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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식생활과 밀접한 식기로서 놋그릇을 빼 놓을 수 없다. 아주 하층 계급이 아닌 이상 일반 가정에서는 반드시 놋그릇을 썼다. 물론 여름 한철에는 자기류 반상기를 쓰다가 김장을 앞두고는 넣어 두었던 놋그릇을 꺼내서 보얗게 광이 나도록 닦는 일이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겨울 준비였다. 특히 예전에는 대가족제도였으므로 집안 어른 내외분의 진지그릇부터 시작해서 손자 손녀의 밥그릇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놋그릇을 닦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물론, 집안 여인들이 총동원되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죽 둘러앉아 놋그릇을 닦는 광경은 가히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속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한 이처럼 놋그릇을 닦는 철이 되면 날씨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져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실감하게도 된다. 이에 곁들여 제기도 보얗게 닦아 두었다가 추석 차례, 기제사, 정월 차례 때 꺼내 썼다. 이처럼 일상 생활과 매우 친숙했던 놋그릇은 집안의 경제 사정과 지체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 품질이 달랐다. 웬만큼 살림이 넉넉한 집안에서는 이른바 안성맞춤의 품질 좋은 방짜 유기를 썼다. 따라서 놋그릇의 질이 상품이냐 중품이냐 하품이냐에 따라 그 집안의 살림 형편을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 순조 때 서유구가 지은 <임원십육지>에는 "개성과 호남의 구례, 평안도의 정주 지방에서 유기를 생산하였으나 안성의 유기가 으뜸이다. 안성과 용인 및 장호원의 장터에는 안성에서 만든 유기가 많이 나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성은 본래 교통의 요충지여서 수공업이 발달하여 유기뿐 아니라 창호지, 고서적, 담뱃대 등도 유명했으며, 남사당패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또 호남과 영남을 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영, 호남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특히 안성의 유기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유명해서 각 지방 명문 호족들의 주문이 쇄도했다. 안성유기가 이토록 명성이 높았던 것은 유기가 작고 아담할 뿐 아니라 견고하고 재질이 좋아 광채가 은은한 최상의 품질이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북 산간 지방이나 영, 호남의 농촌에서는 보리밥을 주로 먹었기 때문에 밥그릇이 커야 했지만, 서울이나 지방의 명문 반가에서는쌀밥이 주였기 때문에 밥그릇이 클 필요가 없었으므로 안성의 작고 아담한 아름다운 놋그릇이 인기가 있었다. 조선시대 활발했던 안성 유기의 생산은 자기 그릇의 영향으로 1900년대에 많이 쇠퇴했다. 특히 일제 말기의 유기 공출로 된서리를 맞은 격이 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다시 회생되어 반상기를 중심으로 유기 제작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근대에는 생활 방식이 서구화되면서 생활 환경이나 생활 양식이 바뀌었고 새로운 식기가 다양하게 등장함으로써 유기는 일상 생활 용품으로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유기 제품은 은은하고 품위가 있는 반면 자주 닦아야 하는 등 사용이 불편한 점도 있었으나 문화 수준의 향상과 전통미의 인식이 높아감에 따라 다시 찾는 손길이 많아지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볕좋은 가을날, 할머니, 어머니, 고모들이 멍석에 둘러 앉아 깨진 기왓장을 갈아 만든 잿물과 짚수세미로 놋그릇을 닦던 모습이 생각난다. 놋그릇이 스텐레스 식기로, 다시 도자기 그릇과 유리 그릇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놋그릇을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 가서 본 놋그릇은 내가 시골에서 보던 놋그릇보다 크기가 작고 가격이 무척 비싸서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의 전통 놋그릇은 그렇게 우리의 생활에서 사라져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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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통 놋그릇이라고 부르는 유기는 전통적 제작방법인 방짜기법과 주물기법이 있다. 동과 석을 정확한 비율로 합금하여 두드려 만드는 방짜유기는 가장 귀하고 값도 비쌌다. 잡금속을 섞어 녹인 금속을 주물틀에 부어 대량생산하는 주물유기보다 희소가치도 있었고 장인들의 수제품이기 때문에 고급품인것은 당연하다. 유기는 '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안성의 맞춤유기가 유명했다. 주로 사극에서 놋그릇을 보게 되는데 은은한 품위와 운치가 있다.
그런데 유기의 치명적인 결점은 바로 사용하는데 큰 불편함이 따른다는 것이다. 유기의 고유한 멋을 살리기 위해서는 때마다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그러니 옛날 사람들처럼 부지런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유기를 사용해볼 꿈도 못꾸는 것이다. 유기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댓가로 치루어야 하는 일이 현대인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이것저것 바쁜 현대생활에서 그릇이나 닦고 있을 한가한 사람은 없을테니 유기가 퇴물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방송에서 학생들이 방짜유기 제작체험을 하는걸 본적이 있다. '혼자 할수 없는 일이 놋그릇 만드는 일' 이라는 말대로 밥그릇 하나, 수저 하나 만드는 데도 여러사람이 조직적으로 작업하지 않으면 안되는 힘든 작업이었다. 그때 감독하던 방짜유기의 기능보유자이신 분은 오랜세월 뜨거운 불과 함께 작업을 하느라 손가락은 불에 데인 상처자국 투성이었다. 장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아무나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험난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장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유기를 만드는 일은 불을 사용해야 하므로 훨씬 더 어렵고 위험한 작업이다.
유기의 쇠퇴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 무기에 필요한 쇠붙이에 혈안이 된 일제가 한국에 널려있던 유기를 마구 공출해 가고, 수많은 유기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부터 시작됐다.그리고 계속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유기의 가치는 퇴색되어 갔다. 하지만 생활이 안정되고 문화수준도 향상되고 전통문화에 눈을 뜬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유기의 부활이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활성화 되기에는 유기의 실용성이 너무 미약하다. 하지만 유기가 우리의 독특한 문화유산인 만큼 찾는 손길이 끊이지 않아서 명맥이라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이 우리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잊혀져 버린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인상깊은구절]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아서도 양반가를 비롯하여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실생활 용구로서의 놋 제품이 얼마나 널리 대중화되었는지를 알고 도 남음이 있다. 북쪽의 산간 지방에서는 놋동이, 놋양푼, 놋요강, 놋버치, 놋상등 비교적 큰 것들을 만들어 썼으며, 중부 지방에서는 안성지방을 중심으로 반상기와 제기등의 작은 식기류를 주로 만들어 썼다. 또 농사일을 주업으로 했던 남쪽의 함양과 김천지방에서는 우수한 농악기를 만들어 썼다. 이처럼 널리 일반화되었던 전통적 의미의 놋쇠는 동 1근 (지금의 600 g)에 상납 4냥 반 (약 168.7 g) 을 배합한 우리나라 특유의 재료이며, 일명 유철이라고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