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6월, 복직을 앞둔 나는 지역의 유명한 정신과를 검색해 어디가 가까운지, 대기 기간은 얼마나 될지 가늠해보곤 했다. 당시 내 마음은 칠흑이었고 앞으로 남아 있는 나날도 변함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에 대한 고민은 하나 끝나면 다른 하나가 생겨날 테고, 무수한 고민들이 관 뚜껑이 닫힐 때까지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직장생활은 아이가 없었던 지난 10년간도 충분히 어려웠다. 매년 바뀌는 업무, 바뀌는 교육과정, 새로 만나는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 자주 허덕이고 지쳤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그럼 매해 내 육신은 약화되므로 더 힘들어질 거라고 온통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만 머리에 들어찼다. 나는 ‘침체’와 ‘침몰’ 상태였다. 달리기와 독서는 지난 몇 년의 시간과 현재의 내 마음이 ‘침체’와 ‘침몰’ 상태라고 진단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줬다. 그리고 두 가지는 공통적으로 ‘모든 순간은 지나간다’는 말을 떠올리게 했고, 이 말은 내 삶도 변화할 수 있다는 위로의 말이 됐다. ‘모든 순간은 지나간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잠언처럼 마음에 새겨두고 싶어 하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장과도 상통한다. 김연수 작가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읽었던 이야기를 또 읽는 까닭을 두고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p121.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김연수는 이 소설집을 낸 뒤 인터뷰에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평온한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지향하는 삶 또한 그랬다. 나는 침체된 상태가 아니라 고요한 평안을 얻고 싶고 끊임없이 아래로, 과거로 내리꽂는 눈을 돌려 평범하게 다가올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싶었다. 자기 계발서를 읽을 때면 현재를 더 성실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게 되고 앞만 보고 달리도록 채찍질당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일상에 신선한 자극은 되지만 내 속도를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운전하길 강요당하는 레이싱 선수가 된 기분이 들어 숨 막힐 때도 있었다. 강요당하는 희망엔 거부감이 일었다. 이 소설집도 희망을 얘기한다. 절망에 빠져 몸을 바다에 내던지는 ‘난주’와 같이 절벽 아래 선 이에게 발길을 돌릴 걸 얘기한다. 그 방법엔 이야기가 있고,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상상이 있고, 나를 기억해 줄 한 사람 또는 내가 기억해야만 할 한 사람이 있다. 내가 바라보는 눈길의 범위를 넓히고 인식하는 시간의 범위를 늘려 과거를 품은 현재를, 미래를 안고 있는 현재를 바라보라 얘기한다. 내가 맞고 있는 바람의 방향이 언젠가는 변한다는 것, 폭풍의 가운에서 두려움에 떨더라도 폭풍이 지나간다는 것, 나와 내 아이의 얼굴엔 여러 대의 얼굴이 들어 있고 얼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나는 달린다. 체력에서 마음의 여유가 길러진다는 걸, 밖에서 체력을 남겨 와야 집에서 내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시작한 달리기였다. 30분 달리기를 하면 15분 전후에서 고조되던 통증이 가라앉고 호흡이 더 안정되고 발놀림도 규칙적으로 변한 걸 느낀다. 바람은 여전히 그 바람일 텐데 나는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이전보다 더 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사점을 넘어서면 이전의 바람과는 다른 바람이 분다. 달리기는 내게 사점의 존재를, 사점 전후에 달라지는 변화를 주기적으로 각인시켜 준다. 김연수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갈 거라고 말했다. 사점과 세컨드 윈드를 맞이할 때마다 나는 며칠간의 사건들을 정리하고 내게 다가올 평범한 미래를 기억하기로 한다.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건에 대한 예언도 달라지는 것처럼, 난주의 바다 앞에서 전해 내려오는 결말을 다른 이야기로 바꿔 살아갈 힘을 얻었던 손유미처럼. 좋은 순간도 지나가지만 괴로움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걸, 그러니 괴로움에 붙잡히지 말라고. 이미 진 벚꽃, 떨어진 꽃잎들을 지켜보는 슬픔에 울지 말고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남아 있다는 걸, 벌써부터 그 꽃잎 하나하나를 기억하자고 다짐하기도 하면서. |
[진주의 결말] 김연수는 소설을 진행시키는 화자의 관점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소설의 속성에 맞는 것은 3인칭 시점임이 확실하지만, 이제 진지하게 쓰는 소설에서는 불가능해졌다고 말한다. 거의 대부분의 소설은 1인칭 화자*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화자는 소설의 전반을 모두 파악하고 있지만 현상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화자이다. 이 부분이 무척 중요한데 어떤 사건에 대해 개인적 판단을 한다는 것은 그 서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전지적 소설이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동적 독자를 만들었다면, 1인칭 서술은 화자를 마냥 신임하지 못하는 능동적인 독자가 생겨나는 셈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항상 그 말을 기억한다.
'진주의 결말'은 그런 작가의 생각이 담긴 소설이다. 작가가 가장 의문을 가지는 명제는 '과연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 진주의 진심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TV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심리학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화자에게 온 한 통의 편지, 수사를 받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억울하다고 하는 용의자의 편지가 바로 이 소설 자체이다. 그녀는 심리학자인 선생님마저도 자기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이해지 못한다고 말한다. 김연수는 바로 그 지점,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그 엇갈림에 대해 항상 고민해 왔다. 애석하게도 그 결론은 항상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 하다'였다.
용의자 진주는 치매걸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살해혐의를 받고 있었다.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TV속 프로파일러가 자신의 사건을 분석했다는 사실에 자신을 잘 이해해줄까 기대를 하지만 크게 실망한다. 전제가 틀린 분석은 관점이 다른 소설가처럼 진실에 가까울 수 없었다. 진주는 그 실망스러운 맘을 담아 편지를 보냈고, 화자인 나는 그녀의 편지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진실이라는 것은 도마가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듯 보여지는 현상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라거나 선의나 악의로 찾아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명백히 보이는 증거들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보내는 편지는 다만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가 있을 뿐 진실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는 진주가 아버지를 죽인 것은 거기까지 내몰린 그녀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지만, 그녀는 편지를 통해 그의 모든 분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했다. 결국 상황과 증거로만 말하기 때문에 틀릴 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 심리학자의 주장은 또 다른 사실의 등장으로 무참히 무너진다. 완벽한 논리로 지어졌다고 믿는 생각들은 그 반론이 하나만 있어도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결국 그녀에 대한 의심들은 그들의 기대만큼 논리적이도 완벽하지도 않았음이 밝혀진다. 그의 말들 듣고 모든 방송의 초점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딸의 사연으로 만들었던 PD도 그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진주는 심리학자에게 묻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 말은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절대 확신한다고 할 만한 모든 사실들이 준비된 상황에서조차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설 속 등장인물이 자신의 관점과 경험을 통해서만 현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한정되고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 시작점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남이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남도 내 맘 같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적어도 '소통'이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면 그 기본값이 '0'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내용은 존속 살해의 용의자와 이를 바라보는 전문가와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나와 타자의 그 간극을 이야기 하고 있는 단편이다.
[1인칭 화자*와 관련해서 보르헤스의 픽션들 단편 중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친구 카사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인칭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모순에 개입하기 때문에, 오직 몇 명의 독자들, 즉 극소수의 독자들만이 잔혹하거나 진부한 현실을 읽어낼 수 있다.' 다음 리뷰는 그 단편에 대해서..] |
우리의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오늘을 살지만, 곧 흘러가 버릴 세계, 과거의 한순간이 될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모든 게 미래를 위해 산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에 갇혀 무리한 결정을 해야 할 때 그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떠한 계기로 새로운 시간을 설계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건네는 한 마디가 삶의 희망을 줄 수도 있는 법이다.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소설가는 대학 시절 지민과 함께 외삼촌이 일하던 출판사를 찾았다. 자살한 지민의 엄마가 쓴 오래전에 절판된 소설을 찾고자 했다. 미래가 현재를 바꾸는 순간, 평범한 현재를 사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 또한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알게 한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이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페이지,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소설가 혹은 배우, 범죄심리학자. 저마다 과거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인물들이다.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한순간을 기억하고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는 인물들이다. 그러고 보면 여덟 편의 소설은 과거의 기록, 시간의 기록인 것 같다.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을 우연히 만나 그 시간을 반추하고, 애써 지우려 했던 인물들조차 어떤 인연으로든 찾아드는 기록인 것이다.
남해의 한 섬의 중학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섬에 도착한 정현은 대학 때 문학 동아리를 함께 했던 손유미 씨, 즉 은정이를 다시 만난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 라는 소설이다. 손유미가 쓴 소설을 보여주는데 조선시대 명문가에서 태어난 정난주의 이야기였다. 관아의 노비가 될 처지였던 난주가 아들을 살리려 바다에 빠지려고 했던 내용이었다. 하나의 삶이 끝나고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듯 손유미 또한 아이를 잃고 남해의 한 섬에서 두 번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치 세컨드 윈드처럼, 거침없이 부는 바람을 향해 나아갔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세상을 거울이라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어딘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에 가까웠지만, 그는 늘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거리의 풍경을 면밀히 살펴보거나 들리는 소리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44페이지, 「난주의 바다 앞에서」 중에서)
소설 속 배경은 남쪽 바다 그리고 제주의 바다였다. 세월호 침몰이 일어났던 그 배를 타고 제주를 건넜던 자의 깊은 고민, 세찬 바람이 두렵지만 건너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현재. 마치 삶의 한 모습인 것 같다.
아버지를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유진주의 심리를 담당했던 범죄심리학자에게 메일이 온다. 정황상 치매 아버지를 간병했던 딸이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방송을 보고서 말이다. 자신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진주의 메일이었다. 범죄심리학자라고 해도 살인자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건의 정황, 증거 등을 보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진주의 결말」은 그렇게 타인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85페이지, 「진주의 결말」 중에서)
누군가의 노래 하나가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자살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카페에 들어섰을 때 들리는 노래가 다시 살고자 하는 용기를 주었다. 노래를 부르고 메모를 쓴 가수를 오랫동안 찾았고, 그 사연을 말하는 사람을 통해 감동의 전이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어 좋았다. 소설이 주는 즐거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삶에 대한 대리만족이랄까. 단편소설임에도 마치 한 편의 긴 이야기로 압축되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거쳐 미래의 시간을 머무는 우리. 시간은 이토록 혼재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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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pp.34,35)
김연수의 소설을 이번처럼 내 이야기로 치환하며 사적인 독해를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앞에 인용한 저 문구에 꽂혀서 옴짝달싹 못한 체 이 글에 붙박여서 말이다. 세기말의 공포와 다가올 밀레니엄에 대한 흥분으로 뭔가 뒤숭숭하고 잔뜩 들썩였던 1999년,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한 사무실에서 잦은 야근과 노처녀 상사의 온갖 히스테리와 언어폭력으로 몸도 마음도 지치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지 싶을 정도로 아침마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바로 관을 짜고 들어가도 되겠다 싶을 만큼 시커먼 낯빛에 해골을 연상케 하는 비쩍 마른 몸, 생기를 잃어버린 퀭하고 충혈된 눈. 젊음으로 한참 반짝반짝 빛나야 할 시기에 사회초년생으로서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안쓰럽기만 하다. 만약 그때의 내가 20년 뒤의 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아니 미래의 평범한 하루를 떠올릴 수 있었다면 더 잘 버틸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20년 뒤, 2019년의 나는 어떤가? 남편의 결정으로 수십 년간 살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하느라 애쓰고 분주한 나날들, 날마다 온갖 문제로 시위를 벌이는 사춘기 자녀와의 위태로운 하루하루. 산책길에서 만나는 이름 없는 풀꽃들과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주는 위로마저 없었다면 마음이 쉽게 무너졌지 싶다. 그 이듬해 발생한 코로나19로 인해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 되었다. 숨 쉬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 타인과의 접촉이 공포가 되는 세상. 사방에 보이지 않는 벽이 쳐지고 그 안에 갇혀 생활하면서 코로나 블루가 왔다. 코로나 종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어둠 속 긴 터널 같은 지난 몇 년의 시간 동안 죽지 않고 버텨서 아직 살아있구나 싶다. 솔직히 이제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두렵다. 앞으로 20년 뒤에는 또 어떤 끔찍한 사건과 사고,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현실과 기대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미래를 바라보며 “지는 한이 있더라도 평범한 미래를 선택”하라는 작가의 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의 선택에 따라 미래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는 초긍정 자기충족적 예언일까, 아님 미래 시점에서 보면 현재의 문제는 별거 아니라는 SF적 타임머신 이론일까? 발상의 근거야 어찌 됐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 않고 살아서 오늘도 그닥 평탄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하루를 살아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생각해본다 |
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과 해설,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수록 작품 발표 지면'이라는 페이지와 마주할 수 있다. 소설이 언제 쓰이고 어디에 실렸는지를 보다가 2014년과 2022년이라는 연도를 주목한다. 2014년에 두 편을 쓰고 2020과 2021년에 각각 한 편 나머지 네 편은 2022년에 쓰였다.
2014년과 202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다들 한 번씩은 무너졌고 무너진 김에 일어나지 못하고 오래 울었을 거고. 누군가 혹은 각자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 앞인지 뒤인지 모르지만 일단 걸어갔을 수도 있고. 안녕한지 묻는 게 미안해 어색한 웃음을 인사 대신 나누던 시간들이었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지 못했던 거다. 써보려고 시도했고 안간힘을 다해 문장을 적어갔을 테지만 문장은 버려졌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실린 소설들은 사랑과 기억이라는 주제로 8년의 공백을 메운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슬픔에 미래를 떠올릴 수 없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2022년에도 여전히 가슴 아프다. 그들에게 내일이 있다는 걸 누군가가 말해주기만 했어도,라는 걱정의 마음으로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쓰였다.
죽음이 암시되는 미래를 거부하고자 현재를 끝내기 위한 연인들이 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다가 흩어지고 부서지고 소멸되는 것이라 믿는다. 곧 힘든 시간이 지나갈 거야 막연한 믿음조차 서로에게 주지 못하자 죽음을 선택하기로 한 젊었던 시절의 자신들. 예언자의 말처럼 세계는 끝장나고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절망만을 노래처럼 들려주던 우리들이 소설에 있다.
배가 뒤집히고 단 한 명도 그 안에서 구해내지 못 한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지나 미래의 시간에 안착했다. 그럼에도 미래는 '이토록 평범한' 걸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짐작할 수 없어서 자꾸 울었다. 소설 속 인물은 달에 도착할 수 없어도 달에 가는 것처럼 걸을 수는 있다는 말을 듣고는 결심을 한다. 완벽한 결말은 없어도 완벽한 절망은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각성했기에. 「엄마 없는 아이들」의 제목을 오래 들여다 보았다. 엄마 없는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다고 알려주기에.
사랑의 상실을 겪어내고 이별 후에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바다에 가지 않더라도 바다를 그리워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바람을 맞으며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지나가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하며 나를 살게 한다는 걸 떠올리면 된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거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어서 그 바다에 두고 온 사랑과 슬픔을 함께하며 좋았던 추억을 자꾸 들춰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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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님 좋아해서 모든 책 소장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저에게 큰 울림도 주고 소소한 행복도 가져다주어서 읽는 내내 설레하며 읽었어요 작가님이 쓰셨던 다른 이야기들과 결이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글에 내포되어 있어서 오랫동안 이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했어요 각박하고 점점 좁아지는 세상틈 속에서도 숨쉴 공간을 찾기에 충분한 글이었습니다 |
해설
바라만 봐도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내게 박혜진 평론가는 그런 사람이다. M출판사 편집부에서 경력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평론도 병행하는 성실한 능력자다. 생각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시간을 쪼개 쓰는 그가 삼십대 중반을 잘 넘기면 좋겠다^^. 신작 소설집을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로 분석하였다. 나를 바람에 비유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래도 성씨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지인들은 깊어도 느무 깊다고 말하는데*^^*), 최백호의 ‘길 위에서’의 마지막 구절처럼 기척이 있나 문을 열어봤을 때 휘익 지나가는 찬바람도 나쁘지 않겠다. 해설을 읽으며 ‘빠지다’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영단어로 옮기면 폴링, 일 것이다. 박 평론가는 십사 년 전, 김연수를 보고 소설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250).” 그 깊고 너른 바다와 현재형 사랑을 멈추지 못하고 이별까지 사랑하는 우리들은 닮았다. 문학 애호가들의 동류 의식. 소설에서도, 해설에서도 ‘세컨드 윈드’ 이상으로 세 번째 삶이 울려 퍼진다. 두 번째를 너머 세 번째는 어떤 것일까. 정말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괜찮아” 질까? 두고 보고 버티지 못해 비관의 눅눅한 비를 맞는 걸까. 대학 때 은사 님이 그러셨다. 누구나 구름을 머리 위에 달고 살지만 그게 비가 되지 않게 하는 건 오롯이 너에게 달렸다고.. 그게 슬픔을 괜찮게 하는 법이었나 보다. 조금 더 보충해보자면, ‘깊은 시간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과거와 미래가(인터스텔라 속 시간의 벽을 허물고) 현재에 수렴되면서 주체적인 세 번째 삶이 열린다는 논지다. 그럴 때만 자기 돌보기와 자기 배려가 가능하고 살아갈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253).”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지’ 물으며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부화. 알 깨고 나오기. 중장년의 아프락사스인 셈이다. 이런 연유에서 나는 허구의 소설이 응축해내는 의지와 지속적인 움직임에 강렬하게 이끌린다. 해설대로 김연수의 소설집은 상식을 떠들기보다 ‘상상하라’(Imagine being another you)고 말한다. 그 순간 당신은 새들이 모두 떠난 빈 나무가 아닐 수 있다고. 삶 안에 죽음을 현재화하는 애씀 속에 각자의 삶이, 서로의 삶과 박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을 품에 안을 수 있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묻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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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한 그도, 나도 세월(시간의 묘약) 속에 많이 사회화되었다^^. 김연수가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고 재조명하는 역사학자의 면모가 짙지만, 나는 그의 소설 대부분이 흔들리지 않는 희망과 ‘미래’를 담뿍 머금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맥락과는 또 다른 미래 개념일 수도. 그는 자신의 시간관과 소설가로서의 관심과 관점이 변했다고 강조한다. 세월호에 이은 2015년은 한국문단에 지각변동이 일었다. 개인적, 사회적 상실과 이미지 실추와 미래 전망의 불안 속에 그도 어둡고 힘든 시기를 난 듯싶다. 이대로 독자와의 소통의 길이 끊기고 절필의 수순을 밟는 건 아닌지 막막했을. 이야기가 현실 반영 너머로 더 뻗어나가, 즉 이야기로서의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쪽으로, 신념 체계(= 이야기)를 굳혔다고 소설가는 부연 설명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현실이 내가 받아들일 이상의 소음과 혼돈 상태라면 속한 곳에서 벗어나 우주로 멀리 나가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진의 ‘애스트로넛’을 들으며 얽히고설킴에서 풀려나는 해방감이 부여되듯이, 김연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과도기와 회복기’의 소설들은 “변하지 않으면 삶이 유지될 수 없기에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13)”로 가득 찬다. 작가는 평온을 갈구하고 “단순한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주위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게 쉬워져요. 평소에는 거슬리던 것들에도 관대해지죠(14).”라고 덧붙인다.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선 채 자신을 먹이감으로 내던지기 보단 상한 우유를 드셨나, 아니면 술이 덜 깨셨나는 식으로 돌려 마음 조절(평정 유지)을 한단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서른 살 이후 나의 신조와 완전히 겹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해야 하잖아요. 안 그러면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정말 이해가 안 될 때, 최종적으로 이해가 안 될 때는 ‘신의 뜻으로’ 여기면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거죠(19).” 기를 쓰고 애써도 안 되는 일과 엉망인 상황에 자책해봐야 자기 환멸만 초래할 뿐이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숙명론 혹은 이미 디자인된 결과로 여기면 적어도 나를 덜 들볶게 된다. 특히, 이유가 없는 행동은 플롯을 부정하는 일이니까 소설가에겐 난감한 상황이다. 김연수는 ‘진주의 결말’을 집필하면서 기존의 ‘통제’ 욕구에서 벗어나 진주의 목소리대로 따라 갔다고 고백한다. 더욱이 전문가 프로파일러가 가닿지 못하는 지점이 존재함도 비튼다. “캐릭터가 내 뜻과 다른 말을 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것일까?(25)”라고 묻고는, 작가가 만드는 이야기에서 진주 스스로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긍정한다. 이것을 작가는 작업 스타일의 변화이자 적응이라 칭한다.
*이야기 중독자들의 만남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작가&박혜진 평론가 북토크 - YouTube
*김연수 라디오 |
그때 헤어지면 돼
소설의 제목이 수수께끼 같다. 2100년은 뭐고, 바르바라는 또 누굴까. ‘다시’가 문두에서 힘차게 방점을 찍는 듯하다. 독서 모임에서 누군가는 앞의 소설들을 분해해 다르게 조립한 버전이자 총집합체라고 평했다. 이 말을 받아 자기도 한편 쓸 수 있겠다고 했다. 웃으며 감상문을 시작했지만, 무겁고 어두운 역사(의 반복성)가 담겨있다. 오늘 위안부 할머니 이옥선 님의 부고 소식이 있었다. 증언할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죽어나가는 역사를 청산하는 한국은 불가능한가. 이명박을 비롯해 국정 농단 공범들이 풀려나는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 있다..
소설의 화자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솔직하게 ‘옛날이야기’가 팔리지 않는 시대임을 자인한다. 할머니를 좋아해 입담과 너른 품에 영향 받아 소설가가 된 경우를 삼십대 작가까지는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더 젊은 층은 현저히 다르다. 그렇게 구술의 역사가 서서히 끊기는 건 아닐지.. 할아버지의 녹취를 풀어 책을 만들려던 본래 계획이 시장성 결여로 잠정 중단되었었다. 구순인 할아버지가 뜬금없는 단어들을 섞어가며 혼잣말을 한다는 소식에, 손자는 다급히 요양원을 찾는다. 백세 시대가 열리며 노화 방지 제품과 병원 투어 패키지가 흔한 개념이자 성황 사업으로 자리잡아간다. 국가 차원의 복지 정책과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중장년의 가계 부담이 더 늘 것이다. 막내인 제부의 경우, 노부모님들을 2-3년씩 요양시설에서 모셨다. 본가와 시설을 드나들며 보낸 세월이 자그마치 6년이다. 당연한 도리이나 현대인은 시간에 쫓기고 챙길 게 많고 박봉에 시달린다.. 임종을 앞두거나 옆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면, 신변정리와 뒤처리를 하면서 세간을 간소화하게 된다. 남겨진 사람에게 짐이 될 처치 곤란의 물건을 남기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주인공도 할아버지의 책들을 미리 받아온다. 여담이지만 나는 정기적으로 서재를 관리한다. 일정량 이상 양이 늘지 않도록, 인생책이나 다시 볼 책만 소장한다. 나와 달리 자신의 책을 미래에 읽을 아들을 생각하며 서재를 꾸리는 친구가 있고, 친척집의 서재에 매혹되었던 기억 탓에 딸의 방은 포기해도 서재는 고수하는 친구도 있다. 할아버지가 말한 책과 독서의 의미에 주인공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222).”
주인공은 할아버지의 바르바라와 토마토 얘기를, 치매 증상으로 넘기지 않고 녹취록 풀기에 박차를 가한다. 사람이 가도 물성을 지닌 그의 책은 그 장소에 남는다. 그 책들을 ‘징검다리’ 삼아 할아버지와 자신을, 훨씬 이전의 시간을, 또 미래를 건너가 본다. 그런 다음 국가와 역사를 개인의 삶과 함께 올이 밀리거나 풀리지 않도록 뜨개질한다. 인간관계와 사회적 연대에 있어 ‘고립’과 ‘고독’을 구별지으며.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220-221).” 고독은 나를 품고 너에게로 향하는 자발적인 숙성 시간이다. 반면, 안으로만 굽는 태극기 부대는 전자에 속한다(극단적인 전개ㅋ 화나서).
화자는 ‘눈물 없이 우는 새’ 같은 할아버지의 증언을 따라 18세기 조선(이백 사십년 이론에 준함)의 정약용과 영국의 알렉산더대왕을 평행선에 두고 복기한다. 알렉산더대왕은 청교도주의에서 계몽주의로 넘어가는 초기 단계에 종교적, 정치적 최고의 권세를 (약탈과 파괴라는 방식으로) 대외적으로 누렸다. 그 시기의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정치 탄압으로 소설의 중심에 놓인다. 나는 천주교가 한국에서 포교된 방식을 굳이 긍정적으로 보자면 서양의 계몽주의나 카페 문화 활성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본다. 비록 순교로서 죽음의 말로를 맞지만 체제 비판과 구태관습에 맞서 ‘깨어나는’ 움직임이 수반됐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삶은 세 갈래로 나눠진다. 충신으로 인정받던 시기와, 배교를 했다는 이유로 유배지에서 멸문지화 당하고, 마지막은 참회로 끝난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시선과 이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는 일도, 또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시도를 잘 못한다. 죄악시하는 경향이 짙다.. 괜찮은 명칭이나 ‘가두리’ 아래 자신을 놓고자 부단히/무용하게 애쓴다. 정약용의 형제들이 서양 선진문물인 책을 서로 먼저 읽으려했던 부분에서, 인간의 배우고 깨우치고자 하는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소설에서도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244)”라는 빅 퀘스천을 던진다. 특이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아포리즘을 착착 전개한다. 몸 중심의 노화와 필멸은 눈에 보이는 게 다인 듯 몰이를 하나/가리나, ‘정신의 삶’을 우위에 두면 전후 팔십년씩을 더해 총 이백 사십 년을 아우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모더니즘적 시간관이자 어웨이킹 모먼트이다.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에 흐른다는 포섭/포용. 깨달음의 순간이 오롯이 단수형 현재Is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은 의외로 자신을 냉정한 눈으로 보지 못한다. ‘백설공주’의 마녀처럼 감추고 속이려든다. 그래서 타인이라는, 나와 서로를 비추는 관계-거울이 쓰임 있다. 논지인즉, 내 존재의 크기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 때에 비로소 커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수 표 불굴의 “사랑의 정의”이자 ‘신의 정의’에 해당한다. 절대적인 대문자 갓은 부정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메신저로 얼마든지 다른 형태들로 우리 곁에 다가와 말걸 수 있다. 우리를 충만하게 완성fully complete하는 데에 조력하는 모든 것에 신성이 깃들고, 그 발견의 순간이 바로 에피파니인 것이다.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은, 시대적 주류 세력과 담론에 위배될 때 개인의 희생과 자멸은 줄곧 있어왔다. 더 나아가 사회적 비극과 몰이해와 파벌을 양산하면서 미래를 ‘낙관’하는 여지를 싹틔울 연민과 사랑이 휘발되게 만든다. 그러나 기울고 치우친 역사의 흐름과 방향을 바로잡으려는 성자 바르바라는 기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피 흘림과 성사들을 거치며 여기까지 역사가 와준 것이다. 역사가.
추신. 모임이 있기 전 서울에 두 번째 폭설이 내린 날, 오전을 병원에서 보내느라 진이 다 빠졌었다. 모임 멤버가 사전 미팅을 하자고 했다. 대단한 열정이다 싶으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보았지만.. 결국 집 앞 카페에서 저녁에 보기로 했다. 세상에. 삶은 고구마와 반찬을 주려고 온 거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본모임에 나갔는데 다들 산타였다. 10 to 6 허리가 아프게 웃게 해주는 이십년지기들, 고마워요. 강건해지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을 수가. 오랜만에 나온 책인 만큼, 뭐랄까. 밀도랄까 위로랄까. 깊이 있는 이야기로 느껴지는 각각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20대부터 30대까지. 김연수 작가님의 책들과 함께 자랐다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제게는, 30대, 코로나 팬데믹. 이상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데, 위로와 따뜻함. 편안함을 주는 이야기들이었어요 특히 첫번째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아름다운 느낌이 잊혀지지 않아요 |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진주의 결말」중에서)
어떤 희망의 방향을 찾는 일은 때로 쉽고 어렵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서 작은 격려와 응원을 받는 기분이다. 좋은 소설에 대해, 우리가 기다렸던 소설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