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67%
  • 리뷰 총점8 25%
  • 리뷰 총점6 8%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9.0
  • 50대 9.0

포토/동영상 (4)

리뷰 총점 종이책 구매
[19-34] 일본 다도의 시작과 교토 도자기의 발달
"[19-34] 일본 다도의 시작과 교토 도자기의 발달" 내용보기
의외로 조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 교토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토[京都]를 일본의 전통이 짙게 배인, 일본의 경주와 같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들여다보면 교토만큼 조선인의 숨결을 많이 읽을 수 있는 곳도 없다는 것이다.고개를 기우뚱거릴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영국의 청교도
"[19-34] 일본 다도의 시작과 교토 도자기의 발달" 내용보기

의외로 조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 교토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토[京都]를 일본의 전통이 짙게 배인, 일본의 경주와 같은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들여다보면 교토만큼 조선인의 숨결을 많이 읽을 수 있는 곳도 없다는 것이다.

고개를 기우뚱거릴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이룩한 문화는 미국문화이지 영국문화가 아니듯, 한반도의 도래인(渡來人)이 건너가 이룩한 문화는 한국문화가 아니라 일본문화1)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인의 숨결이 많이 담겨 있으면서 동시에 일본의 전통이 짙게 배여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도(茶道)와 도자기, 국화와 칼의 변용(變容)

 

일본 전국시대 효웅(梟雄)의 하나로 자신이 소장한 명품 차솥[茶釜]를 지키기 위해 죽음마저 불사한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1510~1577]의 일화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다구(茶具)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다구는 곧 자신의 명예이자 존재 가치의 모든 것이라는 함의가 있었다. 그만큼 이에 대한 집착도 상상을 초월했다.” [p. 8]

 

왜 일본에서 이렇게 다도(茶道)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유럽에서 프랑스어가 교양이었던 것처럼 일본의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다도는 교양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처럼 다도를 정치의 도구로 이용한 이들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처음 다도(茶道)가 전해졌을 때는 송()나라의 투차(鬪茶)’ 풍속이 전해졌다고 한다. 여기에 쿠게[公家]에 대한 신분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사무라이와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상인들의 자기과시욕에 결합되어 값비싼 차와 다완(茶碗)을 자랑하는 서원차(書院茶)가 유행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졸부(猝富)의 과시욕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다.

이러한 추세를 바꾼 것이, 후에 다성(茶聖)이라고 불린 센노 리큐[千利休, 1522~1591]였다. 그는 화경청적(和敬淸寂), 즉 화합과 공명, 맑음과 고요의 선정(禪定) 상태를 이루는 마음을 강조” [p. 31]했고, 이는 기존의 서원차와 상반된 주장이었다. 이에 그는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초암차(草庵茶)가 지닌 자연주의를 일본식으로 변형한 와비차[ ]를 내세웠다. 이는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 센노 리큐는 화려와 사치에 빠진 일본 차 문화의 물신(物神) 숭배를 바꾸기 위해 와비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에 맞아떨어진 것이 이도[井戶]다완이었다. 화려한 흑유(黑釉) 계통의 텐모쿠[天目]다완 대신에 소박한 이도다완이 채택된 것이다. ” [p. 149]

그러면서 센노 리큐는 조선 기와공 송경(宋慶)의 아들 송장우(宋長祐), 즉 초지로 [長次郞, ?~1589]에게 다도에 쓸 찻사발을 굽게 시켰는데, 이것이 일본의 명물 라쿠야키 [樂燒]의 시초라고 한다. 일본화된 조선 도자기인 셈이다.

 

센노 리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도자기와 이를 만드는 사기장(沙器匠)이라는 보물을 약탈한 전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토는 다도 문화를 성숙시킬 수 있었다.

 

일본에서 다기는 첫째 이도[井戶], 둘째 라쿠[], 셋째 가라쓰[唐津]’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 가운데 하나인) 가라쓰야키[唐津燒]는 비록 그 뿌리는 조선 도자에 있지만 더 이상 조선 도자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조선 도공의 후예들은 더 이상 조선인이 아니었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일본인으로, 일본인의 정서와 수요, 욕구에 맞추어 가라쓰야키[唐津燒]발전시켰다. 일본 속의 한국문화로 머물지 않고 일본문화로 발전/성장한 것이다.2)

그 과정에서 일본화된 조선 도자기 혹은 일본 도자기(이하 일본 도자기’)에는 국화와 칼로 대표되는 일본인의 본성이 담겨갔다.

일본 도자기를 취재하면서 필자는 수도 없이 많은 잇쇼켄메이[一生懸命]’를 만났다. ‘잇쇼켄메이는 도자기를 굽는 현장 어디서나, 역사 속 어디에나 있었다. ‘잇쇼켄메이는 목숨을 걸기 때문에 늘 시퍼런 긴장의 날이 서 있다.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사기장들은 서늘한 칼날 위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뛰어난 도자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 도자기야말로 국화와 칼이다. 칼날의 긴장을 담고 있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pp. 11~12]

 

 

부끄러운 한국의 문화재 인식

 

이렇게 일본은 우리의 도자기 기술을 가져다 세계 시장을 제패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간단하다. 유홍준 교수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도자기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 분청사기가 뛰어나다는 주장만 했지 생활 속에서 그것을 즐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도자의 가치를 일본인들은 일찍이 알아챘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마냥 즐기고 있다. 우리는 고유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줄 몰랐고, 일본은 그 고유기술을 통째로 가져가 자신들의 위대한 도자기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반성할 대상은 우리 자신에 있다 3)라고 한탄한 것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지금의 상태가 계속되면, 김시습의 초암차(草庵茶)처럼 우리의 도자기 문화도 잊혀질지 모른다.

터무니 없는 헛소리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도와 결합한 교토의 도자기 문화는 일본인들에게 최고의 자부심으로 작용한다. 아울러 도자기와 다도의 콜라보레이션, 하이브리드는 교토를 찾는 이들의 매력적인 관광 상품이 된다” [p. 511]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쪽은 열심히 계승 발전시키고, 다른 한쪽은 가끔 생각나면 말로만 자랑스럽다고 할 뿐이니…….

 

뿐만 아니라 뿌리깊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식과 천민 자본주의가 결합된 천박한 문화의식도 한 몫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언급했듯이 오사카[大阪]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은 세계 제일의 동양 도자 컬렉션을 자랑한다. 불행히도 여기에도 평생 단기(檀紀)를 고집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높은 이마저 외면하게 만드는 한국의 처참한 문화재 의식이 작용했다.

외교관을 지낸 재일교포 이병창(李秉昌, 1916~2005) 박사가 1999년 자신이 소장한 한국 도자기 301점과 중국 도자기 50, 연구기금을 이곳에 기증한 사실도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다. 게다가 그의 컬렉션이 오사카에 있게 된 이유에 창피할 정도로 수준 낮은 우리 문화재 인식과 관료들의 탁상행정 그리고 몰이해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더욱 화가 솟구친다.

이 박사는 1999 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평소 아끼던 소위 달항아리라 불리는 커다란 백자 항아리 한 점을 기증하며 온도와 습도를 맞춰 전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당시 박물관은 그러한 요구 조건에 맞출 설비가 없다고 답했고, “그렇다면 내가 돈을 내어 그런 전시실을 짓겠다고 했는데도 거절을 당했다. 결국 그의 기증품은 공개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다시 서울에 와서 그 물건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pp. 445~446]

이 정도면 그가 기증한 백자 항아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병창 박사의 일만 아니다. 평생 모은 골동품과 우표를 기증했는데 관리소홀로 골동품36 , 우표 500여장이 사라지고, 기증을 요청했던 시장이 바뀌자 구두 약속했던 박물관 옆 작은 매점의 운영조차 박탈당하는 등 푸대접을 받은 남기석4)의 사례도 있다.

 

 

한국의 도자기 문화를 유지하려면

 

한국 도자기 문화를 유지하려면 먼저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 도자기가 그릇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말로만 고려청자, 조선백자가 우수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오래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을 실생활에 쓰자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시 등을 통해 수장고(收藏庫)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고, 그들의 맥을 잇는 도자기를 쓰자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단지 조금만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면 된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우리 문화의 근본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양념은 옹기 없이는 만들 수 없다 그 질박한 항아리를 통해야만 비로소 고추장도, 된장도, 간장도 생겨난다. 이는 도자기가 곧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임을 말해준다. 도자기 없이는 우리의 일상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불편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도자기가 우리와 늘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만 여긴다.”[p. 511]

아니, 자꾸 자꾸 박제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생활 도자기를 업신여기고 장식 도자기만을 값어치 있는 도자기로 대접한 우리 문화계의 풍토” [p. 511]가 작용하고 있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轉倒)된 터무니 없는 짓거리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사물을 그 목적대로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이런 것들이 하나 둘 모여 우리 도자기 문화도 제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1)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1 규슈, (창비, 2013), p. 12

2) 유홍준, 앞의 책, p. 120

3) 유홍준, 앞의 책, pp. 122~123

4)나라 믿고 골동품 기증했더니… 22년 뒤 참담한 결과”, SBS뉴스 2015.11.16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70181

w******f 2019.07.01. 신고 공감 15 댓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