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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드러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묻고 싶어진다. 여러 가지 이유로 덮어두고 싶은 것들이 있다. 조용히 지나갔으면 싶은 일들이 있다. 남들이 굳이 몰랐으면 싶은 상황이 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꽁꽁 묶어놓듯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들을 품에 끌어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풀어놓아야 할 순간을 놓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면서, 혹은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믿고 있기에 더욱 덮어둔다. 흘러가겠지, 괜찮아지겠지,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건, 마냥 마음속 기도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바람이다. 그 기도는 누가 들어주나?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못한다. 누군가가 들어준다고 해도 금방 해결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해결이 아닌 하나씩 계속해서 풀어가야 할, 폭력은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공동의 숙제이다.
이상하다. 왜 그랬을까? 한 아이의 눈에 또 다른 아이가 당한 폭력이 어떻게 비칠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나는 줄곧, 폭력이란 것을 겉으로 드러나는 장면으로만 봐왔던 것 같다. 많은 이유로 행해지는 폭력, 그중에서는 정말 이해 불가의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 폭력이란 그 자체는 근절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것만 봤다. 보도되는 내용에만 집중했다. 혀를 끌끌 차면서 미친 듯이 폭력을 행했던 가해자를 바라보곤 했다. 가해자가 법적인 처벌을 받더라도, 남겨진 피해자가 살아가야 할 앞으로의 시간을 걱정했다. 너무 당연한 것처럼 눈으로만 그들을 보듬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열세 살의 마샤가 아홉 살 율리아와 일곱 살 막스 남매의 몸에 생긴 상처와 멍을 봤을 때 가졌던 의문을 단지 하나의 물음표로만 여겼다. 그 이후로 이어질 또 다른 물음표를 생각하지 못했다.
한정된 시간동안만 머물러 있을, 조부모의 동네로 온 마샤.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조용하고 고요한 이 동네의 놀이터에서 우연히 율리아와 막스 남매를 만난다. 그런데 마샤가 바라본 율리아와 막스는 보통의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 율리아와 막스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율리아도 항상 혼자였고 막스는 파블로라는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대화한다. 두 아이가 왕따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이 마샤의 눈에 저절로 보인다. 그때 우연처럼 마샤의 눈에 띈 것은 두 아이의 몸과 얼굴에 생겨난 많은 멍이다. 그 순간 마샤는 생각한다. 아이의 몸에 멍이 생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상황을. 마샤가 추측한 것이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들의 몸에 멍이 생겨난 이유와 폭력의 현장을 마샤는 보고야 말았다. 이제 마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열세 살의 아이가 배운 대로 가정 안에서 생겨난 폭력을, 자신이 보았던 것을 말해야만 한다. 누구에게? 주변의 어른들과 법으로부터 그 아이들을 보호해줄 이들에게. 하지만 이상한 점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와 함께 열세 살 마샤에게는 세상이란 곳, 어른이라는 대상에 대한 혼란이 동시에 찾아온다.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어른은 아이들에게 관심과 배려, 정의를 가르친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수도 없이 부딪혀야 하는 게 사람인데, 그런 존재에게 관심과 배려를 갖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일 것이다. 옳고 그름을 보는 눈도 가져야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배우면서 자란다. 인간성과 사람에 대한 존엄을 배우면서 커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행해져야 할 옳음을 익힌다.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보고 배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마샤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있는 가정과 학교에서 충분히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배운 그대로 행동했던 거로 생각한다. 자신이 본 것을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말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아빠에게 전화로까지 말했다. 긴급번호를 눌러 경찰에게도 말했다. 열세 살의 아이가 행할 수 있는 정의는 그게 전부였다. 그게, 전부였다. 전부를 행했는데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혼란이 왔다. 어른들은 왜 마샤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하고, 듣고서도 모른 척했을까. 율리아는 왜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율리아와 막스 남매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형인데도 아무도 그 상황을 들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샤의 납치극이 그 순간에 당연하게 찾아온 해결책처럼 보였다. 보리밭으로 둘러싸인 푸른 집은 마샤가 몇 년 전에 우연히 찾아낸 비밀의 장소였다. 눈에 띌 만한 장소에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을 집. 놀이처럼 찾아든 그 집에 율리아와 막스를 가두는 마샤였다. 악의로 그런 것이 아니다. 열세 살 아이가 생각해낸, 남매에게 주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폭력의 가해자가 없는 공간, 더는 멍이 몸에 침범하지 않도록, 두 아이의 얼굴에 잠시나마 편안함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랬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봤다. 이 아이들이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막스가 폭풍 흡입하듯 먹어대는 음식, 탄산음료, 그 끝에서 천둥처럼 나왔던 트림 한 방. 모두가 웃었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어댔다. 그렇게, 별것 아닐 수 있는 행동 하나에 웃을 수도 있는 아이들이었다. 생각해보자.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탄산음료를 마시고 개운하게 트림을 할 수 있는 것, 소소한 말 한마디에 웃어 재낄 수도 있는 것. 그런 일상이 율리아와 막스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된 창고 같은 집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두려워서 혹은 편안함을 침해당할까 봐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큰 문제를 방 안의 코끼리(the elephant in the room)라고 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모두가 침묵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인 이 마을이 평온하기를 바란다. 감히 폭력이 행해지는 가정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마을을 그렇게 보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비치는 이미지가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평온을 유지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율리아와 막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똑같이 폭력의 피해자로 남아있는 엄마를 생각해서 말할 수 없다.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서 수시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율리아와 막스, 엄마 모두를 지키고 싶었다. 자신의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더 심해지고 계속될 폭력을 두려워했다.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 ‘방 안의 코끼리’라 부르는 것을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다. 못 본 게 아니라 안 보려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나 율리아의 가족, 나 역시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듯하다. 엄청난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던 막스의 비대한 몸처럼, 그렇게 안 보려 하는 코끼리가 결국은 점점 더 비대해진다는 것.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로 그 코끼리를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가 겪어야 할 두려움은 그만큼 더 커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평온은 만나기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폭력을 소재로 한 많은 책이 있음에도 이 책이 조금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단순히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보여주거나 그런 폭력을 바로잡아 해결해야 한다는 게 아니었다. 그러한 폭력을 방치하게 되는 또 다른 시선을 보여주었다. 침묵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바라본 침묵은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나의 일이 아니니까 모른 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사는 이 동네의 이미지를 위해서, 그저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으로 인한 사람들의 외면이었다. 뜻밖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들어왔던 폭력을 대하는 대부분의 시선은 내 일이 아니니까 나설 수 없다는 회피였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마을 사람들이 율리아네 가정의 폭력을 외면하는 모습은 침묵으로 인해 폭력을 동조하고 있었다는 끔찍함으로 다가왔다. 소리 없는 총성으로 들렸다. 소리 나지 않게 한 발, 한 발, 잔인하게 쏴대고 있었다.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마샤의 행동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폭력이 아이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볼 수 있게 한다. 그것도 가장 기본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가정 안에서, 아이를 책임지고 양육해야 하는 부모가 그랬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공포감을 주고 있다. 아이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유치원이나 학교를 시작으로 좀 더 넓고 큰 세상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부모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충분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보호받고 자라면서, 낯설지만 부딪혀야만 하는 세상을 그렇게 하나씩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이가 그런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선생이자 버팀목이 되는 게 부모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고 자란 아이에게는 특유의 행복감이 얼굴에 서린다. 내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이다. 그건 봐야만 느낄 수 있다. 꼭 그때만 경험할 수 있는, 줄 수 있는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게 부모라는 게 아프다. 그 시간에 축적된 인성이 아이의 앞날에 얼마나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 봐왔기에 두려워진다. 율리아와 막스, 두 아이가 그 폭력의 시간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염려스러워서...
무조건 잘될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경험한 세상은 희망을 말한다고 해서 그대로 희망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기대한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거대해져 가는 코끼리를 바라지 않음을, 누구를 위한 평온인지를 똑바로 봐야 함을. 마샤가 율리아와 막스를 폭력으로부터 구해주기 위해 했던 행동이 납치였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얼굴에 평온한 가면을 하나씩 쓴 채로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할 때, 비록 범법이었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아이를 구해내고자 했던 열세 살 소녀의 순진한 해결 방법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를 봐야 한다고. 단지, 평온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사람들이 침묵으로 만들어낸 폭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똑바로 지켜보라고 말이다. 침묵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폭력의 피해자이자 어린아이인 율리아와 막스, 자신이 배웠던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납치를 택했던 마샤, 조용하게 살고 싶어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말자고 말하는 어른들. 그들의 마음을 들으면서 ‘나라면?’이라는 물음표를 계속 던져주고 있지만 쉽게 답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이해한다거나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을 함부로 건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단정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는 느낌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대신하려 한다. 언젠가 나에게 한 번 더 물음표를 던져준다면, 그때는 작은 목소리로라도 선명한 대답할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감을 가져보면서...
하나의 똑같은 상황이 각자 서 있는 입장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그 심리를 엿보는 재미가 특히나 좋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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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긴, 말한 그대로지. 그냥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말이야. 아빠가 나를 때릴 때면 나는 벽을 보며 어느 한 점을 찾아. 그런 다음 그 시간 내내 그 점만 봐. 그러곤 내가 어딘가 다른 어떤 곳에 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그게 돼. 아빠가 발작을 일으킬 때면 언제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어.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 나는 더는 거기 있지 않으니까.” p134 이 부분을 읽는 데 더욱 가슴이 아팠다. 물론 처음부터 이 책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 』 의 내용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알고 있는 내용일지라도 그 내용을 다시 보게 되면 참 가슴이 아프고 답답함이 몰려온다. 아빠의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아이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마치 그곳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한다니 말이다. 율리아와 막스는 10살도 안 된 어린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 동네 아이가 죽은 사건이 있었다. 아마 이야기를 살짝 듣자니 부모의 구타로 죽은 것 같다. 그런데 그 가여운 아이는 아파서 죽은 걸로 되었다. 그리고 죽어서나마 흰 색 드레스를 입고 저세상 가는 길에 그 옷을 입게 되었다, 평생 예쁜 옷을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아이는 죽어서 입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네에 불이 난 적이 있다. 부모의 싸움으로 태어 난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죽었다. 어른이나 다른 사람들은 불이나자 피신을 했지만 아이는 피신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이다. 이렇게 어른들의 실수와 만행으로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참 답답하고 가슴이 아팠다. 세상에 누구를 믿고 살아야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도 이런 사람들보다 믿고 의지하고 좋은 어른들이 더 많을 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마샤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집에 내려와 사다.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의 일을 하시고 가끔 딸 마샤를 보러 온다. 이 마을은 아주 조용한 마을이다. 오래전부터 사건도 없고 사고도 없는 그런 조용한 동네다. 어른들은 이 마을이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라고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신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의 안 좋은 면은 보지 않으려하고 좋은 면만 보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율리아와 막스는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하고 산다. 그런데 어른들은 다들 입을 다문다. 물론 알고 있는지 아니면 이 아이들의 부모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특히 우리 마을을 그런 마을이 아닌 평화로운 마을이야 하는 생각으로 산다. 놀이터에 나간 마샤는 누구하나 놀아줄 사람이 없이 외로운 아이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지내는 날들이 많다. 그런데 마샤에게 어느 날 남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남매의 동생은 뚱뚱했다. 그리고 누나인 율리아가 마샤에게 다가와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친해졌다. 그리고 막스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 산다. “야 비계자루, 코끼리는 밥을 얼마나 먹냐?” p23 “잘한 일이 아니었어. 전혀! 코끼리가 자기가 죽을 때를 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단 말이야. 아프리카 코끼리들은 자기가 죽을 때를 안대. 언젠가 방송에서 본 적이 있었거든. 그때가 되면 코끼리들은 늪지대로 가서 한동안 기다린대. 그러다 어느 순간 그냥 죽는다고 했어.” p26 놀림을 당하며 사는 막스에게 누가가 코끼리 이야기를 해줬다. 누나인 율리아는 코끼리가 멋지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동생 막스는 아버지에게 시달림이 심하고 친구들의 놀림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코끼리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막스는 먹을 것을 들고 지하에 내려가 그것을 먹고 죽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얼마나 힘들면 그런 생각을 할까? 가슴이 아팠다. 참 코끼리는 죽으려고 그곳에 가는게 아니라고 한다. 이가 빠지고 연약해져서 늪지대에가서 풀을 먹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때가 되어 죽는 다는 것이다. 마샤가 본 아이들의 살짝 모습들은 기가 막혔다. 막스의 이마를 보니 멍이 든 자국이 있었고 살짝 배를 보았는데 거기에도 다친 흔적들이 있었다. 그리고 막스는 이상한 행동들을 했다. 아마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들의 집에 간 마샤는 막스가 아버지에게 맞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말씀 드려도 믿지를 않는다. 그리고 동네에서 맞는 다고 말한 이웃이 이 동네에서 쫓겨났고 의사 한명은 이 사실을 말하고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동네는 아이들이 맞는 것에 비밀이 되었고 아는 지? 모르는지? 어른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동네는 살기 좋은 평화로운 동네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래 결심했어? 마샤는 아이들을 몰래 숨기기로 생각한다. 아버지에게서 아이들을 피신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네 보리밭 한가운데 오두막에 아이들을 피신시킨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아파서 아버지가 부탁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 오두막은 한 여름에 지내기에 무척이나 더워서 아이들이 생활하기에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마샤는 며칠 동안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멀리 떼어 놓는 게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여기 있으면 고아원에 버려질 것이고 아버지가 엄마와 떨어지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무서웠지만 엄마가 좋았던 것이다. 엄마와 떨어져서는 살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열세 살인 마샤가 아이들을 담당하기에 많이 어렸다. 어린 마샤는 그래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았지만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아이들도 마샤를 의심하게 되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있었던 모든 일들은 비밀로 해달라고 약속을 한다. 특히 아버지에게 맞은 사실 말이다. 마샤는 율리아와 막스에게 약속을 한다. 아버지에게 맞은 사실을 동네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말이다. 며칠 후 동네에서 아이들을 찾게 된다. 아이들이 있던 곳은 개, 돼지우리 보다 못한 곳이었다고 뉴스가 나오고 마샤가 아이들을 가뒀다고 뉴스가 나온다. 동네 사람들은 마샤의 집에 행패를 부리고 돌을 던진다. 그래도 마샤는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약속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마샤를 믿지 못하는 가운데 할아버지만 마샤를 믿어준다. 그리고 점점 마샤가 진실을 고백하게 되고 경찰들은 아이들 건강으로 병원에 진료를 맡기는데 거기서 사실 율리아와 막스의 몸을 보게 되면서 점점 진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오두막에 있던 시기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온몸에 멍 자국이 있고 뼈가 부러져 아무는데 이상하게 아문 자국들도 있고 심한 상처가 한두 군데가 아닌 것으로 말이다. 어른들은 이런 사실을 보면서 많이 반성해야 한다. 이상한 동네가 아닌 그저 살기좋은 동네, 평하로운 동네만을 강조한 어른들이 만든 사건은 아닐런지 말이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는 세상이 올 것이다. 요즘도 텔레비전 뉴스나 여러 인터넷으로 사건과 사고를 본다. 가족 간에 사건과 사고들이 참 많은 세상이다. 이런 사건과 사고들 제발 일어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며칠 전 뉴스에서 어느 교회에서 아이를 버릴 거면 이곳에 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곳에 아이를 버리는 숫자가 더 늘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이런 추위에 갓 태어난 아이를 버리면 얼어 죽을 것이다. 그래도 그 아이를 살리겠다고 그곳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곳으로 인해 더 버리는 퍼센트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최선일 것이다. 거기에 아이들 성교육도 철저하게 시켜주길 바랄 뿐이다. 자식을 둔 부모로서 참 걱정이다. 참 사건도 많고 사고도 많은 이 세상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없는 건가? 이렇게 아이들에게 학대를 하고 행패를 부리는 부모들은 좀 살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아이들 혼낼 때 매를 드는데 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 어른으로서 이런 책을 읽으면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된다. 추운겨울 내 주위를 살며시 돌아다보는 그런 사람이길 바래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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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의 코끼리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가정폭력의 희생자들을 구해주지 못할 때 우리들이 가장 빈번하게 하는 핑계는 "가정사다. 남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부부들만의 사정이 있겠지...."가정이라는 이름 안에서 행해지는 폭력앞에 우리는 그렇게 말없는 방관자가 되곤 했습니다. 얼마전 뉴스를 통해 또 시사다큐를 통해 만난 12살 소리와 9살 소원이의 사연은 너무나 가슴아팠습니다. 아홉살 아이의 작고 마른 몸에 수없이 남겨졌던 검푸른 멍....게다가 그 아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던 아이는 겨우 12살의 친언니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진실은 학대와 폭력을 피하기 위해 동생을 때리는 가해자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연약한 열두살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의 격언까지는 못 가더라도 최소한의 생명은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누군가 나서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 하겠지 나혼자 못 본 척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외면하는 동안 얼마나 상처입고 아팠을까요....처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엘제'와 함께 했었더라면 더 많은 상처와 폭력을 막아낼 수 있었을텐데....책을 보는 내내 공범이라는 틀에 갇히고 싶어하지 않는 이기적인 내가 계속 마을사람들을 원망하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소원이 자매를 보호해주지 못했던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사람들이나 이웃사람들에게 비난을 했던 것처럼...마을사람들에게 꽃을 듬뿍 안겨주는 친절한 얀센아주머니도,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말자고 했던 마샤의 할머니도 , 다른 사람도 침묵하게 만듦으로써 함께 공범자가 되어 죄책감을 1/n로 나누고 싶어하는....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저의 모습도 담겨있기 때문에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가족과의 이별,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극복하는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거라고 합니다. 가족의 폭력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도 결국 익숙해지고 마는게 아닐까요...누군가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손을 이제는 어린 마샤가 아닌 우리 어른들이 먼저 내밀어야겠지요.
"아빠가 없을 때" "누가 나를 꼭 안아 줄 때. 아주 꼬옥 안아 줄 때." 차마 울수 조차 없었던 여리고 작은 율리아를 꼭 안아주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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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의 코끼리 (the elephant in the room) 누구나 알고 있지만 두려워서 혹은 편안함을 침해당할까 봐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문제.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지는 제목을 보며 내용을 추측해보지만 감이 오질 않습니다. 표지를 보면 더 궁금할뿐입니다. 파란집을 향하는 두 아이. 그리고 어디론가 열쇠를 들고 가는 또다른 아이. 이상한 것은 아이의 열쇠에 보이는 커다란 코끼리입니다. 이 코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 장을 넘기면 어느정도 느낌이 옵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입밖에 낼수 없는 문제. 그 문제는 무엇일까요. 책을 읽다보면 해결이 되겠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이라든가 코끼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솔직히 겁이 납니다. 우리도 이 책을 보고 모르는척하며 입밖에 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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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바렌부르크에서 여름방학을 보내야하는 마샤. 마샤는 바렌부르크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나이 든 사람이 많아 마샤가 함께 이야기하고 놀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열 세살 마샤가 이 동네에세 일흔 살 미만의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율리아 브란트너와 막스 브란트너입니다. 처음에는 이 두 아이가 마샤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두 개의 점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뚱뚱한 점과 그 뚱뚱한 점을 데리고 오는 노란 점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들이 앞으로는 점 이상의 의미가 됩니다.
놀이터에서 만나던 율리아와 막스가 며칠동안 보이지 않자 그들의 집을 찾아간 마샤. 마샤는 그 곳에서 충격적인 것을 목격합니다.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와 함께 창문 사이로 보이는 놀라운 광경. 멍이 든 배, 이마의 상처 등 도저히 계속 볼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누구도 마샤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남매의 아빠는 이 도시에서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가정폭력의 주범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믿지 않으려하고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마저 쉬쉬 합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른척하고 싶은 것일까요.
나는 다른 사람을 안아 주거나 다독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아무도 나에게 그걸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막스의 몸을 본 이 순간만큼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본문 128쪽
두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샤. 열세살 마샤가 생각해 낸 것은 납치입니다. 어린 마샤가 할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구해내 파란집에 가두는 마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이나 도시 사람들은 납치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마샤는 단지 그 악의 소굴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구해내고 싶은 마음뿐이였던 것입니다.
"무슨 말이긴, 말한 그대로지. 그냥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말이야. 아빠가 나를 때릴 때면 나는 벽을 보며 어느 한 점을 찾아. 그런 다음 그 시간 내내 그 점만 봐. 그러곤 내가 어딘가 다른 어떤 곳에 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면 그게 돼. 아빠가 발작을 일으킬 때면 언제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어.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 나는 더는 거기 있지 않으니까." - 본문 134쪽
가정폭력앞에서 묵묵히 당하고 있어야만 하는 아이들. 그런 사실을 누군가 아는 것이 두려운 아이들. 간혹 방송이나 뉴스를 통해서 가정폭력으로 상처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만날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모습을 보며 부모가 어떻게 저렇데 잔인한 행동을 할수 있을까라며 놀라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옆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쉽게 관여하지 못합니다. 다른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며 고작 할수 있는 것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일뿐입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망설일때가 많습니다. 폭력에 익숙해진 아이들. 율리아와 막스도 맞지 않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덜 아프고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갈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해가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침묵은 금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의 침묵은 금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것입니다. 우리의 비검함으로 더 이상 많은 아이들이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을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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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보이지 않아 카르페디엠 시리즈 34권 수잔 클레러 지음 양철북
마샤는 엄마를 잃고 아빠와 사는 소녀이다. 아빠는 바빠서 방학조차도 함께 보내지 못한다. 외로움을 느끼는 열세 살 마샤가 할머니네가 사는 바렌부르크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며 할 일 중에서 그나마 가장 흥미있는 일은 노래 듣기이다. 어느 날, 마샤는 놀이터에서 막스와 율리아 남매를 만나게 된다. 과하게 뚱뚱하고 불쌍해 보이는 일곱 살 막스와 배에 커다란 멍을 가진 예쁜 소녀 율리아는 뭔가 비밀을 숨기는 느낌이다. 두 남매의 몸에 있던 심각한 상처를 가볍게 보지 않던 마샤는 그들의 집에서 아버지 브란트너 씨에게 아이들이 얻어맞는 광경을 목격한다. 대체 바렌부르크의 브란트너 씨 네의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학대와 방관 사이> 마샤는 이 가족에 대한 정보를 더 캐내려고 하지만, 주민들은 괜한 신경을 쓰지 말라는 눈치이다. 하지만 신경 끌 문제가 아니다. 막스는 상상 속의 또 다른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자신이 아버지에게 듣는 욕을 한다. 율리아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이 당하는 학대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마샤는 남매에게 도망가기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마을의 옥수수 들판에 있는 지저분한 푸른 집에 남겨두고 문을 잠근다. 마샤는 혼자서 아주 위험한 범죄를 계획한다. 마샤는 이 집에 둘을 살게 하고, 옷이나 음식 등은 몰래 갖다 준다. 아이들은 마샤가 한 '엄마는 병원에 갔으며, 아빠는 마샤에게 두 남매를 부탁했다'라는 말을 믿는다. <씁쓸한 해결> 율리아와 막스는 푸른 집에서 즐겁게 지내지 만은 않는다. 학대의 고통을 기억하기도 하고, 푸른 집에서의 역겨운 생활에 격한 불만을 갖기도 한다. 둘을 찾는 수색이 이어지고, 율리아는 마샤의 거짓말을 눈치챈다.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고, 마샤는 자신이 악독하고 잔혹한 범죄자처럼 보여지는 것에 분노한다. 게다가 두 남매는 13살의 납치범을 미워하고 할머니는 마샤를 이해해주려 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언젠가는 율리아와 막스가 고마워할 것이라고 한다. <읽고나서> 스토리에 비해서 끝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래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점이 좀 희미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자녀를 학대하다가도 상냥한 이웃처럼 가면을 쓰는 아버지,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 방관하는 이웃들. 사회는 바뀌어야 함을 제대로 비춰준다. 2013.11.7.(목) 이은우(초등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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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6
(최종규 . 2013 -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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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정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가정 폭력은 가정이라는 담장을 넘어설 때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담장을 넘는 일이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역시 힘든 일인가 보다. 독일의 모습도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 가정폭력이 존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침묵하고 외면하는 모습도. 이런 걸 보면서 나 자신도 반성하게 됐다. 결국 '누구나 알고 있지만 두려워서 혹은 편안함을 침해당할까봐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큰 문제'인 코끼리는 엄마의 죽음을 겪은 열 세 살 아이에 의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고군분투하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얼마나 이 세상의 잘못된 모습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변화시키려 했는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폭력의 문제에 대해 쉽게 읽히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었다. 아이의 시선에 의해 전개되면서 성장소설적인 면도 가지고 있으므로 중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쉽게 읽고 같이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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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13살이고 아직 힘이 없는 소녀가 가정폭력을 당하는 두남매를 보고서 그남매를 납치하면서 생긴 일을 이야기 해준다.소녀가 아이들을 납치를 한 이유는 마을의 변화를 싫어하는 마을사람들이 알면서도 모른척 아니면 절대 그럴리 없다는 확신 우리마을에선 그런일이 일어날리 없다며 묵인 하려 한것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아이들을 도울려는 마음이 없어보이고 오히려 그런 가정사에 끼어들지 말라며 아이들을 돕지못하게 한다.하지만 소녀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어하고 그러던중 아이들을 자신이 예전에 엄마와 함께살았던 집에 아이들을 가두어 버린다.아이들이 더이상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아이들을 납치했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집에 돌아가려고 하니 소녀는 점점 지쳐간다. 그러다가 가정폭력을 한 그남매의 아버지는 아이들을 찾기위해 경찰을 부르게되고 결국 아이들을 가둔 집을 경찰이 찾아내고 소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소녀가 왜 아이들을 납치 했을까?'궁금해라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녀는 아이들의 몸의 상처에대해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여 말하지 않다가,아이들의 상태를 살피는 의사가 아이들의 몸의 상처에 대해 알고 아이들이 가정폭력을 당했다는게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나중에 아버지는 경찰에 잡혀가고 어머니는 아이들과 이동네를 떠날려하는데 마지막으로 소녀가 그들을 찾아간다.그리고 배터리를 건네고 이야기는 끝이난다. 여기에서 왜 사람들은 묵인 하려 했을까? 또 이런사회가 우리 지금의 사회와 조금 닮아있지는 않을까? 하고 여러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니 소녀가 왜 납치를 택 했는지 이해가 간다. 그리고 책의 제목인 '코끼리는 보이지않아'는 내생각에 이책에서 코끼리는 자신의 죽을때를 알고서 보금 자리를 찾아가서 죽는 다는 말을하며 남매중에 누나인 율리아가 동생인 막스가 코끼리처럼 어떤 창고에 들어가서 죽을 준비를 했다고 소녀에게 말하며 슬퍼하는 부분이있는데 사실은 코끼리는 자신의 죽을때를 모른다는 것을 뒷부분에서 소녀가 알게된다. 그러니 나는 이책의 제목인 '코끼리는 보이지 않아'가 함축한 의미가 '코끼리는 사실 죽음이 보이지 않아'가 아닐까 생각 하기도 했다. 책은 전체적으로 어떻게 흥미로웠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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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30페이지, 23줄, 26자.
마샤는 엄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름방학은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지냅니다. 아버지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여기 저기 돌아다녀야 합니다. 바렌부르크는 아주 지루한 동네입니다. 모든 게 정체되어 있지요. 심지어 새로 이사온 사람은 동네 사람으로 쳐주지도 않습니다. 기존의 주민들만 실재하는 사람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앞에 있나 했더니 뒤에 나올 이야기 때문입니다.
13살 또래의 애들은 6주짜리 뜨네기 친구를 사귈 의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왕따인 마샤는 가서 지내기엔 너무 나이가 든, 놀이터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습니다. 거기서 율리아와 막스를 봅니다. 율리아는 9살, 마그는 7살이네요. 율리아는 엄청나게 예쁘네요. 그래서 샘이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 된 배에 큼직한 멍 자국이 있습니다. 얼마 뒤 브란트너 댁에 갔습니다. 초인종이 안 울려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브란트너 씨가 막스를 폭행하는 걸 봅니다. 집에 와서 할머니, 이웃 아주머니 그리고 가끔 정신이 돌아오는 이웃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봅니다.
하지만 오히려 주의만 듣습니다. 현상유지가 마치 지상목표인 듯한 동네. 그래서 율리아와 막스를 꾀어 가까이 있으나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푸른 집으로 데려가 가둡니다. 하지만 그 집은 물도 전기도 없네요. 그러니 갖힌 아이들은 고생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마샤는 생각이 복잡합니다. 결국 빨래감을 갖고 왔다가 들켜 경찰이 찾아냅니다.
막스는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이기는 중이였고(그래서 매우 뚱뚱하여 코끼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율리아는 외면함으로써 극복하기에 부정합니다. 마샤는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함구하였지만 너무나 무거운 약속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할아버지 앞에 내려놓습니다.
주제는 아동폭력입니다. 무관심해 보이는 주변의 어른들과 함께요. 어쩌면 자신의 사생활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기에 남의 사생활에 대해 무관심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내 생활을 하고 있을 테니 너도 거기서 너의 생활을 해라. 그러면 피차 거슬리는 것을 눈감을 수 있지 않겠느냐?
참 난감한 주제입니다. 객관적이라고 해서 그게 진짜로 옳은 건 아니거든요. 거두절미하고 이 사안만 본다면 율리아 등을 때리고 지내는 건 잘못입니다. 하지만 인간사에선 디지털 세계처럼 0과 1만 있는 게 아니라 0.5도 있고, 0.4도, 0.6도 있습니다. 0은 선이고 1은 악인데, 0.5는 뭐죠? 그래서 남에게 뭐라 말하는 게 늦춰집니다. 망설여집니다. 나도 0인 것은 얼마 안되고 1에 가까운 건 좀 되거든요.
책의 원제목이 <letfanten sieht man nicht>로 표기되어 있더군요. 코끼리일려면 앞에 E가 붙어야 할 터이니 아마 오식이겠죠?
150323-150323/15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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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눈앞에 분명 코끼리가 있음에도 보이지않는다고 한다.
어리디 어린 아이의 눈에 보인 코끼리는 공포였다.
이에 코끼리가 보인다고 알리려하나 사람들은 절대 우리마을에 코끼리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코끼리의 정체는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이다.
사람들은 분명 코끼리의 잔인함을 알면서도 그저 내일이 아니니, 시끄러운게 싫어 안보인다 말한다.
이에 어리디 어린 아이가 해결해보고자 일을 벌이나 그아인 오히려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사람이 되버렸으니.....
. . . . 나도 사실 분명 그럴때가 있다. 내눈에 보이는, 이건 아닌데 싶은 것들을 바라고보 두 눈 질끈 잠아버렸을 때... 그런 나같은 이들로 인해 세상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건 아닌지... 나같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그래도 아직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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