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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어쩌면 '이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굴복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아무튼 세상에 산재하는 여러 부조리를 이해한다는 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혹은 온 지구상에서 파편화 된 개인으로서의 자신은 매우 보잘것없고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벽으로서 존재하는 부조리, 개인의 힘만으로 바로잡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의 무기력, 그래도 정의로운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 우리가 그럼에도의 삶보다는 그러므로의 순응적 삶을 선택하는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도덕적 의식과 실재하는 삶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미약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영웅의 출현이나 신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는 독자들에게 얼핏 황당한 이야기로 비칠 수 있지만 작가는 주인공 월트의 삶을 통해 아홉 살 소년이 어떻게 부조리한 삶을 헤쳐가고 있는지 상세히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나약함과 부조리한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1924년, 세인트 루이스의 한 거리에서 예후디 사부는 거리의 부랑아였던 월터 클레어본 로울리를 제자로 선택한다. 예후디 사부는 거리를 전전하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아홉 살의 월트에게 열세 번째 생일을 맞는 날까지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시에 월트의 보호자였던 슬림 외삼촌에게서 월트를 빼내 캔자스의 어느 농가로 그를 데려간다. 그곳에는 사부가 돌보고 있던 이솝과 수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솝은 똑똑하지만 몸이 불구인 흑인 소년이었고, 수 아주머니는 두 번째 결혼한 남편으로부터 참혹한 폭력에 시달리다 사부에게 극적으로 구출된 마음씨 착한 인디언 여인이었다.
월트는 그곳에서 하늘을 날기 위한 33단계의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아홉 살의 소년이 견디기에는 힘에 겨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예후디 사부를 비롯한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월트는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의 탈출은 쉽지 않았고 그때마다 번번이 예후디 사부에게 붙잡히곤 했다.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하던 월트가 눈보라에 갇혀 죽을 고비를 겪게 되는데 살기 위해 무작정 들어갔던 곳이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이었고 그녀는 예후디 사부의 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월트의 후원자이자 조력자 역할을 한다.
여러 사람의 돌봄과 극진한 간호 덕분에 다시 살아난 월트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솝이 예일 대학의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을 무렵 월트는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고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간다 싶었던 그 때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그들에게 닥친다. 마을의 3K 단원이 그들의 집에 불을 질러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한동안 슬픔에 잠겼던 그들은 하늘을 나는 묘기를 갈고 닦아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우리에게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건 기본적인 법칙이야. 만일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거다." (p.155)
공연은 순조로웠고 그에 따라 월트는 점점 더 유명해지고 바빠졌다. 공연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부도 함께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슬림 외삼촌이 그들을 찾아 온다.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에게 공연 수익금의 일정액을 요구하였고, 예후디 사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외숙모를 잃고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던 슬림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의 냉대에 분개하였고 갖은 욕설과 함께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외삼촌의 교활함과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잘 알고 있었던 월트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 나머지 시간에 나를 계속 따라다니던 온갖 불안감을 생각한다면, 공연은 일종의 정신적 휴식, 내 마음을 괴롭히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진정제가 되어 주었다. 나는 전에 없이 일에 몰두하면서 그것이 내게 주는 자유와 보호를 만끽했다. 그러는 동안 내 정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하루에 한 시간씩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는 아이 월터 롤리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인 철두철미한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어 갔다. 땅은 일종의 환상, 음모와 망령들이 깔린 위험 지대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모두 거짓이었다." (p.195~p.196)
월트의 예상대로 다시 나타난 슬림 외삼촌에게 그는 납치 감금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월트의 공연은 매번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위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춘기가 된 월트는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거기에 집착하면서 심한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게 되자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게 된다. 그러자 사부는 월트에게 '공중 곡예사(Vertigo)'라는 별명을 붙여 준다. (Vertigo에는 현기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슬림과 그의 패거리들에게 습격을 받은 사부는 심한 총상을 입고 자살을 하고, 월트는 외삼촌을 죽이고 암흑가로 스며든다. 조직에서 그는 승승장구하여 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군에 입대한다. 제대를 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제빵 회사에 취직하여 그곳에서 일하던 몰리와 결혼한다. 그것이 어쩌면 하늘을 나는 원더보이 월트가 온전히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법을 익히는 첫번째 단계였는지도 모른다. 월트는 그렇게 몰리와 23년을 살았고 암으로 그녀를 잃었다. 원더보이 월트의 노년은 결국 위더스푼 부인으로 이어지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단 두 번의 쓸 만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 첫번째는 아홉 살이었을 때 예후디 사부를 따라 기차에 올라 탄 것이고, 두 번째는 몰리 피츠시먼즈와 결혼을 한 것이었다. 몰리는 나를 다시 완전한 인간으로 되돌려 주었다. 내가 뉴어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떤 처지였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p.380~p.381)
폴 오스터의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인의 성공과 좌절을 원더보이 월트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성공의 이미지였을 테고, 월트가 성공했던 그 짧은 순간 역시 성공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을 터였다. 월트는 결국 지면에 발을 딛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위해 그가 어렸을 때 예후디 사부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훈련보다 몇 배나 더 길고 처절한 삶을 경험해야만 했다. 예후디 사부는 죽으면서 그에게 말했었다. '좋았던 시절들을 기억하라'고. 세월의 위대함은 개별적인 인간의 삶을 결국에는 보편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늙어갈 뿐이다. 결국 우리는 절망을 통해 하늘을 나는 법을 익히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으로 자신에게 다시 찾아온 절망의 순간을 견딜 뿐이다. |
| 폴 오스터의 책은 <빵굽는 타자기> 이 후 두 번째다. 내가 읽은 그의 소설은 모두다 1인칭 시점으로 적혀 있었고, 제목은 환상적고 달콤한데 비해 내용은 세상의 비정함을 담고 있었다. 사실 <빵굽는 타자기>를 읽으면서 그의 글이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않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 차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기에 <공중곡예사>라는 제목에 약간의 낭만을 기대 했었다. -물론 번역자의 잘못이지만 Mr.Vertig라는 원제를 그대로 사용했다면 낭만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빵굽는 타자기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그런 낭만은 눈꼽만큼도 없었고 비극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나 같은 독자에게는 폐부를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하는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특히 수 아주머니와 이솝의 죽음은 권투, 레슬링, 이종 격투기 등을 즐겨보는 취미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에 이르러서는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TV 스포츠 중계는 어느 정도 잔인하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전혀 예상밖 이였기 때문이라. 그의 글에는 이렇듯 독자가 앞으로의 이야기를 자기 생각대로 안주하며 읽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많다. 주인공 월터의 비극의 나의 비극인 것처럼 책 읽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공중곡예사>, 이 책에서는 세상의 비정함이 느껴진다. 세상은 인간의 기대에 응해주지 않는다. 세상은 그저 인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동정도 악의도 없다. 주인공 월터의 주위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오스터의 글은 너무나 지독하고 냉정해서 이것이 세상이구나 하는 착각을 들게 할 정도다. 예상하고 있는 비극은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 예상치 못했던 비극이야말로 고통스럽고 시련을 주는 것이다. 이 책엔 그런 예상치 못한 잔인함이 많다. 그러다 세상이 어떤 호의나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나 또한 그런 비극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저 담담하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사실 이런 류의 소설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주인공 월터는 <푸주간 소년>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돼먹지 못한 녀석이고 - 영화에 나오는 애는 섬뜩하기 까지 하다.- 책에서 풍기는 냄새는 왠지 마틴 스콜세지품의 갱스터 영화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한 담배 연기 같은 것이 짙게 깔려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정함과 잔인함이란 것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두 권의 책으로 그의 매력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나 적어도 그의 소설이 내가 건드리기 싫어하는 감성의 한 부분을 후벼파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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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나는 폴 오스터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환상의 책> 이후로 다시는 읽지 않기로 결심할 정도니까. 이 책을 만난 건 찌는 듯이 타오르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출판사들을 한데 때려 놓고 '출판도시'라는 이름을 붙인 곳인데 서울보다는 개성이 더 가까운 곳으로, 아마도 그래서인지 근처 롯데 아울렛에 단체 쇼핑을 하러 오는 중국인 관광객들 말고는 흔히 사람이라 부르는 동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출판인이라 부르는 '비인'이 득실득실하다. 출판인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완고한 턱을 가진 종과 찌푸린 이마를 가진 종. 그들은 둘 혹은 셋씩 짝지어 돌아다니는데 넷이나 다섯 혹은 여섯이 뭉쳐 시끌벅적하게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늘 조곤조곤 조용히 말하며 서로를 향해 동의의 고갯짓을 끄덕이지만 이는 상대방의 말을 존중해야한다는 교양인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일 뿐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수긍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 겪는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의 말에 동의를 해준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출판인들을 상대할 땐 어금니 뒤로 숨겨 물은 완고한 자의식과 십수년을 혼자 일하며 갈고 닦은 단단한 편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그들은 다른 출판인 혹은 작가를 만나는 것보다 책 더미가 지저분하게 쌓인 책상에 파고 들어가 좋아하는 펜 하나를 손에 들고 구겨진 원고를 읽는 걸 더 선호한다. 이때만큼은 그들도 숨기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마치 절대로 보여줘선 안되는 고급 보석인양 마음 속 깊이 넣고 꽁꽁 가둬 놨던 자의식과 편견, 직업적 긍지를 원고 위에 풀어 놓고는 문장을 유린하고 난도질하며 웃음짓는 음흉한 악어같다. 물론 받아온 원고가 너무 구릴 땐 예민한 코끼리가 되어 사무실을 전부 뒤집어 엎을만한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도 교양인의 미덕을 지키느라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단지 그렇게 할 것 같은 분위기만 잔뜩 풍겨 주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이렇듯 그들은 자기 주변의 비인보다는 흰 종이 위에 늘어선 글자를 더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다시 찌는 듯한 어느 여름날로 돌아가자. 나는 사람이 싫어 혼자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의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습기를 머금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이 황홀한 냄새의 유혹을 따라 열린책들의 책들이 쌓인 서가로 이동한다. 익숙한 전집들. 그 수 많은 책들 중에서도 나는 단박에 미스터 버티고(이 책의 원제),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를 낚아 올린다. 이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에 우겨 넣는 그 우연의 미학일까? 말했지만 나는 폴 오스터라면 질겁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빵 굽는 타자기>였다면 이해가 간다. 유독 그 책 만큼은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중 곡예사>를 <빵 굽는 타자기>로 오해하기 위해선 몇몇 인지 장애와 심각한 심리불안이 필요하다. 그 날 나는 찌는 듯한 더위에 짜증이 좀 나 있긴 했지만 사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미스터 버티고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바로 그 책을 사버렸다. 이 책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폴 오스터와의 책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이야기 속에 촘촘히 새겨 넣은 난해한 상징과 사건은 없다. <공중 곡예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이야기의 실타래다. 불우했던 한 남자의 흥망성쇠과 슬픔과 기쁨을 넘나들며 소용돌이 친다. 줄거리를 말해주는 건 의미가 없다. 그저 딱 한 마디만 하면, 새옹지마. <빵 굽는 타자기>가 폴 오스터 자신의 인생을 고백한 수필이었다면 <공중 곡예사>는 이를 소설화 한 것 같은 작품이다. 여기엔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청년 시절, 성공이라 믿었지만 그 뒤에 칼날처럼 도사리던 반복된 몰락의 기록이 있다. 인생의 부침을 여러번 겪다보면 인생을 꿰뚫는 진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얻는대로, 얻지 못하면 얻지 못하는대로 여전히 인생이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다. 새 말을 얻었을 때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떠나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이러쿵 저러쿵 논쟁을 벌여봐야 당신은 동의하지 않을 테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이 논쟁을 끝내겠다. 해보면 안다. 진짜로.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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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오스터의 책은 실망을 주지 않는다. 특히 그의 책은 사시사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읽을 수 있다. 그는 긴장감과 몰입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문장과 기교에 공을 들인다. 재치와 위트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신비주의에 가까운 그의 상상력, 혹은 사유의 범위는 꽤 그럴 듯 하다. 이 책을 예를 들자면, 공중부양이라는 독자는 반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현상 대신, 스토리, 즉 작가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게 바로 폴오스터, 타고난 재담가의 능력이다. 특히 그가 묘사하는 신비로운 개인과 있는 그대로의 사회현상, 즉 시대배경은 묘하게 잘 어울리고, 그러한 장치를 통해 독자는 역사의 관찰자로서 책앞에 서게 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묘한 울림을 느낄 수 있는 건 이러한 시대의식을 간접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책은 재밌다. 재미없는 소설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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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공중곡예사>는 자민누나에게 생일선물 받은 책입니다.
미국 원제는 <MR. VERTIGO>입니다. 열린책들에서는 폴오스터의 책들을 번역해서 출판하고 있습니다. 폴 오스터는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미국에서는 보기 힘든 순문학 작가입니다. 폴 오스터는 1947년 뉴저지의 중산층 가족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콜럼비아 대학에 입학한 후 4년 동안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1974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1970년대에는 주로 시와 번역을 통해 활동합니다. 1980년대에 <스퀴즈 플레이>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은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예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달의 궁전>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중곡예사>도 기대가 됩니다.
너는 짐승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여기에 그냥 남아 있는다면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죽고 말 거다. 하지만 나를 따라온다면 나는 법을 가르쳐주지.
소설은 시작됩니다. 초반부터 흥미진진합니다.
하늘을 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꿈입니다. 저도 어릴때 하늘을 날고 싶어했습니다. 수시로 아파트 3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오층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참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행입니다.
그는 내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납득시켰고, 나는 일단 그 말을 받아들이자 이제부터 내 운명이 어떻게 되건 조금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사부는 틀림없이 내가 그렇게 느끼기를, 속을 끓이다가 안으로 삭이기를 바랐을 것이었다. 살아갈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자기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는 가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다음에는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낯선 사람과 함께 밤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미친 짓일지라도.
뭔가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갈망하면서 속으로 <만일 그걸 가질 수만 있다면 내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될 거야>라는 말을 하지만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갈만하는 물건이 손에 들어오고 나면, 그것은 매력을 잃기 시작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서는 해야할 일이 참 많습니다.
현역육군을 만기제대했습니다. 나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저 보다 어린친구들은 군대에 안갔으면 합니다. 군대는 전쟁과 죽음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전쟁은 없어져야 합니다. 선거전까지만해도 굉장했던 천안함사건은 어디로 갔는지 진실이 궁금해집니다.
<공중곡예사>는 다른 폴 오스터의 소설처럼 흡입력이 굉장합니다. 첫페이지를 열고 눈을 껌뻑하니 마지막 페이지가 열리는 소설은 흔치 않습니다. 당분간 폴 오스터의 소설에 집중을 할 예정입니다. 소설가라면 독자를 끌어야 한다. 스티븐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가 생각납니다. 독자를 끄는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글쓰기는 즐겁습니다. 더욱 열심히 글을 쓰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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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중곡예사'라는 번역 제목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미스터 버티고'나 '현기증씨'가 낫지 않을까.(그만큼 이 소설 속에서 '현기증'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소설 속에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주인공 인생에 있어 한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거리감'이다. 가령 고등학교 때 친구가 건네준 빨간 포장의 말보루를 가슴 깊숙이 삼키고 난 다음 펼쳐지는 거리 풍경과 팽창하는 동공과의 거리 변화 따위나 대학 때 옆에 사모하는 여자를 앉히고는 연거푸 데킬라 스트레이트 잔을 여러 잔 마시고 손을 뻗쳐 그 여자의 얼굴 위로 갖다댈 때, 손가락 끄트머리와 그 여자의 볼 사이의 거리, 그 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푸른 빛깔의 팽팽한 긴장감 따위가 그러한 거리감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허공으로 몸을 띄우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을 띄운다는 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수학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내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내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하는 문장으로 시작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이다. 단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한, 어떤 우의적인 사건을 통해 소설의 여러 사건들을 끌고 가게 만드는 폴 오스터 특유의 장난이다. 이 소설 전체가 이러한 장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을 그대로 관통하지 못하고 어떤 기만적인 태도, 즉 인생과, 혹은 이 세상과 어떤 거리를 두고 그 사이를 장난으로 채워버리는 폴 오스터 특유의 태도가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로 인해 폴 오스터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폴 오스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만적인 태도에 있다. 이 기만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폴 오스터 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길잡이를 한다. 꼭 로베르토 무질의 <<세 여자>>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외부세계에 대한 태도가 폴 오스터에게 와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어떤 교훈적인 것도, 인생에 있어 어떤 통찰도 말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아니 어떤 통찰을 말하는 것 같지만(월트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말들, 가령 '그러면 당신 몸 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따위의 말), 다 우스개소리다. 몸을 허공에 띄울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소설은 몸을 허공에 띄우기를 강요하는 소설이다. 이 어긋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우울함 따위를 선사하는데, 그 이유는 몸을 허공에 띄우든 띄우지 못하든, 우리 인생은 이미 조각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인생은 우리 인생이 아니고, 우리를 인도해줄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 폴 오스터의 작품을 거의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환상의 책> 한 권으로 온 맘을 빼앗겨 그의 작품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인 호감에, 그의 상상력과 글솜씨가 덧붙여져, 이 작품도 여전히 재밌게 읽기는 했지만, 좀 속은 느낌도 없지 않다. 제목 때문에 그랬나... 원제인 Mr.Vertifo를 보면서 좀 이상하긴 했다. 보통 <공중 곡예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가 얼핏 상상할 수 있는 그림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하는 일과는 좀 다르다. 차라리 원제를 그냥 두지. 사실 <빵굽는 타자기>도 좀 속은 느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 읽고 나면 이해가 가니까 좀 덜했다. (사실 제목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얼마나 맛있게 나는가 말이다. 작품에선 하나도 안 고소하다. 오히려 빵 구워 파는 게 얼마나 힘든지가 나온다.) 원제는 Hand to mouth였다. 그러니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뜻이란다. 그 연상이 얼마나 다르단 말인가. <공중 곡예사>는 뒷골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던 소년이, 공중부양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따라나선다. 여기서 공중부양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공중으로 뜨는 기술을 말한다. 온갖 말썽에 반항을 일삼던 소년이 사부가 시키는 대로 별별 고난과 훈련을 다 겪고 나서 정말 공중부양에 성공하게 되고, 그걸로 공연을 하고 스타, 원더보이 월트가 된다는 얘기이다. 때가 20세기 초의 미국이어서, 공황, 전쟁 얘기도 나오긴 하지만, 그런 시대적인 배경보다는 한 아이가 좋은 사부를 만나 성공하고, 또 실패를 맛보고, 인생의 온갖 단맛, 쓴맛을 다 본다는 얘기이다. Mr.Vertigo라는 말은 공중부양을 하다 현기증을 느끼고 두통을 앓기 시작한 월트가 병원에 안 가려고 하자, 사부가 한 말이다. 성공을 거둔 원더보이 월트가 미스터 현기증, 미스터 고소공포증이 되는, 즉 그 성공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이 작품 속에는 아이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노력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모험과 사랑, 우정이 마음 아프게 그려져있다. 마음이 정말 아팠던 이유는 월트가 사랑하게 된 사람들을 잃는 것 때문이었다. 공중부양에 이르는 과정이 궁금하시다면? 책에는 아주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원리는 소개되어 있다. 자, 어디 물 위를 걸어보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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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역전이 몇 번을 거듭한다면, 아마도 나는 돌아버릴 것이다. 역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는 변동의 폭을 감안한다면 그도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던 곳을 전전하던 비렁뱅이였다가 친절한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아 잠재된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 고된 훈련을 감행한 끝에 부와 명성을 얻는- 그리고 다시 또 수개월에 걸쳐 완성한 공든 탑이 눈앞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때의 그 허탈감과 좌절감이란...
‘공중 곡예사’란 직업은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들린다. 하지만 삶과 인생자체도 따지고 보면 그러하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어떠한 인생도 정해진 답은 없다. 그저 한없이 떨어지고 깨지고 무너지는 일에 익숙해져 무감각해질 때까지 우리는 평생 오뚝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콩고물 하나라도 얻어가는 데 감사하며.
옮긴이의 이름은 황보석이다. 나는 가끔 헷갈린다. 폴 오스터의 글에 빠진 건지, 옮긴이에게 빠진 건지. 옮긴이의 글이 내 마음의 90%를 가져갔다면, 원작자인 오스터는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견줌. 역자의 글일 뿐인데도 이토록 나의 심금을 울렸다면, 폴의 글은 과연 얼마나 신비로울까. 그 쓸데없는 고민거리로 동요하는 것도 내 오랜 독서습관이다. 이는 자모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황홀한 활자들의 향연을 제대로 만끽할 줄 아는 자만의 생각이고 질문일 수도 있다.
스스로 가볍게 한방 받아먹기로 했다. 줄거리 위주의 리뷰를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나만의 이기적인 리뷰를 고집해왔다. 그에 따른 계획이 있어서였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그 계획을 좀 수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줄거리를 내비치지 않으련다. 그러니 혹 [공중곡예사]를 읽고 싶다면, 알아서 판단하시길. 하지만 이것 한가지만은 알리고 싶다. 많은 책을 읽지 않았지만, 폴 오스터의 작품에 중독되었다는 사실. [달의 궁전]과 순위를 가늠할 수 없는 같은 깊이의 도서. 이제 그의 세 번째 작품, [거대한 괴물]을 구매할 계획이다.
질리고 질려 혹은 변덕을 부려 그의 작품을 멀리할 수도 있다. 아님 새로운 강자에게 나의 마음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가 나에게 심통 부릴 일도 없으니, 난 마음 푹 놓고 읽어 젖힐 거다. 그님이 끝없이 재림하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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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책을 별 다섯개라 생각한다. 폴오스터의 매력에 듬뿍 더 빠져 들게 한 책이기도 하다
한 소년이 낯선 노인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노인은 아이에게 공중부양을 가르치고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가르치게 된다.. 거부하든 아이도 점차 그매력속으로 빠져 들어가 엄청난 고통도 견뎌내면서.. 공중부양의 참맛을 알게 되고..
많은 여러가지 문제들..인종문제.. 혹은 사랑.. 몇줄로 글로 쓰기엔 아쉬운 책이다..
늘 그렇듯... 폴오스터의 책에는 최악의 고통....그리고 자발적인 빈곤을 체험하는 이야기들은 반드시 나오는듯 하다..
난 리뷰를 좀 이상하게 쓴다..책 내용에 대해서는 잘 쓰지 않는 다만 내 느낌만... 강하게 써대는 버릇이 있는듯하다 너무 자세히 리뷰를 쓰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할까봐 미리 겁먹는..ㅋㅋㅋ 그건 아니고.. 제 실력이 미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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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국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소설가, 시인, 번역가, 극작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끼를 보여주는 다재다능한 작가로, 대중친화적이면서도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는 그의 작품은 카프카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사실주의적인 경향과 신비주의적인 전통이 혼합되고,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명상적 요소가 한데 뒤섞여 있다. 초기엔 프랑스 시인과 극작가들의 영향도 받았지만, [뉴욕삼부곡]을 전기로 삼아 미국문학의 사실주의 전통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폴오스터 소설의 주인공들이 대개 고아거나 외톨이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의 소외된 이방인에게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공중 곡예사]는 80살의 월트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적어내려간 자서전이다. 이야기는 여러모로 [톰소여의 모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자기 앞의 생]처럼 어린 시절의 우화 분위기가 짙은 작품이다. 고아, 공중에 뜨는 능력, (유대인, 인디언, 흑인으로) 재탄생된 가족 구성원, 가족의 비극, 후원자, 크리스마스 이브의 선물 등이 우화적 특성을 강하게 한다. 소년 월트는 톰과 제제처럼 영악한 상상력이 넘치고 매우 착한 심성을 가진 아이다. 톰과 제제의 이야기가 단지 어린시절의 모험과 성장통에만 국한된 반면에 이 소설은 월트의 전반적인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격을 달리한다.
1915년 생인 월트의 삶은 굴곡이 크다. 미국의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간다. 먼저 12살 무렵에는 전국적인 스타 '원더보이' 로 살아간다. 예후디 사부의 훈련을 받은 월트는 공중 공연 예술가로 성장한다. 9살부터 시작된 3년간의 훈련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어서 훈련 같지도 않은 훈련도 있었고, 가학적이고 기이해서 고문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훈련도 있었다. 이 때 월트는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 나름 행복한 삶을 보낸다. KKK단에게 수 아주머니와 이솝이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인디언 피가 흐르는 수 아주머니와 흑인으로 머리가 명석한 이솝은 그에게 가족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거듭되는 공연성공을 거두며 월트는 단순한 흥행을 위한 공연자가 아니라 최고의 예술가로 거듭난다.
"나는 이제 단순한 로봇, 매번의 공연에서 똑같은 기교를 선보이는 태엽 감은 원숭이가 아니라 예술가,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공연하는 진정한 창조자로 발전하고 있었다. 나를 자극했던 것은 예측불가능성, 즉 한 공연에서 다음 공연으로 넘어가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모험심이었다. 만일 내 목표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환심을 사는 것뿐이었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쁜 습관에 빠져들 것이고 마침내는 사람들이 내게 싫증을 느끼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계속 나 자신을 시험하며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내 재능을 발전시켜야 했다. 물론 나는 자신을 위해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잘해서 팬들의 사랑을 받으려는 투쟁이었다. "(186-7쪽)
20대 무렵 월트는 암흑가의 일원이 된다. 그가 원더보이에서 암흑가의 건달이 되기까지는 애석하게도 예후디 사부의 죽음을 논해야 한다. 예후디는 현자에 가까운 월트의 멘토이자 사업기획자였고, 월트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고 인생을 살아가는 나침반이었다. 예후디는 공연내내 라틴어로 쓰여진 스피노자의 책을 거듭해서 읽는데 절대로 동이 나지 않는 술잔처럼 매력적인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월트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공중부양이 심한 두통과 현기증을 유발하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자 사부는 월트에게 '미스터 버티고(공중 곡예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고, 공중공연을 접는다. 이들은 헐리우드에서 배우가 될 계획을 꿈꾸지만 예후디 사부가 월트의 망나니 삼촌 슬림의 손에 의해 죽음에 이르자 월트는 복수하기 위해 슬림을 뒤쫓고 살해한다. 거기서 시카고 암흑가의 2인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암흑가에 투신한다. 암흑가에서도 승승장구하여 '미스터 버티고'라는 고급 클럽의 지배인이 된다.
30대 무렵에는 2차대전에 참전하여 퇴역하고 잠시 떠돌이 신세로 지내다가 메이어호프 제빵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동료 몰리와 결혼하여 가정도 꾸리지만 몰리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23년간 평범하게 살다 몰리가 암으로 죽는다. 50대 무렵에는 위치토로 돌아가 워더스푼 부인과 다시 조우하고 그녀와 함께 살며 그녀의 자동세탁소 사업을 돕는다. 월트에게 예후디 외에 또다른 멘토가 있다면 그건 바로 위더스푼 부인인 셈이다. 그녀는 월트가 어렸을 때는 예후디 사부의 연인이자 원더보이의 후원자였고, 월트가 중년이 되자 그의 동반자가 된다. 그녀와 함께 11년의 세월을 보내고 월트는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