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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 1964년 도쿄 출신.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 작가로 불리는 그녀는 냉정과 열정 사이 등으로 한국의 많은 독자들을 사로 잡고 있다.
옮긴이 김난주 : 1958년 부산 출신.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낙하하는 저녁> 등 번역.
홍차 잔, 한낮의 전철, 피크닉, 돌부리, 탬버린, 생각하지 않는 연습, 기억,
천사, 전원, 사랑의 복숭아, 밤의 전철, 카스텔라의 밤, 공주님 놀이,
금기, 보건실, 포르노보다 위험한 것, 하루란 무엇인가, 싸움, 초겨울의 드라이브,
생각하는 연습, 거스러미, 밤길, 다시, 홍차 잔. 24개 스토리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날이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반투명한 회색 하늘, 오토바이 소리. 가호는 비틀비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장소가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공기가 탁하게 고여 있고 폴라로이드 사진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불건전한 방.
"이리 와."
생각이 나서 후키를 부른다.
"이리 와. 목욕시켜줄게."
순백의 고운 거품이 미지근한 물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떨어진다. 손가락으로 빗자 후키의 털이 거짓말처럼 볼륨감을 잃는다. 체온이 높은 탓에, 부드럽고 얇은 후키의 피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83쪽
나카노의 말에 가호는 단박에 기가 죽는다.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 하지 뭐."
얌전하게 물러나는 가호를 보고 나카노는 오늘은 말을 잘 듣는데 하고 생각한다.
"그럼, 그래야지."
나카노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연꽃밭 위로 노랑나비 두 마리가 날고 있다.
"좌측 통행을 하세요. 좌측통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분필로 표시를 하겠습니다."
팔랑팔랑 날아가는 나비를 보면서 가호가 말했다. 96쪽
... 시즈에는 자신의 속내를 들킨 듯한 분함에 눈길을 돌렸다. 상업적인 일을 경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리자와의 제안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라디오에서는 헬렌 메릴이 부르는 웬 아이 폴 인 러브가 흘러나왔다. 시즈에는 자신이 아주 별 볼 일 없고 하잘것없는 인간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때일수록 세리자와는 시즈에를 난폭하게 안는다. 가차 없는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고-시즈에는 어떻게든 세리자와의 인생에 발 맞추려 무진 애를 쓴다-축 늘어져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땀이 흠뻑 배어난 이마와 등과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들러붙는다.
"모든 일이 다 아트고, 그것이 일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축복받은 아트잖아." 125쪽
밤의 전철은 유난히 밝다. 한 걸음 들어서자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불빛이 거침없이 빈자리를 비춘다. 익숙하지 앟은 전철. 가호는 천장에 매달린 공과판마저 어색해서 긴장하고 만다. 닫힌 문에 기대자 머리에 닿은 유리가 싸늘했다.흘러가는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는데, 어딘가 아주 먼 엉뚱한 장소로 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철에 탄 모든 사람이 쓰쿠이보다, 시즈에보다 더 가깝고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160쪽
아, 정말 그립다. 공주님 놀이.
시즈에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가호는 라신이었다. 늘.
이제는 엄마 치마 입어도 공주님이 못 되겠지.
시즈에가 그렇게 말하며 잔을 흔들었다. 카랑카랑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바로 얼마 전 일 같다고 생각한다. 가호는 화장이 유독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립스틱을 바르면 건방이 줄줄 흘렀다. 그러다 엄마에게 들켜서 혼이 나곤 했다.
"난 시즈에 치마 입으면 되잖아."
가호가 그렇게 말하자 시즈에는 기침을 하듯 컥 하고 웃었다. 184쪽
쇼노스케는 쓰쿠이를 평범하다고 했다. 공정하고 선량한 쇼노스케가 그 이상의 말로 칭찬할 수 없다면 쓰쿠이는 그저 그런 남자다.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시즈에는 지금도 울화통이 터진다. 가호도 물론 무책임하고 도덕관념도 희박하고 멍청하다. 더구나 자신을 그냥 방치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남자에게 속을 다 내주고 혼을 잃어야 할 여자는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다. 198쪽 _ 금기
김과 계란과 가다랑어포 주먹밥은 그리운 옛 맛이 났다. 닭 가슴살 튀김도 우엉조림도 쑥갓나물도 맛있었다. 가호는 정말 요리를 잘 한다. 나카노는 녹차를 끓이면서 먹다 남은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비스킷 깡통은 옷장 위 제자리에 놓여 있다. 그 주변만 공기가 팽팽한 느낌이었다. 나카노 자신도 모르게 깡통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에서 깡통이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다. 223쪽 _ 포르노보다 위험한 것
보드카를 한 방울 떨어뜨린 커피를 양손에 들고 촌스러울 만큼 성큼성큼 걸어 침대로 돌아온다. 수웨터를 벗어 던지고 시트를 몸에 둘둘 감고서, 커피를 마시며 아무 마링 없는 세리자와와 함께 뉴스를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당했다. 앞으로 5년 후든 10년 후든 20년 후든, 이렇게 세리자와와 함께 뉴스를 보리라고 생각했다. 마치 그런 시즈에의 생각에 동의하듯, 세리자와가 울퉁불퉁한 팔로 시즈에의 목을 껴안았다. 269쪽 _ 생각하는 연습
가호는 잠을 별로 자지 않는다. 보통 새벽 3시에 자서 아침 7시에 일어나는데, 어쩌다 보면 그냥 멍하니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는 일도 있다. ~ 가호 너 홍차 잔 없어?
에르메스 오데코롱이 불쑥 물었다. 가호와 그녀는, 그녀가 들고 온 푸딩을 먹고 카레오레 볼에다 홍차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다음에 내가 선물해줄까? 늘 이렇게 맛있는 거 얻어먹는데.
홍자 잔? 가호는 순간적으로 말이 막혔다.
괜찮아 난, 홍차 잔 없이 살자는 주의거든. 가호는 평소와 달리 그렇게 단호히 말하고는 미소 지었다. 17쪽 _ 홍차 잔
나카노는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자에서 홍차 잔을 꺼내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거. 굉장히 예쁜데. 악의 없는 목소리였다. 316쪽 _ 다시 홍차 잔
옛날부터 어째서인지 여분의 것을 좋아했습니다. ......여분의 것, 하찮은 것,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그런 것들로만 구성된 소설을 스고 싶었습니다.
여분의 시간만큼 아름다운 시간은 없지요.
사랑의 복숭아에서 가호가 읽고 있는 책은 제이 맥너니의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그리고 종종 읊조리는 시는 오가타 가메노스케 씨의 시입니다. 쇼와 초기의 시인으로 이런 시를 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날들
밥을 먹기 위해 한 번 일어섰을 뿐
종일을 책상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녁
책상 밑에 모깃불을 발로 차는 바람에
화가 나서 저녁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 화낼 일도 아닌데
왜 이리 참을 수가 없는지
어둑어둑한 바깥을 노려보며
저녁 드세요.
아내가 부르는데 대답도 하지 않고
불끈해서 자신을 내던진 꼴이라니......
나는 이제 싫어졌어 라 말하고 나를 떠나고 싶다
가호도 그렇지만, 저도 이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1994년 여름의 끝 에쿠니 가오리
319쪽
아마도 아직 소설 읽기가 익숙치 않지 싶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담출판사 빙고 이벤트처럼 특별한 계기(사실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제가 소설책을 그것도 에쿠니 가오리의 글을 맘 편히 읽는 일은 아마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엣든 친구가 필사했던 그 옛날이 떠오르는 그런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은 일부러 찾지 않기로 그냥 가호와 시즈에 어디 쯤에 에쿠니 가오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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