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벌이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며 살고 싶었던 중섭은 혼자 몸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딸린 식구들을 돌볼 힘이 없었다. 부산 범일동 피란민 구역에서 살 때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받은 돈을 다 써버리고 말아 남덕과 슬하의 두 아들은 처참한 생활 속에서 비쩍 말라갔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남덕은 중섭과 헤어져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가난을 견디지 못한 남덕은 온 식구가 한 가정 아래 모여 살아갈 날을 고대하며 아들 태현과 태성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그녀는 지금의 이별을 달게 받아들이며 희망을 예견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 절대적 빈곤에 처연함이 더했을 것이다. 식민지 지배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는 죄의식은 중섭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잇따른 전쟁으로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부부는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낼 수도 없었다.
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낸 뒤의 헛헛함과 고독은 중섭에게 고착화된 듯하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흘려보냈다.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고 돈을 써야하는지 방법을 몰랐던 그는 애써 번 돈을 대책 없이 탕진하여 늘 돈이 궁했다. 남편의 성향을 잘 아는 아내는 남편에게 책 판매를 알선하여 일본으로 수익금을 부쳐달라고 청하였지만 중섭은 돈을 저축할 줄 몰랐고 술 한 잔하자는 사람의 청을 뿌리칠 줄 몰랐다. 그림 그릴 종이를 구하지 못해 담뱃값 안의 은지화에 그림을 새겨 넣어 현상 너머의 세상의 본질을 담았다. 친정으로 가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우는 딸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측은지심이 더했던지 중섭이 가족을 찾아 일본으로 갔을 때 장모는 사위를 냉대하며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도 맞춤으로 정해 두고 헤어진 터라 중섭은 상실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번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부부가 함께 보낸 시간은 고작 5일이었고 가족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이들 역시 아빠를 데면데면하게 대하여 기운을 차리기 힘든 상황으로 치달아 중섭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중섭은 반듯한 질서의식에서 배태되는 비인간적인 억압과 군대적인 규율과 집단의식이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이민족을 압박하는 일본의 민족성에 대한 반발심은 더 커졌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그동안 그리지 못한 그림을 그려 동란 후 처음으로 미도파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가 즐겨 그렸던 소의 다양한 이미지를 화폭에 담았고,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두고 호불호가 분명히 나뉘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순환과 회귀를 간결한 선에 담아 애들이 발가벗고 노는 그림을 춘화(春畵)라고 폄하하여 전시회를 제대로 갈무리할 수 없었다. 변변한 화구도 없이 인간적인 진실을 소박하게 담아낸 그의 그림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는 게 화가로서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쇠약해진 육신에 정신적인 충격이 겹쳐 중섭은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곁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교감을 나눴던 구상 시인은 늘 그를 위해 따사로운 손길을 전했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섭을 아꼈다. 이들은 서로 걷는 길이 달랐지만 생에 대한 깊이와 통찰력으로 질박한 삶 속에 깃든 인생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남달랐다. 죽음을 향해 치닫는 중섭의 병이 깊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남덕은 남편을 찾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뒤 자식들을 건사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는 일이 남편을 대신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로 여기고 현실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남편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아내 역시 가족과의 재회는 단념하고 지금 곁에 있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길이 우선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죽기 전에 아내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던 중섭은 적십자 병원 철제 침대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전에 아내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었던 남편은 죽음에 임박하여서야 이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아내 생각에 미치자 감정에 솔직하여 허랑하게 보낸 시간이 회한으로 남았을 뿐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남에게 대접 받고 싶으면 그만큼 베풀며 살라는 어머니의 말은 세상사 이치를 담고 있는 진리였음을 깨닫게 되지만 평생 예술적 욕망과 가족에 대한 의무 사이에 갈등하던 이는 죽음으로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랑했던 남편을 떠나보내고 울음을 삼키며 살아야 할 명분에 충실하였던 남덕은 엄마로 자리하는 일이 자기 역할로 여겼을 것이다. 획일화된 제도 아래 민족성을 중시하는 나라에서 중섭의 반쪽 자리로 태어난 아들들이 이지메를 당하는 고통 역시 푸른 바닷물에 흘려보내고 가슴에 응어리진 강박을 풀어내는 남덕의 슬픈 얼굴이 떠올라 처연함이 더한다. |
|
맑은 눈망울을 굴리며 음매음매 소리를 지르는 소의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다 보게 된 이중섭 화가가 그린 소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강렬함은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앞발에 힘을 모으고 어딘가로 뛰어오르려는 태세로 뼈와 근육까지 꿈틀거리는 동적인 이미지로 울분을 터뜨리고 서 있는 소처럼 여겨졌다. 부드러운 붓질보다는 거칠고 격렬함으로 질긴 생명력을 담아 현실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자구책으로 그는 그림을 그려왔던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자리한 이중섭 미술관을 지나 퇴락한 초가 툇마루에 앉아 불운한 시대를 살다간 화가 이중섭을 떠올려 본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좁은 방에서 기거하며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배고픔을 달래고 게와 고동을 잡아 끼니를 해결하였던 궁핍함으로 점철된 나날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2012년 11월의 제주 바람이 불어 마음까지 뚫고 지나가는 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는 이중섭이 남긴 팔레트를 들고 아들과 함께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함께 살 수 없는 시대적 상황으로 긴 이별을 감내한 채 평생 남편 이중섭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현해탄 너머 일본에서 두 아들과 함께 지냈던 그녀는 한 식구가 정을 나누며 열 달 남짓 살았던 바람의 섬을 찾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이중섭이 여러 병을 전전하며 고통에 시달리며 홀로 죽어갈 때에도 그를 찾지 않았던 아픔은 죄책감의 멍에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힘들었다. 화가에게 화구는 예술혼을 담아내는 도구일진대 밑바탕 그림을 그린 뒤 팔레트에 담긴 갖가지 색깔을 덜어내 붓질하는 모습은 장인의 면모를 발견케 한다. 예술가로서 남편을 경외하며 식민 종주국의 국민으로 느꼈을 참혹한 슬픔까지 아우르고 싶었던 남덕은 남편이 남긴 팔레트를 기증함으로써 자신을 짓눌러 왔던 죄책감을 덜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팔레트를 기증한 다음 날 남덕은 기념관 앞에서 쓰러진 한 남자의 변사체 소식을 듣고 확인한 결과 그가 다름 아닌 허수임을 알게 되었다. 천부적인 재능과 예술적 감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명망 있는 상을 받으며 인정받는 화가 이중섭을 시기하며 그의 작품을 모방하는 일로 화단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로 살아온 허수였다. 이중섭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 그림 공부를 할 때에도 식민국 사람으로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며 태양상을 수상하였을 때도 번민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림으로 살고 그림으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그에게 반한 마사코는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게 느껴질 때마다 이중섭은 마음에 빗장을 질러둔 채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중섭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응시할 때 마사코의 시선은 그를 따라다녔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둥지를 틀었다.
첫아이를 떠나보내고 상심할 새도 없이 생계를 걱정하여야 했던 지난한 시절 구 시인과의 우정은 아무리 힘들어도 서로를 위해주는 진한 정을 두텁게 하였다. 신문에 삽화를 그려 밥벌이를 하라고 권한 구 시인의 배려를 물리칠 정도로 올곧은 예술가로 자리한 중섭은 생존을 위해 그림을 파는 화가로 전락하는 일을 삼갔다. 일본 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이중섭은 홀로 고향 원산으로 돌아와 그림을 계속해 그리며 화가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동안 해방을 맞았다. 광복 이후 남과 북은 이념과 사상의 대립은 이중섭의 그림에까지 파장이 미쳐 그의 사상성을 의심받는 일이 벌어진데다 설사가상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남하하였다. 부랑의 벼랑 끝에 몰린 중섭은 우여곡절 끝에 범일동 피난민촌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했지만 처참한 생활을 이어야 했다.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받은 품삯을 술값에 탕진하는 동안 남은 식구들은 피폐함 속에 쇠잔해졌다.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고 싶었던 마사코는 중섭과 결혼함으로써 감내하기 힘든 고통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현실 감각이 떨어져 생활인으로서 부적격인 남편과 헤어져 바다 건너 친정으로 발길을 돌리며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식구들을 떠나보내고 자기만의 색깔로 화풍을 유지해 온 화가들처럼 중섭은 식구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마음의 짐을 부려놓고 지낼 수 있다고 여기면서도 식구들을 떠나보내고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을 것이다. 고독한 상황에 놓인 중섭은 나약해진 스스로를 추스르며 보이지 않는 심상 너머 심연을 은박지에 새기며 그림을 그려 나갔다. 침묵 속에 함몰하여 그림을 그리는 대신 생존에 미숙한 남편의 순연한 영혼을 아내는 경외하였다. 사물을 집중해서 살피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아픔과 외로움을 화폭에 담기를 반복하며 중섭은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이뤄나갔다.
민족주의적이며 조선적인 문화적 아우라가 강했던 오산학교 졸업생으로 중섭은 마사코와의 사랑이 민족의 반역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스스로 반역의 올가미를 들씌우고 아내와 함께 지내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고뇌하는 시간이 길었다. 한 장의 그림을 보고 학생의 잠재적 능력을 꿰뚫어 가능성을 열어 준 임용련 선생님과의 만남은 화가로서의 삶에 매진케 하였다. 흉내 내기 힘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연습을 거듭하며 소년 시절 우직한 소를 그림으로 담아내기 위해 집요하게 관찰하고 그리기를 반복하였지만 돈이 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림이 팔려 돈을 손에 넣었을 때도 그는 그동안 신세 진 이들에게 술과 밥을 대접하며 빈털터리로 빈한한 삶을 이어야 했고 생활고로 그의 삶은 팍팍해졌지만 예술가로서의 혼을 지켜나갔다. |
|
따분해서 그렸고 |
|
20세기초 우리나라 현대화가의 대표적 인물을 뽑자면 이중섭과 박수근이 아닐까? 미술에는 문외한이라도 박수근의 '빨래터'와 이중섭의 '황소'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중섭에 대한 지식도 '황소' 그림뿐으로 천재화가 이중섭의 삶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TV 드라마에서 이중섭과 아내 이남덕의 애절한 제주도 생활과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가 소개되면서 이중섭 화가의 생애가 궁금했었는데 소설로 만나볼 수 있게 되어 설레였다.
작가의 전작인 [난설헌]을 읽을때도 가슴이 아려와서 혼이 났는데 [이중섭] 또한 가슴에 큰 돌덩어리가 자리하고 있는것처럼 답답하고 명치끝이 아파왔다. 일제강점기, 6.25 동란 등 시대적 불운만 아니었다면 작가의 일생이 이렇게 가슴절절하게 아리지는 않았겠지..천재화가 이중섭의 인생이 어쩜 이리도 쓸쓸한지..평생을 가슴에 한을 품고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쳐보지도 못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삶을 마감해야만 햇던 이중섭의 한맺힌 인생에 그저 가슴이 먹먹하다.
제주도 이중섭 기념관에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 여사가 남편 이중섭의 유품 중 팔레트를 기증하기 위해 작은아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다. 이남덕은 지독한 가난때문에 사랑을 버리고 결혼 7년만에 이중섭을 한국땅에 홀로 남겨두고 두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한국땅을 찾은 그녀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마음이 편치않다.
두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랑하는 남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도 찾아올 수 없었던 이남덕의 애타는 마음을 누가 알까? 민족혼을 담아내는 화가라고 불리지만 정작 일본인 여성과 결혼 후 자신의 정체성 혼란에 빠져 술로 지새며 결국 가족과 생이별을 하며 고통을 감내해내는 이중섭의 생애가 현실을 보는것처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고 자신속에 내재해 있는 강한 민족혼조차 지켜낼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갔던 이중섭의 40여년의 생애를 지켜보는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저자는 이중섭 뿐만 아니라 동시대 예술인들의 삶도 함께 버무려 놓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중섭의 재능을 살리고 이남덕과의 관계를 이어주려고 노력했던 구상 시인,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중섭에게 질시와 시기어린 마음으로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허수..그 시절 그때의 시대와 사회문화가 현실감있게 그려내어서 타임머신을 타고 1940-1950년대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
|
이중섭 화가를 학교 다닐 때 한국의 유명한 작가로 이름을 첨으로 들었고 그때 황소의 그림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책으로 그의 작품을 만나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책에서 이야기하듯 행복한 삶보다는 고달픈 삶을 살아온 힘든 사람이지만 열정을 가지고 만든 그의 작품들을 참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더욱더 많이 발동되어서 소설 이중섭을 찾아서 보려고 했었는건지도 모릅니다. 첨에 이중섭이라는 걸 보았을 때는 이중섭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할 꺼라 생각했는데 첨부터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 그의 아내의 팔레트 참여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며 회상과 현실에서의 왔다 갔다 하는 구조의 내용으로 전개가 되었습니다. 야마모토 마사코 그림에서나 등작하는 여인이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 건 하나도 없었는데 그녀의 모정과 궁핍 그리고 여러 가지로 맞물린 시대적 배경까지 사람들은 서로를 욕합니다. 이중섭의 천부적인 화가를 칭송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에게 소홀한 아버지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남편으로써 못할 짓을 한 일본인인 야마모토 마사코 서로에게 힘든 존재로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야기상에서의 이남덕은 참 편안하게 앞을 바라보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정말 그때 힘든 삶인데 제주도를 부산을 그리고 거기서 정착하고픈 마음까지 정말 근데 이렇게 살고 싶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힘든 삶을 산 이중섭과 이남덕 그리고 아이들 그림에선 민속의 혼자 영혼이 깃든 소 그리고 왠지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 자유로운 듯 한 영혼을 가지고 그만큼 행복할 거 같은데 계속되는 불행 사기 그리고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까지 좋게 보아야할지 바보같이 봐야할지 여러 가지로 혼란을 주는 것 같습니다. 과연 내가 그림만 보고 알아오던 이중섭일까? 의구심까지 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의 인생까진 좋아할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때의 시대적 배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처럼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애잔하게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부부 죽어서 한국에 팔레트 하나 때문에 온 그녀 여러 가지 생각들이 참 많이 듭니다. 그리고 읽는 내내 뭔가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들지만 정말 무척 답답함을 느낍니다. 뻥 뚫려버리면 시원한 느낌이 들껀데 계속된 막힘이라고 할까요? 그들의 인생이기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좋아하는 미술화가이지만 인생의 도화지에서의 그의 삶과 그녀 그리고 아이들 주변 인물들까지 무언가가 이상한 느낌 그러나 뭐가 틀렸는지 알기엔 너무나 복잡한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몰래 엿보고 왠지 속상한 마음에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
[ 출판사를 통해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간서치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고흐처럼 강렬한 인상의 그림을 그리는 이중섭을 좋아한다. 황소 그림으로만 알던 이중섭을 책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을 보면서 그의 삶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소설 <이중섭>을 읽게 되었다. 이중섭이 살았던 1910년부터는 일제 강점기였다. 탄압이 심했던 시절로 1910년대 20년대 30년대까지 나누어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는 일본 유학 중 후배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 만남은 마사코가 일본여자라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이념을 넘어 대담하게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멀리하려 해도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열정을 알아주고 신념에 대한 갈등까지도 알아주는 마사코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사코와 결혼했고 이중섭은 그녀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부농이었으므로 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 마사코를 만나 결혼을 해서 가장인 된다는 것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몰랐다. 그의 군동화에서 상징하는 끈의 이미지가 관계의 소통이라고 했지만, 그와 두 아이와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캄캄한 오지를 그가 한 번이라도 들여다봐준 적이 있었던가. 하긴 그녀 역시 술을 마시고 혼미한 상태에서도 연필을 들고 허룽거리는 그의 고독한 내면의 얼룩에 렌즈를 대본 적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1쪽) 점차 일제의 핍박으로 인해 삶은 궁핍해지고 중섭의 그림이 팔려도 그 돈은 그의 주머니에 남지 않았다. 팔린 만큼 축하를 받고 보답으로 동료화가에게 술을 사야 했다. 얻어먹은 것보다 더 내고 싶어 했던 성격이었고 화공이기에 그에 어긋난 일들(신문에 연재하는 삽화 등) 할 수 없어 돈이 없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먹을 것을 사 올 거라며 기다렸지만 항상 빈손이었던 것이다. 우산을 쓰고 나란히 도쿄의 뒷골목을 걸어 다니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치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비가 내렸다. 부슬비가 내리던 날 그가 우산을 접었다. 왜요? 하고 쳐다보는 그녀에게 “날 그냥 빗속에 내버려두는 게 좋아. 흠뻑 젖어서 떠내려가게 내버려둬.”하자 “아고리 상, 뭐가 그리 괴로워요? 나 때문인가요?” 하며 그녀가 나직이 한숨을 깨물었다. (30쪽) 결혼 후, 그림을 위해 집을 떠나있을 때가 많았지만 그의 심정을 볼 때 그 이유만으로 떠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내면에 나라를 잃은 슬픔과 한(恨), 그로 인해 자신한테 화가 나고 일본 인 아내를 둔 자신이 부끄럽고 이렇게 느끼는 것을 아내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족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가까워지기보다 점차 더 멀어졌다. 이남덕, 그녀도 남편 이중섭과의 삶이 고되었다. 언제나 그림이 팔려도 돈은 가져온 적이 없었고 오히려 남편의 화구를 위해 돈을 구하러 다녀야 할 때가 많았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밥을 먹기를 바라기보다 그날 굶지 않을 것을 걱정해야 했다. 부잣집 딸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낯선 땅에서 살기에는 그녀도 버거웠던 것이다. 우리 땅을 되찾게 되자 감정이 격해진 때를 피해 피난길에 남덕과 아이들만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가족 없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순수했던 그가 점차 빛을 잃어가고 남덕과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설은 편지글에서 읽은 이중섭을 살려낸 것처럼 끝없이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시대적 아픔과 고뇌, 자신의 순수함 때문에 오는 아픔들 모두가 그였다. 이중섭 자체였다. 책을 읽고 난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의 소의 눈 같은 순수함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연약하였다고. 그래서 생을 일찍이 마감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는 평판을 팔았고 노래를 팔았고 시간을 팔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로 팔아서 술을 마셨다. 생존이 철저하게 망가져버린 그의 일상은 수만 수천 개의 구멍으로 시커멓게 곪아갔다. 그렇게 그가 갈구하던 예술을 향한 붉은 열정마저 숨소리를 잦히며 조용해졌다. (227~228쪽)
|
|
이중섭 화가의 아들 이태성씨가 아버지의 이름을 내걸고 사기에 가담했다는 충격적인 기사를 접했다. 이태성씨가 진품이라고 주장했던 이중섭 화가의 작품 2800여점이 모두 가짜로 판명이 났었다고 하는데, 대체 그는 왜, 아버지의 이름에 제대로 먹칠을 해버릴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을까. 제 3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았을 때 이태성씨는 말 그대로 천하의 몹쓸 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늘 나라에 있을 아버지 이중섭이 이를 지켜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을까.
하지만 정작 이중섭은 그의 아들 이태성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서 분노나 원망의 감정은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최문희 작가의 소설 『이중섭』이 실제의 이중섭을 최대한으로, 최선으로 반영한 것이라면 이러한 추측은 당연해진다. 일단 소설 속에서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빼돌려 팔아먹어도 전혀 개의치않았고 어떠한 후속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이중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중섭은 아내 이남덕을 만나고 나서부터, 나아가 아들 둘을 부양해야 할 가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야했기에 오히려 아들 이태성이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고자 했을 때에는, 그래 아들아 그렇게라도 내가 너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라를 빼앗긴 분노와 슬픔. 즉 민족혼을 가득 담아 황소를 그리던 그가 하필 일본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결혼을 한 후로 이남덕 여사와 그의 아들들에게 그 자신은 점점 초라해지고 작아지고 비굴해지는 존재로 전락해버리면서 결국 그림에 대한 자신감까지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이중섭은 여자 하나 잘못만나서 인생을 망쳐버린 꼴이 된 것이고 소설 속 허구인물 허수 역시 이중섭의 인생이 파멸로 치다른 이유는 여자를 잘못 만나서라고 외쳐대고 있다. 천재화가의 혼을 망가뜨려버린 일본의 여인 이남덕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소설에서는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을 아주 적극적으로 유혹한 것으로 나오기에 더욱 그렇다. 강제침탈한 나라의 남자를 꼬셔내 주위의 안좋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했으면서, 거지꼴로 살게 만드니까 평생을 외면하다가 죽기 직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절규한 그의 외침까지 모멸차게 외면해버린 그녀가 문화훈장 수여식에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연히 곱지 않은 시선만 꽂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남덕 여사 역시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이 파괴되어버린 사람이었다. 물론 정확하게 그녀의 진심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소설만 놓고 보자면 그녀 역시도 무지하게 불쌍한 여인이자 피해자였다. 지나가는 여자들을 붙잡고 한 번 물어보자.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이중섭과 같은 남자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연애는 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잘생긴 외모와 예술에 대한 열정, 말이 별로 없는 조용조용한 성격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는 그런 남자, 확실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의 씀씀이와 우유부단함을 평생 끌어안아줄 여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이남덕 여사는 충분히 아내로서의 도리를 행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성애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남편을 향한 사랑도 크지만, 그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자신이 남편을 사랑해서,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에게 딸린 두 아들의 인생까지 무시하면서 남편 곁을 지킬 수는 없었지 않았을까. 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다 그렇지 않았을까. 그런데 뭐, 누가 더 나쁘고 누가 더 인생을 망쳤는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려 서로 뜨겁게 사랑했는데, 주변 환경이, 그놈의 돈이, 그들의 사랑을 마구마구 찢어발긴 것 밖에 더 있는가. 결국 돈인가? 결국 돈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무너졌고, 결국 돈 때문에 그의 아들 이태성이 아버지를 배신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중섭은 아들을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제대로 아빠 노릇 한 번 해준 적 없고, 매번 약속도 지켜주지 못했기에, 두 아들의 마음 속에 쌓였을 아빠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이중섭 그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소설 내용으로 판단해 본 나의 생각이다.
나는 몰랐다. 이중섭이라는 사람, 이중섭이라는 화가는 '대충' 알았지만 그에게 이렇듯 비참한 삶이 있었다는 것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중섭 화가의 진품이 겨우 14점 밖에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대체 그의 그림은 다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일까? 60여 년 정도가 흐른 지금까지 남아있는 진품이 이렇게도 없단 말인가. 그의 아들이 진품이라고 내놓은 그림들도 모두 가짜로 드러나버렸으니... 이중섭이라는 존재가 점점 잊히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의 작품까지도 몇 점 남아있지 않으니, 그를 추억할 수 있는게 너무나도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슬프다. 그래도 이렇게 소설로나마 그의 숨결을, 그의 혼을, 그의 삶을 느껴볼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고 언젠가 그의 그림을 직접 두 눈으로 꼭! 보고 싶다. |
|
오래 전 성격유형검사인 MBTI 를 한 적이 있다. 성격유형검사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MBTI 검사를 통해서 나는 ‘옳다, 그르다’ 보다 ‘좋다, 나쁘다’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행동이나 사건을 판단할 때 대부분 좋다·나쁘다·기쁘다·슬프다 등의 감각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1월 9일부터 20일까지 1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읽은 책이 있다. 나는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독서 습관을 갖고 있기에 한 권의 책에 일주일 정도 시간을 투자하는 건 다반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10일이 넘는 시간을 할애한 이유는 읽을 책이 여러 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읽는 시간이 힘겨웠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단지 허구일 뿐이라고 되뇌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소설 《이중섭 1,2(2013.11.05. 다산책방)》으로 다시 태어난 천재 화가 이중섭은 생전 모습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감정 이입되는 작품이다. 예술혼과 가족애 사이에서 주춤거리는 이중섭, 조선의 그림(민족혼)을 그리는 화가와 일본인 아내를 둔 한국인 남편 사이에서 흔들렸던 이중섭의 모습이 애잔하고 애달팠다. 최문희의 소설 《이중섭》은 감정적으로 읽기 힘든 작품이다. 우리에게 ‘황소’그림으로 유명한 천재 화가 이중섭이 소설로 다시 태어났다. 소설 《이중섭》은 2012년 11월, 남덕(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이중섭 화가의 유품인 팔레트를 기증하기 위해 제주도를 찾은 때부터 시작한다. 이중섭이 사랑한 남덕 그리고 마사코(남덕)가 사랑한 아고리 상(이중섭)의 시선이 교차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일본강점기를 지나 6.25를 거쳐 이념과 사상이 충돌한 혼란의 시간을 버텨낸 인간 이중섭의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랑을 보여준다. 그녀가 그에게서 가장 높게 얻고 싶었던 것은 그의 순연한 영혼이었고 그다음이 그가 지닌 예술성이었다. P.257(1권) 마사코는 프랑스로 그림 유학을 떠나려던 꿈과 미래를 접고 이중섭 아내로의 삶을 선택하지만 이중섭은 마사코 앞에서 주춤거린다. 지배국과 피지배국, 수탈자와 피해자라는 관계의 고리가 이중섭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나보다.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차이를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손이 헤프고 마음이 헤프고 쓰임새가 헤픈(P.242,1권) 이중섭은 생존 보다 예술이 우선이었고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친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천재 화가 앞에 놓인 예술로만 밥벌이를 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안타깝고 타인에게 독하지 못한 여린 감성을 지닌 남자의 아내로 살아야했던 남덕 여사의 현실이 애처롭다. 헤헤거리는 그의 헤픈 웃음(P.232,1권) 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낮춤의 의미(P.233,1권) 였다는 사실은 그의 그림 속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분위기의 ‘소’와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마음이 무겁다. 핍박받고 억압받는 민족혼을 소에 담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인간에게 한없이 너그럽기만 한 ‘소’와 자신 그리고 가족을 위해 타인에게 모질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을 동일시한 결과물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또한 화가로서의 삶 이전에 자신의 그림 속 힘 센 황소처럼 가족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이중섭에게 가장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소설 《이중섭》을 읽는 내내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 ‘허수’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작가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중섭과 마사코의 마지막 만남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배타적 존재로 인지하고 오해만 쌓이게 만든 동기는 모두 ‘허수’로부터 비롯되었기에 그렇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반가운 소식은 허수’가 허구의 캐릭터라는 사실, 하나 뿐이다. 진심으로.
|
|
소와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화가, 천부적인 예술의 재능을 타고났지만 불과 불혹의 나이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해야 했고, 한국의 반 고흐로 불리며 국민화가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비극적이고 애달픈 일생을 이어가야 했던 사람, 그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중섭이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살아온 생애가 어떠했는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도 잘 몰랐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을 읽음으로 그의 고단했던 삶과, 미술에 관한 문외한 임에도 그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찾아 감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중섭이 추구하고 표현하고자했던 그림의 내용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기회를 얻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대향 이중섭은 서구 근대화의 화풍을 국내에 도입한 지대한 공헌과 함께, 미술계는 물론이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로 대다수 국민들이 인지하고 있을 만큼, 그의 지명도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중섭에 관해, 교과서적인 표피의 부분만을 알고 있을 뿐, 화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이나, 그의 여러 작품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충실히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 이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이 비록 작가에 의한 상상력과 허구가 가미된 소설의 형식을 빌었지만, 이중섭의 평전에 가까울 만큼, 사실을 바탕으로 그의 예술적인 면이나 인간적인 면을, 흥미로우면서도 감동 있게 담아내고 있어서, 많은 독자들이 깊은 관심과 주목을 한번 가졌으면 싶다. 소설 속 내용을 보면, 이중섭은 부농의 집안에 막내아들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타고난 미술의 재능을 보이며 일찍이 국내 미술계로부터 천재성을 부여 받는 등의 촉망받는 화가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한편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할 만큼, 화가로서의 그의 삶은 불운했고 처절했으며 고통의 나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당시 처했던 시대적 배경을 보면, 대외적으로는 일제 치하 속에서의 암울한 시기가 있었고, 해방을 맞은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6.25 동란이 일어나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몸소 겪어야 하는 과정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그 기간 동안 그의 인생사에 잊지 못할 여러 커다란 변화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일련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젊은 시절 일본 유학기간동안 만나게 된 일본인 여성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게 되는 것, 그리고 국내로 돌아와 첫 아이를 잃는 아픔이 있었고, 태어난 고향땅과 홀로 계신 자신의 어머니를 등지고 월남을 선택해야 했던 모자간의 생이별의 장면은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중섭은 피난처인 부산에 머물면서 어수선한 국내의 상황에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어, 심혈을 기울여 여러 작품들을 발표했고 서울과 대구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의, 적잖은 활동을 해왔다. 그의 작품은 많은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대부분의 그림들이 고가에 팔려나갔지만, 천성적으로 돈에 관하여 큰 애착도 없었고, 또한 부실한 관리로 언제나 그의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적었다. 이로 인해 결국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가슴쓰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아이들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으로 남아, 훗날 그에게 무거운 삶의 짐이 되어 그를 괴롭히는 원인이 되고 만다. 이후 그의 천재적인 예술적 재능이 활발하게 꽃피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구상 시인을 비롯한 주변 동료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위로가 있었지만, 마치 죽음을 결행하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를 자학하며 술로 연명을 해오다가, 안타깝게도 홀로 쓸쓸하게 자신의 41년 짧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소설의 제목에서 보듯 이중섭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은, 그의 일생에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는 여러 인물들을 연결시켜, 그에 관한 굵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과정을 취하고 있다. 또한 그 전개 형태가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여 서술되어 있지 않고, 그의 예술 인생에 많은 사연을 남겼던 장소와 주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 배경의 전후 사실들을 토대로 하여 꾸며져 있다. 그래서 이중섭에 대한 기본적인 이력을 알지 못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작품의 내용을 따라가기에 다소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그의 간략한 정보들을 먼저 보고 난 후에 접하게 된다면, 독자들이 한층 더 수월하게 그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사실 이중섭의 일대기를 다루었던 기존의 책들 대부분은, 그의 예술적 세계의 이해나, 그림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내용 보다는, 고독하고 궁핍한 삶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두 부분을 균형 있게 다루어, 독자들이 그의 예술적 가치와 의미는 물론이고, 인간적인 삶의 그 내부를 동시에 음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전의 난설헌을 통해 한 인간의 내면에 세계를 섬세하고도 감동적으로 담아낸 작가의 필력이, 이 작품에서도 역시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어, 이중섭의 생애를 깊이 있고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을듯하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권하고 싶은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소와 아이들에 대한 남달랐던 사랑과, 시대의 아픔에 따른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결코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화가 이중섭의 진면목을, 가슴으로 진정 느껴보는 유익한 시간을 잠시라도 가져보면 좋을듯해서이다. |
|
순수한 모순의 사랑 부제가 가슴을 후려칩니다. 이중섭이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일본에 건너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내를 만나서 함께 살 기대에 부풀어서 말이죠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히 부셔지게 되죠 아내 남덕이 보낸 편지속에 자신이 투자한 책값 28만원을 찾아오라는 말 그리고 아내도 장모도 그의 손만 바라보고 있죠 묵직한 가방 이중섭은 그곳에서 함께 살 요량으로 옷가지를 챙겨왔지만 그의 개털옷에서는 역한 냄새가 날뿐이였습니다. 그렇게 냉대를 당한채 돌아온 대향 그는 그 후로 점점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미도파 백화점에서 미술전을 열지만 누군가의 신고로 춘화를 전시한다며 경찰들이 들이닥치기도 하고 팔려나간 그림은 제대로 대금을 받지 못할 경우가 많았죠 너무나 갑갑한 사람 그런 그의 옆에 구시인과 함께 허수가 있게 됩니다. 빈속에 술을 내미는 사람 그리고 점점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듯한 이중섭
그는 그렇게 서서히 죽음으로 걸어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서도 아내 남덕을 그리워하면서 그녀의 편을 들죠 오지않는 아내를 사람들이 원망어린 말로 한마디씩 던질 때마다 그는 장모가 아파서 못온다는 말을 합니다.
아내는 또 얼마나 한국에 있는 남편 곁에 가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반쪽짜리 아이 지금도 일본은 재일교포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저 시절은 얼마나 더 했을까요? 한인 아버지라는 반쪽짜리 아이라는 이유로 큰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 시작하죠 어미의 마음이 정말 얼마나 아플까요? 보고싶고 아픈 남편 곁에 가고 싶지만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남덕의 친정엄마는 냉정하리만치 차갑고 현실적인 말을 하죠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 둘의 사랑이 잘못된게 아닙니다. 현실의 이념이 이들을 갈라놓았고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선이 이들을 왜곡해서 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인 남편을 둔 일본인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은 남덕이 살아가던 일본사회 안에서 엄청난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중섭의 삶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그가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어려워진 이중섭을 놔둔채 일본 친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야했다는 것에 매국노, 혹은 일본여자란.. 이란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도 있고 가치의 차이도 있고,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사정을 보려 하지 않은채 나의 가치관만 자꾸 주장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본속에서 한국인 혼혈로 살아가야 하는 그의 아이들의 입장을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위해 어떻게든 강하게 살아남아야했던 남덕 여사를 우리는 그저 자기 편하자고 일본으로 가버린 매정한 여자로 보고 있는건 아닐까요?
요즘 이중섭 화백의 작품을 두고 유산싸움이 났다고 신랑이 그러드라구요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생각한다면 욕심많은 일본여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전 한 아이의 엄마이다보니 그녀가 살아온 삶 또한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그저 그녀가 잘못했다고만은 말 못하겠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이 따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중섭은 자신의 사랑에 얼마나 책임을 졌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 둘이 한국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가 아니였다면 만약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가버렸다면 이중섭화백이 자신의 혼과 같은 황소를 포기하고 조금만 유연했다면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지금 우리는 이런 멋진 대작을 만날 수 없었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반전이 나옵니다. 이중섭이 춘화를 걸었다고 신고를 당하고 아내가 보낸 책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과 팔린 그림 대금을 제대로 회수 못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한 사람 그 사람의 잘못된 사랑과 증오, 그리고 질투가 한 사람의 화백을 지옥문으로 밀어넣어버린 결과에 더욱더 가슴이 아픈 2권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