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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농업의 선구자 피에르 라비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 명료하다. 스스로 인류의 빠른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시킨 현대 문명에서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발적인 소박함을 선택함으로써, 인간 고유의 가치를 되찾고, 더이상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고 가능한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피에르 라비의 메시지는 얼마전 읽은 [성장 없는 번영 :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를 위한 생태거시경제학의 탄생 - 팀 잭슨 저| 착한책가게] 의 연장선 상에서 볼 수 있다. 이 책은 성장없는 번영 에 비해, 조금 더 철학적이고 인본적 가치에 치중한 책이나, 저자 피에르 라비 자신이 평생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 실천적 삶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는, 영혼이 풍부한 책이다.
각종 연구자료와 다소 학술적 내용을 포함하는 성장없는 번영 중 "행복은 소득에 비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 소득이 도달하면 그 이상은 소득과 행복에 아무 관련이 없다"는 연구 결과가 기억난다. 행과 불행에 끼칠 수 있을 만큼의 소득은 OECD의 국가에서는 사회적 안전망을 통해 이미 구축이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주춤한 경제 성장이나 돈을 더 많이 못벌어서가 아니고, 행복한 이유 또한 선진국이 되어서가 아닐 것이다. 피에르 라비는 인간의 고유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생태 농업으로,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잉여 생산과 낭비를 없앰으로써, 조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전통적 생활 방식을 회복하고, 자발적 소박함이라는 삶의 태도를 지향할 것을 전하고 있다.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이 수만년동안 공유해 왔던 모든 재원들을 겨우 최근 몇백년 혹은 몇천년만에 파괴하는 것은 약탈행위이며, 후대까지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이 지속가능한 삶을 영속할 수 있도록 정직하게 일하고 그 지상의 모든 혜택을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나누는 것만이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를 밥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고, 정신활동을 도와주는 이 도시를 어떻게 떠날 수 있으며, 먹고 마시고 만나고 떠들고 누리는 이런 것들을 어찌 소비를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으면서 최근 읽고 있는 다른 책들을 통해 느꼈던 생각들이 이 책을 통해 받은 느낌과 함께 두서없이 교차했다. 피에르 라비가 주장하는 방법과 이념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으로서의 그의 생각이 디지털 문명의 다른 영역에서는 충돌하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읽고 있는 에지 프로젝트 "우리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읽으며 수많은 석학들의 생각을 읽고 느끼고 공감한 것들이, 피에르 라비가 주장하고 가슴 울리는 성찰을 전달하는 자발적 소박함의 철학과 충돌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라비는 현대 인터넷 문명 때문에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졌다고 본다. 집에 있는 것은 아이들의 빈 껍데기 뿐이고, 그들의 영혼은 인터넷의 어딘가에서 위선과 꾸밈으로 가득한 가상 자아로 치장한 채 또다른 위선과 꾸밈이 가득한 거짓 자아들과 만나면서 가상의 세계를 헤매고 다닌다는 것이다. 디지털 원주민이 아닌 우리 기성세대에게 집에서 하루 종일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확실히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 덕분에 자신과 같은 취미나 학술적 관심, 혹은 전세계적으로 통털어도 아주 드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관심 분야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자본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대중의 의견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상호 작용으로서의 매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네트워크 세대는 진정한 민주화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지식은 특정 계급에게 편중되어 있었고, 지난 세기만 하더라도, 오늘날 키보드 몇 번이면 액세스가 가능한 학술지의 열람은 선택된 지식계급들이 위치한 그 물리적 환경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고민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인간은 브랜드 상품과 물질적인 것보다는 더 고유한 가치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지만, 이미 소비와 물적 충족이 하나의 조건이 된 사회 내에서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적용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라비는 책을 통해 자신이 무조건적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문장 하나 하나 100% 공감하면서도, 100% 인정할 수 없는 갈등을 책을 덮을 때까지 겪는 이유는(그것은 고통스럽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실천적 방안이, [성장없는 번영]에서 지적한 것처럼, 어차피 이제는 너무나 늦었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파괴했고, 그래서 그나마 우리의 아들 딸과 그들의 아들 딸이 지속적으로 이 지구에 발붙이고 살게 하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난제를 포함하고 있고, 이미 물욕에 어두워 그것 없이는 삶이 어찌 지속될 지조차 불안해진, 자본의 속성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실천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의 삶이 책을 통해 전달하는 가치에 동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저 막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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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저자 피에르 라비/출판 위즈덤하우스/발매 2013.10.25.
과도한 풍요의 사회에 나는 일종의 치유책으로써 자발적 소박함을 권유한다. 소박함을 근간을 한 문명에게만 미래가 보장된다. 노동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면 그에 따라 무절제한 삶이 생겨나고 사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돈도 흥청망청 쓰게 되었다.
그 물건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일하기 위해 사는가?"
소박함은 과소비 사회에 대항하고자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삶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극단적인 소비 행태에 공공연히 저항하겠다는 표현인 것이다.
P98~99 소박한 삶의 문제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 때면, 나는 자신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던 원시 부족들이 어떤 느낌으로 그렇게 주장한 것인지 알 것 같다. 자원이 풍족한 시절에도 검소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애착을 느끼는 북아메리카 수족 인디언은 들소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부족이 먹고 살 만큼만 사냥했다. 이 신성한 동물은 조금도 낭비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낭비 행위는 신성한 도리로써 금지되었다. 자연과 그 법칙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대지의 넉넉한 인심에 감사해 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도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의 고귀한 교훈이다.
현대 문명에서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발적인 소박함을 선택함으로써, 인간 고유의 가치를 되찾고, 더 이상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고 가능한 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행복은 소득에 비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 소득이 도달하면 그 이상은 소득과 행복에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의 고유가치를 파괴하지 않는 생태 농업으로,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잉여 생산과 낭비를 없앰으로써, 조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전통적 생활 방식을 회복하고, 자발적 소박함이라는 삶의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
이미 물욕에 어두워 그것 없이는 삶이 어찌 지속될지조차 불안해진, 자본의 속성에 심각하게 길들여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자발적 소박함을 추구해야 한다. 적게 소비하고 최대한 아끼고 많은 소유를 스스로 하지 않아야 한다. 가난할 때는 조금의 채워짐이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욕망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P75 모든 것이 일관될 수 있도록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현재의 모순된 상황을 가급적 일관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는 뭐든 다 잡아야 한다. 특히 작은 실천의 중요성과 그 위력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나는 항상 이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로부터 상황이 변화된다고 느낀다.
처음 시골로 내려간 라비는 농사짓기 좋은 땅을 한사코 마다하고 메마른 황무지를 고집해 그곳을 단출한 오아시스로 만들었다. 그러는 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라비는 친환경 농법으로 대량생산은 거부한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한다. 일용할 양식만 거둘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연과 긴밀이 이어지는 삶을 살아간다.
라비는 수도가 들어오는 데 7년, 전기가 들어오는데 1년이 걸린 척박한 환경에서 양초와 호롱불, 가스 등으로 불을 밝히며 맨손으로 땅을 일구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가족은 궁색할 만큼 검소해야만 했지만, 그 누구도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음을, 편리함에도 있지 않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피에르 라비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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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이 책은 ‘자발적 소박함’이라는 글귀에 끌려 가져온 책인데 책 중반까지는 저자가 얘기하는 내용이 일반적인 사회통념과는 조금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어 읽는 내내 불편함과 거북함이 느껴져 저자인 ‘피에르 라비’를 다시 검색?확인을 해보니 1939년생으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 농부이자 작가이자 사상가. 생태농업의 선구자로서 인간과 지구를 존중하는 사회양식을 지지하고 식량자원을 보호하면서 모두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농사 개발을 주장. 그리고 한때는 프랑스의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하고 농한기에는 세계 각지를 돌며 강연하고 친환경 농사법을 가르치고 저술 활동을 펼치는 농부철학자로서 현대 기계문명을 비판하며 자연생태와의 하나가 된 삶을 강조하는 환경운동가라는 걸 파악하고서는 책에 담겨진 내용을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니 때로는 공감하면서 때로는 반론 의견을 가지고 마음속 갈등을 겪으며 끝까지 읽은 책이다. 한마디로 말해 술술 읽혀지는 그런 책은 아니고 상당히 인내를 갖고 읽어야만 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바가 우리의 삶에 풍요로움을 가져오기 위해 경제발전을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을 너무 파괴했고 물질욕에 어두워 반생태적인 문명을 이끌어냈다고 ‘어느 아프리카의 농촌에서의 비료 사용과 풍작 사례’나 ‘물질적 가난 속에서 발견한 행복’,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형 회복’과 ‘우리가 아이들에게 진정 가르쳐야 할 것들’, ‘더 나은 오늘을 만드는 지혜’, ‘건설적인 분노를 위하여’ 등등의 얘기를 통해 비판하는 내용들이 보는 관점에 따라 공감이 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여간 행복을 가져다주는 파랑새는 바로 내 맘속에 있다는 거처럼 꼭 물질적인 풍요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는 주는 건 아니고 이를 누리지 못하는 거 또한 불편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게 바로 불행과 연결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일정 부문은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바에 100% 공감이 간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많이 회자되는 단어인 ‘소확행’과 일맥상통하는 부문도 있고, 그 추구하는 바가 이 책 소개 글에서 얘기하고 있는 거처럼 ‘우리의 삶에서 필요와 욕구를 절제하고 자발적 합의에 따라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세계화라는 식인적 질서와 단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 그리고 나무, 유기농업, 대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 등을 강조하는 저자이기에 코로나19라는 역병이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현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자연상태가 좋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100% 공감. 또 작은 실천 하나가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키고 깨닫게 해준다며 ‘오직 마지막 나무가 뽑혀지고 난 후에야, 오직 마지막 강물이 오염되고 난 후에야, 오직 마지막 물고기가 잡히고 난 후에야, 오직 그러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당신은 돈만으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저자의 울림이 있는 글에도 또 100% 공감. 아울러 우리의 삶을 좀 더 가볍고 평온하게 자유롭게 하여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어나가자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특히 다음과 같이 이 책속에서 우리의 행동에 호소하고 있는 짧은 이야기가 더욱 그렇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언젠가 굉장한 규모의 산불이 있었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동물들은 별 수 없이 대재앙을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오직 작은 벌새만이 부리에 몇 방울의 물을 담아 실어 나르며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위로 내뱉고 있었다. 잠시 후, 이 부질없는 짓에 역정이 난 아르마딜로는 벌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지금 제 정신이야? 그런 물 몇 방울로는 산불을 끌 수 없다고!” 그러자 벌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그저 내 몫을 할 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그 가치에 동감하긴 하지만 이미 물질적인 거에 깊이 물들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환경운동가 등과 같은 특수한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을 제외하고 나면 저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가치에 과연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왠지 걱정이 앞선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 그런 분야에서 새로운 가치를 얻고자 하시는 분에게 적극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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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에서 발췌하여 필사한 내용입니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가장 뛰어나고 바람직한 길은 인간의 생명 유지와 관련된 필수적인 욕구들을 지극히 단순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충족하는 것이다. 자신의 텃밭을 일구거나 혹은 자립성을 갖기 위한 모든 창조적 활동에 매진하는 것은 하나의 정치적 행위이자, 인간의 의존도와 종속성을 이겨 내는 하나의 저항 행위로 간주된다.
과거 200명 남짓 살아가던 한 아프리카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가진 돈을 전부 합쳐도 150유로(약 23만원) 정도를 만들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은 어떻게 돈 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사회에는 돈이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돈이 아닌 물물교환의 방식으로 1차 생필품을 주고받으며 생활했다. 실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 사회에는 사회보장제도나 보험, 은퇴도 없었다. 더욱이 아이을 돌보는 일은 윗세대와 아랫세대 간의 직접적인 상호 부조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들의 공동체는 삶과 생존의 원천이 되는 땅, 물, 씨앗, 지식, 노하우 등에 가까이 있었다. 자신의 집은 자신의 힘으로 짓고, 마을 공동 가옥은 서로 협력해 지었다. 물질적, 문화적으로 필요한 것들도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인구 이동에 따라 덩치가 커진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도움을 주는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생태 농업을 시도한 우리에게도 물질적인 고민이 있었고, 내적으로 많이 힘들었으며, 의견 충돌이나 대립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 같은 삶은 확실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최초의 길이었다. 길도 잘 모르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신도 서지 않은 채 의심만 가득한 상황에서 산등성이를 오르는 기분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우리 앞에는 보다 이해하기 쉬운 광경이 펼쳐졌고, 의식은 더욱 더 선명해지며 고양되는 것 같았다.
레 자마냉은 시범적 생태 농업과 생물 다양성 보존이 이루어지는 실험의 장이다. 태양열판과 풍력발전기, 나무 보일러 등을 통해 에너지는 자급자족하며, 건물은 완전히 생태적 방식으로 세워졌고, 폐수 처리는 식물 정화 시스템을 이용한다.
농업 생산 구역에서는 환경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농사가 이루어지며, 깨끗한 먹을거리를 보장해 준다. 식량은 대부분 현지에서 생산, 가공되며 현지에서 소비된다.
우리는 늘 어떻게 하면 더 소박하고 조심스럽게 생활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러자면 절제의 삶의 필수적이고,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하며, 스스로 알아서 한계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먹는 것이나 자연 자원을 소비하는 습관도 자발적으로 제한해야 한다. 이러한 제한적 요소들은 우리가 엄청난 즐거움을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며, 그 환희의 느낌은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조금씩 서서히 우리에게 주언진 이 자유는 고생 끝에 얻어 낸 결과물이며, 여전히 미완의 단계에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이기적인 쾌락의 욕구에서 해방되었다.
우리가 이 모든 이기적인 성향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창조의 조화로움이 어떤 것인지 지각할 수 있고 , 아울러 우주의 아름다움 앞에서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다. 만일 존재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자연히 올바른 선택을 하고 통일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우리가 포기한 것들은 더없이 풍요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소박함은 진정한 의미의행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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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富)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우선하는 행복의 척도일 것이다. 행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을 재물의 많고 적음에 기반하여 적게 가진 자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많이 가진 자는 부자여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가난은 불편하긴 하지만 불행하진 않다는 것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가난은 삶의 불편함과 불행함을 동시에 주는 불청객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좀 더 많이 가지려고, 좀 더 많이 모으려고, 좀 더 많이 벌려고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들은 대부분 성실한 사람들이다. 성장을 지향하는 건강한 사람들이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근면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사람이 있다. 풍요로움 대신 소박함의 가치를 역설하며 간소하게 살기를 제안하는 이는 바로 생태 농업의 선구자인 피에르 라비다.라비는 잉여 생산을 지양하고 필요한 만큼만 생산할 것을 제안한다. 과도한 풍요는 대지와 자연,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한 침탈행위라는 것이다.
알제리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프랑스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현대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라비는 노동과 돈에 종속된, 오로지 경제를 위해 존재하는 생물학적 부품과도 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고 현대 문명을 뒤로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청년시절 시골로 이주해 땅을 일구며 자급자족한 라비는 지금까지 농부로 살아가고 있다.
처음 시골로 내려간 라비는 농사짓기 좋은 땅을 한사코 마다하고 메마른 황무지를 고집해 그곳을 단촐한 오아시스로 만들었다. 그러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라비는 1961년부터 45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데, 화학적으로 해로운 것은 철저히 배제하고 파괴하지 않고 생산 할 수 없는 기업식 농업을 거부한다.
라비는 단순히 친환경농법을 주장하는 농부가 아니다. 아무리 친한경농법이라도 대량생산은 거부한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한다. 그는 생산량이 많은 비옥한 땅보다, 비록 메마른 황무지일지라도 그 안에 깃든 적막함, 빛, 아름다움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독특한 농부다. 농부에겐 농사짓기 좋은 환경과 비옥한 땅이 최우선이나 그는 일용할 양식만 거둘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연과 긴밀히 이어지는 삶을 택하는 괴짜농부요, 철학자다.
라비는 수도가 들어오는데 7년, 전기가 들어오는데 13년이 걸린 척박한 환경에서 양초와 호롱불, 가스 등으로 불을 밝히며 시대를 역행하는 구시대적인 삶을 선택해 맨손으로 땅을 일구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가족은 궁색할 만큼 검소해야만 했지만, 그 누구도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음을, 편리함에도 있지 않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대지를 존중하는 그의 삶에서, 소박함을 추구하는 생활양식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을 보았고 절제의 미를 보았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에 깊게 물든 사회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살라는 제안이, 부유함과 풍요를 인생성공으로 인식하는 이 사회에 자발적 소박함이 행복이라는 그의 외침이 얼마나 먹힐지 미지수다. 책 곳곳에 소개되는 라비의 경험담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읽는 재미를 주고, 라비의 철학은 많은 생각거리와 물음을 동시에 던져준다.
올해로 나는 귀농 6년차에 접어들었다. 마을 주민 전체는 대지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런데 마을 어디를 둘러봐도 라비처럼 농사 짓고 라비처럼 사는 주민은 없다. 모두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뿌린다. 이유는 단 하나, 상품성 있는 작물을 대량생산하기 위함이다. 내가 본 농사일은 저농약은 있어도 무농약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은 작물을 팔아 1년을 먹고 산다. 그런데도 빚에 허덕이는 가구가 대다수다. 자발적 소박함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소박함이라고 해야 맞겠다. 자발적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기력이 떨어진 연로한 농부들 뿐이다.
라비의 주장과 철학에 동의하면서도 선뜻 따라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저마다의 형편과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라비의 사상과 내가 처한 농촌 현실과의 괴리를 어떻게 좁힐 것인지 묵직한 과제를 안겨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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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마지막 나무가 뽑혀지고 난 후에야, 오직 마지막 강물이 오염되고 난 후에야, 오직 마지막 물고기가 잡히고 난 후에야, 오직 그러고 난 후에야 비로소 당신은 돈만으로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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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알제리 출신의 생태농업 전문가이자 농부이며, 사상가인 저자가 토해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더 나아가 실천 방도까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주제의식은 비춰지고 있듯이 스스로 절제된 삶을 추구하는 방식, 다시 말해 풍족하고 ‘늘, 더욱, 언제나, 더, 많이’를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무한성장 정책과 돈에 장악 당하고, 화학비료로 인한 토양오염, 자연환경 파괴, 나눔, 형평성, 연대원칙인 인본주의에 미치지 못한 인도주의에 머물러 있는, 인간과 자연이 괴리된 상태에 반기를 들고 저항의 의미로 자발적 소박함을 추구하는 이 책은 사하라 사막의 추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대장간을 보면서 모루로부터 배운 추억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모루가 멈추면서 모든 불행의 재앙이 시작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누구도 인정하듯이 처음엔 도시화 혹은 근대화, 산업화가 개인의 무궁한 발전과 부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고 초가집도 걷고, 마을 길도 넓혔지만 어느새 기계화되고 획일화된 작업 공정 앞에 시간의 노예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벗어나려 몸부림쳐 보지만 자본의 굴레에 속박된 채 헤어나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노릇이다. 오히려 빈부 격차 및 가난은 빈곤으로 심화되고 희망으로 보였던 거대 자본은 스스로 노예가 되기에 이르러 인간성 상실은 물론이고 행복의 길이 아닌 불행의 길을 자초했던 것. 저자 역시 초창기엔 프랑스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근대식 교육을 받았지만 남들처럼 노동자로 들어가 쓰라린 경험을 맛보아야 했다. 결혼후 아내 미셀과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 세벤에 자리잡으면서 본격적인 생태 농업에 돌입하면서 반기를 든다. 초창기 이해시키는 어려움 때문에 대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45년간 자연환경을 근간으로 하는 친환경 농법을 비롯, 조화를 우선시 하는 실천을 해오고 있다. 자발적인 절제된 삶을 통해 형평성, 균형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루마니아 경제학자 니콜라스 제오르제스쿠 뢰겐의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을 선거운동의 모토로 쓰기도 하고 이 용어의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 자발적 소박함으로 바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대안을 제시한 걸 살펴보면 검소, 소박함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 데 예를 들면 자연환경을 공공재로 인식해야 한다든가, 파괴성향이 강한 남성성보단 삶의 수호자 역할이 강한 여성성 회복에 주력하여 양성간의 균형회복 도모, 여성들의 사치품인 보석, 옷, 향수, 미용케어, 화장품등의 소비절제를 통해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매력 발산을 추구할 것을 권하고 있다. 아이들에겐 생태정원을 통한 대지의 풍요로움을 직접 느낄 수 있게 가르치고 장난감이나 자연파괴적인 인스탄트 문화에서 벗어날 것도 주문한다. 그리고 신구의 조화, 노인의 삶의 지혜를 전수받고자 하는 자세를 피력하고 있다. 단지 나이를 먹었단 이유로 폐기되어야 할 존재로 치부되고 있는 노인문제를 과거의 경험을 전달해주고 미래를 여는 세대 전수자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융합을 강조한다. 정부 대신 빈민구호에 앞장서는 엠마우스 공동체, 마음의 식당, ATD Quart Monde, 구세군등도 언급하고 있다. 한편, 저자 관련 단체들을 살펴보면 연대의식을 고취시키는 생태 학습원인 레 자마냉(Les Amanins), 만남과 교류의 발판인 콜리브리(Colibris), 어린이 농장과 회양목 마을, ‘의식의 반란’을 위한 호소 르 마픽(Le Mapic), 대안적 삶의 방식 제안인 오아시스 운동, 자급자족을 실천하는 종교의 결합인 솔랑 수녀원, 생태농업 전도사 ‘대지와 인본주의 연합’등 크고작은 단체들이 세계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적은 것이 행복하다’는 모토가 들어맞다. 과도한 풍요의 사회에 자발적 소박함의 실천을 통해 일종의 치유 수단으로 삼아보길 권하고 있다. 작은 실천 하나하나를 통해 자연이 쓰레기 더미가 아닌 인간의 보물로 여기는 풍조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실천 방도 하나씩이라도 내어보는 게 어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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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을 상상하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그런데 무엇이 행복일까?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부와 명성, 또는 인기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다 가진 듯 보이는 친구가 인생이 공허하다며 넋두리 하는 모습을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떤 사람의 행복을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다.
알제리 작은 마을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이 못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이웃의 도움을 받으며 조화롭게 살았다. 딱 알맞을 만큼만 가지고 사는 삶이 그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런데 대량화·기계화를 내세워 많은 물질을 소유하자고 주장하는 서구 문명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많은 물질을 가지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살기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일하기 위해 사는가?”조차 모호해졌다. 과도한 욕망이 그들의 관계를 파괴했고, 서로를 원망하게 만들었으며, 더 가지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행복을 빼앗겼다.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가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다. 자본주의가 대량생산하여 유포하고 있는 물질적 행복의 길과는 ‘다른 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농업의 선구자인 ‘피에르 라비’가 그 대표라 할 수 있는데, 그는 과도할 정도로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은 이 사회에 대한 치유책으로 ‘자발적 소박함’을 제시한다.
모두가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동경하는 이 시대에 살면서 ‘소박함’을 선택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만약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라면 불가능한 일이리라. 하지만 ‘자발적’으로 소박함의 길을 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한 걸음이 될 것 같다.
피에르 라비는 ‘의식의 반란’을 통해 물욕(物慾)을 통제하고 절제의 위력을 발휘해 ‘자발적 소박함’을 이루자고 주장한다. 그는 먼저 물질적 가난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이 의식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함께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그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는 것은 그가 자발적 소박함을 실천하기 위한 ‘실천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그의 실천은 한 때 유행하던 ‘느림의 미학’이나 ‘심플 라이프’처럼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계를 위한 실천이다. 실제로 피에르 라비는 생태 학습원과 어린이 농장을 만들어 생명과 미래를 키우고 있다. 생태 학습원에서는 생태 농업을 가르치고, 태영열판과 풍력발전기 등을 이용해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식물 정화 시스템을 이용해 폐수를 처리한다. 아이들이 자연과 교감하면서 서로 돕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이다. 또한 자립의 원칙과 인본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소유보다는 행복에 기반을 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단체도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람과 환경이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피에르 라비의 소망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사람을 물질적 가치로 환원하는 소위 ‘잉여 인간’이 넘치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피에르 라비는 자발적 소박함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이에 응하고 응하지 않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지쳐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행복을 원한다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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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함. 이제는 선택하는 삶의 태도가 되어 버린 단어.
옮긴이 배영란은 이 책의 제목을 '적은 것이 행복하다'라고 하고 싶었다고 한다. 적게 갖고 있기 위해서 어느덧 우리는 노력을 하고, 마음을 다져잡고, 책을 통해서 일깨워야 하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책의 처음은 피에르 라비의 어린시절 회상으로 시작한다. 소설 형식의 구성으로 된 책인가? 의문을 갖았을 정도로 초반에는 그의 어린 시절 동네 풍경 하나하나와 인물들의 감정까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뒤에 알고 보니 저자의 이런 시적인 표현으로 인해서 옮긴이도 꽤 고심했다고 한다.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담아내기 위해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다.
끝없는 발전과 문명만이 최선이고 인류 모두가 달성해야 하는 목적인 것 처럼 여겨져서 지금까지 무한 발전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과 과거의 시절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저자는 이미 오래전 이렇게 살고자 했으나 아내와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도 있었다. 알제리의 대장장이 아들인 그가 프랑스에서 땅을 일구려 하였을 때 겪은 일은 그 자신은 이해 안되지만 소비문명은 분명 반대한 것이 옳은 행위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자연을 인정하고 땅을 살리는 농업이 인간에게도 이롭다는 사실을 어느정도 널리 퍼지고 있는 편이다.
인간이 배불리 먹기 위해서 고기를 기르고, 그 고기를 기르기 위한 농업은 지구 한 편에서의 굶주림으로 나타난다. 지구자원을 파내서 쓰는 것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자원의 문제는 이미 환경오염과 더불어 코 앞에 닥친 현실이다. 사치와 향락을 위한 소비, 지구 자원을 투자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이미 충분한 것에 욕심을 내는 일. 이 모든 것에 우리의 소박함이 필요하다. 장난감을 쥐어 준 아이들은 더욱 새롭고 자극적인 장난감에 몰두하고 자신의 노력이나 생각이 없이 물질로 주어진 것이라 애착이 없어서 함부로 사용하고 버리고 다시 갖기 원하게 된다. 자원에 대한 문제를 읽다보니 얼마전 방송에서 본 물에 대한 다큐가 생각났다. 먹을 물이 없어서 돈을 주고 사야하고, 비가 오는 날 씻는 그들의 눈 앞에 장미꽃 재배를 위한 드넓은 정원이 펼쳐있었다. 맥주병을 씻기 위한 물로 쓰기 위해 주민들은 우물이 말랐다. 이 모두 소박함을 생활화하지 않은 결과이다.
어느 날 내가 춥지 않기 위해 남의 가죽을 입지 말아야겠다. 나의 주머니를 가죽 주머니가 아닌 것으로도 아무렇지 않았던 나를 발견했다. 원래 나는 헝겊주머니를 더 좋아했었다. 가볍고 가격도 싸고 모양도 내가 원하는 것이 많았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짐승의 가죽주머니에 멋진 마크가 달린 주머니를 어깨에 메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깨달음이 육식에 대한 책을 읽은 뒤였다.
피에르 라비의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짐승의 털이 아니어도 좋고, 그들의 가죽이 아니어도 좋다. 가끔 그들이 주는 젖을 먹는 것으로 감사하고, 그들이 내어준 생명을 건강을 위해 먹을 때 고맙게 먹기로 했다. 화분의 적은 흙이 주는 놀라운 힘을 배우기 위해 실내에서 가꿀 수 있는 채소를 키워보고 싶어졌다.
사고 또 사고 부족하다 여기지 말아야겠다. 한정된 자원인데 그 자원을 작은 힘이라도 보태서 아껴줘야 하니까. 흙을 퍼내서 구운 도자기 그릇, 석유로 만든 볼펜, 광물로 만든 금속., 둘러보니 한 둘이 아니다. 자발적 소박함은 나의 생명과 지구를 함께 생각하는 삶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지구를 물려줄 것인가?와 더불어 우리의 지구에게 어떤 아이들을 물려줄 것인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이는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하는 말이다. 선거 활동을 할 때 '지속적 마이너스 성장'을 강요한 그의 말에서 마이너스 성장이란 단어가 문제가 되었었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소비 욕구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과 절제의 미덕에 기반을 두고 세계화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책 속 내용 중 서구인들의 경작법으로 같은 토지에서 두배의 생산물을 거두게 되어 젊은이들이 기뻐할 때 마을의 존경받는 노인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제 그 절반만 심으면 되겠네"라고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우리는 젊은이들이다. 충분함을 모른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반성한다. (그 반성에는 이런 반성도 있다... 배부른데 많이 먹었구나.. ㅜ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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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정말로 악독한 존재가 아닌 이상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동물들을 몰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불행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피에르 라비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식을 갖는 것에서, 특히 자비심을 갖는 것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적 능력이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자비심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구에서 악몽과도 같은 존재가 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