을 벼리던 엘라, 그녀도 결국 사랑을 확인한다. 도리고의 진심을 읽었던 것이다. 태즈메이니아 거센 산불을 뚫고 기어이 찾아온 도리고 에번스, 그는 엘라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사지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에이미를 사랑한 방식과는 달랐지만 나름의 사랑의 끈을 꼭 쥐고 있었다. 결코 놓지 않았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의 고통과 절망, 함께 살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삶, 애정과 질병과 비극과 농담과 수고로 이루어진 음모, 결혼생활, 기묘하고 무서운 인간 존재의 한없음. (523)

 

그러니 어찌 도리고를 탓할 수만 있으랴. 그를 단죄할 수 있는, 그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자 어디 있겠는가. 그도 운명의 격랑에 휩쓸린 한낱 여린 인간이었으니. 사랑 앞에 스러지고 사랑 없음에 아파하며 좁은 길 걸어온 이였으니.

 

 

그래서 먼 북은 결국 사랑이었다. 운명적 끌림이기도 하고, 경험을 공유한 자들의 의무감 같기도 한, 바로 사랑이었다. 모든 지남철이 가리키는 한 곳, 중심에 정확히 가닿으면 바늘이 한없이 떨린다는 그 지점, 좁은 길을 거쳐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생의 비의, 그 먼 북이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 사랑이 이들을 구원했다. 이 죄인들을 용서한 것이다.

a*****7 2018.02.17. 신고 공감 6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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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상흔이 시가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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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감동하는 건 쉽다. 그 뒤에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기에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고 안다고 해서도 안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경우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전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일상과 광기의 역사를 글로 읽어내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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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감동하는 건 쉽다. 그 뒤에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기에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고 안다고 해서도 안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경우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전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일상과 광기의 역사를 글로 읽어내는 일은 힘겹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거기 있기에 말이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 도리고가 최초의 기억 속 빛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전쟁과 함께 살아가는 지독히 아픈 삶을 들려준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중계하는가 하면 전쟁의 모든 기억은 잊은 듯 살아가는 전후 생존자의 현재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치 전쟁은 꿈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도리고를 비롯한 모두는 자신의 몸과 영혼이 기억하는 고통을 전쟁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도리고 앞에 나타난 동백꽃의 여인 에이미와의 만남만이 꿈이 아닌 현실은 아니었을까. 도리고에게는 약혼자 엘라가 있었고 에이미에게는 남편 키스가 있었다. 비밀스럽게 만남을 유지하는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배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으로 채워진 전쟁터였다. 

 도리고의 부대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타이-미얀마 간의 철도 건설의 노역에 투입되었다. 의사였던 그는 직접 노역 현장에 동원되지 않았고 환자를 돌봤다. 콜레라와 괴질과 각기병으로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병사를 살리기 위해 그들을 현장으로 내모는 일본 장교 나카무라와 대치한다. 무조건 철도(라인)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본군에게 폭력은 의지와 실천이었다. 다치고 병든 포로를 철로로 이끌어내야만 했다. 포로들에게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며 동료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삶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도 동료의 죽음이었다. 함께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한 이들의 환영이 그들 곁을 맴돌았다.  

 

 인간은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이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자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름이 구름답게, 대나무가 대나무답게 사는 것. (375쪽)


 라인은 망가졌다. 모든 선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모든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의미와 희망을 갈망했지만, 과거 기록은 오로지 혼란만이 가득한 흐릿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375쪽)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의 삶은 어떻게 지속되었을까. 도리고를 비롯한 포로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물과 진흙탕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에 나팔을 부는 것으로 애도하며 지낸 시절은 절대 기억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일본인 나카무라는 전범 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워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착한 아내를 만나 딸을 낳고 좋은 아빠가 되기로 한다. 고타 대령을 만나 도움을 받았지만 가족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일본 장교로 포로를 학대하던 그 시절은 그게 선(善)이었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것만이 나카무라를 살 수 있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한 것이 바로 시詩인데, 천황 폐하는 그 자체로서 시였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는 우주를 모두 포함했으며, 모든 도덕과 고통을 초월했다. 위대한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천황 폐하라는 시 또한 선과 악 너머에 있었다. (478쪽)


 나카무라가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살았듯 도리고 역시 그러했다. 완벽한 아내와 가정, 성공한 외과의사이자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며 살았다. 에이미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아닌 척 연기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났지만 사랑이 아닌 단순한 유희였다고 자신했다. 현재의 고독과 허무의 허기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지난 삶을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아름답지만 너무도 쓸쓸하고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소설이다. 전쟁이라는 전무후무한 지독한 경험을 통해 그려낸 삶. 아마도 많은 이들이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아름다운 소설이라 말하는 건 기존의 전쟁 소설과는 차별적인 하이쿠의 등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도리고가 외우고 사랑한 시. 전쟁의 주범인 일본과 하이쿠라니. 기이하면서도 신선한 조화가 색다르다. 어떤 삶이든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나카무라와 도리고도 처절했던 삶을 끝냈다. 삶의 상흔을 시로 위로받았던 도리고와 시가 되고 싶었던 나카무라. 도리고가 사랑한 율리시스와 나카무라의 임종 시를 읊조려본다. 이것으로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나의 목표는 이대로,

 석양 너머로 향해하는 것, 그리고 서쪽 하늘

 모든 별들 너머로 내가 죽을 때까지. (26쪽, 「율리시스」 일부)


 

 겨울 얼음이

 녹아 맑은 물이 되고

 내 마음도 맑다. (482쪽)

r*********s 2018.02.14. 신고 공감 5 댓글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