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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토피아
역자의 말이 맨 앞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럴 읽어보고, 책을 시작하게 된다.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 책에는 저자의 글 6개가 실려있다.
그렇게 읽어간 글, 첫 번째 글부터 막힌다. 이제 뭐지? 무슨 글이야? 편지글인가 편지글인 것은 맞다. 글 앞머리에 이런 글이 써있으니까. ‘멀리 있는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그렇게 첫 번째 글을 두 번, 아니 세 번을 읽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용도 그렇거니와 글쓴 이의 상황을 모르니 무슨 영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별수 없이 책을 덮고 탐험을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누구며, 이 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볼 심산으로 인터넷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났다. 바로 예스 24의 이 책 소개문이다.
<예스 24 책 소개글>
어찌된 일인지 여기에서도 다섯 번째 글인 <유토피아의 메커니즘>에 관한 소개는 빠졌다.
어쨌든 아쉬운 점은 이거다. 이런 글을 왜 책에서는 읽지 못하고 다른 수고를 해서 찾아내 읽어야 하는지? 예스 24의 책 소개에 나오는 정도니까 충분히 책에 집어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과는 별개로, 그런 소개글을 읽고 이 책을 읽으니 조금씩 안개가 걷히는 듯,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시오랑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냉혹하다.
시오랑의 글은 통렬하다. 냉혹하다. 어쩌면 저런 글들을 서슴치 않고 쓸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이런 글들 읽어보자.
모두다 금쪽같은 아포리즘이다. 인간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이 책에 넘치고 넘쳐난다. 해서 어떤 생각의 뭉치를 전하는 단락도 좋지만, 그 생각을 전달하는 문장 하나하나 마다 모두다 새겨볼 만하다.
인간들의 모습, 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해 놓았다.
거기에 저자의 넋두리가 얹혀진다.
맥베스와 히틀러, 스탈린의 공통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어른거린다.
이에 대하여는 별도의 글로 남긴다. http://blog.yes24.com/document/17054465
역사의 속내를 파악한다.
이슬람 군주 마호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을 때 일이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분열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로마 교황은 도움의 손길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기 위한 파병을 약속한 것이다.
특별히 유토피아에 관련된 부분 :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유토피아와 관련된 부분이다. 먼저 역자가 <옮긴 이의 말>에서 언급한 유토피아 관련 글 읽어보자.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저자의 글이 확실하게 해준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우리가 정말 이상향으로 생각하던 유토피아가 얼마나 허술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유토피아는 흐트러진 한 사람만 있어도 허물어지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 밑줄 긋고 새겨가며 가슴에 품어야 한다.
다시, 이 책은
맨 처음 읽을 때에는 마치 안개속을 헤매는 것 같았는데, 에밀 시오랑의 말투에 익숙해지고 나니. 그의 말이 모두 다 꿀같이 달게 느껴진다. 우리의 진짜 모습을 밝혀 보여주는 그의 혜안이 놀랍고, 역사와 유토피아의 관계가 어떤지를 짚어주는 명쾌한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역사에 대하여는 이 말, 기억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역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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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활동은 유토피아의 반대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역사의 본질은 정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변화이다. 변화의 동력은 다양성이며, 단절이고 돌발성이다. 변화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의식은 선택의 가능성을 열며, 자유를 갖게 하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간은 의식을,자유를, 지식을 포기할 수 없다.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러시아가 모호한 눈에서 선명한 주도로 옮겨가려는 데는 근거가 없지 않다. 만일 러시아가 몽골의 침입을 중단시키고 소멸시키지 않았더라면 서유럽은 어떻게 되었을까? 러시아는 두 세기 넘게 굴욕과 예속의 시간을 살면서 역사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는 동안 서쪽 유럽인들은 서로 물고 찢고 싸우는 여유를 누렸다. (본문) 나의 행운을 바라보는 당신의 부러움이다. 질투심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 않고는 편지를 끝낼 수 없습니다. 조국에 부리를 내리고 있는 당신 역시도 동경하며 추억하는 도시 파리에 안주할 수 있었던 '행운' 말입니다. 이 조시를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파리는 내 불행의 근원입니다. (본문) 에밀시오랑은 1911년 카르파티아산맥 작은 마을 트란실바니아 출신이다. 그는 루마니아 출신 철학자로 소개하고 있는데,그가 태어난 시점, 그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던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에 루마니아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작품 대부분 프랑스어를 쓰면서,『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는 루마니아 철학자이며, 에세이스트였다. 책 『역사와 유토피아』는 인간의 삶을 철학적으로 조망하고 있으며, 인간은 유토피알르 꿈꾸면서, 현실의 본질적인 형태는 왜 역사를 쓰고 현재에 머무르며, 현실과 역사는 대부분 디스토피아로 엮이고 있음을 적시한다.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 나치 독일이 유대인학살과 , 유럽 전역을 독일의 지배하에 놓인 히틀러가 지배하였던 시기였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이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점이다. 그가 니체와 쇼펜하우어에게 심취하였으며, 쇼펜하우어의 창조적 염세주의가 그의 작품에 녹아있다.고야의 하푸을 느끼게 해주는 에세이를 주로 쓰고 있었다. 패자들의 애독서, 독설의 팡세, 존재의 유혹, 해체의 개설, 태어남의 불편함, 고백의 저주 등이 현재 남아 있다. 역사적 변화의 물줄기 속에서, 저자가 『역사와 유토피아』를 쓴 시점은 ,저지의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던 1950년대였으며, 책을 쓴 시점은 양차 대전이 끝나고,6.25 한국전쟁이 끝난 시점이다.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사람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생존이 남아 있었다. 그가 그 고통스러운 삶 속에 어둠에 대해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모순과 자가당착에 대해 하나하나에 대해서,인간은 역사 속에서, 담고자 하였으며, 에밀시오랑이 염세주의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다. 인간은 의식을,자유를, 지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항상 기록에 의존한다. 그가 살았던 그 시대의 암울하고, 어두운 역사의 중심에 있으면서,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는 여명의 순간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기록과 인간의 부조리함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있다.그의 통찰이 엿보이는 책 『역사와 유토피아 』는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에 비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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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기억이나 예감이 없다면 숨을 쉬는 것도 형벌이다. 이 무슨 번역을 잘못한 게 아닌가 싶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무엇인지는 천천히 알아보자. 역시나 어렵고, 힘든 책이었다. 예상했던 만큼 힘들었다. 이 책은 굉장히 비판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철학자의 비판이니 만큼 그 비판하는 대상을 설명하는 것부터 심상치 않고 어려웠다. 먼저 시오랑은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저신이 무엇을 비판하고자 하는지 소개하는 듯 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폭력적인 권력을 지녔던 폭군들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이 두 부분에서 시오랑은 자유라는 것에 가치를 두는 구나 싶었다. 그 이후에는 미움으로 복수하는 우리에 대한 성찰이 이어지는데, 폭군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싶은게 아닌가 생각해봤다. 다음으로 유토피아, 이상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두 가지 부분, 동전의 양면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꿈꾸어야 한다고 말하며 행복은 꿈으로 갖게 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부분에서 에덴의 기억이나 예감이 없다면 숨을 쉬는 것도 형벌이란 말에 단서가 잡히는 듯 했다. 그러나 시오랑은 유토피아에 대한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동시에 비판한다. 유토피아가 그리는 사회는 인간의 냄새가 없다고 했는데, 악의 부재를 문제시 했다는 것이 새로웠다. 자, 어쨌든 시오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시오랑이 말하길 인간은 유토피아를 꿈꾸어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이다. 그렇기에 자유가 억압되는 유토피아는 꿈을 꾸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역사이지만, 우리가 경계하고 비판해야할 대상이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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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책에서 그가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에 대해 말했습니다. 플라톤의 이상향에서는 사람들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고 음악과 체육 교육을 하며, 필요 이상으로 사유 재산을 가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식사하며 생활하네요.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의 세계를 언급하였는데 그중에는 조지 오웰이 쓴 '1984' 처럼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묘사한 책도 있습니다.
에밀 시오랑이라는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는데 루마니아 출신으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았던 철학자로 다수의 책을 내면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역사와 유토피아' 에서는 역사 속에 나타난 사건들을 통해 유토피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늦게까지 전제 군주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는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성립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공산주의가 나타난 나라는 뜻밖에도 농업 사회였던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처음에는 이상향으로 보였지만 곧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네요. 저자는 러시아의 자유를 보지는 못했지만 공산주의는 결국 90년대에 무너졌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폭군들이 등장했습니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이후부터는 권력으로 인해 조금씩 무너졌네요.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빼앗길까봐 두려운데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는 뜻을 같이 해온 바로 옆 동지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강력한 로마 제국을 만든 카이사르의 가장 큰 실수는 측근들을 경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양의 역사에서도 자주 볼 수 있네요.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서 현실에 불만이 있는 만큼 이상향의 세계를 꿈꿉니다. 그런데 이상향의 세계를 나타내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입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누구나 행복할것 같지만 저자는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면서 마치 인형처럼 사는 것을 끔찍하게 여기면서 진정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네요. 책과 저자 소개를 찾아보면 도발적이면서 사회 현실을 비판하였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것 같아요.
책은 작고 얇은 편이지만 처음에는 읽어나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몇 번 반복해서 읽다보니 조금씩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이해되었네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공산주의를 피해 프랑스에 정착하고 글도 루마니아어 대신 프랑스어로 쓰면서 많은 혼란을 겪었을텐데 이러한 점도 저자의 철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저자에 관심이 가는데 다른 책들도 한번 찾아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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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토피아》 는 에밀 시오랑의 책이에요. 우선 작가에 대한 소개가 필요한 것 같아요. 에밀 시오랑은 1911년 카르파티아 산맥 작은 마을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났고, 당시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에 속해 있었는데 아버지가 조국이 헝가리화되는 걸 저항하는 의미로 자식들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철학과에 입학한 시오랑은 그때 불면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고 하네요.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사유한 모든 것을 프랑스어로 옮겨놓은 허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라고 해요.
"빌려 쓰는 남의 언어 프랑스어와 씨름했던 지난 시간은 악몽이었습니다. ... 나 같은 스키타이족이 어떻게 거기에 적응해서 정확한 의미와 관념들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 불행하게도 돌아서기에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국어를 버리지 않았겠지요. 신선한 것과 썩어가는 것의 냄새, 햇살과 진흙, 추한 슬픔, 당당한 상스러움이 있는 루마니아어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선택해야 했던 언어가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쏟은 노력이 인질입니다." (14-15p)
이 책은 멀리 있는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되는데, 저자의 고백처럼 느껴지네요. 서유럽의 복잡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저자가 느끼는 고통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사유하는 존재인 자신을 우연히 병에 걸린 환자 혹은 문명인들 틈에 있는 침입자로 인식하고 있어요. 1950년대 후반의 정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2022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더 소름끼치는 부분이에요. 러시아는 이미 차지하고 있는 넓은 공간을 명분으로 영토 확장 계획을 변명한다는 저자의 지적이 예리하네요. "충분히 가지고 있는 바에야 넘치게 갖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70p) 그들의 선언과 침묵이 담고 있는 무언의 역설이라는 것. 러시아는 우리가 사는 역사적 순간의 어둠을 수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라라고 표현했는데, 현재 러시아가 저지른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전 세계를 신냉전 시대로 몰고 갔어요. 욕망이 넘치는 세상에 사는 한, 사소한 악덕들이 훌륭한 미덕보다 효율이 높은 법, 행위가 지배하고 역동성이 지배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들의 정치적 측면이라는 것. 자신을 안다는 것은 행위의 저질적 동기를 아는 것이고, 본성에 새겨진 고백할 수 없는 것들을 아는 것이며, 우리의 생산성을 좌우하는 단점을 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네요.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다면 유토피아는 부질없는 환상인 거예요. 저자의 고통과 혼란 그리고 회의주의는 깊이 상처받은 영혼의 사디즘이에요. 그 상처를 들여다볼수록 우리가 해방되지 못한 존재라는 조건을 떠올리게 되고, 반복되는 역사를 지켜보게 되네요. 유토피아와 세계 종말의 개념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서로 영향을 주며 이어져 왔고, 우리를 위협하는 현실을 반영하기에 적절한 도구이기도 해요. 그러나 우리의 불행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해요. 헛된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인 거죠.
"국민을 어떻게 보는가?" 아이러니를 섞지 않고 국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상가나 역사가는 자격미달이다. 국민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역사적 사건들과 통치자의 망상을 감내하는 것이다.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괴롭히는 계획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 국민이 누리는 단 하나의 사치가 혁명이다." (88-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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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사와 유토피아』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무거운 철학·종교·사상·국가 등의 개념을 동원해 부조리한 사회 비판의 에세이다. 에세이지만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에세이의 정의에 한층 가깝게 간다. 에세이는 개인의 상념을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한두가지 주제를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으로 논하는 비허구적 산문 양식. 에세이는 통상 일기·편지·감상문·기행문·소평론 등 광범위한 산문양식을 포괄하며, 모든 문학형식 가운데 가장 유연하고 융통성있는 것 가운데 하나라는 사전적 풀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에세이의 종류를 기술할 땐 에세이와 미셀러니(miscellany), 혹은 공식적(formal) 에세이와 비공식적(informal) 에세이로 나누기도 하는데, 전자는 대개 지적·객관적·논리적 성격이 강하며, 후자에는 감성적·주관적·개인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문학비평용어사전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플라톤의 『대화록』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이 장르의 속성을 갖고 있지만, 프랑스의 몽테뉴(Montaigne)가 쓴 『수상록(Essais)』에서 현재의 의미로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후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과 찰스 램,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와 발터 벤야민, 미국의 랄프 에머슨 등을 통해 에세이의 현대적 모습과 각국의 문화적 특성에 따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분류에 따른다면 이 책 『역사와 유토피아』는 몽테뉴의 『수상록(Essais)』처럼 포멀 에세이에 속한다. 6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진 이 책 각 장의 제목만 보아도 이 책이 포멀 에세이집이라는 사실을 금세 눈치 챌 수 있다. 1장 「두 유형의 사회에 대하여」, 2장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 3장 「폭군들의 학교에서」, 4장 「원한의 오디세이아」, 5장 「유토피아의 매커니즘」, 6장 「황금기」이다.
나치 독일의 멸망으로 루마니아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되어버리자, 파리에서 무국적자로 머물러야 했던 이 책의 저자 에밀 시오랑은 루마니아어와 이별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로 결정한다. 『역사와 유토피아』는 1960년에 출간된 그의 네 번째 프랑스어 작품으로 상까지 수상하며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첫 에세이 「두 유형의 사회에 대하여」는 루마니아 철학자 콘스탄틴 노이카(Constantin Noica)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권력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시오랑에 따르면 역사는 정해진 어떤 방향이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저 그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무리 중 가장 강한 자가 권력을 잡는다는 것.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에서 그는 러시아, 러시아의 역사, 발전, 그리고 그가 “자유의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시선을 보여준다. 「폭군의 학교에서」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그는 보기 드문 명쾌함과 설득력 있는 논리로 폭군과 폭정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원한의 오디세이아」에서는 ‘이웃을 미워하는’, 즉각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복수를 하려는 우리 모두의 뿌리 깊은 꿈을 조사한다. 마지막 「황금기」에서는 수많은 시인과 사상가의 유토피아인 성경의 에덴동산인 “황금기”의 개념을 분석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글들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와 독설과 풍부한 지식과 ‘무해’한 사상을 구사한 그의 문명 비평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독자는 사실 저자 에밀 시오랑(Emil Michel Cioran)도 처음 접하고, 그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진 못했다.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짧은 글로 이 책의 '서문'의 역할을 하는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1960년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된 시오랑의 『역사와 유토피아』는 역사와 유토피아라는 두 명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지만 항상 시사성을 잃지 않고 있는 주제다. 함축적인 짧은 글로 이루어진 다른 저자들과 달리 인용문과 세밀한 분석으로 통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특유의 날카로운 독설이 완화되어 있지만, 시오랑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냉혹하다. 인간은 선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다. 권력을 향한 욕망, 원한, 질투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다. 경쟁과 투쟁으로 피로한 인간은 열렬하게 유토피아를 염원한다. 유토피아는 가능할까? 아니다. 유토피아는 경직과 침체를 피할 수 있는 개념으로 유용하지만 결코 실현된 수도 없고, 실현되어서도 안 되는 이상향이다. 악의 어둠이 사라지고 빛만 존재하는 일원성의 세계, 갈등과 다양성이 진정된 세계, 영원한 현재가 지배하는 정체된 세계, 그 유토피아에서 인간은 살 수 없다. 그 획일성과 단조로움에서 인간은 질식한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유토피아와 반대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역사의 본질은 정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돌발성이다. 변화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의 의식은 선택의 가능성을 열며 자유를 갖게 하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간은 의식을, 자유를, 지식을 포기할 수 없다.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용기를 내어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구원을 인간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시오랑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인본주의적이다.(p.7)
시오랑은 이 책에서 유토피아, 종교(가톨릭), 러시아, 사회주의에 대해 천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11년 루마니아 태생이다. 익숙한 이름 시오랑도 아니고 ‘치오란’이라고 한다. 루마니아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베를린 대학교에서 장학금으로 수학했지만 철학적 에세이, 개인 사상가로의 활동이나 책쓰기에 몰두했던 것 같다. 루마니아로 돌아가 잠시 철학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1937년 프랑스 문화원 장학생으로 소르본 대학교 철학과에 등록했지만 수업과 논문 쓰기를 버리고 프랑스 전국을 자전거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직후 1947년 조국 루마니아와 결별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소련 치하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책에서 나와 있지는 않은 사실이고 단순히 독자의 추정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명분이든 동방정교의 명분이든 러시아는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명성을 무너트릴 운명을 타고났다. 러시아인들이 가톨릭의 목표를 용납하려면 자신들의 사명과 계획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황제 치하의 러시아인들은 가톨릭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도구라고 규정하고 ‘저주’의 기도를 했다. 지금은 가톨릭을 반동의 앞잡이 사탄으로 생각하고 옛날의 저주보다 더 강도 높은 욕설을 퍼붓고 있다. 곧 모든 무게와 힘으로 가톨릭을 침몰시킬 것이다. 금세기 깜짝 사건의 하나로 베드로 성자의 마지막 후계자 교황이 사라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p.51) -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 중에서
시오랑은 학계나 사상가, 철학자들과의 교류를 하지 않은 채 프랑스어로 쓴 책들에서 절제된 아포리즘적 절규로 많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고 한다. 『해체의 개설(Precis de decomposition)』, 『고통의 삼단논법(Syllogismes de l’amertume)』(1952), 『존재의 유혹(La tentation d’exister)』(1956), 『역사와 유토피아(Histoire et utopie)』(1960), 『고백과 저주(Aveux et anathemes)』(1987) 등이 연달아 출간됐다. 여러 차례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수상을 모두 거부했고 생계를 이을 수입도 없어 단 한 차례 1950년 리바롤(Rivarol)상을 받았다. 이때 생계가 어려웠기에 그 상이 아니었다면 노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시오랑은 특히 유토피아에 대한 강한 플라톤 이후 현대 사회까지 유럽 사회에서 떠나지 않는 욕망일 뿐이라고 강렬한 비판을 쏟아냈다. 유토피아, 즉 지상에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싶다는 이념은 허구라는 사실에 방점을 둔다. 유토피아에 대한 주장과 추구는 이미 그들이 말했던 완전함이란 결점이었고, 참신한 희망이란 재앙이었다는 것이다. 감상적으로 상상했던 사회 유형이었지만 실제로는 살 수 없는 것이었다고. 유토피아(Utopia)는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의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인데, 동시에 이 말은 '좋은(eu-)', '장소'라는 뜻을 연상하게 하는 이중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서유럽 사상에서 유토피아의 역사는 보통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이상국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정확히는 모어의 저서 『유토피아』(1516)를 시초로 하여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1623),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1627) 등 근세 초기, 즉 16∼17세기에 유토피아 사상이 연이어 출현한 시기를 그 탄생의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유토피아는 중세적 사회질서에서 근세적 사회질서로 옮아가는 재편성의 시기를 맞아, 또는 거기에서 생기는 사회 모순에 대한 단적인 반성으로서, 또는 근세 과학기술 문명의 양양한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생긴 것이다. 전자의 예로는 종교개혁 사상 가운데 가장 과격파인 '천년지복설(千年至福說)'의 비전을, 후자의 예로는 『뉴아틀란티스』를 각각 그 전형으로 들 수 있다. 이들 유토피아의 비전은 또한 18∼19세기의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이상사회의 계획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근세의 유토피아 사상과, 나아가서는 루소 등의 원초적 자연상태로서의 황금시대에 대한 꿈이나 플라톤의 이상국에 대한 꿈까지를 포함하여 일관된 특징은, 그것들이 이상향을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하면서도, 실은 어디까지나 현세와의 시간적·공간적 연속선상에서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즉 유토피아는 '도원경(桃源境)'이니, '황천국(黃泉國)'이니, '하데스(Hades)'니 하는 원시시대 이래 인류 일반에게서 볼 수 있는 '타계관념'처럼 시공을 단절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에른스트 브로호, 마르쿠제 등 20세기 유토피아 사상의 계승자들의 사상에 있어서나 또는 조지 오웰, 올더스 헉슬리 등의 20세기의 '역(逆) 유토피아' 사상에 있어서도 같다. 시오랑은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주장했던 카베의 공상 소설 『이카리아 여행』을 예로 인용한다. 토머스 모어에서 캄파넬라, 카베, 푸리에까지,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쓰여진 수많은 유토피아 문학을 섭렵한 시오랑은 거기에 그려져 있는 악의 부재와 사람 냄새의 부족을, 인간이 모두 로봇으로 되어버리는 환경에 깊은 위화감을 느낀다. 유토피아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람, 이단자, 모양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고뇌에 시달리고 목까지 악에 잠겨 있다. 그런데 이런 관리와 질서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악의 어둠이 사라지고 빛만 존재하는 일원성의 세계, 갈등과 다양성이 진정된 세계, 영원한 현재가 지배하는 정체된 세계, 그 유토피아에서 인간은 살 수 없다. 그 획일성과 단조로움에서 인간은 질식한다. 유토피아 기술에서 시오랑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예외는 『걸리버 여행기』로 스위프트가 그린, 그 희망이 가득한 나라뿐이다. 시오랑의 주장이 예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시오랑은 러시아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을 서슴지 않는다. 마르크스, 레닌의 사상도 유토피아에 대한 추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들 간 불평등 해소, 같은 민족 내 평등의 진전 그리고 인류의 완성이다."라는 콩도르세(1743~1794,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의 말에 대해 역사는 이 주장을 긍정하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실제 사회를 관찰하면서 우리의 희망이 어디서나 항상 실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좌절해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고 언급한다. 타키투스와 같은 역사학자들에게 이상적 로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비유함으로써 스스로의 주장에 힘을 싣는 듯하다. 그는 "비극은 역사의 핵심이고 결정이다. 유토피아는 비극에 반대된다. 유토피아에는 비이성도 없고, 복원 불가도 없다. 유토피아라는 완벽한 사회에서는 갈등이 멈추고, 인간들의 의지가 억제되고 진정되어 기적적으로 하나가 된다. 우연이나 모순과 같은 성분이 사라지고 단일성이 지배한다. 유토피아는 위험한 이성주의와 인간적 순결주의가 합성된 것이다. "사람은 불가능에 부딪혀야 행동한다. 유토피아를 생산할 능력이 없고 거기에 헌신할 능력이 없는 사회는 딱딱하게 굳어져 망한다.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현자들은 주어진, 가지고 있는 행복에 만족하라고 한다. 인간은 거부한다. 그 거부를 통해서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꿈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p.149) - 「유토피아의 메커니즘」 중에서
저자 : 에밀 시오랑(Emil Michel Cioran) 1911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에밀 시오랑은 1937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살며 글을 썼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의 이름은 ‘치오란’이 아니라 ‘시오랑’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졌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베르그송’에 대한 논문으로 학사 과정을 마쳤다. 1933년에 독일 훔볼트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했지만 체계로서의 철학에서 멀어져 철학적 에세이, 개인 사상가로서의 글쓰기에 경도된다. 1934년 첫 책 『절망의 정점에서(Pe culmile disper?rii)』를 출간했고, 1936년에는 루마니아로 돌아가 잠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7년에 프랑스 문화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파리로 가 소르본 대학교 철학과에 등록했지만 수업과 논문 쓰기를 접어두고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모국어로 쓴 책 『사유의 석양(Amurgul gandurilor)』(1940년)을 출간하고 난 다음 1947년 이후에는 루마니아어와 결별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49년 프랑스어로 쓴 첫 책 『해체의 개설(Precis de decomposition)』이 출간되었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고통의 삼단논법(Syllogismes de l’amertume)』(1952), 『존재의 유혹(La tentation d’exister)』(1956), 『역사와 유토피아(Histoire et utopie)』(1960), 『고백과 저주(Aveux et anathemes)』(1987) 등의 책을 출간하며, 고독과 처절하게 맞선 글쓰기, 절제된 아포리즘적 절규로 많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여러 차례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수상을 모두 거부했고, 단 한 차례 1950년 리바롤(Rivarol)상을 받았는데, 생계가 어려웠기에 그 상이 아니었다면 노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95년 6월 20일, 파리에서 숨을 거두어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역자 : 김정숙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4대학Paris IV Sorbonne에서 프랑스 현대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배재대학교 주시경대학 교수 및 북아프리카 마그레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프랑스어권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역서로 『카빌리 베르베르 문화사전: 알제리 소수민족의 삶과 역사』, 『북아프리카지역에서의 부족집단 간 갈등 양상에 관한 기초연구』(공저), 『마그레브: 북아프리카의 민족과 문명』(공역)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 「프랑스어권문학: 탈식민화 기획과 실천의 가능성」, 「마그레브 프랑스어문학: 모호한 정체성과 위상」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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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에밀 시오랑의 '역사와 유토피아'는 1950년대 후반 당시의 정치와 역사, 유토피아에 대한 도발적인 견해로, 1960년 출간되어 프랑스어권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몇몇 프랑스 작품들에 대한 난해함을 떠올리면 이 책 역시나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물론 저자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후에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만 작품을 썼지만. '두 유형의 사회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타인을 거부하는 것이 삶을 진정으로 사는 것이며 타인을 받아들이려면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은 비참한 족속으로 무기력해져야만 고귀해질 수 있으며 관용은 정열이 식은 것을 뜻함을 피력한다. - 무위도식자들, 기생충들, 비열한 자들, 추잡한 자들만이 사회가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부를 누립니다. P 26 아이러니함과 독설이 난무하는 내용이 어렵지만 어찌 재미있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인간에 대한 고찰과 삶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읽으니 아쉬움이 크다. 그럼에도 시오랑의 에세이는 공감적이고 흥미롭다.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 역시나 세계사에 대한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또한 너무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 기독교가 분열한 것은 교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내세우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p 52 - 민주주의는 줄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름다운 약속이다. p 57 - 러시아 사상의 역사에서 혁명에 관련되었든 아니든 모두 혼미하고 지독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아직도 구제 불능 유토피아주의자들이다. 유토피아란 핑크빛 그로테스크다. 가능하지 않은 행복을 역사 과정과 연결하려는 욕구이고, 뜬구름 같은 낙천적 환상을 밀고 나가 그 출발점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없애려고 했던 냉소주의 자체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괴물같은 마법의 성이다. p 62 - 관용이란 자유의 다른 이름이고 정신의 다른 이름이다. 정신은 한 개인에게도 위험하지만, 제국에는 더 위험하다. 정신은 제국을 침식하고 견고함을 훼손하며 가속적으로 약화한다. 하늘이 제국을 치려고 비웃으며 사용하는 도구다. p 65 - 로마제국은 한 도시에서 시작했다. 영국은 좁은 섬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제국을 건설했다. 독일은 국토에 인구가 넘치자 숨을 쉬기 위해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는 유례없는 현상이다. 차지하고 있는 넓은 공간을 명분으로 영토 확장 계획을 변명한다. p 70 1957년에 쓴 이 에세이에서 시오랑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러시아가 무엇을 결정하고 시도하는가에 우리의 행로가 달려 있다. 러시아는 우리의 미래를 손에 쥐고 있다.'라고 썼다. 현재의 사태를 보니 반박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폭군들의 학교에서'는 권력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우리가 전에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다시 확인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살기 위해 태어났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식은 권력욕을 자극하고 충동해 우리를 가차 없는 파멸로 이끈다. 우리의 꿈과 시스템보다 성서의 인간 창조가 우리의 조건을 더 잘 보여준다. p 82 - 모든 인간은 정도가 심하든 그렇지 않든 질투를 한다. 정치인은 질투 그 자체다. 자기 옆이나 위에 누가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무엇인가 행동하는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질투심에서 촉발된다. 질투는 살아 있는 인간의 최고 특권이자 행위 법칙이고 원동력이다. p 84 - 행위가 질투심에서 나온다면 정치 투쟁의 최후 단계가 경쟁자나 적을 제거하기 위한 계산과 권모술수로 귀착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 생각의 방향이 같고 선입견도 같아서 당신 옆에서 같은 길을 걸어왔던 사람들을 제거하라. 그들은 필연적으로 당신의 자리를 빼앗고 없애버릴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경쟁자 중에서 제일 위험한 자들이다. 그들에게만 집중하라. 다른 사람들은 기다릴 시간이 있다. 내가 권력을 잡는다면 첫째 할 일은 내 동지를 없애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을 망친다. 폭군의 신용을 떨어트린다. p 85~6 - 카이사르의 가장 큰 실수는 측근들, 그를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신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던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은 것이다. p 90~1 페이지 수가 그리 많은 책은 아니지만 생각하며 읽어야 함에 더디게 진도가 나갔다. 에밀 시오랑이 쓴 역사와 정치,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에세이집으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도서이다. 강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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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라는 것은 자기 나라의 말이라는 의미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말로 이 모국어를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다른 나라에 오래 살더라도 모국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역사와 유토피아>의 작가는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를 사용한 철학자이자 작가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옮겨놓았지만 완벽하게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했다. <역사와 유토피아>에는 총 6편의 글을 모아두었다. 이 글들은 아주 오래전 1950년대에 쓰여진 글들이다. 당시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생각 등을 읽을 수 있다. 폭군은 어느 역사에나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폭군들이 있다. 러시아의 황제 이반 4세는 주목할 만한 폭군이었다고 한다. 인간 심리의 구석구석을 모두 보여주는 예로 미친 짓에서나 통치 행위에서나 복잡다단했던 재위 기간의 러시아를 악몽의 모델로 만들었다. 그는 피의 맛과 후회 사이를 오가며 악마처럼 분노하고 비열하게 슬퍼하는 괴물이었다. 인간 안의 악령의 사고방식과 천성이 제국을 만들고 우리 의식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사악함이 드러나게 된다. 천년에 걸친 공포, 암흑, 약속의 세월을 두고 있는 러시아는 역사적 순간의 어둠을 수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러시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 ![]() '유토피아'란 어느 곳에도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는 다른 사회를 상상하며 살아간다. 더 나은 미래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은 고행과 수행의 욕구를 채워줄 그 무언가일 수도 있다. 유토피아를 생산할 능력이 없고 거기에 헌신할 능력이 없는 사회는 딱딱하게 굳어져 망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유토피아가 출현하는데 빈곤이야말로 유토피아주의자의 조력자라고 할 수 있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의 일거리이고 궁리이며 신의 섭리가 내려준 강박이다. 빈곤에는 유토피아주의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엉뚱한 생각을 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는 꿈을 꾸며 빈곤한 자의 망상이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만든다. 다른 세상을 살고 싶어 하는 열에 들뜬 군중이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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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인간은 늘 현실에서 유토피아를 갈망하고 또 그 유토피아적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 왔죠. 예를 들어 사회주의 역시 공평한 분배에 대한 인류의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상사회를 꿈꾸는 인간의 욕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출신과 배경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루마니아 출신이지만 서유럽세계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던 저자이고 저자가 이 책을 출간했던 1950년대 후반의 경우 구소련이 맹렬하게 동유럽을 공산화시키고 서유럽과 냉전체제를 갖추어 가던 시대이기도 했었죠. 두번째 챕터인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를 저는 매우 흥미로게 읽었는데요. 러시아의 경우 사회주의와 러시아정교로 서방민주세계의 기독교와는 묘한 대치의 관계에 있고 러시아가 프랑스등의 서유럽국가와 같은 체제나 운명을 가질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 상당히 심도있게 저자는 다루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기나긴 전쟁과도 이 부분은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할수 있는데 서방세계와 러시아와의 어쩔수없는 경쟁과 대립은 이미 오래된 시절부터 그 기원하였음을 이 책을 통해서도 알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서방세계에서 프랑스어로 사고하고 글을 썼지만 동유럽도 아닌 서유럽도 아닌 중간인이었고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세계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이상사회로써 구현하고자하는 유토피아에 대해 인간의 역사를 통해 그 유토피아가 절대적으로 실편 불가능한 욕망에 지나치않음을 특유의 사유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할수 있죠. 저자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어둠이 없고 빛만 조존재하는 세계로 다양성과 갈등이 거의 없는 세계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런 세상에서 인간은 결코 살수가 없으며 그런 유토피아는 너무 단조롭고 인간을 질식사시킬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꿈꾸는 것은 아마도 현실이 녹록치않고 모순이 많아서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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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와 혼란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종교와 이념의 시대인 중세 시대를 지나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세상은 다시 자본과 이념의 시대로 들어서는 과도기적 진통을 겪고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정치적 혹은 철학적 견해를 역사와 철학, 이상과 현실 등 다양한 사례와 검증을 통해 피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