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사람들의 간사함까지도 이야기 한다.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깨닫고 옳바른 믿음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많은 목자가 돈과 관련된 문제로 목회의 여정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 자신의 결심과 각오가 굳다 하더라도, 가정이 있는 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함께 사역의 길을 가는 사모의 역할이 절대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보다 사모의 세속화가 심각해 보인다. 지나온 고생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심리일 수도 있으나 그 지나침이 도를 넘어서면 우려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안정적 규모의 교회를 섬기는 목사의 사모들 중에는 중산층 부녀자 이상의 사치와 허영에 젖어 사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부동산 투기도 하고, 모르는 맛집이 없을 정도의 식도락을 즐기며, 엄청난 교육비가 들어가는 특목고나 대안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기 위해 온 정신을 쏟으며 사는 사모도 있다. 게다가 노후 대책과 은퇴 자금 문제와 사례비에 관한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연스럽게 목사인 남편이 목회의 원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분들이 있다.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분들이다. 그러나 간혹 그러한 분들 중에 비장한 사명의 노예가 된 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 세상이 제공하는 어떤 혜택과 안락도 거부한 자부심이 정신적 신분 상승을 이끌어 영적 귀족인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비장한 사명감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길만을 제시하시는 분이다. 십자가의 능력과 은혜로만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로부터 오는 그 은혜와 능력을 가장하여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결심과 다짐 안에 담긴 자기 의를 찾아내기도 한다. 남다른 수고와 아픔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안락한 사역의 길을 가는 자들을 향해 도에 넘치는 불평과 거친 언사들을 쏟아 놓는 근거로 작용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지는 따뜻함과 여유로움이다. 아무리 사면초가의 현실이 답답하고 깜깜할지라도 당신의 일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인간 쪽에서 가지고 있는 진심 어린 벅찬 사명감이 하나님의 고민과 아픔을 능가하는 번민의 자리에 있게 한다.
진실한 사명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잘못 작동되면 자의식이 만들어 낸 고강도의 연속적인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게 된다. 이 피로가 누적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탈진해 불만이 폭발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결과는 오히려 십자가의 고유한 능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의 소명을 감당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성령의 능력은 특정한 방법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위로부터 임하는 참된 성령의 능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목회적 성과물을 만들어 내어 이 땅에서 그 영광을 누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은 이 세상이 가지는 속성과 명확하게 대조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정신과 방법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다.
세상 사람들은 삶의 괴롭고 고단한 현실을 술과 혈기로 버텨 낸다. 머리를 술로 마비시켜야 하루를 보낼 수 있고, 쌓여만 가는 분노와 스트레스를 분출시키는 방법 외에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한다. 분출 방법의 종류만이 다양할 뿐이다. 이런 세상의 방식과 대비되는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주어진 삶의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견디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참담한 현실을 소망 중에 인내하는 동력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대부분 성도의 삶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우리의 인생은 성공과 성취의 내용보다는 견뎌 내고 참고 감당해야 할 과제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이것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능력은 지지리 궁상을 떠는 서글픈 삶의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자폭하고 싶은 삶의 현실을 기쁨으로 수납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참된 능력인 것이다.
조금만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진다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는 분들이 참 많다. 그들의 마음과 진심을 이해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여건과 환경이 받쳐 주지 않아 주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개념은 어불성설이다. 그러한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의 일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 각자의 처지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억울하고 답답함을 느끼는 그 현실조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모른다. 인생에서 큰 위기나 병을 얻고 나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지금의 소중함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을 앞둔 시점이 되어서야 강렬한 인식이 생겨 복된 현재의 일에 남아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물론 그러한 몸부림은 과거에 아무 생각 없이 떠나보낸 고귀한 시간을 보상하려는 마음이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면 무엇 때문에 인생을 허비해 왔는지 후회와 자책이 온몸과 영혼을 휘감는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의 저자 어니 젤린스키가 '어제'는 이미 기한이 지난 수표이고, '내일'은 지급을 약속한 청구서에 불과하며, 오직 '오늘'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현금이므로 오늘을 현명하게 쓰라고 한 말은 어리석은 우리의 영혼을 깨우치는 명언이다.
덧없어 보이는 현재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 덧없어 보이는 삶의 시간에 영원의 가치가 담겨 있다. 아둔한 우리가 그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현재 속에 담긴 영원한 가치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
|
성경책이라면 다른 책에 조금씩 나오는 구절이 유일한 구경거리인 저에게, 기독교 서적을 읽는 기회가 오다니 제가 봐도 신통방통합니다. 신자도 아닌 제가 이 책을 끼고 읽으니, 독실한 마나님도 칭찬이 자자하시고요. 책을 보면서 종교란 것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더 좋아지기도 하고, 책을 전해준 친구와의 필담으로 또 더 행복한 삶과 우정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가 확인하려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는 생각입니다. 친구와의 필담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는 모습이 내가 갖은 두눈과 머리에서만 목격되는 것에서만 한정되던 것과 달리 목사님이 오감과 영적으로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듣을 수 있다는 점이 책을 두배로 재미있게 본 점입니다. 물론 여기서 목사님이 저자 김관성 목사님이 아닌 제 친구 장상희 목사님입니다. 이런 두가지 생각을 머리에 담고 저자의 소회, 어려움, 한탄, 가야할 길에 대한 재촉, 아쉬움을 보니 좀더 깊이있게 목회자의 삶을 보게됩니다. 사실 저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렇다고 다신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무종교라기보다는 비종교인에 가깝습니다. 누군가 삶의 안정을 위해서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도 권면합니다. 다만 저에게 종교라는 것이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이단이겠지만 준비하지도 않았고, 준비되지도 않았고 아직 제 마음이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은 욕심때문입니다. 신에 의지하지 않고, 비록 힘들고 어렵고 실패와 고난이 있더라도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만하게 완전한 신은 왜 화를 내는가? 신은 행과 언이 진리이고 옳음이지만, 진실과 거짓, 옳음과 타락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있간이 이 여건의 유혹속에서 조그만 옳음을 한다면 인간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필담을 하다보니, 그것도 인간에 내재된 인지적 상황이란 생각도 들긴합니다. 목회자의 소회를 보면서 목회자도 일상의 어려움을 살아가는 신도들과 같이 희노애락, 오욕칠정을 느끼는 사람의 고뇌와 번민을 똑같이 같고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다시 하게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가지 스스로들 더 돌아보고 정진하는 모습은 신앙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그들을 본질로 회귀하게 한다는 점..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원을 기준으로 조금 빨리 돈다는 것은 멀리가지 않았다는 것이고, 조금 천천히 도는 것은 또 멀리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인이나 저와 같은 비종교인은 여기저기 다른 기준에 따라서 여기서도 돌고, 저기서도 돌고하니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큰 기둥을 버리고 아무데나 놀고 있는 천덕꾸러기같아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습을 통해서 또 자신이 걸어가야할 길을 더 명확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들어왔던 유혹을 편지글로 남긴것이라 생각하게됩니다. 저 같이 비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사이비종교가 어떻게 생기는지 알게된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치가 아주 쉽다는 것도 알게됩니다. 하지만 난잡하게 걸어간 발자국은 뛰따라 걷는 사람들이 쉽게 안다는 것입니다. 이길을 걷는 사람은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뒷사람은 파헤치며 가니 세상은 어쩌면 참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종교인의 생각은 친구목사님과 필담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와 신앙인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그 본질의 가치를 깨닫고, 본질의 기술적 변화를 이해하는 길로 가야합니다. 저는 그들의 눈에 정처없이 떠도는 한마리의 양일지라도 또 이산저산을 오르면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살아가보려합니다. 참으로 신기한건 저자가 느끼는 소회를 저도 비슷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역시 세상은 보이는데로 보아야하고, 종교인에게 보고싶은 곳은 결정된 것이며, 저는 보고싶은 것이 자유로운것 같습니다. |
|
상당히 신선하고 좋은 내용이라는 점은 확실한데,
내용 별에서 별점이 3개 밖에 안 되는 이유는 저자의 교단이 침례교라는 점과 더불어 생각하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워드 요더를 훌륭한 신학자의 예시 중 하나로 들기 때문이고
편집/구성 별에서 별 점이 3개인 이유는 출판 년도를 보면 물론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태극기를 든 사람들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태극기를 든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래서 별점을 후하게 주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