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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성정을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선생이 밀양중학교 1학년 때 퇴학당했다가 밀양고등공민학교에 편입할 때의 일이다. 밀양고등공민학교 교사는 일제 시대에 동민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각종 친목회 사무소로, 청년단체 사무소 등으로 쓰기 위해 동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 지는 건물이다. 그런 만큼 거기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무명베를 입은 가난한 학생들이다. 거기에 선생은 이종형으로부터 물려받은 상당히 고급스런 세루 양복을 입고 편입한다. 상대가 번드레하면 자신이 좀 추레하더라도 주저 없이 나가는데, 상대가 추레하고 자신의 차림이 번드레하면 선생은 그만 주눅이 들어버리고 만다. 추레한 복장의 학생들을 보고 주눅 들었던 선생은 다음부터는 세루 양복을 벗어버리고 무명베 학생 옷으로 갈아입고 등교한다. 상대가 번드레하면 주저 없이 나가는 반면에 상대가 추레하면 주눅 드는 선생은 천상 강자에게 강하게 나가고 약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성정이다. 이러한 성정을 가진 선생은 1948년에는 ‘2·7 구국투쟁’에 참가한다. 2·7구국투쟁은 1946년의 ‘10월 인민항쟁’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전에 계획한 조직적이며 무력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적인 준비를 갖춘 투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남의 운동은 무장투쟁으로 점차 전환해 간다. 이때부터 각 지방에는 폭력을 상비하는 유격소조가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생겨난다. 이는 곧 제주도에서는 ‘4·3 인민항쟁’으로 이어나가고, ‘5·10 선거 반대투쟁’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남조선인민유격대’로 발전해 나간다. 선생은 ‘2·7 구국투쟁’ 뒤 야산대에서 산사람의 삶을 훈련받는다. 비록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산사람 훈련을 통해 뛰어난 지도원 동지를 만난다. 그이의 가명은 박철환이다. 북부 중국 일제의 후방 도시에서 공작원으로 투쟁하다 체포되었는데, 그 와중의 격투로 목뼈를 다쳤다. 그 부상으로 목을 바로 가눌 수 없는 불편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다. 이러한 신체의 불편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나이 어린 동지들에게 언제나 동지애를 가지고, 또 동지로서 대등한 입장에서 대해 준다. 언제나 경어를 쓰는 지도원 동지에게 선생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존댓말을 쓰는 것은 민망하다며 하대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지도원 동지가 허허 웃더니 말한다. “동무는 나에게는 동지라오. 그것도 민족의 간부가 되는 동지라오. 동지란 나의 모든 것을 주고 그의 모든 것을 받는 관계이고,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언제나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뜻을 주고받는다오. 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동지에게 말을 하대하면 우리들 사이에 있어야 할 평등한 입장은 날아가고 말지요. 말에서 지배와 복종을 나타냄과 동시에 지배와 복종이 바로 말로 나타나게 되지요. 그래서 동지 사이에는 지배와 복종이 없고 평등한 관계로서의 언어가 있을 뿐이라오. 말하자면 ‘상호 존댓말’은 바로 동지 간의 언어, 즉 ‘동지어’라고 할 수 있소.” (187쪽) 야전대는 동지들끼리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 훈련을 하거니와 산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다. 현장의 투쟁은 감동적인 반면에 투쟁 지휘부는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지휘부가 북조선의 책상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두드러진 무장투쟁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지도한다. 그것도 연락선으로만 지도하고 있다. 당연히 그 투쟁을 뒷받침하는 대중적 역량의 조직에는 관심도 역할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무장투쟁이라는 두드러짐 때문에 조직역량은 적의 집중 표적이 되고 만다. 결국 투쟁이 자리 잡히기도 전에 집중 공격을 받아 조직은 점차 무너지고 만다. 특히 남로당 당원 수를 배가 5배가 10배가로 마구잡이로 늘렸다가 조직 자체를 와해시켜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남로당 밀양군당 조직 레포(연락원)와 농민위원회 오르그(조직지도원)로 활동하던 선생은 총을 버리고 살길을 찾는다. 1949년 6월 초등교원 채용 준교사시험에 합격한 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대구시 달성군 구지국민학교 교사로 지낸다. 열일곱 살 아기 선생은 때로는 형처럼, 그리고 오빠처럼 어린이들의 생활하며 선생이라기보다 동무처럼 지낸다. 그리고 교사가 천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 학력뿐이던 선생은 교사를 그만두고 영남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여 공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52년 9월 1일 대학에 입학한다. 조국은 전쟁터가 되어 분단의 길로 착착 나아가고 있는데 선생은 대학에 입학하여 출세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개인 영달의 길에 머물지 않았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권에서 확인해야 한다. 일단 멈춘 선생의 장대한 이야기를 어서 읽게 되기를! |