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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찾기 위해 서핑하다가 우연히 이 산문집을 만났을 때 ‘나무가 있던 자리’라는 제목에 이끌려 커서를 고정시켰다. 개략을 훑어본 후 주문하여 받은 책은 내밀하고 풍부한 성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미 제목에서 암시되었듯이, 내 기억의 저장소로부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맨 먼저 호출하더니,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 헬레나 노르베지 호지의 ‘오래된 미래’,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등을 두서없이 소환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내 머릿속에 재편된 첫 번째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는 데미안에 나오는 목소리였다.
< 그즈음에 ‘선데이 서울’이라는 주간지가 창간되었다. 마을 형들이 그 주간지를 보면서 킬킬거리곤 했다. 형들의 웃음이 보통 때와 달라 호기심이 일어서 잡지를 보니까 잡지의 중간쯤에 화보가 있었는데, 그 화보에는 벗은 여인의 흑백사진이 담겨 있었다. … 나도 마을의 형들처럼 주간지의 화보를 찾아서 책상 서랍에 감추어놓고 여성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보곤 했다. … 내가 불량학생으로 낙인찍힌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아마 중2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손에 살이 끼었는지 늘 학교의 유리창을 깨곤 했다. …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종착역인 강릉역에서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이른바, 가출이었다. … 영주 못 미쳐서 홍익회 직원한테 먼저 걸렸고, 이윽고 검표원한테 무임승차했다는 죄목으로 걸렸다. 검표원은 어린 나를 호송하는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나는 호송원 두 사람에게 객차와 객차 사이의 승강구 언저리에서 거의 죽을 만큼 얻어터졌다. > 213-217쪽.
이 장면을 데미안에 비유하면, 알 속의 캄캄한 세상에서 작가의 의식이 어두운 열정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새는 성장을 계속한다.
< …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 내가 다닌 중학은 영동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명문이었지만, 부모님은 막내인 나까지 대학에 보내기 힘들다고 판단해 상업학교에 보내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나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상고에 간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 학교 공부는 일찌감치 전폐했다. 교사들이 그들 직분에 어울리지 않게 이상한 불량학생에게 지레 손을 놓아버리자, 사고를 치고 처벌받고 무슨 영웅이나 된 체 으스대는 일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 그러다 어느 날, 너무나 심심해서 학교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는 정음사판 문학전집과 을유문화사판 문학전집이 있었다. 사르트르나 카뮈, 카프카 같은 작품을 읽었다. … 그래서 고2때부터 졸업 때까지는 오로지 학교에 책을 읽기 위해 등교했다. 하루 종일 나는 책을 읽었다. 아침부터 하교할 때까지, 집에 와서도 새벽녘 잠들 때까지 문학전집과 사상전집을 읽었다. … 돌이켜 생각해 보니 책이 결국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 같다. 책 속에서 살아 펄펄 뛰는 생면부지의 위대한 망자들이 나를 조용한 책벌레로 만든 것이다. 누구도 나를 지도하지 않았지만 책 속의 인물들이 내게 뭔가 지침이 되기 시작했다. 책의 세계는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감탄스러웠고, 놀라웠고, 경이로웠다.> 219-222쪽.
이 장면은 데미안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한 에밀 싱클레어가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과정과 유비되는데, 이 책 ‘나무가 있던 자리’의 작가의 성장과정 역시 누구에게나 삶의 여정에는 어둠과 고통의 과정이 한두 구간의 터널처럼 놓여 있음을 독자에게 보편성 거울처럼 보여준다. 자신의 무의식과 내면을 일깨우는 과정인 이 장면은, 하지만 책의 전체 과정으로 보면 아직은 여전히 혼자서 부리로 껍질을 깨려고 시도할 정도의 성장에는 이르지 못한 단계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래 장면에서 나온다.
<나는 그즈음, 석공에 근무하는 어떤 광부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하숙이라고 하지만 밥만 그 집에서 먹고 잠은 ‘똥골’에서 잤다. 방 구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그즈음, 똥골이란 내가 겨우 한 칸 구한 사택촌 끄트머리까지 이르는 골목에 하도 똥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 똥골의 그 방을 얻을 때부터 문풍지는 뚫려 있었다. 탄불을 피우자면 문풍지를 땜질해야 했었는데, 그 두 가지 일이 그 당시 내게는 똑같이 힘겹고 귀찮았던 게 사실이었다. 밤이면 송곳처럼 뾰족하고 차가운 골바람이 발 빠른 자객처럼 침입했다. 내가 그쪽으로 발령나자 어머니는 아주 두텁고 붉은 캐시밀론 이불을 한 장 챙겨주셨다. … 바닥 저 아래 땅속에서는 쿵쿠웅, 굴진하느라 터뜨린 발파음이 울려오곤 했다. 바닥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두껍고 둔탁한 발파음 소리는 3억 4,000만 년 전 석탄 생성기에 지각을 뒤흔들었던 공룡의 발걸음 소리 같기도 했고, 이 골짜기에 흘러들어왔다가 차례차례 숱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울부짖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324-325쪽.
이 장면은 작가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강원도 장성에 있는 초등학교의 교사로 초임 발령받아 갔던 시절의 내용으로, 껍질을 깨려고 시도할 만큼 부리가 강해지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성장은 계속된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과 마찬가지 이유로 ‘사랑’ 또한 확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국내 초유의 집단 히스테리라는 신체적 증상으로 세상에 일깨워준 마을이 곧 사북이었다.> 338쪽.
이 서술은 작가가 장성 초등학교에서 5년간 교사생활을 할 때 이웃 고을인 사북의 한 여자중학교에서 일어난 집단 히스테리 현상을 소재로 하여 ‘잠자는 불’이라는 소설을 써서 문단에 데뷔하였는데, 그 배경과 주제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이제 작가는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다. 한편, 잠자는 불은 내게 세 가지 상징으로 읽혔는데, 하나는 이탄지에서 잠자고 있다가 세상으로 채탄된, 가난한 사람들의 난방을 해결해주는 석탄이고, 두 번째는 사북여자중학교 학생들의 집단 히스테리의 원인인 인간에게 필요한 관심과 사랑이며, 세 번째는 알에서 깨어난 뒤 환경운동에 투신한 작가 자신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알에서 깨어난 작가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자마자 절규하는데, 내게는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오, 세상에! 나무가 없잖아. 내가 앉을 나무, 내가 날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할 나무, 내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를 나무. 내 동료 새들이 그렇게 할 나무. 나무가 사라진 곳에는 원형탈모증에 걸린 듯한 하늘만 빠꼼하게 보이잖은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고.
이후 작가는 환경운동에 뛰어들었다. 알에서 깨어난 새는 모두가 공존 공생할 수 있는 나무가 없음을 알고는 기겁한 나머지, 더 이상의 방치상태를 보고 둘 수만은 없어, 첫발을 내디딘 소설의 세상을 등지고, 방풍림이 되고자 행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춘천의 한 시골로 가서 소로처럼 살면서 강해진 부리로, 알에서 깨어 나오려고 애쓰는 독자들의 의식을 밖에서 쪼아서 돕는 줄탁동시를 하는가 하면, 풀꽃연구소를 차려, 만유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처럼 풀과 꽃과 지렁이와 흙과 돌과 새와 물 등등에도 인간과 동일한 생명성을 부여하여, 그것들에 상을 주는 작업도 곁들이고, 의사들이 포함된 구호단체를 꾸려 성자들의 땅으로 봉사활동을 나가기도 했다. 그러느라 소설로 채워졌어야 할 인생의 왕성한 황금기를 소진해 버렸다. 싱클레어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같은 연유로 입원한 데미안을 만났다가 헤어진 후 데미안의 얼굴로 변해 있었듯이, 작가는 소로와 레비스트로스와 베이트슨의 얼굴로 변했던 것이다. 그 얼굴의 안쪽에 들어 있는 작가의 정신은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난다.
< … 대량소비에 잘 길들여진 우리가 생활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게 물론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어느 때보다 자발적인 청빈, 생태학적 금욕주의가 요구되는 때라는 건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어렵겠지요. 행동의 변화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선배님은 사람이 얼마나 달라지기 힘든지를 잘 아시지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도 잘 아시지요. 그리고 목전에 닥치고 피부로 느껴야만 움직인다는 사실도. … 누가 저 혼자 이 밀물처럼 거대한 욕망 대행진의 물결에서 홀연히 일탈하려고 하겠어요. 산사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저자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허락되어 있는 외길이라는 생각을 하면, 설사 뼈를 깎는 어려움이 수반되더라도 그 길로 가지 않을 수 없겠지요. 모두 함께 살 길이 정말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10-311쪽.
책을 다 읽고 나면 소리굽쇠의 공명처럼 자신도 모르게 작가의 아픔과 슬픔에 동조된다. 지금 세상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세상임이 불현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달리는 호랑이의 율동에 맞춰 등 위에서 유희를 즐기는 것밖에 더 무엇을 할 수 있냐고, 그에 영합하는 정신의 글을 쓰라고 부추겨 약삭빠르게 돈을 버는 출판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작가가 소설이라고 인정하는 소설이 사라진 소설의 들판에서 뒤뚱거리는 거위의 율동과 흔들리는 들풀의 리듬과 스치는 별의 반짝임을 따라 살고 있는 작가의 터진 가슴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프다. 왜 이 작가만이 들판에 한 그루 푸른 나무로 서서 꼿꼿이 바람을 견디고, 한 줄기 들풀로 서서 이쪽저쪽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아니다, 아니다, 하고 말하고, 한 송이 검붉은 엉겅퀴 들꽃으로 나직하게 서서 ‘잠자는 불’ 깨어나 그믐밤 등불 되어 세상 밝히며 서 있는가? 왜 홀로 베어진 벌판에서, 깎여진 아파트 밀림에서, 허리 묶인 시멘트 웅덩이에서, 작가의 울음 토하는 눈빛만이 나무 울창한 숲으로 자라고, 숲의 파도 일렁이는 산으로 웅장하고, 산 빛 강물로 흐르고 있는가? 원형탈모증 공간처럼 베어진 하늘은 200년 동안 얼굴이 없다. 왜 이 작가만이 그 텅 빈 하늘을 보며 처절하게 울고 있는가? 작가의 말대로라면 작가됨은 불의와 생명경시에 대한 저항을 소명으로 받은 것이므로, 모든 작가들이 한 울음으로 사라진 얼굴을 두고 대성통곡해야 하지 않는가?
아프다. 왜 이 작가만이 숲은 베어져야 한다는 외침에 홀로 맞불이 되어 불타오르며, 사막은 안 된다, 사막은 안 된다, 외치고 있는가? 그마저 외진 한쪽에서 수련자처럼 침묵의 낱말로 공존을 절규하고 있는가? 거위와 지렁이와 별들과 태양과 산새와 풀벌레와 나무와 야생화와 도랑물 외에 또 누가 그와 함께, 안 된다, 안 된다, 메아리를 만들고 있는가? 그러느라 몸은 야위어가고 정신만이 추위에 떨며 깡마르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아프다. 어찌하여 이토록 빛나는 정신이 허름한 출판사양의 몸을 입고 탄생했단 말인가? 나 같은 속물은 책도 외양에 이끌려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경우도 아직은 내면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상태이므로 우선은 외모에 먼저 이끌리게 마련이듯, 책도 하드커버 양장의 고급스런 외피를 입고 있으면, 뭔가 굉장한 내용이 들어 있나보다는 생각에 먼저 눈길이 간다. 뿐만 아니라, 그런 책을 갖고 있으면 괜히 부자가 된 듯 뿌듯하고, 속물근성이 발산되어 들고 다니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모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책은, 부자출판사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의 구매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어선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하드커버 양장의 몸체로 세상에 나온다. 얇은 두께의 책마저도 그렇다. 그리고 어쩌면 편집자 스스로도 이렇게 고급스런 외양으로 판이 결정되면 안쪽에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에 철저를 기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내용도 좋고, 오타 면에서도 아직까지 한 번도 조우하지 않았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런데 왜 이 출판사는 이리도 촌티 나는 표지에 투박한 질감의 종이를 사용하여 출간했단 말인가? 아직은 가난한 출판사여서 그렇다고 이해해보면서도, 그게 아니라, 작가의 검소한 정신에 걸맞은 형식을 차리느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나보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는바 아니면서도, 위대한 정신이 병약한 육체 때문에 일찍 떠나는 경우와도 같은 안타까움이 이 책에도 작용하여, 오래 소장하지 못하고 쉬 닳아 너덜거릴 것만 같아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백 개의 조약돌을 모으는 것보다 한 개의 다이아몬드 갖기를 바라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가 아닐까? 저자가 이 말을 들었다면, 백 개의 조약돌에 대한 생명을 한 개 다이아몬드 생명과 바꾸려 한다고 질책할 게 분명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자연을 그대로 무한반복하며 저 별들에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는 의식을 지닌 사람들로 유지되는 지구 제한적 하향평준화세상보다는 자연의 희토류들을 감사히 이용하여 우주선을 만들어 별들의 세상으로 매일매일 여행하면서 별들의 생명체들과 교류하면서 사는, 그러노라면 우주를 탐험하는 데 보내느라 지구를 파헤칠 일이 줄어들어 자연이 균형을 유지하는 상향평준화세상을 바라는 속물진보주의자여서 어쩔 수가 없다. 녹색혁명을 일러 작가는 형용모순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책을 통해 나무의 죽음을 애곡하는 작가의 행위 역시 형용모순이다. 왜냐하면 책은 나무의 시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책을 매체로 자연보호를 호소하는 작가 역시 어쩔 수 없이 나무의 죽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의 죽음을 소의 죽음으로 등치하여 보았을 때, 소의 가장 맛있다고 하는 꽃등심 대신 소가죽에 붙은 질긴 살을 먹는다고 하여 소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종이로 책을 만드는 대신 가장 거친 종이로 만든다고 하여 죽은 나무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책을 종이로 만들어야 한다면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 오래오래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빛나는 작가정신에 걸맞은 대접이 아닐까
작가의 환경운동이 지구파괴를 얼마나 막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는 가슴속 잠자는 불을 채탄하여 조개탄 같은 문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문자의 의미를 행동으로 보여주어 세상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양자 중립 상태에서 파동과 입자는 관찰행위로 인해 입자로 붕괴된다고 한다. 직립된 수많은 조각들은 한쪽 조각이 넘어지면서 연쇄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넘어지면서 결국 모든 조각들이 넘어진다. 그렇듯 이 작가의 정신이 언젠가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세상의 모든 정신들이 환경을 살리기 위해 그의 정신을 따라 넘어지는 날이 올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신선한 정신과의 뜻 깊은 만남이었다. 그러하매 정신없이 현대적 삶의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이 길이 아닌데 싶어 한 번쯤 멈춰 설 때면, 망설임 없이 펼쳐들고 길을 물어보고 싶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