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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바다에 사는 이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게 바다는 태곳적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느껴지곤 하였다. 그러나, 만약 바다에서 나고 자랐다면, 바다를 한없이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파죽지세로 몰아치는 바다의 무서움은 모르고 그저 아름답고 잔잔한 바다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바다를 동경할 수 있는 것이다. 일년중에서도 여름에나 바다를 찾아가기에 바다는 항상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물異物 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 우연히 보게 된 구글지도의 대한민국은 바다가 이물이 아닌, 너무도 친숙하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깨달았다. 위성 상의 한국과 일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 가까운 거리였었고, 대한민국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섬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에 다시한번 놀라워 했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사이를 잇는 작은 점인 제주도의 시계視界는 더욱 작게 느껴졌었다. 이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온 이유는 바로 이 책 《검은 모래》를 읽으면서 바다를 떠올리면서 였다.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제주 잠녀들의 억척스러운 삶의 굴레가 한국과 일본에서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이, 마치 우리 역사책 한귀퉁이에 쓰여 있었으나 지워졌던 글씨를 복원한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바다가 아무리 험악하고 모질게 굴어도 절대로 원망하지도 말고 탓하지도 말아라. 바다는 말이다. 우리 잠녀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으니까. 우리네 인생이 바다에 달렸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물질로 하루 벌어 먹고 살고 , 물질로 생명을 이어나가는 잠녀의 운명은 바다에 달려 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섬속의 섬인 우도에서 태어난 잠녀 구월의 운명도 그러하였다. 제주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자체가 바다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을 천형으로 삼고 살아야 하였지만, 구월의 삶의 추가 더욱 무거운 것은 현대사의 굴곡진 흐름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나라를 잃은 구월의 운명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업嶪을 잇는데 개인의 삶이라는 씨줄과 현대사의 날줄이 서로 촘촘하게 엮이며 비운의 삶을 직조해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어민들의 잦은 침탈로 바다에서 나는 양식이 씨가 마르게 되자, 일본의 침탈로 조각나는 조선을 뒤로 한채, 굶어죽지 않기 위해 타게 된 일본의 기미가요마루 연락선은 구월에게 새 출발을 기대하게 하지만, 일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식민지 국민의 설움과 차별, 고된 노동뿐이었다.
일본의 연이은 침략은 멈출줄 모르고 만주에 이어 중국, 한반도, 나아가 태평양까지 뻗어가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그 희생자 가운데에는 구월의 남편 박상지도 있었다. 일본의 패전소식과 더불어 36년만에 광복한 한국의 기쁨은 잠시 남북분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생떼 같은예비 사위 한태주를 전쟁터에 떠나보낸 구월은 처녀몸으로 임신한 해금을 오래 전부터 짝사랑하던 청각장애인 후쿠오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아이에게 성姓을 만들어준다. 태평양전쟁의 후유증과 전쟁의 상흔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 버렸지만, 한태주와 해금의 핏줄인 건일은 이름도 모르는 한국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살뜰한 정으로 키워준 일본인 양아버지 후쿠오만을 핏줄로 인정하며 한국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해금과 갈등을 빚고, 일본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철저히 일본인이 되고자 하며 딸 미유에게조차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까지 한다. 일본 극우파와의 사랑으로 한국인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미유는 아버지 건일과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한국인 할머니 해금에게서 한국인의 음식과 전통을 배우며 한국어 공부를 새로 시작한 미유의 모습에서 한국과 일본사이에 존재하던 거대한 장벽을 허무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구월에 이어 해금, 건일, 미유에 이르기까지 잠녀 가족의 장장 4대에 걸친 디아스포라의 삶은 시간이라는 연고로 치유되어 가고 있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제주4.3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의 대표적인 사건이다. 제주사건은 단순히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인 전체의 역사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디아스포라로서 그리고 있는 재일조선인의 삶은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인권문제나 다름없다. 흐르는 시간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고여있는 시간이란, 시대의 흐름 속에 간직되어 있는 우리의 역사를 말한다. 흐르는 시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앞에서는 아주 개인적이고 추상적이지만, 그 시간을 지배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흐르는 시간과 고여있는 시간 사이에 존재하며 '삶'을 꾸려가는 인간의 시간은 한시적이다. 제주도 잠녀의 4대에 걸쳐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은 전쟁의 상흔들조차 아물게 하고 아들 건일의 상처또한 치유하게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희생자들의 인권은 여전히 시간 속에 고여있는 중이다. 그러나, 작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제주도 잠녀들의 삶에 국한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과 고여있는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 자체를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그리고 있다. 흐르는 시간 안에서는 우리의 삶 자체가 디아스포라가 아닐까. 개인의 굴곡진 삶과 교차하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저자의 역사인식은 대한민국사에 잊혀져간 인권문제를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저자는 《검은 모래》에서 제주도의 굴곡진 현대사 역시도 생생히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감싸안아야 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듯했다. 오랜 세월 멀게만 생각했던 바다가 이렇게 지정학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어주듯이 제주와 재일조선인은 우리모두가 끌어안아야 할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안식이 없는 자의 이름, 디아스포라 그것은 우리들의 이름인 것을,,,,
디아스포라는 정착을 꿈꾸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삶에는 늘 결핍이라는 물이끼가 습진처럼 끼여 있다, 아무리 먹고 살만 해도 그들의 가슴은 허기지고,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어도 늘 춥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설명한들 알 수 있을까.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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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회사에 입사한지 몇 년 되지 않아 연수원에서 한 석달간 일본어를 배운 적이 있다. 그때 일본어 강사 중 한 명이 재일교포 2세였다. 연수원에서 생활한 지 두어달이 지났을까?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그와 일본어로 얘기하는데 별 불편이 없을 무렵, 그에게서 듣는 일본내 재일교포들의 생활은 충격 그 자체이었다. 더군다나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2세, 3세까지도 일본인들에게 어김없이 당하는 차별대우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당시 울분을 표하는 것 외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린 그 문제는 가끔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매스컴에서 보도될 때 생각났지만 이내 잊혀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이제 한 소설을 통하여 다시 만나고 있다. 소설은 일제감점기 제주의 한 잠녀 가족의 이야기를 4대에 걸쳐서 제주와 일본에서 그려낸다. 1910년 나라를 잃은 해 태어난 구월, 그리고 그녀의 딸 해금, 그녀의 외손자 건일(켄), 건일의 딸 미유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구월의 가족사가, 근 100년에 걸쳐 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아우르며 이어지고 있다. 그녀들의 가족사의 중심에는 해금과 미유가 있고, 그녀들의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 가며 서사를 이끌고 있다. 섬 속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 우도의 동쪽에 있는 조일리는 검은 모래 해안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그곳에서 9월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이 구월이다. 제주에서 잠녀의 생활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고단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일제감점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웃마을 청년 박상지와 결혼한 구월은 딸 해금과 아들 기영을 낳고 살았지만, 더 이상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가족 모두 일본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정착한 곳이 도쿄 남쪽의 화산섬 미케야지마이다. 해금은 물질을 하는 어머니 구월을 따라 해녀로 생계를 꾸려간다. 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가 태평양전쟁 말기 죽고, 어머니 구월은 기영과 해금에게 모든 희망을 건다. 기영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해금은 한태주를 알게 되지만 민족분단의 비극은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을 비켜가지 않는다. 한태주는 고국의 전선으로 떠났고, 해금은 사생아 건일을 낳는다. 시간이 흐르고 구월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물질을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고래 떼를 따라간다. 아마 남편 박상지가 그곳에서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 뿐인 혈육, 동생 기영은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견디지 못해 새로운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탄다. 일본 땅에서, 더군다나 미혼모가 조선인이라면 아이나 엄마 모두에게 지옥이 될 것이다. 해금은 전에 구월이 출가물질을 갔다가 알게 되어 연을 이어온 선주의 장남과 혼인을 한다. 그는 청각장애인이다. 아들 건일에게 성과 이름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건일은 켄이 되었다.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겪는 모멸과 차별로 멍들어가는 것을 보아 온 켄은 한국인이기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일본인이기를 바랬다. 결국 미국유학까지 다녀오고 일본인 여자 메구미와 결혼까지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 만큼 해금과의 갈등은 깊어만 간다. 켄의 외동딸 미유는 할머니 해금과 깊은 정을 쌓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별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은 할머니의 피가 조금 섞인 쿼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해금과 켄이 하는 말을 엿들은 미유는 자신은 쿼터가 아니라 하프임을 알게 되고, 결국 하프라는 이유로 연인과도 헤어지게 된다.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 고이는 시간은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6쪽) 라고 저자는 말한다. 해금에게 있어 어머니 구월과 동생 기영은 흐르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아들 켄과 손녀 미유는 고이는 시간 이었다. 육체에 남겨진 흔적은 시간이 가면 잊혀지겠지만, 가슴에 남겨진 흔적은 두고두고 시리게 만든다. 20년마다 한번씩 대분화를 일으키는 미케야지마 화산 때문에 해금은 요코하마에 있는 켄의 집에서 보내지만, 그것은 해금에게는 가슴 시린 시간이었고, 켄 에게는 새로운 갈등의 시간 이었다. 딸 미유 에게 만은 자신이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켄에게 해금의 존재는 영원히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섬으로 돌아온 해금이 어느 날 각혈을 한다. 폐암이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2년여간을 섬에서 미유와 함께 생활할 때가 해금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게다. 병이 악화되어 해금이 더 이상 살지 못함을 알았을 때, 켄은 오열한다. 제주 우도에서 일본의 화산 섬 미케야지마까지, 한 잠녀 가족의 4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하여 소설은 우리 역사 속, 기층민중의 역사를 복원한다. 또한 오늘날 한일관계의 원형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들의 고단한 삶 역시 눈에 선하게 그려낸다. 결국 국가란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할 때, 기층민중의 삶은 어떠한지, 타국에서 영원히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의 가슴속 절규는 어떠한지를 작가는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미유는 해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섬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섬에서 해금의 자리를 지킨다. 그녀에겐 자신이 쿼터든, 하프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의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생각이 마음을 놓이게 하지만, 그녀 또한 무수한 내면의 혼란은 겪었으리라. 그것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제주의 한 잠녀의 가족사는 우리로 하여금 천형의 땅, 4.3의 땅, 제주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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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비극이라 불리는 6·25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비극적 사건 끝나지 않은 이야기 4·3 항쟁을 다큐 형식에 담은 지슬 영화를 보았을 때의 아릿한 슬픔은 고이는 시간 속에 아픔을 덧칠했다. 왜 죽어가는 지 모른 채 죽음의 공포 속에 짓눌려 숨 죽여 지내던 이들의 순박한 대화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진상 규명이 미완의 과제로 남아 마음이 무거웠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일어 부서지고 깨지기를 반복하며 비취 빛 세상을 만들고 세월의 부침에 따라 기이한 모습으로 시선을 끄는 화산섬 제주도를 여행할 때면 낭만적인 생각만으로 여행하기에는 역사적 부채가 크게 자리하는 섬이다. 무고한 양민들을 폭도로 몰고는 가혹하게 탄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대로 학살하였고, 공권력을 자행한 이들은 국가 유공자로 선정해 정부의 보훈 대상자로 삼았다니 부조리한 역사의 일면을 보여준다.
우도의 동쪽에 자리한 조일리는 검은 모래 해안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나고 자란 구월은 태어나면서부터 잠녀로 살아야 할 운명이 지워졌다. 물질 솜씨가 남달랐던 구월은 박상지와 결혼하여 자주적인 어로 행위를 위해 조합을 결성하였지만 일제의 직간접적인 탄압으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딸과 아들을 낳았고, 태평양 전쟁이 나던 해 가족과 함께 살아보겠다고 식구들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남해상으로 180킬로미터 떨어진 화산섬 미야케마에서의 삶은 감시와 통제 아래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구월은 해녀로 지난한 삶을 이어왔다. 분화로 용암이 분출하였다가 식으면 세상을 검게 물들이는 미야케지마 섬은 고향의 검멀레와 같은 빛깔이지만 폐포를 열고 호흡하며 살아가기 힘든 시련의 공간이었다.
일생을 두고도 못 잊을 사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심어진 그리움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여생을 보내야 하는 살아남은 고통은 통렬한 아픔으로 자맥질하기 일쑤다. 태평양 전쟁 때 맥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기진한 구월은 태를 묻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고생만 하다 황천객이 되어버렸는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끈을 놓아버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해금에게 아버지의 제사상을 차려주길 당부했다. 원폭 투하로 나가사키가 초토화된 날 해금의 아버지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정을 나누며 살려 했던 꿈마저 한방에 날려버렸는지 모른다. 유영하는 돌고래들을 바라보다 해초를 캐던 낫을 던지고 돌고래를 따라 갔던 구월이 미이케우라의 검은 모래 위에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식구들은 그녀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바다에 유골을 뿌림으로써 물질로 평생을 살아온 험한 구월의 인생길을 어루만져 주었다.
물질로 생업을 잇는 엄마를 대신해 도쿄로 나가 공부하는 기영을 주기적으로 찾던 해금은 임시교원으로 일하는 한태주를 향해 달뜬 마음을 누를수록 한 남자를 향한 동경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숱한 만남 속에 고정되어 있던 둘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사랑은 크고 작은 표현에 담아 속뜻을 내비쳤다. 글을 깨친 해금에게 자존감 있는 생활로 비상하려는 주인공의 변화를 담은 ‘날개’소설을 건네주던 그의 손길은 그녀의 마음을 달뜨게 했다. 기품 있는 지성인 한태주를 마음에 품고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표현하기를 꺼렸던 해금에게 그는 연모하는 여성이 해금임을 밝히고 사랑의 씨앗을 그녀의 뱃속에 심어두고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의협심이 강한 태주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죽음의 땅을 향하였고, 해금은 새 생명을 뱃속에 품고 한태주의 귀환을 바라며 일상을 견뎌왔다. 달이 차서 건일을 낳아 기르는 동안 아들의 장래를 위해 양아버지와 재결합하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아들의 일신을 도모하였다. 후쿠오와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그의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었고, 물질을 하는 대신 민박집을 운영하며 신산한 삶의 무게를 상쇄하여갔다.
사지(死地)의 공간을 탈피하여 낯선 공간을 찾아 토착민들과 함께 섞여 사는 동안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당하는 아픔을 삭이며 켄은 일본의 엘리트로 자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재일 한국인의 아픔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때가 있다. 스쿠버 다이빙 동아리에서 만나 공인된 연인으로 자리했던 미유와 지로의 관계가 지로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로 일단락되는 부분은 순정(純情)이 물거품으로 화하고 마는 순간이다. 일본 우익 세력의 기득권층이 누릴 수 있는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미유를 내친 지로의 행동은 재일한국인이 당하는 고통 속에 융해되어 흐른다. 일본에서 살 길이 막막해진 이들은 귀국선을 타고 북조선으로 갔고 하나밖에 없던 기영을 찾아 수소문하였지만 동생이 숙청당했다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은 운명을 거스르지 말고 섭리대로 살아 때가 되면 그동안 부여잡고 있던 생명의 끈을 놓아야 함을 일깨운다. 행장을 간단히 꾸려 검은 모래 행장고향을 등지고 재앙은 대분화 이후 세간을 잃고 일터를 송두리째 빼앗겨 재건하기 힘들어 보일 때도 해금은 강단진 태도로 민박집과 카페를 운영하며 살림을 꾸려갔다. 폐허에 피어나는 들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일생을 버텨 온 해금이 폐암으로 생명이 사위어가는 어머니에게 죄스러움을 토로하는 아들 건일의 절규는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아웃사이더의 피 맺힌 한으로 물든다. 해금이 엄마 구월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 낸 미유와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리운 이들의 못다 한 목숨까지 받아 살아왔다는 해금의 지난한 삶은 모진 세상살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희망의 꽃을 피워낸 숭고한 가치를 발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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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났다. 언젠가 제주 우도에 갔을 때 보았던 해녀상.물질에 필요한 해구를 짊어지고 바다 쪽을 향해 구부정하게 서 있던 여인의 모습이었다. 바다가 소를 수장시킨 듯 파도가 높고 거칠던 어느 날이었다. 『검은 모래』를 읽고 나서 다시 제주에 가고 싶어졌다. 여행자로서 간단히 일별했던 그곳, 풍경의 상처와 흔적들을 찾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해녀는 그저 바다여인(海女)일 뿐이었다. 물속에서 멍게, 해삼, 전복 따위를 채취하는 사람들로만 여겼던 게 사실이다. 4.3사건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먹고살기 위해 바다에 들어가야 했던 ‘그녀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심했고,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바닷속 먹거리마저 장악하려는 일제의 횡포에 떠밀려 우도의 해녀들은 미야케지마라는 이름도 낯선 일본의 작은 섬으로 머나먼 길을 떠난다.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생계를 위한 여정이었을 테다. 『검은 모래』의 장구한 서사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야케지마는 뱃길이 만만치 않은 멀고 먼 섬이었다. 게다가 지난해인 1940년 7월에 발생한 대분화로 사람이 12명이나 죽었다고 하니 뱃길만이 아니라 인생길도 녹록지 않을 것 같았다.” 주인공 해금은 어머니 구월을 따라 낯선 곳에 정착해 해녀로서의 삶을 물려받고, 그곳에서 사랑도 키워간다. 하지만 언어도, 문화도, 입는 옷도 다른 타지에서의 삶이 결코 쉬울 리 없다. 무엇보다 그녀를 힘들고 불행하게 만든 것은 해금에게서 행복을 뜯어가려는 "역사"의 방해 공작이었다. 해방 뒤 국론분열로 들끓는 조국이 남북으로 서로 머리를 다르게 눕는 상황에서 해금의 동생은 북한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싣고 그것이 영영 마지막이 되어버린다. 사랑했던 남자 한태주 역시 한국전쟁에 북한군으로 참가했다가 희생되고 만다. 단 하룻밤의 사랑 이후 미혼모가 되어버린 해금은 한태주의 아들 건일을 낳고, 청각장애를 가진 일본인 어부와 재혼한다. 건일은 마츠가와라는 성을 얻고 마츠가와 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멀리 방파제로 부딪치는 파도가 하얗게 물꽃을 피웠다. 포근했던 봄날에 한태주와 나란히 도쿄의 강변을 산책할 때, 길가에 무리 지어 피어나던 이팝나무의 하얀 꽃처럼 거품을 피우는 파도가 해금을 대신하여 울었다. “건일아, 이 엄마…… 내일 시집간단다.” 해금은 고무공을 가지고 놀다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쓸쓸히 말했다. 건일은 마츠가와 켄이라는 합법적인 일본 이름을 얻었다. 국적이 달라졌다지만 부모 자식 관계에 털끝 하나 변한 것은 없었다. 국적이란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해금은 아들이 일본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가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창시절, 역도산을 우상으로 생각했던 켄은 야쿠자의 칼에 찔려 죽은 역도산이 그동안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왔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켄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사춘기를 보낸다. 그리하여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결국 어느 정도 안정된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켄의 딸 미유는 아빠와 생각이 다르다. 그녀는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있는 할머니 해금을 사랑하고 미야케지마에 자주 놀러가고 싶어 하는 귀여운 손녀다. 일본 내 한류열풍의 수혜자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 발랄한 여대생으로 삶도 사랑도 예뻐 보이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미유를 둘러싼 일본 사회에는 혐한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정착을 꿈꾸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는 단순히 제주 해녀의 삶을 그린 역사 소설이 아니다. 또 뒷부분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거기에만 초점이 맞춰진 작품도 아니다. 나는 백여 년 전 어느 날 먼 곳으로 출가물질을 떠난 어린 해녀의 가슴팍에 안긴 새하얀 부표를 떠올린다. 개인의 삶을 물크러뜨리는 역사라는 높은 파도에 맞서기 위해 그네들이 살아낸 삶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네들은 격랑에 휩쓸리면서도 부표를 꼭 끌어안았고 그렇게 살았고, 결국 살아남은 것이었다. 이보다 무엇이 더 위대하다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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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내가 읽은 첫 번째 디아스포라 소설. 책 표지에 빛나는 모래 촉감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마음에 들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나 시리즈별로 나오는 책 등,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소장하게끔 만드는데, 이 책도 역시 그런 아름다운 디자인의 책 중 하나이다. 21세기의 마케팅에서 디자인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인걸 잘 느낀다. 책이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관심이 많이 갔었고 기대도 했었는데, 솔직히 읽다가 실망한 부분이 4.3 사건을 언급하는 부분은 딱 한 장면 나오는데 그냥 상황묘사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4.3 평화문학상이 뭔지 궁금하다. 어떤 기준으로 수상작을 매기는지 사실 글 말미에 심사평이 나오기는 한다...그래도 여전히 미심쩍다. 하지만 내용은 굉장히 흡입력 있었다. 글의 배치가 어머니세대의 얘기랑 손녀세대의 얘기가 홀짝수로 번갈아 나와서 처음엔 헷갈렸는데 나중엔 같이 나왔다. 나중엔 해금이가 아들인 켄의 화해와 더불어 손녀인 미유가 해금이 운영하던 카페를 이어 운영함으로써 훈훈하게 끝맺는 이야기인데, 특히 돋보이는 이야기 전개방식은 3인칭 시점이라 객관성을 더욱더 높였다고 본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은 결론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이야기를 풀어씀으로써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어서 마치 추리소설의 일부를 보는 듯 했다.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 나와서 이야기를 읽는데 한층 더 흥미로웠고 사실, 흥미로웠다가 보단 가슴이 답답해지는 부분이 많았다.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니까 그냥 하나의 소설이 읽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내가 들어가서 상황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디아스포라 소설이라는 단어자체가 꺼림칙하긴 하지만, 인정해야할 우리의 과거이기 때문에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구절절 글을 읽으며 조상들의 한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랑이야기도 삽입시켜 물드는 단풍으로 인해 감수성 풍부한 나의 가슴에 작은 불을 지피기도 했다. 해금과 켄의 화해 장면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글의 흐름의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또한(?) 보인긴 했지만, 대체로 윗세대와 아랫세대 이야기를 잘 병치시키며 이야기의 흐름이 잘 흘러간다고 봤다. 사실 글을 읽으면서 계속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앞에 작가소개를 봐도 내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광고회사에서 근무한 이가 어떻게 이렇게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에 생생한 묘사를 구현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작가와 작품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배경으로 인해 어떻게 이런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더 찾아봐야겠다, 작가의 이력에 대해서... 나의 첫 디아스포라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났다. 성공적인 첫 발자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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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 4·3은 좀 난해한 문제입니다. 한국전쟁도 저와는 별개처럼 느껴지는데 4·3은 더욱 그렇습니다만 제가 나고 자란 제주가 들썩이던 그 시절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에는 ‘까마귀제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집 건너 몰래 지내는 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4·3때 돌아가신 분들이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있는데 그걸 대놓고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손들이 지금은 많아 이제는 제사도 나눠지고 간략화 되었으니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4·3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아픔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눈으로 그런 제사를 본 적도 없고 지내 본 적도 없기에 여전히 남 일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도 결코 빗겨갈 수 없는 4·3의 잔향은 있습니다. 저에게는 마음이 조금 불편한 이모님이 계십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순수하셔서 나이마저도 그저 숫자에 불과한 이모님은 외모도 동안, 생각도 동안이십니다. 삼십 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외삼촌댁에 머무시는 이모님 이야기를 어머님께 물어본 것은 고작 몇 년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4·3때였고, 그 사건을 외할머님이 직접 목격하셨는데 그때 할머님 뱃속에 이모님이 계셨다고, 아마도 그 충격으로 이모님이 저렇게 되신 것 같다는…. 제주도에 살면서 4·3은 많이 접하는 단어지만 결코 친숙하기 어려운 말이었는데 어느새 4·3은 제 가족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앗아간 것은 바로 4·3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4·3은 언제나 제게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희 아버지도 어머니도 4·3을 이야기하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모두가 피해자였기에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 속에 부모님 마음속에는 아픔만이 쌓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의 한 소설을 만났습니다. <검은 모래> 이유 불문하고 첫 장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 제가 기대한 그 이상이었습니다. 당연히 4·3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검은 모래>는 제주도, 제주 사람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거대한 섬이었습니다. 잠녀(제주말로는 녀, 제주에서는 ‘아’ 보다는 ‘오’에 가까운 발음으로 좀녀)인 구월, 해금에 이어 재일동포로 사는 켄, 그리고 미유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이야기는 제주가 낳고, 제주가 품은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 고이는 시간은 가슴에 흔적을 새긴다.(프롤로그 첫 문구) 소설의 시작에서 말해주듯이 흐르는 시간과 고이는 시간이 공존하는 제주 인들의 이야기가 소설 속 캐릭터들의 삶에 녹아들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검은 모래>는 그냥 제주입니다. 제주의 시간이, 역사가 그대로 담긴 것이죠. 물질 갔다가 바닷가에서, 검질을 메다가(김 메기를 하다가) 밭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할머니,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제주에서는 흔한, 이야기 축에서 낄 수 없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해금은 제주에서는 특별한 아이가 아닙니다.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태어났으니까요. 그런 해금이 어업침탈로 일본으로 건너 간 것 또한 특별하지 않습니다. 많은 제주 도민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니까요.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삼촌들의 이야깁니다. 그리고 그들이 터를 닦은 일본에서의 삶은, 점점 잊혀가는 제주 어를 연구하기 위해 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인들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들은 제주의 잊힌 삶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켄처럼 미유처럼 이민 세대를 넘어가면서 그 자취는 점점 옅어지지만 일본인의 차별은 옅어지지 않는 것 또한 더 이상 특별하게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은 그냥 제주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죠. 디아스포라는 정착을 꿈꾸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삶에는 늘 결핍이라는 물이끼가 습진처럼 끼어 있다. 아무리 먹고살 만해도 그들의 가슴은 허기지고,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어도 늘 춥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설명한들 알 수 있을까.(본문 215쪽) 제주를 떠나 타지인 일본에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하고 사는 제주 재일동포들은 디아스포라, 이방인입니다. 그들의 결핍을 채우기에는 지난 역사가, 시간이 너무나 아프고 깁니다. <검은 모래>는 그 이방인들을 향한 작은 위로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조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작은 가교가 되어주기도 하겠지요. 제주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흔들림 없이 담은 것이 <검은 모래>이고, 억지스런 눈물 없이 담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작가입니다. 그동안 제주 출신 작가들이 보여준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대 서사시였습니다. 그리고 <검은 모래>는 제주의 삶이고 그 자체가 제주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제주 사람으로서 <검은 모래>를 집필해 준 구 소은 작가님께 감사함을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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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집에 갔는데 낯선 이들이 잔뜩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는데 친척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모르는, 오로지 할아버지만 알고 있는 친척들. 알고보니 일제 시대 때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끌려가 영영 헤어져 있다가 당시 가족 방문이 허용되자 할아버지의 요청으로 오게 되신 분들이었다. 수십년이나 못 보았으니 쌓인 할 말과 나눠야 할 감정은 당연히 많았고 그 날 우리 집엔 밤 늦도록 술자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마지막엔 울음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내 조그만 머리로 그 수 십년간 쌓인 고생과 설움 그리고 울분을 따라잡기엔 너무도 벅찼으니까. 그냥 눈만 멀뚱하게 뜬 채, 안주만 주워먹다가 느닷없이 할아버지와 방문한 이들의 울음을 보게 된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그 날 밤이 떠오른다.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바람에 강제로 이리저리 뿔뿔히 흩어진 피붙이들이 수 십년간 받아온 남의 땅에서의 설움과 쌓여온 고향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설령 서로 어렵게 만나더라도 끝내 내어놓을 수 있는 건 말이 아니라 그저 울음 밖에는 없었던 그런 밤이. 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에 나오는 해금도 그랬으리라. 어릴 때 떠나와 평생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해금이 만일 '우도 동쪽에 자리잡은 조일리란 마을의 검은 모래 해변'에 어떻게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다면 분명 나오는 것은 그저 눈물 뿐이었으리라. 감정은 때로 언어를 넘어서는 법이다. 더구나 그만한 세월 속에 묵혀온 감정이 아니던가! 어떻게 언어라는 작은 그릇에 다 담겨지겠는가?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진짜 읽게 된 것은 4. 3 평화수상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날 밤 보게 된 그 눈물들을 이해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에 문득 가지게 된 그런 궁금증이 잔모래를 만지는 것과도 같은 감촉을 지닌 이 푸른 표지의 책을 넘겨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더구나 여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에게도 아주 익숙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도 강제징용자였다. 오사카의 부두 하역장이 할아버지가 징용되어 주로 일한 곳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난 할아버지로부터 그 때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주를 하시면 늘 같은 말만 반복하시는 술버릇까지 있으셨는데 취하시면 늘 그 이야기만 하셔서 더욱 반복해서 들어야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겨운 고생담이었다. 겨우 한 줌의 밥만 먹으면서 하루종일 엄청난 짐들을 날랐고 그런데도 열심히 일을 안한다고 일본인 감독관으로부터 가해지는 가혹한 매질을 견뎌야 했다. 당신이 살이 오르지 않는 것도 그 때 하도 고생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나라를 빼앗기면 가장 힘든 것은 우리같은 약한 사람들 뿐이라고 당시를 회상할 때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겐 일제가 할퀴고 간 상처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머나먼 척박한 땅으로 끌려갔고 또 누군가는 한 세월을 오로지 가축처럼 취급받으며 일만 해야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이야기일까? 아닐 것이다. 당시에 조선에 살았던 일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왔을 보편적인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편적 아픔은 자꾸만 누군가의 특별한 아픔이 되어가고 있다. 아픔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보상은 커녕 그들의 경험조차 제대로 후세에 새기지 못한 채 빠르게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데다가 강제 수탈을 수출로, 강제징용을 자원한 인력 수출로 왜곡하는 말도 안되는 움직임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거대한 아픔을 그렇게 개간하고 다시 포장 도로를 깔아 그 아래 깃들어 있을 고통과 신음의 뼈들을 얼른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려 하는데 어찌 그 아픔을 똑똑히 보아왔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걸 그치게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지우려들면 들수록 더욱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 어떤 역사적 아픔의 편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담아두고 되새기는 것. 그것이 수난의 역사에 자신의 삶과 가족들을 빼앗긴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더욱 이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소중한 것 같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문학적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일제 시대 제주 해녀들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 역사의 어둠 속 구석진 자리에 있던 것에다 이 소설이 최초로 밝은 빛을 비춘 것과 같다. 문학이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다시는 되풀이 되지말아야 할 그 역사적 모습을 제대로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왜 그것의 반복을 막아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소은의 '검은모래'는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형상화되지 못했던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복원하면서도 재현은 생생하고 성찰의 시야까지 폭넓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좌표를 잃고 그저 속절없이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보다 확실한 과거에 대한 성찰은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게 만들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도 있듯이. ![]() 소설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를 잃은 신세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잠녀(p. 14)'였던 구월로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딸 해금을 거쳐 해금의 아들 켄과 켄의 딸 미유까지 세대를 달리하며 일제강점기부터 오늘까지 이르는 한 가족의 역사를 담아낸다. 그 역사는 늘 힘겨운 물질을 해야 하는 구월의 삶 그대로 고난이요 홀로 존재하는 섬처럼 뿔뿔이 헤어짐으로 가득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사는 것도 사랑도 다 그렇다. 하루종일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거친 물 속으로 뛰어들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빈손이요 뜻하지 않은 이별이다. 그 숱한 시간 동안 그들이 건져내는 건 오로지 고통과 눈물 밖에는 없어보인다. 언젠가 구월은 남편을 찾기 위해 원폭이 떨어진 나가사키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보게 된 것은 남편이 아니라 폐허로 변해버린 땅뿐이었다. 구월과 해금의 삶도 그 나가사키의 폐허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물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설령 아픔과 이별 뿐이라 하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섬에 있다고 한들 해금이 텃밭에 박씨를 심듯, 그녀들은 어제도 오늘도 물질을 하고 내일도 물질에 나설 것이었다. 그 지속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이다지도 개인의 삶을 쉽게 짓밟아 버리는 역사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테왁(박의 씨 통을 파내고 구멍을 막아서 해녀들이 작업할 때 바다에 가지고 가서 타는 물건)이기나 하다는 듯이 말이다. 해금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텃밭에다 박씨를 심는 것이었다. 구월의 시어머니도 박씨를 심다가 운명했다. 잠녀들이 박씨를 심는 건 다름아닌 희망을 심는 것이다. 해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화산섬에서조차 열심히 내일을 기약하는 박씨를 심는다. 그것은 아직은 끝이 아니며 내일을 계속 이어가리라는 희망을 하나의 신념처럼 심는 것과 같았다. 한 마디로 그건 쇠뜨기였다. 구월이 나가사키 페허에서 본 가장 먼저 대지의 절망을 뚫고 올라왔던 희망과 재생의 상징인 쇠뜨기. 죽음의 땅에서도 돋아나는 것이 있었다. 검게 녹은 불모의 대지를 헤집고 비 온 뒤 죽순이 솟듯 새싹들이 움튼다. 뱀 대가리처럼 생긴 연한 갈색 포자낭이 서로 키를 재며 쭉쭉 뻗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이며, 그 어떤 모진 환경도 견뎌내는 생명의 숭고함이다. 구월과 해금. 그리고 그녀들을 비롯한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지지 않고 삶을 지속해나가는 이들 모두가 사실은 쇠뜨기라 할 수 있다. 쇠뜨기가 나가사키에 다시금 생명을 가져왔듯 그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었다. 역사는 거대한 나라들이 아니라 오늘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믿고 해야 할 일을 지속해나가는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을 식물에 비유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미유가 켄의 정원에서 본 그대로 소설에서 식물은 아무리 무겁고 짙은 어둠이 몰려와도 다시금 시작할 '회생의 기회가 있음(p.129)'을 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켄의 정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쇠뜨기에서 바로 이어지는 켄의 정원은 그 장의 제목 그대로 '식물의 유혹'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더이상 해금의 박씨와 같지 않았다. 해금은 박씨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박이야 내가 없으면 저 혼자 잘 크겠지 뭐. 정성을 다해 키우던 것들은 손을 타야 살지만, 그건 인간의 오지랖이 지나쳐서 그렇게 된 게지. 그냥 두면 알아서 다 살아가게 되어 있더구나.(p. 67) 식물이 쇠뜨기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회생의 존재가 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손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자연적 자생력에 있었다. 그건 원폭에도 살아남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해금의 말은 이러한 식물의 힘을 존중하고 있다. 해금이 식물을 키운다는 의미에서 그건 그대로 거대한 역사나 국가가 백성과 가지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존중은 역사나 국가 또한 한 개인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태도였다. 박씨와 쇠뜨기를 비롯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와 국가는 그렇지 못했다. 존중은 커녕 개인을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기에 바빴다. 전쟁은 그것의 극명한 증거가 아니었던가. 켄의 정원도 마찬가지다. 식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켄은 식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지속적인 공존의 방법임을 인간보다 식물이 먼저 깨달았다. (p. 144) 하지만 말뿐이다. 그 때의 역사나 국가가 그랬듯이. 켄은 식물에서 보았던 것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그는 타인을 믿지 못했고 자신의 안정된 삶은 스스로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걸림돌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엄마인 해금을 비롯하여 가족을 버렸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인'을 버렸다. 그렇게 된 것엔 불신의 힘이 컸다.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불안이 중첩된 불신. 그건 바로 개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역사와 국가는 모든 개인이 소중하고 그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된 보편화에 불과했다. 당시의 개인은 그저 국가가 필요하면 동원할 수 있는 존재 이상의 보편적 의미는 가지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구월이 조선 해녀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을 호소했을 때 일본이 국적을 이유로 무시해버렸던 것처럼. 입으로는 보편을 말하지만 손으로는 인위적인 이유로 온갖 것으로 나누었다. 켄의 정원은 그러한 거짓 보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다. 그 어떤 자연적인 자람을 거부한 채 오로지 인위적인 손길만 가해지는데다가 그저 안으로 채집되기만 할 뿐 아무런 바깥으로의 넘나듦이 말끔히 제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 한껏 고양된 인위성과 오로지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폐쇄성은 현실 국가의 은유라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식물은 본래의 자생력을 잃고 어디까지나 켄에 의해 길러지는 껍데기뿐인 식물로 남는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게 개인이 그렇듯이. 미유와 지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도 그것이다. 미유는 켄과 해금의 언쟁으로 인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대로 4분의 1만 피가 섞인 쿼터가 아니라 반이 섞인 '하프'임을 알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일본이 한국에게 지자 한국을 마구 비하하는 지로에게 미유는 화가나 자신이 하프임을 밝히며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해 줄 것을 고백한다. 미유는 지로의 사랑을 믿었으나 지로는 그러지 못했다. 텅빈 케이크 전문점에서 지로는 미유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이또한 서로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거짓 보편화가 얼마나 허위인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구소은 작가가 주로 일본의 모습에서 이러한 거짓 보편화를 가져오는 건 이유가 있다. 바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외쳤던 '대동아공영'처럼 거짓 보편화의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범 아시아적인 번영을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고 미화했지만 사실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한 일이었다. 켄이 식물에 대한 말과는 달리 타인을 불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미유를 버리는 지로처럼 말이다. 거짓 보편화란 이렇게 그저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현재 일본의 진실된 모습은 어떠한가? 오로지 가상만 남아버린 일본은 실상 텅 비어있다. 구소은 작가는 지로가 미유에게 이별을 말할 때 텅 비어있는 케이크 전문점과 해금이 사는 미이케우라 섬이 밤에는 텅 비어 있음을 통하여 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일본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가상에만 만족하고 속을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진실된 속죄와 깊은 뉘우침으로만 가능했는데 번영이라는 가상에만 취한 나머지 그걸 방기하고만 것이다. 그건 미유와 지로가 연애할 때 함께 했던 스쿠버 다이빙에서도 드러난다. 미유와 지로에게 바다란 구월과 해금처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치열한 전장이 아니다. 그저 한가롭게 구경할 수 있는 관광 장소일 뿐이다. 그렇게 가상만 취할 수 있을 때 그들은 피를 따지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금의 삶과 함께 바다가 더이상 가상이길 포기하자 그들은 헤어진다. 이로써 구소은 작가는 해녀의 삶과 현재 일본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선명히 한다. 그녀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본처럼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기 위한 대안을 바로 해녀의 삶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모습인가? 그건 단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의 테왁이 가지는 차이점을 말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부표로 만든 테왁의 소재와 모양인데, 여기서는 박속을 파내고 잘 말려서 만든 테왁을 쓰지 않고 나무로 만든 북 모양의 일본식 테왁인 탐포를 사용했다. (...) 해녀들은 자신의 몸집과 힘에 맞춰 테왁을 만들었는데, 일률적인 일본식 탐포는 익숙해지기까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p. 96) 과연 거짓 보편화의 일본답게 일본의 테왁은 개인의 개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이지만 조선의 테왁은 각 개인의 개성을 고려하고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작가가 구월과 해금의 삶을 하나의 대안으로 가져오는 이유이다. 거짓 보편화가 하듯이 한 개인이 가진 고유한 존재 가치와 시간을 함부로 없애지 않으며 제 가치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켄의 정원과 구월과 해금이 하는 대표적인 행위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켄은 식물을 기르지만 구월과 해금은 바다에서 캐낸다. 기르는 것은 개체를 보편이란 토양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반면 캐내는 것은 개체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엔 아무런 인위적 조작이 없다. 이러한 캐내는 것이 가진 개체 보존의 투명성. 구소은 작가는 해녀들이 하는 행위의 대표적인 모습을 통해 거짓 보편화에 맞서는 대안이 바로 개체들의 투명한 보존과 복원에 있음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검은 모래'에서 구소은 작가가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대안으로써의 해녀 모습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망각이라는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던 일제 강점기 해녀들의 삶을 마치 해녀가 바다에서 캐내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 모습에 담긴 뜻이 또한 오늘의 시대가 텅 빈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되는 지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여 더욱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늘 일본에게 올바른 역사 청산을 이야기 할 때마다 위정자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과거 보다는 미래가 소중하다. 이제 더이상 서로 안 좋은 과거에는 집착하지 말고 협력해서 앞만 보고 나아가자'는 말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과거의 일본이 외쳤던 구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거짓된 보편화다. 역사에 실존했던 개인의 고통과 눈물을 현실적 이익이라는 이유로 쉽사리 제거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결국 그러한 제거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게 만들어 그 반성이 가져올 보다 나은 오늘에 대한 성찰을 조금도 매개하지 못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을 잘못된 과거의 반복을 결국엔 거듭하도록 만든다. 꾸며낸 영업적인 미소가 거래의 신뢰를 조금도 보장하지 못하듯, 진실된 반성과 사죄가 뒷받침되지 못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억지 화합은 관계의 공허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 아마도 종국엔 관계에 내실을 가져다 주는 진정한 가치는 모조리 사라지고 그저 겉모습만 존재하는 텅 빈 관계가 되고말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지금 던져주는 주제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희생한 개체의 존재와 삶에 대한 온전한 보존과 최대한의 존중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화해 역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작품 전체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사할린에서 온 친척들과 할아버지가 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해금 역시 다시 고향의 검은 모래 해변에 서게 되더라도 그저 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의 사회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존중과 사죄도 하지 않고 그저 지우려고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정 그들이 고향의 검은 모래 위에 섰을 때 그나마 밝은 얼굴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가 그들의 눈물을, 아픔을 내 것처럼 소중히 할 때 뿐이리라. 그것을 위해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삶을 발굴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소은 작가의 '검은 모래'는 실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단단한 첫 걸음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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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제주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여행자에게 제주는 낯선 풍광을 선물했다. 4월 제주의 바다는 잔잔했고, 육지는 유채꽃이 만발해 있었다. 한라산과 세계 최장 용암동굴 만장굴, 성산 일출봉, 기묘한 해안절벽인 주상절리와 폭포수, 그리고 소가 드러누워 있는 지형에서 유래한 우도 등. 4박 5일간의 여행 가운데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낸 적이 없이 제주를 속속들이 보고자 했다. 그럼에도, 섬을 떠나던 날 아쉬움이 밀려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제주에 대해 내가 본 것은 그저 풍광이지 역사가 아니었다. 난 제주를 마치 중국인 관광객이나 된 듯 이곳저곳 보고 즐기는 데 소비했을 뿐이다.
제주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제주는 4.3이란 현대사의 흉터를 그 산하에 새겼다. 제주는 20세기 한국민이 당한 일제 수탈의 고통과 6.25를 정점으로 한 피비린내 나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품고 있는 땅이었다. 제주가 아름다운 풍광으로 소비되기 전에, 그 땅에서 질긴 생명을 이어온 민초들의 굵곡진 삶과 역사를 먼저 기억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제 1 회 제주 4.3 평화문화상이 제정된 후 첫 수상작인 <검은 모래>(구소은 지음, 은행나무,2013년)가 집중해 그려낸 것은 20세기의 제주라는 시,공간과 그곳에 몸 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즉, 제주의 우도 출신 잠녀, `구월'로부터 시작된 4대의 삶과 그 시대였다.
구월은 태생적으로 온통 불리한 여건의 삶을 살 운명이었던가 보다. 제주 출신 여성이란 것에서, 평생 물질을 해야했다. 더군다나 태어나자마자 나라를 잃은 신세로 전락했다. 일본 어민들은 제주 앞바다에 나타나 어업 침탈에 열을 올렸고, 그들이 만든 해녀조합에 돈을 바쳐야 그마저 물질이 가능했다. 고향땅에서 물질이 어렵자 잠녀들은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기미가요마루라는 연락선을 타고, 먼 일본땅으로 출가물질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물질 솜씨를 닳은 구월은 빼어난 잠녀로 성장한다. 어선을 두척이나 보유한 박상지를 남편으로 맞았을 때만 해도 그녀의 삶은 순탄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해금과 동생 기영을 낳고 난 후 그들은 우도를 떠나 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4대에 걸쳐 조국과 고향을 떠나 경계인으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고향 땅, 우도의 해변에는 검은 모래가 있었다. 사람들은 제주말로 그걸 `검멀레'라 했다. 구월네 가족이 정착한 일본 섬 미야케지마의 한국인 정착촌 미이케우라의 해변에도 검은 모래가 있었다. `검멀레' 뿐만 아니라 식민지 제주섬과 다를 바 없이 조선의 이주민 잠녀와 가족들은 차별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다. 삶의 구차함과 더불어 역사 또한 그네들의 평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통에 나가사키에 일을 보러 떠난 해금의 아버지, 박상지는 미군의 원폭투하로 생사불명의 인사가 된다. 해방 후 6.25 전쟁은 해금의 짝이 될 뻔 했던 한태주를 남북의 싸움터 한 가운데로 불러들인다. 그가 단 하룻밤의 정으로 남긴 자식이었던 건일(켄)은 훗날 자신의 뿌리를 증오하며 어머니 해금과 담을 쌓는다.
역사에 발담근 인물군상들의 비극적 운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방 후, 일본에 잔류한 재일 한국인들을 처리할 목적으로 일본은 북한과 교포 송환 계획을 체결한다. 결국 해금의 동생, 기영은 북한행을 선택하지만 그곳에서 숙청의 운명을 맞는다. 제주 섬 우도를 떠난 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게 된 잠녀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그녀들의 짝은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다. 남편을 잃고, 동생을 잃는다. 가족과 불화하고 차별과 억압의 일생을 보낸다. 평화롭지 못했던 시대탓을 해야 할까? 기구한 개인의 운명을 탓해야 할까?
"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커다란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 거야, 우리 식구들은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아직도 여행 중인 셈이잖니? 참 길고도 긴 여행이지." 해금은 미유에게가 아니라 창 너머, 켄의 정원 너머 더 먼 곳을 향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먼 고향 땅을 눈으로 밟고 있는지도 몰랐다." 321쪽, 구소은 <검은 모래>
고통과 상처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억이란 과거를 대상으로 한다. 현재는 살아내는 것일 뿐, 기억하진 않는다. 내가 제주에 4박 5일을 머무르며, 단 한 번도 제주의 역사를 생각하지 못한 건, `과거와 기억'에 대한 우리들의 인색함을 드러내준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현재의 우리가 과거 사람들의 삶과 역사안으로 발딛고 소통하는 일이다. 하여, 이 소설속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해금의 손녀이자 켄의 딸인 `미유'다. 구월네 4대 가운데, 미유는 가장 현대적인 인물이다. 그는 극우 일본인의 후손인 `지로'와 사귀지만 재일 한국인의 후손이란 이유로 이별을 겪는다. 하지만, 미유는 아버지 `켄'처럼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할머니 해금이 일본에 정착한 후 살아온 삶을 궁금해 할 뿐이다.
미유는 해금과 제주 해녀들의 부침많은 인생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일본에서 차별 받는게 할머니와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사람이 나고 자랄 곳을 미리 정할 순 없다. 그가 할머니의 삶을 더 많이 알고 싶은 것은, 오직 그네들이 겪어온 지난 과거의 모진 삶이야말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드러날 때, 우린 용서해야 할 사람과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 해금은 할머니의 삶이 빼어난 물질 솜씨 만큼이나 성실하고 건강했음을 깨닫는다. 최선을 다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시대, 제주에서 태어나, 잠녀로서 살 운명속에 놓인 여인들은, 살기 위해 먼 타국으로 떠나와야 했다. 더군다나 나라를 잃어버린 것도, 원폭에 남편이 죽어버린 것도, 전쟁의 한복판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것도, 그녀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트럭기사 미야케지마 섬 청년 일본인 `토모야'는 해금의 분향단에 고개를 숙이고 그를 추모한다. 작가는 섬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미유와 토모야의 설레이는 미래를 마지막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국적과 이념을 넘어 진실을 아는 자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이다. 지금도 일본의 양식있는 시민들은 위안부 문제나 식민지 수탈, 독도문제 등 과거사를 일본정부를 대신해 반성하고 사과한다.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숱한 사건들이 지금껏 해결되지 못한 것은 진실을 고백하고, 낱낱이 기억하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왜곡한 교과서를 교과부가 승인한 문제를 비롯, 5.18 역사 왜곡이 일부 보수세력을 통해 버젓이 자행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구소은의 <검은 모래>는 우리 세계에 `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우린 이 소설을 통해, 제주 잠녀들의 모진 삶과 그럼에도 바다를 벗삼아 생을 일구어온 민족의 생명력 넘치는 혼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의 우도와 미야케지마 섬, 미우케우라의 검은 모래 위에 지금 따뜻한 햇볕이 평화롭게 쏟아지고 있다. 그 모래밭을 지나 한국과 일본의 잠녀들이 물질을 나갈 것이다. 바다는 무심히 파도로 일렁일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 평화로운 바다를 파괴하는 인간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파괴의 시대가 오면 구월의 4대처럼, 또다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반복되고, 죽임과 죽음의 운명이 이어질 것이다. 그 불행한 미래를 막아내는 일은 `미유'같이 젊고 명민한 독자의 몫이라 믿는다. 미유는 증오가 아닌 포용, 비난이 아닌 이해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더불어 진실을 발굴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제주에 다녀온지 7년이 지났다. 다시 제주를 찾는다면 갈 곳이 많다. 한라산을 꼭 종주해 보고 싶다. 7년 전, 입산 통제 때문에 입구에서 발을 돌렸던 아쉬운 경험 때문이다. 무엇보다 관광지로만 돌았던 일정은 접고, 제주의 역사를 미리 공부하고, 4.3 평화기념관을 가장 먼저 가보고자 한다. 광주에 갈 때마다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 들르지 않은 자신을 죄스러워 한적이 많다. 그 땅의 아름다움을 말하기 전에, 그 땅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잊지 않는 일은 뒷 세대의 일상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명이다. 우리의 불온한 과거를 기억하고, 낱낱이 밝혀 역사에 기록할 때 다시는 그런 오욕과 죄악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오로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는 넬슨 만델라의 외침은 하여 여전히 새롭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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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다多의 섬 제주도에서 특히나 여자의 삶은 그야말로 '억척'이라 말할 수 있다. 거센 바람과 돌이 많은 땅을 일구고 바다에서 잠녀들에 의해 건져 올려지는 해산물까지 그녀들의 삶은 억척스럽지 않으면 섬에서 견디어내기 힘든,그것이 나라를 잃고 더불어 가난이 모두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악스럽게 현실과 맞써야 했을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남성 보다는 여성이 더 위기대처에 능수능란함이 드러난다. 식구들 입에 풀칠할 것을 억척스럽게 마련하는가 하면 거기에 자식들 교육까지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은 굶어도 새끼들은 먹고 입히고 교육시키며 그렇게 일으켜세웠다. 자신은 까막눈이어도 자식은 힘들게 벌어 대학까지 교육시키는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이었다.그것이 섬 바다 특히나 태어나는 순간 나라를 잃었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잠녀였던 삶이라면 누구보다 더 억척이었을 것 같다.
여기 그런 잠녀의 역사가 있다.우도의 한 바닷가에서 태어나는 순간 나라를 잃었고 잠녀였으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하여 일본 바다로 출가물질까지 가야했던 구월과 해금 그리고 그들의 다음세대인 켄과 미유까지 이어지는 100년의 역사,우리 근대사와 함께 한 이들의 가족사는 나라를 잃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미야케지마로 이주를 하여 삶이 '여행'이라 생각하며 좀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영과후진,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라고 했다. 나라 안팎으로 사정이 좋을 때도 다른 나라에 가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일제강점기이니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은 더없이 힘든 일이었을텐데 잠녀로 가정 경제도 책임지며 자식을 누구보다 잘 키워내려 했던 어머니들의 삶은 또 얼마나 핍박이었을까.어머니들의 옹이진 삶이 웅덩일르 채워 주었기에 켄에서 미유에게로 삶은 이어지고 시간은 흘러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또 그렇게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갈 수 있었기도 하다.
디아스포라는 정착을 꿈꾸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그들의 삶에는 늘 결핍이라는 물이끼가 습진처럼 끼어 있다. 아무리 먹고살 만해도 그들의 가슴은 허기지고,두꺼운 옷을 껴입고 있어도 늘 춥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설명한들 알 수 있을까.아마도 우진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국적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고수한 상잠수 구월과 해금,그녀들의 핍박하고 질곡의 삶을 그 다음세대인 켄(건일)은 외면하듯 한다. 어머니와 멀어지고 어머니가 제주의 잠녀이고 한국인이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세어 나오지 않아야만 자신이 일본사회에서 일본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고 그의 딸인 미유가 완전한 일본인이 되는 길이라 생각한다. 잠녀인 어머니 해금의 유복자로 태어나 호적이 없던 그에게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호적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생사도 모르는 한태주를 가슴에 묻고 일본인 선장 아들인 청각장애를 가진 후쿠오의 양아들로 만들어야 했던 질곡의 삶 또한 해금에게는 또 얼마나 큰 아픔이었을까.자신의 아버지가 전쟁의 피해자였고 그들 또한 전쟁의 피해자로 격랑의 삶을 살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동반자였던 한태주와 어머니 구월을 잃고 기둥과 같았던 동생 기영이 북한으로 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 시간을 그녀에게 던져 준 후 아들 건일만 바라보는 삶에서 아들의 외면은 그녀가 바다속에 잠수 들어갈 때 그녀의 몸을 가라않게 해 주는 납덩이만큼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그녀가 폐암으로 살 날이 줄어들고 나서야 이제서 자신의 어머니를 바로 보게 된다.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흐르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이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 고이는 시간은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해금의 아버지인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였던 박상지와 결혼을 약속한 한태주와 동생 박기영은 그녀에게 '고이는 시간' 인 과거이다. 과거의 아픔을 간직하고 그녀는 날마다 납덩이로 자신을 가라앉혀 바다 밑에서 이 힘든 격랑의 시간을 살아가고 견디게 해 줄 생명줄과 같은 해산물을 건져 올려야 했다. 그렇게 해서 가난을 벗어나야 했고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고 멸시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해금의 시간을 이어준 것은 누구보다 뛰어난 물질 솜씨가 있어 현재를 견디어 굶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었지만 과거의 웅덩이인 옹이를 채우고 현재로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시간은 '켄과 미유'이다. 흐르는 시간을 그녀에게 준 사람들,하지만 켄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미래로 나아가기 보다는 과거에 안주하여 더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를 받아 들이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받아 들이지 않으며 겉포장을 하고 일본인으로 허울뿐인 일본 이름 '켄' 으로 건일을 버리고 일본인 노릇을 하며 살고 있다. 그것이 온전한 삶일까? 켄은 그것이 자신이 살아갈 길이고 버티어 갈 길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딸인 미유에게도 쉬쉬하며 자신의 그리고 어머니 해금의 과거를 덮으려 한다. 하지만 역사도 시간도 흐른다. 어느 순간 덮어 있다고 저만큼 흘러가서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수면 위로 고개를 들고 나타나게 되어 있다. 자신의 과거의 문을 빗장을 걸고 숨죽이며 살아가려 했던 그에게 어머니의 폐암 판정은 걸어 잠갔던 빗장을 풀게 만들었다. 자신이 잘못 살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일본 땅에서 재일교포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란 것을 많이 접해서 알고 있지만 개인의 역사로 보면 분명 건일에게는 오점이고 오류였다. 어머니와 건일의 관계에 물꼬를 튼 것은 그의 딸 '미유'를 통해 화해와 용서 이해를 하게 된다.
"나도 조선 사람이고 네 아버지도 조선 사람이었어. 네가 일본 사람들처럼 살 수는 있으나 일본인은 아니다. 그까짓 종이 쪼가리가 피를 대신 할 수는 없는 거야. 아무리 일본 이름을 가지고 산다 해도 네 피를 속일수는 없잖니. 그리고 네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순결한 피야.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잊지 마라."
제주 우도의 잠녀 구월에서 해금으로 그리고 건일과 미유에게까지의 역사는 제주에서 일본 미야케지마로 뿌리를 내리기까지 격랑의 가족사는 우리의 근대사 100년과 맞물려 역사와 가족사가 씨실과 날실로 잘 짜여진 한벌의 옷이 되어 미유에게까지 와서야 비로소 화해와 용서 속에 몸에 맞는 옷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 과거 식민지였고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굳건하게 자신의 국적을 버리지 않은 해금처럼 우리는 다시금 일어나 '한류'로 일본 사회를 흔들어 놓고 있다. 건일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프로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드라마를 보고 한국을 여행하고 이해 못 할 일이지만 딸 미유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할머니의 고향인 제주여행을 가고 좀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대화를 할 수 있고 해금이 뿌리를 내린 '아리수'를 좀더 한국식으로 가꾸어 자신의 터전으로 삶을 수 있는 것이다. 잠녀로 출가물질을 오던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는 한류가 일본사회를 뒤흔들어 놓아 우리것이 일본사회에 하나 둘 정착하고 있는 시대다. 분명 역사도 흐르고 시간도 흘렀다. 어느 누구의 편에서서 빗장을 걸고 문을 닫을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시선으로 역사도 다시 보고 이해할 것은 이해하고 용서와 화해가 필요한 시기이며 잘못된 것은 꼬집고 넘어가야 하는 그런 과거와 미래를 아우룰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해금이 미야케지마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힘이란 정말 위대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활활 태워 자식을 건사하고 그 다음세대까지 아우르며 과거와 현재를 어머니의 힘으로 이어 놓는 가교 역할을 했는가 하면 자신의 과거 아픔을 꺼내 보기 보다는 미래에 투자를 하며 한국의 어머니상을 잘 보여주었다. 언젠가 나카사키의 아버지가 돌아올지도 모를 곳이고 자신의 반려자인 한태주가 올지도 그리고 동생 박기영이 찾아 올 곳은 미야케지마 아리수다. 그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그렇기에 어머니 해금은 더욱 떠나지 못하고 그곳을 지키고 싶을 것이다. 제주의 우도와 비슷한 화산섬,우도의 검은 모래인 검멀레가 생각나고 우도 바다에서 물질해서 잡던 전복이며 미역이며 소라가 있고 자신의 어머니 구월이 일구던 터전이고 지신들을 버리지 않고 보듬어 준 바다가 이곳이다.늘 억척일것만 같던 어머니 해금이 폐암으로 쓰러지고 그런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는 아들 건일이 마음의 문을 열 때 얼마나 눈물이 흐르던지.나 또한 아버지를 폐암으로 보내드렸기에 그 순간이 기억나 마지막 부분은 울면서 읽게 되었다.그 순간은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고 더이상 가두어 둘 감정이 무엇이 있을까? 생과 사는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강하게 부정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있지만 모든 것은 시간 앞에 굴복하게 흐르게 마련이다. 역사도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지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디엔가 저장되어 있다. 잘못을 했다면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고 포용할 줄 아는,그것이 또한 미래의 역사와 만나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과 동생을 데리고 기미가요마루라는 커다란 연락선을 타고 제주를 떠나오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던거야. 우리 식구들은 일본에서 돈 많이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아직도 여행 중인 셈이잖니? 참 길고도 긴 여행이지."
검은 모래가 있는 '바다'는 구월과 해금 그리고 건일과 미유까지 그들을 살아가게 해 준 생활터전이기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주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도 하면서 그들에게 용서의 기회를 안겨주는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물질하던 미야케지마의 그 바다를 외면하던 건일이 딸 미유와 아내가 미야케지마와 바다를 좋아하며 그곳에 자주 가는 모습을 보며 그도 서서히 빗장을 풀게 된다.그를 살게 해 준 것은 다른 곳이 아닌 이 푸른 바다와 검은 모래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숨을 쉬고 켄의 정원을 가꾸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것도 이 바다고 그들의 삶을 지탱해 준 것도 바다며 바다는 어머니를 품어 주었듯이 모두를 품어주고 용서를 해주었다.우리에겐 정말 아픈 역사였지만 잠녀인 해금의 가족사를 보며 다시금 되짚어 본 역사는 격랑이면서 어쩌면 더 단단하게 담금질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또한 우리네 삶이고 현재의 삶이라면 거부하지 말고 받아 들이며 겸허히 살라하는 듯 하다.겸허한 삶으로 일관했던 해금의 삶이 대단하다. 어느 순간 자신의 삶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을텐데 늘 한결같이 일관한 삶이 현재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 아닐까 한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며 역사 책 한 권을 읽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소설이다.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공존의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책을 읽다 문득 '귀화식물' 을 생각하게 되었다. 귀화식물들은 대부분 우리것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남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면 더 독한 생명력이 그들에겐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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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채널예스에 먼저 올린 글입니다. http://ch.yes24.com/Article/View/23757 --- 소설가 현기영은 “『검은 모래』의 서사는 크고 강하다”고 평가한다. 매력적인 서사가 드문 이 시대, 반가운 소식이다.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에 바쳐진 심사평은 이렇다. 소설들이 서사성(이야기)을 잃고, 그에 따라 독자도 잃고 트리비얼리즘의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것이 요즘의 경향인데 『검은 모래』는 소설에서 서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입증하고 있다. - 심사위원 : 현기영, 김병택, 윤정모, 임헌영, 최원식 서사를 만드는 힘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한 예로, 진중권 교수도 지난 9월 27일 열린 한 강연에서 “우리나라가 스토리텔링 능력이 부족하다. 한국에는 문학이 약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거대서사가 사라진 뒤 예술의 의미도 없어졌다는 상투적인 진단에서부터, 단편 위주의 한국 문단이 지닌 한계라는 분석, 책이 두껍거나 상하로 나눠지면 더 안 읽히는 현실적 제약 등. 어쨌든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면서도 갈수록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나기란 어려워지는 듯하다. 화려한 영상과 순간적인 재미를 제공하는 웹툰이나 게임에 비하자면 소설이 가진 무기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강력한 서사야말로 소설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매력!
『검은 모래』, 역사에서 강렬한 서사를 찾다
역사는 매력적인 서사가 탄생할 수 있는 뿌리다. 역사적 사건이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기도 하거니와, 역사 자체가 이야기기 때문이다. 구소은 작가가 쓴 『검은 모래』도 역사에 뿌리를 깊이 내린 작품이다. 조선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독립을 하자마자 남북이 갈라진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어떤 역사에 드라마가 없겠냐만, 이 시기 만큼이나 사건이 많았던 때도 흔하지 않다. 한자 문명권의 한 축을 담당하며 비교적 안정된 공동체를 꾸려나가던 조선, 유럽과 미국이 강자로 등극한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흥 강국 일본의 속국이 된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오족협화를 주장하며 동남아시아에서부터 만주에 이르는 넓은 공간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치하고자 한다. 물론 허울뿐인 구호였고 실제로는 일본인이 아닌 민족은 차별을 받았다. 어쨌든 활동 범위가 넓어진 이 시기가 영화 「놈놈놈」의 배경인 건 우연이 아니다. 근대의 제국주의는 대개 도시화와 산업화와 함께 이뤄졌다. 식민지 조선도 마찬가지. 신작로가 깔리고 철도가 놓였으며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식민지 모국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에도 공동체 해체, 빈곤 등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식민지에서 사회 모순은 정도가 더 심했다. 게다가 세계 대공황으로 내수 시장이 취약했던 일본은 직격탄을 맞으며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돈도, 기댈 곳도 없던 사람들은 정들었던 고향을 버리고 일본으로, 만주로 살 길을 찾아 떠난다. 디아스포라 소설의 모범을 제시하다 김영하의 『검은 꽃』과 같은 몇몇 디아스포라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 시기다. 디아스포라란 원래 헤어지고 흩어진다는 뜻의 그리스어지만,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탈주와 이주가 전세계적인 현상이 된 지금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도 사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모래』 역시 디아스포라 소설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디아스포라 소설이 으례 그렇듯, 가족사 소설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잠녀로 태어난 구월에서 시작하여, 그의 딸 해금, 해금의 아들 건일(켄), 건일의 딸 미유에 이르는 4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사의 축이 모계라는 사실이다. 이는 소설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주 생계 수단이 어업인 섬에서는 농촌과 달리 여성의 발언권이 세다. 농경 활동에 비해 위험한 어업 활동에서 남자들이 죽으면, 혼자 남는 여성이 가사를 꾸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르나 남자가 부재하는 가정을 여성이 지켜 나가는 설정은 이 소설에서도 나타난다. 구월의 남편 박상지는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나가사키에서 죽는다. 그렇다, 바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 나가사키. 해금의 남편 한태주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번에는 다른 나라의 전선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인 한반도에서. 6.25, 한국전쟁으로 알려진 그 전쟁.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가장인 다소 어색한 상황. 행복한 사회에서 불행한 가족은 있을 수 있지만, 불행한 사회에서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해금의 가족사가 이를 증명한다. 해금네는 먹고 살기 위해 한국의 제주에서 일본의 미야케지마로 이주했고, 일본인의 텃세가 싫어 해금의 동생인 기영은 북한으로 떠나지만 이들에게 평화로운 삶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세계2차대전,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평화는 멀리 있다. 해금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가지만 해금의 아들인 건일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성장통을 앓는다. 일본에서 조센징은 불순하고 불온하다는 낙인이기 때문이다. 건일이라는 이름 대신 켄으로 살고자 하는 그는 일본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해금을 의도적으로 멀리 한다. 이러한 정체성 문제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가네시로 가즈키를 비롯한 여러 재일교포 작가에게 발견되는 대목이다. 소설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화해를 다루다 조선인으로 살고자 하는 해금과 일본인이 되고 싶은 켄 사이에 벌어진 틈을 또다른 주인공 미유가 메워준다. 그녀는 한국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첫사랑이었던 지로와 헤어지면서 아버지인 켄과 마찬가지로 정체성 갈등을 겪는다. 그렇지만 할머니인 해금과 친해지면서 미유는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서사를 요약하면서 불가피하게 시간 순으로 서술했지만, 이 소설은 연대기적 구성을 취하지는 않았다. 현재 시점에서 미유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다음 장에는 구월의 이야기가, 또 다음 장에는 현재의 미유, 다시 다음 장에는 과거의 해금이 등장하는 식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졌고, 둘은 화해해야 한다는 작가의 바람을 담은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세기’라고 표현했다. 부를 향한 질주가 계속되는 한편, 반대편에는 폭력으로 점철된 시대였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냉전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아픔 많은 세월을 겪었다.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한일합병, 2차세계대전, 제주 4.3, 한국전쟁 등. 전쟁 후에도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에게는 비극이 이어진다. 기민정책이라고까지 평가됐던 이승만 정부의 재일조선인 대처는 이들을 더욱 아프게 했다. 자민족을 품는 듯 보였던 북한조차 재일조선인 출신을 숙청했다. 『검은 모래』에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등장하면서도, 등장 인물이 과거와 화해하고 서로를 보듬는 모습이 나온다.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검은 모래가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이 있다. 삼양검은모래 해변, 소설 속 등장인물인 구월이 태어난 제주 우도 조일리 검은 모래 해안이 그렇다. 제주 사람들은 검은 모래를 검멀레라 부른다고 한다. 언젠가 제주를 찾을 날이 온다면, 이 소설이 남긴 여운이 떠오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