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쓴 모든 작품을 읽은, 앞으로도 더욱 계속 읽고 싶은 작가들이 있다. 토니 모리슨도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내게는 줌파 라히리, 파스칼 키냐르, 제임스 셜터, 찰스 부코스키 등이 이러한 작가군에 속한다.) 나는 토리 모리슨을 향하여, “여성과 인종이라는 두 가지의 문제를 사실과 환상이라는 두 개의 차원에 교묘히 중첩시킴으로써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작품을 쓴다. 매 작품의 독서에서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토니 모리슨이 강연 시리즈를 시작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상대는 정치적으로는 경량급이라고 여겨지던 남성이었고 대세는 클린턴이 훨씬 우세했다. 이 모든 상황은 역사의 명령을 거스르고 마침내 ‘도덕적인 우주가 그리는 긴 원호의 끝에 있는 정의’라는 종점에 마침내 도달하려고 애쓰는 한 나라의 궤적을 증언하고 있었다(마틴 루터 킹 목사는 “도덕적 우주가 긴 원호를 그리지만 그 원호는 결국 정의를 향해 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옮긴이)
나는 약자를 향하는 선한 의지를 정의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토니 모리슨이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차별받는 인종 그리고 여성을 향하여 보여 주는 선한 의지는 그 자체로 정의롭다. 그러한 토니 모리슨이 《타인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책 안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미국 내의 흑인 차별이 어떤 마음으로부터 기인하였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기원은 많은 차별과 혐오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을 법하다.
“... 고등 동물인 인간은 우리 부족 사람과 그 밖의 사람을 구분지은 뒤 상대를 적으로, 즉 취약하고 결핍이 있으며 통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오래된 경향은 단순히 동물계나 선사시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피부색은 부, 계급, 젠더와 마찬가지로 다름을 판단하는 데에서 끊임없이 결정권을 행사해 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권력의 통제의 필요와 관련되어 있다.” (p.26)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권력의 통제의 필요’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 속하는 것과 우리에 속하지 않는 것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나눔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저 눈에 확 띄는 것이면 충분하였을 텐데, 생김새 그중에서도 피부색은 이러한 기준으로 삼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 짓기는 통제의 방식으로 아직 그 시효가 소멸되지 않았다.
“인종은 특정한 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는 인류라는 종에 속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은 다 무엇인가? 적개심은 무엇이며, 사회적 인종차별은 무엇이고, 게다가 타자화란 대체 무엇인가? 타자화가 가진 매력, 그것이 주는 위안과 사회적·심리적·경제적 권력은 어떤 성격을 갖는가? 소속감을―‘나’라는 개별적 자아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그래서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암묵적인 의미를―느끼는 데서 오는 짜릿함일까?
그리고 이러한 구분짓기는 타자화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방인을 상정하고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타자화의 주체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소속감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부여하게 될 것이고, 그 소속감의 원천에는 타자화의 객체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사회 경제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는 길지 않은 몇 편의 글을 통하여 이를 분석하고, 자신의 소설 몇 편을 가져와 이를 인증한다.
“이방인은 바깥의 존재도 아니고 임의로 존재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억된 존재이다. 굳이 인지하지 않더라도, 그런 존재가 내 자아와 우연히 만났을 때 바로 경계심이 물결치듯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이 불러일으키는 모습과 감정, 특히 그 감정이 아주 심오할 때 비로소 거부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타자를 소유하고지배하고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타자의 마음을 빼앗아 내 자신의 거울 속으로 도로 데리고 들어오고 싶어 한다. 어떤 경우에든―경계심을 갖든, 헛된 존경심을 느끼든―인간은 타자에게 개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자신은 꼭 지녀야 한다고 고집하는 그 개인적 특성을 남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p.75)
토니 모리슨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바를 향해 멈추지 않는 서술을 하는 작가였다. (작가는 2019년 8월에 88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이방인을 향하는 타자화와 이를 통하여 소속감과 안정화를 누리고자 하는 유혹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이기도 하다. 나는 누릴 수 있지만 당신은 안 돼, 의 마음이 아니라 내가 누릴 수 있으니 당신도 누릴 수 있어야 해, 의 의지가 만연하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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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리뷰하면서 최근에 리뷰한 장정일의 <신악서총람>에서 그가 말한 "기원에는 기원이 있기 마련이다"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와 관련해 '인종차별'의 기원과 언급하자면 이 책에서 토니 모리슨은 상당히 인상적인 말을 한다. "인종차별이라는 현재진행형의 범죄를 지우기 위해 '인종'이라는 현재진행형이 아닌 개념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인종차별주의'가 아닌 '인종'을 언급할 때 우리는 인종이 자연 세계의 한 특징적 요소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도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결과라는 생각을 구체화하게 된다" '타자화된 최초의 기억'이라는 타이틀의 글을 시작하 전에도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이 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집단은, 권력이 있든 없든,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 언급한 것들을 아울러 말하자면 그 유명한 '구별짓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다르거나 특히 '우리'라고 할 수 있을 것과 조금이라도 다를 때 그 대상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짓밟는 건 오랜 역사다. 사실상 본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꽤 어린 나이의 아이들부터 지켜보면 그러한 구별짓기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다. 미국에서 인류학 수업을 교양으로 수강할 때 교수님은 "race라는 것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딱 하나의 race만 있을 뿐이며 그건 바로 human race"라는 말이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생각났다. 똑같은 말을 바로 이 책에서도 하기 때문. 150페이지도 안 되는 다소 얇은 분량에 판형도 작아서 쉽고 가볍게 읽힐 수 있는 책이지만, 으레 그런 책들이 그렇듯 전하는 내용은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다. 누군가를 타자화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한번씩 다시 들춰 보아야 할 책이다. |
바다출판사에서 출간된 토니 모리슨의 타인의 기원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바다출판사의 책들에 꽤나 흥미를 느끼는 편인데 출판사 인스타그램에서 글을 보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책 자체는 그리 분량이 많지도 않고, 가벼운 편이지만 그 내용만큼은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에세이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타자화에 대해 깊이 성찰한 작가의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작가의 소설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면 마음에 더욱 와닿는 작품이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
첫 장부터 이러면 책 내용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번역이 그런 건지 술술 읽히는 글도 아닌데 기본적인 편집 실수를 첫 장부터 할 수가 있나요? 이건 검수 자체를 안했다는 건데… 종이책과 비교해보지 못해서 잘 옮긴 건지 모르겠는데 뒤 페이지도 편집이 엉망이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북도 엄연히 돈을 받고 판매하는 책인데 이렇게 검수를 안할거면 이북 만들지 마시고요. 이북으로 산 사람들에게 종이책을 주든지 다시 만들어 배포하거나 환불해주세요. 이런 성의없는 이북 제작은 이북 리더로서 많이 불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