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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앞에서 써 내려간 삶의 기록
"비극 앞에서 써 내려간 삶의 기록" 내용보기
코로나였는지, 독감이었는지 지독하고 끈덕진 것이 들렀다 갔다. 자가 격리 기간 초반에는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에 내 얼굴을 맞대고 부비는 애정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어찌나 서글프게 느껴지던지... 하지만 발열과 기침, 두통과 체증이 몰고 오는 짜증과 무기력함 사이에서 지독히도 향기로웠던 손 세정제를 듬뿍 짜서 코밑에 들이대도 아무런 냄새로 맡을 수 없는 후각 상실에 이
"비극 앞에서 써 내려간 삶의 기록" 내용보기


코로나였는지, 독감이었는지 지독하고 끈덕진 것이 들렀다 갔다. 자가 격리 기간 초반에는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에 내 얼굴을 맞대고 부비는 애정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어찌나 서글프게 느껴지던지... 하지만 발열과 기침, 두통과 체증이 몰고 오는 짜증과 무기력함 사이에서 지독히도 향기로웠던 손 세정제를 듬뿍 짜서 코밑에 들이대도 아무런 냄새로 맡을 수 없는 후각 상실에 이어, 매운맛을 제외하면 막이 씌워진 것처럼 둔중한 맛밖에 느껴지지 않는 미각 상실을 겪은 후에는 무언가에 대한 감흥마저 사라진 느낌이었다. '표백되었다'는 표현이 적합했던 그 무감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지독히도 향기로운 손 세정제의 냄새가 희미하게 돌아올 무렵, 안도감을 느끼며 집어 든 <페스트>의 영문 번역본에는 내가 겪은 일련의 변화가 오랑 시민들의 모습으로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페스트>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전염병으로 봉쇄된 도시 '오랑'에서 전염병이 사그라들어 봉쇄가 풀리기 전까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사이 점차 무감해진 채 음울하고 지난한 현재를 견디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동시에, 몇몇 특징적 인물을 통해 매우 개인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기록 형식의 소설이다. ‘격리’라는 조치가 필요한 질병을 겪은 개인과 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서,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에 대한 은유로도 읽히는 <페스트>의 결말에 다가갈수록 ‘전염병’이란 사실상 인간의 삶에, 역사의 흐름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삶을 무너뜨리는 모든 병폐를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재앙과 같은 사건들. 전쟁부터 개인이 일으키는 폭력 행위까지 직접 사건을 겪은 당사자가 아니면 ‘추상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렇기에 기록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히고 때로는 같은 사건은 겪은 이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빠르게 잊고 누군가는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상흔을 남기는 것.


They calmly contradicted, against all evidence, that we had ever known this insane world where murdering a man was as ordinary as killing as flies, this well-defined savagery, this calculated frenzy, this imprisonment that brought with it a horrific freedom from everything that was not the present moment, this stench of death that stunned all those it didn't kill, and finally, they denied that we were once these dumbfounded people, some of whom were piled each day in the maw of a furnace to evaporate in oily smoke, while the rest waited there turn, wrapped in chains of helplessness and fear.


우리는 너무나 쉽게 비극을 잊고, 누군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 당혹스러워한다. 현재의 안온함에 도취되어 늘 어딘가에 도사리며 순식간에 삶을 점령할 수 있는 '전염병'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페스트>가 기록의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책머리에서 대니얼 디포의 문장(It is as reasonable to represent one kind of imprisonment by another, as it is to represent anything that really exists by what which exists not)을 인용한 것 역시 비극을 통과한 허구의 기록을 통해 상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늘 비극을 잊고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전염병'의 시기를 어떤 태도로 살아낼 것인가에 대하여. 절망 속에서도 묵묵한 연대와 희망이 이어지기를, 그리고 마침내 '전염병'에서 벗어나는 환희의 순간에 누군가는 그 절망의 시기를 기억하고 기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페스트 #알베르카뮈

YES마니아 : 로얄 p*****e 2026.09.2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