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35)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40%
  • 리뷰 총점8 54%
  • 리뷰 총점6 6%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9.0
  • 40대 8.0
  • 50대 8.0

포토/동영상 (8)

리뷰 총점 종이책
적응과 갈등의 공존.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적응과 갈등의 공존.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가끔 어르신들과 함께 있을 때 고릿적 얘기라고 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지금의 생활방식은 문명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해 듣고 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기에 이 책에 대해 많이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지금의 시간과 반대의 공간에 있을 나르시스가 어떻게 살아갔던 지를, 야만인과 어울리지 않게 백인의 몸
"적응과 갈등의 공존.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가끔 어르신들과 함께 있을 때 고릿적 얘기라고 하는 것을 듣고 있다 보면, 지금의 생활방식은 문명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들에 대해 듣고 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기에 이 책에 대해 많이 기대했던 것 같다.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지금의 시간과 반대의 공간에 있을 나르시스가 어떻게 살아갔던 지를, 야만인과 어울리지 않게 백인의 몸을 하고 있다는 나르시스가 그들과 함께 한 17년의 시간에 대해 세세하게 들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물을 찾기 위해 잠시 정박한 섬에서 고립된 사내. 문명의 시간 속에서는 ‘나르시스’라 불리고, 야만인의 삶에서는 ‘암글로’라 불리던 남자. 실재에 근거해 써진 이 소설은 그 남자 나르시스에 관한 이야기이자 서로 상반되는 문명과 야만이 공존할 수 없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시드니에 출현한 ‘흰둥이 야만인’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목적에, 짐을 떠안듯 국제적인 문제 앞에 희생인 것처럼 보이는 지리학자 옥타브는 나르시스의 보호자가 된다. 그런 옥타브의 기록을 토대로 17년을 야만인으로 살았던 한 문명인의 삶이 기록되기 시작한다. 나르시스가 야만인이 되기 전 프랑스인으로 살았던 모든 것이 삭제된 상태다. 문화, 언어, 습관,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이 그의 삶에서 사라졌다. 나르시스는 문명인의 삶인 현재에 적응해야만 했다. 옥타브는 나르시스에게 그런 삶을 주고자 언어부터 많은 생활 문화까지 가르쳤다. 그의 언어, 고향, 가족, 신분을 찾아주었고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옥타브와 나르시스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 둘을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나르시스는 한명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학문적 연구 대상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문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거듭나야하는 운명이 주어졌고, 학계에서는 그가 야만인으로 살았던 삶을 기록하고 연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발견되는 것들에 대한 기록, 그때까지 인류가 다 알아내지 못한 일들에 대해 알아내야만 하는, 야만인이 문명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의 결과까지 보고되어야만 하는 임무까지. 그리고 옥타브와 나르시스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적 전이는 야만인이든 문명인이든 그 경계가 필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 순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인정하게 된 것이다.

 

처음 나르시스가 섬에 고립되고 야만인의 삶에 흡수되었을 때, 그는 인정하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백인인 자신과 야만인인 그들이 동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곧 구조될 것이고 다시 자신이 속했던 삶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야만인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연구하고 시도했다. 그에게는 희망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야만인에게서 도망쳐도 야만인은 무관심했고, 그를 구조하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섬에 남아 야만인과 함께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체념했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가 살아가야 함을 인정했다. 그리고 서서히 잊어갔다. 신분, 이름, 언어, 가족, 많은 것들을... 그렇게 그가 잊은 것들의 자리를 야만인의 삶이 채운다. 야만인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들의 언어, 자연과 동물의 언어, 습관과 문화를 배우면서 야만인 암글로의 삶을 택한다. 그렇게 17년을 살았다. 우연처럼 그는 문명의 사람들에게 구조되었고, 다시 문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은 나르시스의 보호자 역할인 옥타브가 지리학회 학회장에게 보내는 서신의 형식과 섬에 고립되어 야만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나르시스의 시선으로 교차하며 서술한다. 그래서 문명인이 야만인으로 되어가는 과정과 야만인이 다시 문명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이 더 비교되면서 보인다. 서로 다른, 상반된 세계에 흡수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내가 살았던 세계와는 다른, 낮다고 생각하는 야만인을 무시하는 시선일 수도 있다. 나는 곧 구출될 거니까 그 잠깐 동안이라면 너희들의 방식을 따라가 줄 수도 있어, 하는 거만한 자세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점 시간을 흐르고 희망은 체념으로 바뀐다. 자신의 목숨을 연명할 방법은 그들, 야만인의 삶을 따라가는 것밖에 없음을 알아간다.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문명인 나르시스는 야만인 암글로가 된다. 반대로, 암글로가 나르시스가 되어가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문명의 세계에 발을 디딘 순간 그는 알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17년 만에 바뀐 이 환경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옥타브가 알게 된 사실은 문명과 야만은 충돌하면서도 공존할 수 없었다는 것 아니었을까. 그 두 세계에서 살았던 나르시스는 하나의 삶을 버리면서 적응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문명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르시스는 그 스스로가 우연처럼 꺼내지 않는 이상 야만인의 삶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과 세계에 대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기대감은 나르시스의 침묵으로 묻혔다. 17년의 시간동안 나르시스가 경험한 야만인의 세상은 나르시스의 시선으로 들려주던 고백 같은 말이 전부였음이다. 더군다나 이 책은 소설이다. 나르시스가 실존 인물이고 그가 야만인으로 살았던 시간이 사실이어도 그가 입을 열지 않은 이상 그 시간에 대한 묘사는 허구에 가까울 수도 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것은 ‘한 남자가 섬에 고립되어 17년을 야만인으로 살았다.’는 사실 이면에,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가는 인간과 그 과정에서 겪어야만 하는 내면의 갈등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사실과는 다르게 소설 속의 나르시스는 옥타브에게서 떠났다. 자취를 감췄다. 그의 내면에, 그가 말하지 않고 있던 것들에 대해 침범하려는 누군가의 시도가 그의 갈등을 최고로조 이끈 것이 원인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가 야만인의 삶에 적응해야만 했던 시간, 다시 문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적응해야만 했던 시간에 똑같이 동반되었던 것이다. 그건, 어떤 경우에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굳이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넘나들지 않더라도,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을 만났을 때 우리는 상대방과 충돌하게 되니까 말이다.

 

모험이라고 하기에는 잔인했고, 내일이라는 희망을 놓고 싶지 않게 만드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의 내면을 한번쯤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이다.

 

기억이 오히려 과거를 지우고, 엉클고, 녹이고, 희미하게 만든다. 기억력 자체가 부족하다. 나르시스는 저항할 생각도, 기력도 없다. 깊은 만의 끝자락에서 규모를 가늠키 어려운 너울이 가파르게 일어나듯, 모든 걸 삼키며 솟아오르는 망각이 그는 이제 두렵지도 않다. 무관심이 승리를 구가 중이다. 그깟 배의 중갑판이든, 희망봉이든, 생-질이나 보헤미아를 기억해서 무엇할까? 왕년의 전설들은 이제 서로 뒤섞이면서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꿈을 낳는 회색빛 연무 속에서 그 자취를 거의 찾을 수 없다. (357페이지)

 

 

 



n******i 2013.12.02. 신고 공감 15 댓글 73
리뷰 총점 종이책
문명과 야만, 궁극적인 이상향은 있는가.『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문명과 야만, 궁극적인 이상향은 있는가.『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픽션이다. 대부분 허구, 가상을 중심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다. 반면 소설은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도 한다. 그러한 작품을 만날 때 독자의 심리는 한층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쉬워진다. 막연하게 가공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한 사실적인 입체감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도 그런 작품이다. 상상하기
"문명과 야만, 궁극적인 이상향은 있는가.『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픽션이다. 대부분 허구, 가상을 중심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다. 반면 소설은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도 한다. 그러한 작품을 만날 때 독자의 심리는 한층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쉬워진다. 막연하게 가공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한 사실적인 입체감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도 그런 작품이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소설은 실존했던 한 남자, 17년 동안 야만의 땅(섬)에서 표류하게 됐던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인물을 다루고 있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1달, 1년도 아닌 자그마치 17년의 세월이다. 만약 나나 당신이 그런 상황에 부닥친다면 견뎌낼 수 있겠는가. 단지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 생에 대한 집착으로 점철된 존재만이 척박하고 미개한 땅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일이지 않을까. 사실 이 작품의 제목부터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단어의 어감이 불편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흰둥이는 꼭 동물(개)을 지칭하는 것 같고 야만인이라는 단어도 함부로 뱉어내는 단어는 아니지 않은가. 두 단어가 결합하면서 와 닿는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았기에 과연 어떠한 서사가 펼쳐질지 내심 호기심도 일었다. 이 작품을 읽기에 앞서 어디까지나 주목해야 할 것은, 나르시스 펠티에 그가 야만 사회에서 겪은 17년의 세월이, 저자 프랑수아 가르드의 상상력과 혼합된 사실과 허구의 산물인 이 작품 속의 묘사보다 절대 약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아마도 나르시스 펠티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너머의 현실을 몸소 겪지 않았을까 한다.

 

가끔 이런 말을 뱉어낸다. 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무릇 삶이라는 게 모두 내 뜻대로, 원하는 대로 실현되지 않는 데서 오는 푸념 섞인 한탄 같은 것일 테다. 하지만 정말 현실이 된다면. 과연 그때도 나는 그 삶을 아무 불평 없이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을까. 아니, 솔직히 자신 없다. 분명 나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시들고 병들어 초췌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비슷한 맥락으로 무인도에서 혼자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상상 속의 희열일 뿐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닥친다면 과연 나는 살아낼 수 있을까. 군중 속의 고독을 토로하고 문명의 이기 속에서 동떨어진 느림을 추구한다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세상 안에 속해 있으면서 내뱉는 불만일 뿐이다. 길을 걷다 이리저리 부딪히는 사람들의 물결,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지구촌 곳곳의 최신 정보를 듣게 되는 삶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자율과 타율의 틈이 지대한 만큼 자율적 의지와 타율적 지배의 격리 속에서 '잘' 살아낼 자신은 솔직히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오만한 한탄이었을 뿐. 이 작품을 두고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에 비유하는 출판사의 소개 문구에서 톰 행크스가 열연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1년)가 떠올랐던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하나뿐인 배구공 친구 윌슨이 파도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보고 목놓아 부르던 장면은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작 중 화자이자 나르시스 펠티에가 문명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되는 지리학자 옥타브는 지리학회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분명 언급했다. 그들이 흰둥이 야만인이라고 불렀던 나르시스 펠티에, 그를 로빈슨 크루소와 동급으로 보는 건 옳지 않다고. 물론 처절한 고독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분명 로빈슨 크루소나 척 놀랜드(톰 행크스)가 한 수 위다. 나르시스 펠티에에게는 비록 야만인이었지만 함께 생존해갔던 공동체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뿐이다. 조난당할 당시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소년 혹은 청년이었던 그다. 한참 성장의 과도기에 접어든 한 소년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문명사회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야만인들의 사회에 적응하기란 퍽 힘겨울 것이며 문명과 야만이라는 차이에서 오는 혼란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기 때문이다.

 

 

문명과 야만, 두 세계의 충돌과 융합

 

 

"나는 나르시스 펠티에! 생폴 스쿠너 선 선원이다."-23쪽

 

그랬다. 섬에 홀로 표류하기 전까지는. 그는 생폴 호의 수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17년 동안 문명과 단절된 채 혹독한 고립의 세상을 탐험하는 모험가로 탈바꿈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섬의 벼랑 끝에 올라 동료들의 구조를 기다리며 시시각각 신세를 비관하는 한 남자의 몸부림을 그려보라. 당장 먹을 식량도 목을 축일 식수도 없는 망망대해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삶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는 발가벗은 채 동산을 활보했다지만, 이미 인간의 문명은 그 시절을 한참이나 지나왔다. 성정盛粧을 하고 서로의 패션을 과시하며 언어와 행동으로 자신의 지적 수준을 타인과 공유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19세기 중반 유럽 사회도 분명 문명화된 사회였다. 그곳에 소속되어 있던 이제 막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에게 최소한의 국부도 가리지 않은 채 발가벗고 생활하며 영어나 프랑스어가 아닌 목이나 혀를 사용해서 기이한 소리의 신호로 대화하는 광경이 얼마나 모순적으로 다가왔겠는가. 실제로 14살에 견습 선원이 되고 18살에 홀로 표류하기까지, 이 소년의 삶은 '바다'와 함께 '자유'를 갈망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문명'에 속한 바다 위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탈의를 한 채 날생선으로 연명하는 자유로운 삶의 풍습 안에서는 아니었을 거라는 거다. 한 인간 존재가 대립하는 두 세계를 모두 끌어안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섬의 원주민들과 생활하며 급기야 문명사회를 잠재의식 깊숙이 봉인하게 되었던 것 아닐까.

 

이쯤에서 존재의 역설로 들어가 보자. 인간은 본연 자체로 역설적인 존재다. 그러나 역설적인 존재라는 것 또한 역설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태곳적부터, 모태인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싹튼 생명을 발화한 때부터 '역설'의 미명에 갇힌 존재라는 거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예견할 수 없듯이 '나'라는 주체가 어떠한 소속, 집단으로부터 예속되거나 방기되는 현실 또한 역설이다. 인간은 개인의 고유 영역에 잠식돼 살아가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큰 틀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바로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 말이다.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이들이라도 나름대로 공유하는 대상이 하나라도 있기 마련인데 나르시스에게는 최소한의 것도 없었다.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당연하게도 narcissism이 떠올랐다. 의지하는 거라고는 오로지 자신뿐이고 최소한의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그들과 살아가려면 아니 자신을 지켜가려면 화합해야 했고 반목은커녕 일방적 복종, 수긍의 상태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그를 옭아맨 강한 상실감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난당한 그를 동료들이 구출하러 올 거라는 기대와 체념 사이에서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쉬운가. 그럼에도 살아서 돌아가야 했기에 오랜 세월을 목숨에 대한 집착, 뭍으로 나갈 열망, 문명사회의 소속원이 될 거라는 가열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버리기로 한다. 침묵하기로 한다. 잠재적 희망은 남기되 야만인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려면 문명인의 삶은 버려야 했기 때문이리라. 인간이란 이토록 '적응'의 산물이다. 만약 아니었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테고 이런 소설 또한 실화가 바탕이 아닌 순전히 작가의 상상 안에서만 머물렀을 테다.

 

 

문명과 야만, 궁극적인 이상향은 있는가.

 

 

옥타브는 나르시스를 문명사회로 이끌기 위해 학습시키며 과연 야만과 문명, 야만인과 문명인의 경계란 무엇이고 어느 것이 진정한 문명인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저자의 의도였겠지만 나 또한 옥타브와 다르지 않았다. 문명은 발전은 삶의 편리와 효율성을 가져다주었지만, 인간미의 상실이라는 크나큰 부작용을 수반하고 있다. 야만인들에게는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오늘을 살고 지금 이 순간 배를 채우고 즐기며 살아갈 뿐이다. 갈등, 반목, 싸움도 없다. 소유한 게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냥과 채집한 음식은 모두의 것이고 드러내고 과시할 게 없으니 그저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면 그만이다. 나르시스가 그들을 보며 품었던 의문이기도 했던, 가진 게 없고 노래하고 잠을 자며 각자 할 일을 하며 항상 즐거워 보이는 야만인과 돈이 있으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편리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시시때때로 부정과 힐난으로 불행의 터널을 걸어가는 문명인 중 과연 진정 행복한 이들은 누구일까. 우리의 눈에는 미개한 종족이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그들 눈에는 외려 우리가 더 신기한 종족이었음은 말해서 무엇할까. 옥타브는 나르시스 펠티에가 두 세계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을 위시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삶이란 유기적 결합으로 얽혀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른바 아다몰로지 라는 것. 그가 말하는 건 학문이지만 학문의 뿌리는 인간을 기초로 한다. 나르시스가 문명과 야만 사회에서 각각 적응하고 퇴행하며 재적응 해나가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이 아다몰로지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학문적으로만 구분 짓기에는 평가절하되는 게 사실이다. 인간의 삶, 인간의 고유 영역은 보다 광대하고 오묘할 뿐 아니라 신비로우며 정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르시스의 삶 역시 일반적 접근에서 벗어난 원론적이고 원초적인 접근이 필요한 거였다.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그가 두 세계에서 각각 살아냈다는 것이 중요하며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우리가 상기해야 할 부분이다. 문명과 야만 사회의 간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삶의 영위는 모두 비슷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 인간의 무서운 적응력과 친화력과 융합의 접점을 상기해보는 시간을 선사하고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오는 혼재를 넘어 수용할 수 있는 삶의 변화와 한계를 고찰해보는 계기가 되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궁극적인 삶이란 무엇이고 보편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와 같은 명제에 부딪힐 수 있다. 문명사회와 미개한 삶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환기하는 것은 결국 어떠한 삶의 모습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거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어떠한 삶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뛰어난 친화력이 내재해있다는 거다. 나르시스 펠티에를 통해 문명 안에 살았던 사람이 야만적 습성에 얼마나 빨리 길드는지, 반대로 규범, 관습, 언어, 문화, 이 모든 것이 와해되었다가 재형성되기가 생각만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19세기 중반의 고독한 한 남자로부터 증언 받는 순간이었다. 살아야만 했기에 가능했던, 문명의 충돌 앞에서 인간의 적응력이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겪었을 내적 분열은 얼마만 한 크기였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우리의 자아는 처음부터 문명에 길들어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교육받고 분별력을 키우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관습이다. 이 자아가 한창 무두질을 할 때 급격히 반대되는 성질의 세계에서 전혀 다른 질서와 규범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단지 다르다는 차이에서 오는 인식을 떠나 체득하는 수준으로 변화한 그의 17년 삶은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를 제외하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과연 인간에게 더 이로운 것은 무엇일까. 자연 친화적인 아니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야만의 세계일까, 아니면 재단하듯 질서가 잡히고 편리한 문명사회일까. 굳이 답을 바라는 의문이 아니다. 어디든 경계는 있고 한계 또한 있는 법이며 임계점 또한 존재하는 법이니까. 어느 한 사회든, 두 세계의 결합이든, 궁극적인 이상향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아니,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내 대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그저 어디서든 살아내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w*****8 2013.11.25. 신고 공감 14 댓글 12
리뷰 총점 종이책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내용보기
여태까지 '공쿠르상 수상작'이란 닉네임이 붙은 소설이 좋지 않은적이 없었다. 공쿠르상 수상작을 읽을때마다 감동을 받곤 하는 책이었기 때문에, 다소 거창한 제목의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지만, 주저없게 읽게 되는게 또 공쿠르상 수상작인것 같다. 읽을 책이 쌓여있는데도 이 책 부터 읽는다는 것, 그만큼 공쿠르상 수상작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서" 내용보기

여태까지 '공쿠르상 수상작'이란 닉네임이 붙은 소설이 좋지 않은적이 없었다.

공쿠르상 수상작을 읽을때마다 감동을 받곤 하는 책이었기 때문에, 다소 거창한 제목의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지만, 주저없게 읽게 되는게 또 공쿠르상 수상작인것 같다. 읽을 책이 쌓여있는데도 이 책 부터 읽는다는 것, 그만큼 공쿠르상 수상작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작가 프랑수아 가르드는 이력이 특이하다.

전문 작가도 아니었고, 그로노블 행정판사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다. 그의 이력을 보고는 이 책이 소설이 아닌 르뽀인가 했다. 하지만 책장을 처음 폈을때부터 내용에 압도되었다. 상상력의 산물이 아닐까 싶었던 이 책의 내용은 실제 일어난 일이며, 이 책의 주인공 나르시스 펠티에는 실제 인물이라고 한다. 실제 인물에게 일어난 일들을 소설화 시킨 것인데,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라는 대립되는 테마를 다루었다고 했다.

 

책 내용에서부터 한 편은 나르시스 펠티에가 조난당하기 시작한 3인칭 과거의 이야기가, 다른 한 편은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이 파리 지리학회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과거의 이야기에서는 그가 조난을 당한후 배고픔, 외로움, 절대적인 고독감에 떨며 목숨이 위협받을 처지에 그를 도운 야만인 노파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노파를 따라가 그들이 함께 움직이는 야만족 틈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과거 자신이 살았던 과거를 잃고 17년 동안이나 그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말, 그들의 생활에 적응해가는 나르시스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지리학자 옥타브는 나르시스를 관찰하며, 그가 야만인의  사회에서 모든것을 잊고 파리로 돌아와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롭게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며 학문적 고찰과 그에 대한 인간애가 생기는 걸 느낄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나르시스가 야만족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가족에게로 가지 못하게 될 것을 알자, 야만족의 말을 배우고, 그들이 몸에 문신을 하듯 자신도 그렇게 하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던 것처럼 말이다. 잊고자 하는 것은 잊게 되는 것인가. 17년 전에 썼던 말을 잊게 되기도 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난 네 살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나는데, 자신을 키워준 부모, 가족, 자신이 했던 말을 그렇게 잊어버릴수도 있는가 싶었다. 한 마디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다 잊어버린줄 알았던 말을 옥타브에게서 듣고 입안에서,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을 내뱉는 몇마디의 외침. 그 외침은 나르시스의 무의식 속에서 늘 살아있었나 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만 그가 몇마디의 말을 배우고,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변화하는 나르시스를 보는 것은 감동이었다. 처음에 자신이 그토록 원했었고, 이제 문명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아이처럼 하나씩 배워나가는 모습들 말이다.

 

이 모험을 통해 저 자신도 변화한 것이 아닐까요? 제가 관찰을 심화하면 할수록 제가 가진 평소 신념이 뿌리째 흔들립니다. 도대체 야만인이라는 것이 무얼까요?  (158 페이지)

 

말한다는 것,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옛 시절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끝없이 이끌어내려 했지만 영구적으로 봉인되어 버린 기억을 말로 풀어내는 것, 즉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가 만약 내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스스로를 극도의 위험에 빠뜨리는 꼴이 될 겁니다. 죽는 거죠. 임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에 대한 죽음 말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두 세계를 동시에 머릿속에 담을 수 없음으로 인한 죽음, 동시에 흰둥이와 검둥이로 존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죽음. (349 페이지) 

 

야만인이 문명인의 사회에 와 적응해 가는 사람도 있었고, 조난을 당해 야만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이렇듯 나르시스처럼 두 사회를 모두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나르시스는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조난을 당한 깊은 숲속에서도, 다시 문명인으로 돌아와서도 적응하려 했다. 어떻게든 생존하려하는 그의 본능적 노력이 문명사회에서 와서도 그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끝까지 입을 닫았는지도 모른다. 

 

공쿠르상 답게 꽤 괜찮은 작품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정글'이라고 표현한다. 이 험난한 정글을 두 번이나 겪는 나르시스의 속마음을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온 모든 삶에서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쳤던 나르시스와 그런 나르시스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도 변해갔던 한 지리학자의 생각들에 동화되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h*****9 2013.11.18. 신고 공감 6 댓글 12
리뷰 총점 종이책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넘나들다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넘나들다" 내용보기
르뽀 냄새가 나는 제목이지만 사실은 소설이다. 18세 나이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시 섬에 표류하여 17년간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19세기의 프랑스 선원 나르시스 펠티에(Narcisse Pelletier)의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가 상상력을 가미해 재구성했다. 사실에 바탕을 준 이야기라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마치 내가 무인도에 혼자 남겨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책장을 덮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넘나들다" 내용보기

르뽀 냄새가 나는 제목이지만 사실은 소설이다. 18세 나이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시 섬에 표류하여 17년간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19세기의 프랑스 선원 나르시스 펠티에(Narcisse Pelletier)의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가 상상력을 가미해 재구성했다. 사실에 바탕을 준 이야기라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마치 내가 무인도에 혼자 남겨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기곤 한다.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나르시스가 표류 후 원주민과 보냈던 시절을 다루는 장과 지리학자 옥타브가 파리 지리학회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교차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런 형식에 따라 흰둥이가 원시 섬에 표류되어 야만족이 되면서 겪었던 변화의 모습과 구조된 이후의 재사회화를 거치며 문명의 기억을 찾아가는 모습이 대비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옥타브는 나르시스가 문명사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면서 관찰자의 입장에서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역할을 동시에 담당한다.

 

주인공 이름이 '나르시스'라는 점이 고독한 개인의 실존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서구 유럽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선원이 되어 바다로 떠나는 첫모습에서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표류된 후 원주민들과의 생활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 구조된 후 야만인에서 흰둥이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소통의 단절이다. 그래서 나르시스는 인간이란 결국 자신밖에 의지할 수 없는 고독한 존재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생존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살아가지만 결국은 본질적으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 도중에 주인공을 혼자서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장면이 여러번 소개된다. "나는 나르시스 펠티에! 생폴 스쿠너선 선원이다."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흰둥이 야만인'인 이란 표현도 재미있다. 흰둥이 야만인이 이슈가 되는 것은 원래 흰둥이는 문명인이고 검둥이는 야만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인 흰둥이는 원주민인 검둥이에 비해 우월하고 문명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옥타브는 나르시스를 문명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교육하면서 과연 야만과 문명의 경계는 무엇이고 어느 것이 진정한 문명인지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원주민은 발가벗고 생활하고 수렵과 채취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의사소통도 목이나 혀를 사용해 기이한 소리를 내는 원시적 대화방식을 사용한다. 현대 서구인의 기준으로 원주민을 야만인이라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야만인들은 문명인들처럼 서로 많이 가지려고 싸우는 일 없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가식으로서 감정을 왜곡하는 법도 없다. 과연 어떤 삶이 더 문명화되고 진실된 삶일까?

 

문명과 야만, 두세계의 충돌과 융합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문명인이 야만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나중에는 다시 본래의 문명으로 돌아와 살아간다는 이 소설의 설정 자체에서 어떤 우월적 문화는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문화적 상대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럼 두 개의 상반된 세계를 동시에 간직하며 살아갈 수는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에 가까운 것 같다. '흰둥이 야만인' 자체가 양립하는 두 세계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셈이다. 하나의 세계를 완전히 버리기 전에는 다른 세계에 진정으로 편입되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서로 다른 세계의 충돌이 가져오는 가혹함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c******4 2015.09.03. 신고 공감 4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 프랑수아 가르드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 프랑수아 가르드" 내용보기
"나는 나르시스 펠티에! 스쿠너 선 생폴 호의 선원이다!" 항해 도중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섬에 고립되어 버린 선원 나르시스.. 마실 물을 찾아 잠깐 섬에 정박했던 일행들.. 하지만 나르시스는 그 일행에서 벗어나 혼자 남았고 그들은 그를 섬에 남겨둔 채 떠난다. 나르시스는 곧 동료들이 자신을 다시 구조하러 올 것이라 믿으며 기다려보기로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자신을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 프랑수아 가르드" 내용보기

"나는 나르시스 펠티에! 스쿠너 선 생폴 호의 선원이다!"

항해 도중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섬에 고립되어 버린 선원 나르시스.. 마실 물을 찾아 잠깐 섬에 정박했던 일행들.. 하지만 나르시스는 그 일행에서 벗어나 혼자 남았고 그들은 그를 섬에 남겨둔 채 떠난다. 나르시스는 곧 동료들이 자신을 다시 구조하러 올 것이라 믿으며 기다려보기로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자신을 구조해 주러온 동료가 아니었고 그 섬의 원주민인 한 노파였다. 배고픔과 목마름. 피곤함 그리고 아무도 곁에 없다는 외로움 앞에서 그는 자신을 구조하러 올 일행을 기다리는 한편 당장의 생존을 위해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을 해 나간다.

어린 시절 읽었던 로빈슨 크루소나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가 떠오른다.

하지만 나르시스가 그들과 다른 점은 철저하게 혼자만의 고립이 아닌 문명과 야만을 오고가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두 영역속에서 겪게 되는 혼란과 침묵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흰둥이 야만인... 상반된 개념이 섞여있는 말이다.

이 제목을 보면서 흰둥이 야만인의 의미를 두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절대적인 의미와 상대적인 의미로..

18년동안 야만이라로 규정짓는 섬의 원주민들과 생활하면서 문명을 잊고 그야말로 야만인이 되어버린 그를 일컫는 절대적인 의미 그리고 원주민들의 시각으로 볼때 자신들과 다른 모습, 언어 , 습관들 가지고 있는 나르시스가 그들이 보기에는 흰둥이 야만인이었을 것이라는 상대적인 의미로 생각해 보았다.

나르시스가 섬에서 겪는 이야기를 하는 것과 18년후 시드니에서 발견된 나르시스를 보호하게 된 지리학자 옥타브가 학회장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한 편씩 교차되어 쓰여진 이야기 속에는 이 두가지 의미의 흰둥이 야만인을 찾아볼 수 있었다.

도대체 야만인이라는 것이 무얼까요? 나르시스가 완전한 야만인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면, 어느 날 몇 시에 다시 문명인으로 돌아온 걸까요? 그를 가르치는 일이란 가르침 자체에 대해 우리에게 무얼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와 나 둘 중 과연 누가 배우는 입장일까요?(158)

낯 선 모습의 나르시스를 대하는 두 세계의 반응은 참 달랐다,

배에서 낙오되어 오지의 섬에서 만난 그 섬의 원주민들.. 그들은 그를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의 한 일원으로  생각했다

그저 그의 옷을 모두 벗기고 그의 귀에 있던 귀거리를 강제로 빼 버린 것. 그리고 음식을 나눌때 제일 마지막의 서열로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 아프면 치료를 해 주고 이동을 할때는 함께했던...

그를 '암글로'라 부를 뿐 그를 특이한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어찌보면 무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18년후 야만인으로 변해버린 나르시스를 발견한 소위 문명인들은 그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를 통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알려고 했고 관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그를 취급했다.

백인들의 사회에 들어와 사는 야만인은 백인의 관습에 적응하게 되는 반면, 야만인들 가운데 처박혀 사는 백인은 세월이 흘러도 문명의 혜택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법이지요.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바로 나르시스인데, 그래서 더욱 신기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p271)

다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관찰하며 함께 했던 옥타브만이 나르시스의 인간적인 그의 고뇌를 점점 느끼며 그를 진정으로 안쓰러워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야만인이라고 하는 그들이 단순하고 인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무조건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백인들.. 하지만 그들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들에게는 야만일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새로운 환경에서 18년의 시간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기억, 언어. 생활습관.. 모든 것을 그렇게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섬에서 있었던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 나르시스가..

그러나 나르시스의 존재를 하나의 전쟁터로 인식해야한다는 옥타브의 말에 공감이 되며 맘이 아팠다.

나르시스의 내면에서는 문명과 야만 이 두 세계를 동시에 담을 수 없는 괴로움,,

이쪽의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저쪽의 세상을 잊어야만 했던 그의 노력..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건 죽는 것과 같다!" 고 마지막으로 말한 그의 절규가..

기억의 상실속으로 도피를 해야만했던 그에게 침묵은 그에게 생명의 열쇠였다..는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 아프게 한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섬에서 원주민과 17년의 생활을 했던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선원이야기를 접하게 된 저자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이 이야기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인간이 다른 세계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살아나가야하는 세계가 극명히 대비되는 그런 상황속에서 한 인간이 겪어야하는 생존과 내면의 갈등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흥미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무엇을 가지고 더 문명인이고 야만인이라고 규정지어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한다..

 

2012년 공쿠르상 수상작..

프랑스 문학하면 웬지 어렵다,, 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맹가리의 소설이나 르 클레지오의 소설을 읽으며 그 선입견을 조금씩 버리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어렵다..라는 생각은 없었고 좋다. 울림이 있다.. 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리뷰는 yes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n******m 2013.11.26. 신고 공감 4 댓글 9
리뷰 총점 종이책
나르시스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나르시스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내용보기
상상해본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홀로 깨어나는 느낌을. 둘레를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파도만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이곳은 어디, 나는 누구. 조금씩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오른다. 중국으로 가던 배에 탄 선원이었고, 물을 구하려고 동료들과 보트를 타고 섬으로 왔다. 그런데 깨어나보니 보트도 동료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섬에서 홀로 깨어난 사람은 나르시스 펠
"나르시스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내용보기

상상해본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홀로 깨어나는 느낌을. 둘레를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파도만이 밀려왔다 밀려간다. 이곳은 어디, 나는 누구. 조금씩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오른다. 중국으로 가던 배에 탄 선원이었고, 물을 구하려고 동료들과 보트를 타고 섬으로 왔다. 그런데 깨어나보니 보트도 동료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섬에서 홀로 깨어난 사람은 나르시스 펠티에다. 이 사람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라고 한다. 나르시스 펠티에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다. 섬에 홀로 남게 된 나르시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 17년이 지나고 영국 배에 발견되어 흰둥이 야만인으로 문명사회에 돌아온 모습이 엇갈려서 나온다.

얼마전에 열네살에 브라질로 이민을 간 사람이 우리말을 다 잊어버려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네살은 어른이 아니니까. 어린이가 어른보다 아주 다른 사회에 더 빨리 동화되어 살아가기는 한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조금 다르다. 문명사회에서 문명이 없는 사회에 간 것이니 말이다. 자신이 나고 자라서 배운 말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잊지 않으려 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았을까.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문명이 없다고 해서 야만인이라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본래부터 그곳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갔다. 한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르시스가 만난 사람들은 옮겨가면서 살았다. 그 사람들 나름대로 살아갔겠지만, 조금 재미없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자연이 아닌 문명사회에서 살아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열일곱해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살아가면서 원주민으로 살아가던 나르시스 펠티에를 영국 배를 탄 사람들이 발견한다. 원주민 사이에 있던 백인을. 홀로 버림받았을 때는 다시 오지 않더니, 나르시스는 동료들이 바로 자신을 찾으러 돌아올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배 선장은 나르시스가 죽었다고 여겼다. 열일곱해가 지나서 나르시스는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다시 문명사회로 돌아왔다. 이제는 원주민과 살았던 일들을 잊어버렸다. 아니, 일부러 잊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가끔 원주민과 살던 때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 나르시스를 맡은 사람은 옥타브 드 발롬브룅이다. 이 사람은 지리학을 하는 사람인데, 나르시를 만나고 흰둥이 야만인을 연구하려고 하였다. 나르시스가 옥타브와 말을 할 수 있게 되어도 옥타브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옥타브는 그 일을 아쉽게 여겼다. 나르시스 때문에 원주민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나르시스가 어떻게 지냈는지도. 나르시스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하려고 해도 잘 모르겠다. 아주 편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밖에는.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르다. 로빈슨 크루소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이 알아서 살아가지 않았던가 싶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집에 돌아갔을 때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르시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더는 백인이 아니었는데 다시 백인으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그때는 더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옥타브는 나르시스가 낚시 도구를 만드는 것을 보고 야만인한테도 지식이 있나 했다. 문명없이 자연에서 산다 해도 사람은 연장을 만들 수 있다. 두손이 있고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구나, 그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구나. 할 수 없었다기보다 하지 않은 것일지도. 백인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문명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람은 다 똑같다. 이것은 피부색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가든 사람은 자신이 몸담은 사회에서 지식과 지혜를 익힌다. 그것은 소중한 것이다. 나르시스는 사람들의 아주 다른 반응에 괴로웠던 것은 아닐까. 아니다, 아주 다른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을 것이다. 나르시스는 아주 많이 외롭지 않았을까.



희선




☆―

나르시스는 야만인들한테서 배운 지식을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다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지요. 한데, 그럼 야만인들의 지혜를 인정한다는 뜻이겠죠? 정말 그 지혜란 어떤 것일까요? 거기엔 또 어떤 소중한 보배들이 담겨 있을까요? (296쪽)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르시스 펠티에가 모쪼록 이 모든 시련을 끝내고 자기만의 평화와 쉼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것뿐입니다. ‘말하는 건 죽는 것과 같다’ 는 끔찍한 주문을 입에 올릴 필요가 제발 더 이상, 더 이상은 없기를!

하느님, 그를 도와주소서! (351쪽)


n***8 2014.01.22. 신고 공감 2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미지의 땅을 발견하고 탐사하는 일은 웬만한 도전과 용기가 없으면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특히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19세기의 지리학회 회원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좌초되기도 하고 마음을 다스려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미개지역인 오지를 탐험하는 과정을 지리학회장에게 15편의 서한문(1편의 유언장포함)을 주인공 옥타브 뒤 발롬브룅의 탐험일지가 마치 르포르타주와 같이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미지의 땅을 발견하고 탐사하는 일은 웬만한 도전과 용기가 없으면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특히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19세기의 지리학회 회원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좌초되기도 하고 마음을 다스려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미개지역인 오지를 탐험하는 과정을 지리학회장에게 15편의 서한문(1편의 유언장포함)을 주인공 옥타브 뒤 발롬브룅의 탐험일지가 마치 르포르타주와 같이 기록문으로 전해주고 있다.지리학회의 회원으로서 오지 및 밀림,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 미개지역의 사람들과의 대화,소통,교류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어 이를 보고하는 형식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은 오스트레일이라 북부지역에서 만난 백인 청년을 만나면서 그에 대한 언어와 행동변화,그리고 미개지역의 일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이 실제 있었던 실존인물인 나르시스 펠티에로서 프랑스 생-질-크루아-드-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견습선원으로 시절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북부에 위치한 케이프요크 반도에서 실종되고 식수를 찾아 나서다 오지탐사에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으며,선장은 나르시스를 '사망처리'하면서 오지에서 미개인들과 17년 간을 정처없이 현지인들과 융합이 되지 않은 채 생존해 있었으며 이를 지리학회 회원이었던 옥타브 뒤 발롬브룅에 의해 발견되면서 나르시스의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면서 삶의 희망과 모국으로의 귀환도 가능하게 되었던 훈훈한 휴머니즘이 녹아나는 글이다.거무튀튀하고 용맹성이 뛰어나며 집단의식이 강한 오지의 미개인들과 살아가면서 나르시스는 기억상실증에 가까운 정신질환을 앓게 되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반병어리에 치부만 가린 채 원주민들 틈 속에서 살아갔던 것이다.

 

 기나긴 항해 끝에 잠시 희망봉에 들러 생리적 욕망을 채우고 또 어디론가 항해를 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오스트레일리아 케이프요크 반도였다.바다와 자연에서 자라나는 물고기,동물들을 사냥하면서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원주민들에게 발롬브룅은 낯선 이방인이고 적개심마저 드는 존재였을 것이다.다행히도 발롬브룅에게는 해코지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 어눌하고 기억상실증에 가까운 나르시스는 그에게는 군계일학과 같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온통 거무잡잡한 가운데 흰색의 종족이니 그에게는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말을 붙여 보지만 제대로 된 단어,어구를 활용할 줄을 모르니 답답하기도 했을 것이다.하지만 그와 긴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그의 이름과 고향은 발롬브룅의 같은 민족인 프랑스가 아니었던가.그리고 식민 지구에서 내준 한 채의 가옥에서 절도죄로 도형생활을 하는 영국인을 포함하여 세 명이 오지생활을 해 나간다.

 

 열대지역에다 습기와 각종 벌레들이 우글대는 밀림지역의 원주민들을 모습을 보면 여자들은 목에 건 뼈나 조개껍데기가 반짝이고 아무런 장식이 않았고 문신도 팔과 넓적다리에만 한정되었는데,성인 남자들은 거의 온몸을 덮을 정도로 문신이 많다.나르시스 또한 몸에 문신자국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생활에 동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나르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면서 언어에 관한 발전 속도는 괄목상대의 향상을 보여 주고 본래의 성정인 과묵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나르시스는 그곳에서 알게 된 노파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도 이색적이다.원주민들의 식사는 도마뱀을 잡고 물고기를 낚아서 불에 그대로 구워 먹는 식이다.특히 나르시스는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에 맞춰야 하기에 신체상 고충과 자기 운명의 불확실성,나체 생활과 비위생적인 음식에 익숙해져 갔던 것이다.자신과 진정으로 대화,소통을 할 수 있는 이가 없기에 그는 절대적인 고독감과 완전히 박탈당한 인간관계로 인해 말이 없어지면서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른다.즉 우애,동료애,사랑,동지 의식,존경,유혹,성관계 등 인간적인 감정의 표출이 금지된 셈이다.

 

 자작이면서 지리학회 회원인 발롬브룅은 선원으로 실종되어 '사망처리'된 나르시스가 생존해 있다고 보고하면서 그의 생환소식이 고향의 부모,주민들에게 알려지면서 '돌아온 탕아'마냥 눈물바다가 된다.그는 '고래 등대'의 창고지기를 하면서 새 삶을 이루어 나가고,발롬브룅은 죽음을 앞두고 주임 신부 앞으로 유언장을 남긴다.재산 유증에 관한 문제 및 비석에 새길 문구를 바라는 내용이다.(비석내용 "나그네,옥타브 드 발롬브룅")장장 6~7년을 나르시스와 함께 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 체험 및 나르시스 개인을 본래의 모습으로 바꿔 놓으려는 발롬브룅의 휴머니즘이 이채롭고 훈훈하기만 하다.특히 문명과 야만,대도시와 오지,발롬브룅과 나르시스간의 진솔한 삶의 의미를 깊게 공감하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j******6 2013.10.29.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라고 말하는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문명과 야만의 기준과 경계가 무엇인지를 한번 되새겨보게 한다. 2012콩쿠르상 수상작이기도 한 [흰둥이 야만인~]은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넘나든 한 남자의 생존실화속에 삶의 놀라운 신비를 담고있다.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즐겨 읽는 책들중에 하나이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재미있게 읽었었다. 어렸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내용보기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라고 말하는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는 문명과 야만의

기준과 경계가 무엇인지를 한번 되새겨보게 한다. 2012콩쿠르상 수상작이기도 한 [흰둥이 야만인~]은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넘나든 한 남자의 생존실화속에 삶의 놀라운 신비를 담고있다.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즐겨 읽는 책들중에 하나이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재미있게 읽었었다.

어렸을때는 멋모르고 읽었던 다양한 책들이 사실은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이 다분한 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았지만 그런점을 접어두고라도 그냥 재미면에서는 읽기에 부담없고 좋았던것 같다.

로빈손크루소의 영향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만약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생존을 위한 법칙들을 위한

책들도 다양하게 소개되고 아예 로빈슨 크루소 따라잡기라는 책까지 출판되었다.

그런데 정말 만약에 나르시스처럼 무인도에 나홀로 남게된다면 장장 17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야한다면.

 

19세기 중반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시드니에 이른바 '흰둥이 야만인'이 출현한다.

이 흰둥이 야만인을 거두게 된 인물은 지리학자 옥타브 드 발롬브룅으로 세계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그 일을 기록으로 남겨 이름을 날릴 야망에 불타오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려고 하는

여행지들은 이미 누군가 다녀온 기록들이 있으며 단순하게 여행으로 그 안의 세계를 알기란 무리라는

것을 인식한 즈음 그는 문신으로 가득찬 한 흰둥이 야만인을 만나게되는데 그가 바로 이 생존실화의

주인공 '나르시스 펠티에'였다. 나르시스를 만나면서 그의 연구들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각을

틀게되는데 그가 직접 오지를 여행하는것보다 직접 그안에서 생존의 시간을 경험한 나르시스의 경험을

듣는다면 그것이상의 연구결과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하에 나르시스를 주의깊게 관찰하게 된다.

이 소설은 나르시스가 혼자서 섬에 남겨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한 묘사와 나르시스를

관찰하며 학회장에게 보내는 발롬브룅의 편지 두개의 큰줄기로 이뤄져 있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아닌 나르시스는 견습선원이 되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풍족하지않은 살림에서 나르시스에게 돌아올 몫이라는것은 없었고 주위의 누구나 다 그렇게 장남이

아닌경우에는 고향을 떠나는 일이 다수였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 뱃일을 시작한 순간부터

나르시스는 한사람의 몫을 다하기위해 정말 열심히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았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바로 이런 순간이라니..어디서부터 잘못된것일까.동료들과 떨어진순간? 아니면 더욱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향땅을 떠나던 순간..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나르시스의 머릿속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후일을 대비하느라 쉴새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일단 지금은 한숨 자두고.

잠에서 깨어난 나르시스는 구원을 요청하기위해 그가 만들어둔 구조물이 훼손되었다는 사실과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누군가 그를 이 섬에서 지켜보고 있었던것이다.

언제부터, 배가 섬으로 접근하던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배가 떠나던 순간, 그리고 홀로 나르시스가

남겨진 시간 그 모든 과정들을 누군가 지켜보면서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시드니에서 나르시스르 맡게된 발롭브룅은 그가 단순한 야만인이 아닌 조난으로 인해 문명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을 조난자로 인식하게된다. 그가 어떻게 흰둥이 야만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파악이 되지않지만 그의 입을 열어 그가 경험한 세계의 이야기들을 들을수만 있다면

세계에 다시없을 진귀한 기록으로 남게될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이제 주어진 과제는 나르시스와 대화를

위해 그에게 말을 가르치는것..우선은 귀에 익은 소리를 들려주어 그의 기억속에 잔재하는 언어의

뿌리를 찾는것이 중요한데 우연한 계기로 발롬브룅은 나르시스가 프랑스국적의 사람이라는것을

파악하게된다. 조금씩 천천히 나르시스를 교육하면서 나르시스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을 학회장에게

보고하면 비슷한 류의 자료들을 물어보는 발롬브룅은 다른 한편으로는 나르시스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게된다. 그리고 드디어 이미 17년전에 사망처리된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인물에 다가간다.

 

타는듯한 갈증이 느껴졌고 그순간 진흙이 섞인 수통이 나르시스의 입에 다가왔다.

혹여나 빼앗길새라 수통을 낚아채 갈증을 해결한 나르시스는 그의 주변을 탐색하던 노파의 뒤를

따르게되고 한 무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인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로 이뤄진 무리는

나르시스의 눈에는 보이지않는 어떤 규칙들이 존재하는듯하고 처음에는 겉돌기만 하던 나르시스는

자연스럽게 무리속에 점점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수시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고독함.누군가

그를 구조하러 올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은 점점 그를 더 지치게하고 절망속에 빠져들게한다.

탈출의 끈을 놓치않으려 조개속에서 건져낸 진주를 던져버렸다가도 얼른 주워 다시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가던 나르시스는 어느 순간 무리속에 완전히 동화된채 망각속으로 기억을 밀어넣게된다.

이제 나르시스는 사라지고 암글로만 남았다.

 

발롬브룅은 나르시스의 가족들에게 나르시스를 데려가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라는것을

확인하게된다. 이미 문명과는 동떨어진 시간이 길기도 했거니와 여지없이 가난한 고향에서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는 나르시스가 마땅히 할만한 일이 없었던것..발롬브룅은 여전히 나르시스의

후견인자리를 포기하지않았고 신문에서는 연일 흰둥이 야만인들에 대한 기사가 넘쳐흘렀다.

하나같이 제멋대로 만들어진데가 자극적이기만 한 기사속에서 나르시스는 천박하고 미개한 야만인

이었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댓가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함께사는 세상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황후의 배려로 나르시스는 등대 창고관리자로 부임하게되고

발롬브룅은 그곳의 기지장에게 나르시스를 돌봐줄것을 부탁하게된다. 발롬브룅에 의해서 많은

교육과 적응기간을 거친 나르시스는 다행히 등대창고관리자로서의 소임을 휼륭하게 소화해내는데..

그러나 돌연 나르시스는 행방을 감추고 만다..섬에서의 생활을 궁금해하던 발롬브룅에게 남긴 말은.

" 말하는건, 죽는 것과 같아..."그 신비스러운 말뒤로 발롬브룅은 다시는 나르시스를 볼 수 없었다.

 

나르시스가 섬에서 보낸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지않다.

다만 혼자 남겨진것을 알았을때의 나르시스의 심경,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 주변의 상황들.

그리고 부족안에 받아들여지던 당시의 묘사들까지는 나르시스의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면

흰둥이 야만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드니에 나타난 순간부터의 나르시스의 내면속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않는다. 다만 관찰자의 입장인 발롬브룅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나르시스의 외면의

모습들만 조금씩 나르시스가 처한 상황들을 돌아보게 만들뿐이다.

한남자의 처절했던 생존의 기록..그리고 말하는것은 죽는것과 같다는 침묵의 주문..

지루하고 어려울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흥미있게 다가갈수 있었다.

 

 

j******3 2013.11.27. 신고 공감 1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교만한 잣대에 대한 비판!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교만한 잣대에 대한 비판!" 내용보기
소설을 다 읽고 그에 대한 궁금함에 더 많은 자료가 있을까 해서 검색하던 중 우연히 한 방송을 예정 중 이라는 기사를 보게되었다. 다큐로도 방송되었고 출연했던 아마존의 원시부족의 한 가족이 한국에서 얼마간 홈스테이를 한다는 것. 나 또한 꽤 인상적으로, 내가 몰랐던 원시의 세계를 호기심으로 봤던 다큐멘터리였다. 이미 문명이 많이 유입된 상태의 부족들이었지만 아직까지 전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교만한 잣대에 대한 비판!" 내용보기
소설을 다 읽고 그에 대한 궁금함에 더 많은 자료가 있을까 해서 검색하던 중 우연히 한 방송을 예정 중 이라는 기사를 보게되었다. 다큐로도 방송되었고 출연했던 아마존의 원시부족의 한 가족이 한국에서 얼마간 홈스테이를 한다는 것. 나 또한 꽤 인상적으로, 내가 몰랐던 원시의 세계를 호기심으로 봤던 다큐멘터리였다. 이미 문명이 많이 유입된 상태의 부족들이었지만 아직까지 전통을 지켜가며 생활하는 그들은 신비 그 자체였다. 그 다큐에 나오는 부족들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떠올려봤다. 과거와 미래 등의 시간관념이 없으며 누군가 싸우거나 하면 간지럼을 타게 해서 크게 웃고 마는 모습에서는 스트레스가 만연한 문명의 세계에 사는 나로써 부러운 일이었고 성인식을 치르면서 신체에 상처를 내거나 하는 장면에서는 문명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을 내가 야만인으로 봤던가? 그들의 생활이 신비롭기는 했으나 야만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의 제목에도 나오는 '야만인'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미개하여 문화 수준이 낮은 사람, 교양이 없고 무례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 나르시스의 내적 갈등이 주요한 감상포인트이지만 더불어 그들을 야만인으로 보는 문명인들의 일방적인 잣대에 대한 교만함 또한 느껴졌다.
 
일단 제목에서는 왠지 지루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18세의 프랑스 소년 나르시스 펠티에는 스쿠너 선 생-폴 호의 견습 선원이다. 항해 중 식수 부족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해안에 내려 식수를 구하기 위해 수색 하게 되는데  배는 나르시스를 남겨놓은 채 떠나버리고 만다. 그때부터 나르시스는 문명과 동떨어진 원시의 생활이 시작된다. 원시 부족의 한 노파를 만나게 되면서 부족과 같이 생활하게 되지만 구조선을 기다리고 탈출을 꿈꾼다. 시간이 갈수록 그러한 희망들은 점점 작아지고 죽음까지 생각하면서 1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그 후 우연히 지나던 영국 배 존벨 호에 의해 발견되어 구조되고 지리학자인 옥타브 드 발롬브룅을 만나면서 새로운 문명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소설의 결말이 그래서 그는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면 좋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해피엔딩이 아니다. 문명으로 돌아온 나르시스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환대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낙오 이전의 생활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은 나르시스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신기함과 더불어 멸시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이러한 결말은 재미와 동떨어지고 이 소설이 다시한번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환기시켜줬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르시스의 원시적 생활과 옥타브와의 생활은 흥미진진함을 주면서 흡입력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가 직접 나르시스 펠티에를 인터뷰하거나 그의 원시생활을 본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야만인의 세계에 내쳐졌을 때의 절망감과 야만인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 죽음에 대한 생각, 문명으로 돌아왔을 때 겪었을 혼란과 내적 갈등의 묘사는 소설에 대한 흥미와 흡입력을 높여주는 백미랄 수 있다.

나르시스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섰을때 그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질문하는 사람들이 미개하여 문화 수준이 낮은 '야만인'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터무니없었다. 아직은 많은 과학이 발전하기 전의 지금부터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행태는 나르시스보다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생활을 같이 하면서 돌봐주는 지리학자 옥타브는 단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호기심과 원시부족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위해 그를 가르치고 문명에 대한 기억을 되돌리려고 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야만인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신념들에 대해서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 모험을 통해 저 자신도 변화한 것이 아닐까요? 제가 관찰을 심화하면 할수록 제가 가진 평소의 신념이 뿌리째 흔들립니다. 도대체 야만인이라는 것이 무얼까요? 나르시스가 완전한 야만인으로 변해버리 상태였다면, 어느 날 몇 시에 다시 문명인으로 돌아온 걸까요? 그를 가르치는 일이란 가르침 자체에 대해 우리에게 무얼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와 나 둘 중 과연 누가 배우는 입장일까요? - p158

요컨데, 백인들 사회에 들어와 사는 야만인은 백인의 관습에 적응하게 되는 반면, 야만인들 가운데 처박혀 사늠 백인은 세월이 흘러도 문명의 혜택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법이지요.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바로 나르시스인데. 그래서 더욱 신기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지금까지 야만인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그 많은 사례들, 언제나 한결같은 양상으로 발휘되늠 문명의 흡인력이야말로 보편적 양식이 주장하는 것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왔습니다만... , 나르시스만은 예외인 거죠. -p271~ 272

나르시스는 야만인들에게 배운 지식을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지요. 한데, 그럼 야만인들의 지혜를 인정한다는 뜻이겠죠? 과연 그 지혜란 어떤 것일까요? 거기엔 또 어떤 소중한 보배들이 담겨 있을까요? -p296

나르시스 펠티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야만인에 대한 기준은 오롯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누려온 문명인이 일방적으로 세운 교만하고 우월주의적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르시스가 문명으로 돌아와서도 옛 기억을 잃고 야만인의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생활하면서 야만인의 눈으로 문명을 세계를 보았을 때의 시선은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야만인을 만나고 그들을 혐오하는 시선을 보았던 것과 비슷한 감정도 느끼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는 잠깐 문명에서 생활한 그 아마존 부족민의 문명 생활에 대한 느낌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르시스 겪은 고통과 내적 갈등과 혼란은 분명 아주 무거운 주제이다. 그럼에도 나르시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비문명에 대한 문명의 관념을 고찰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f*******7 2013.11.26.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문명인 나르시스와 야만인 암글로!
"문명인 나르시스와 야만인 암글로!" 내용보기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이 책의 첫 문장  " 낮은 벼랑 끝에 다다라서야 그는 혼자임을 깨달았다." - 7page   19세기 중반. 지리학자 옥타브는 수상한 흰둥이 야만인을 맡아 거두게된다. 나르시스는 섬을 방문한 선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야만인들 속에서 유난히 흰피부와 머리색깔로 백인임을 의심받고 선원들과 함께 배에
"문명인 나르시스와 야만인 암글로!" 내용보기

 

 

 

 

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이 책의 첫 문장  " 낮은 벼랑 끝에 다다라서야 그는 혼자임을 깨달았다." - 7page

 

19세기 중반. 지리학자 옥타브는 수상한 흰둥이 야만인을 맡아 거두게된다.

나르시스는 섬을 방문한 선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야만인들 속에서 유난히 흰피부와 머리색깔로 백인임을 의심받고 선원들과 함께 배에 오른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백인의 겉모습만 지녔을 뿐 문명사회의 규칙을 전혀 모르고 말도 못했다. 17년 전의 기억을 모두 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옥타브에 의해서 하나씩 밝혀지는 그의 과거. 그는 17년 전 이미 사망처리된 선원 나르시스 펠티에였다. 18살의 선원이었던 나르시스는 물을 찾으러 갔던 그 섬에서 낙오되어 버려졌고 세상에서 잊혀졌다. 야만인과 함께 살았던 나르시스는 어느새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하며 야만인이 되었다.

 

지리학자 옥타브는 야만인이 되어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나르시스에게 말을 가르치고 문명을 가르치며 그가 겪은 섬에서의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내게 된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 꺼내놓지 않았다.

 

왜 나르시스가 그 섬에 남겨질 수 밖에 없었는지, 18살의 소년이 어떻게 문명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야만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만인'이라는 것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느 누가 그들의 생활을 야만이라는 단어로 비약할 수 있는지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두번씩 직접 체험한 흰둥이 야만인 나르시스 펠티에의 생존 실화다!

 

 

 

 

 

"이 고독과 미지의 땅에서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죽음은 더이상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러니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처음 나르시스가 원주민들을 만났을 때는 미개한 야만인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문명 사회에서 온 사람이고 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관계를 가지는 미개한 인간들이라고만 치부했다. 하지만 18살의 나르시스가 외딴 섬에서 홀로 살아남기란 불가능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억척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르시스는 그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나르시스는 불도 지피지 못했고 물도 찾지 못했고 먹을 것을 사냥하지도 못했다. 배고픔에 허덕이다 죽기 직전.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원주민 노인이었다. 물을 주고 식량을 주고 추위에 떨때 체온을 녹이게 꼭 안아준 것도 노인이었다. 원주민들이 처음부터 나르시스를 받아들여준 것은 아니었다. 문명사회의 생각을 지우지 못했던 나르시스는 원주민의 생활에 동화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도 점점 지쳐갔고 외로웠다. 그렇게 문명을 고집하며 지내는 사이 그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더이상 선원들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없었고 탈출의 희망 또한 버린지 오래다. 목숨을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그가 택한 것은 문명을 버리고 오롯이 그들에게 동화되는 쪽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버려진 채,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식인종이나 맹수 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닌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고, 불을 피울 방도도 없다. 허리띠에 찬 단도와 입은 옷이 가진 것 전부다." - 12page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버려졌다면?  무엇보다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나르시스의 선택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문명인의 눈으로 볼때 원주민들은 야만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 환경에 최적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야만이라 부르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 봤던 책의 이누이트 원주민 말살정책이 떠오른다. 강대국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쫓아내야 했고 죽이는 방법대신 택한 것이 바로 원주민들의 문화를 말살해 문명에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생각할 수록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하게 다가올 수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구대륙 도착, 침략이라고 배워야하는 것은 아닐지. 새로운 시각으로 그 야만!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나르시스를 관찰하는 지리학자 옥타브는 "대체 그자는 어떤 끔찍한 일들을 껶은 걸까요?"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옥타브가 흰둥이야만인으로 살았던 세월이 끔찍하고 암울한 기억이었을까. 그건 문명인의 잣대로 지켜본 기준이며 모순이 아닐까.

옥타브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이른바 문명인들이 나르시스를 대하는 장면들과 나르시스가 떠올리는 원주민들을 비교해보면 어떤 것이 더 끔찍한 일이었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르시스 펠티에. 그는 문명인 나르시스와 야만인 암글로!

두 삶 중 어떤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그의 대답이 정말 궁금해진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7 2013.11.14.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